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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내용 요약>

 

소개: 94년생. 직업 없음. 대학 졸업장 없음.

경력: 몇 개의 사업 경험 +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 생활 1년 6개월.

 

이후 택배 일을 시작한 필자가 차츰 적응해 가고 있다···


 

택배 일을 하기 전 간혹 내가 주문한 물건의 배송 여부를 묻고자 택배 기사들과 통화할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건물 주소와 호수만 듣고는 물건을 놔뒀는지 아닌지, 몇 시에 갈 건지 즉각 대답하는 게 너무 신기했는데 일을 해보니 왜 그렇게 되는지 알 것 같았다. 매일 같은 구역을 돌다 보니 며칠 되지 않아 택배가 특히 자주 가는 곳이 어느 건물 몇 호인지, 물건을 받기 전 꼭 전화를 걸어 도착 시간을 물어보는 사람은 어디에서 택배를 받는 사람인지 대략 알게 되었다. 각 건물 출입문 비밀번호도 한 달 만에 모두 외우게 되었다. 뇌의 어느 부분을 펼치면 내 배달 구역의 지도가 새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단순한 배달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기억력'이 중요했다.

 

"물건을 못 찾겠어요."

 

매일 같은 곳에 물건을 놔두는 데도 이런 전화를 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물건을 놔둔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면 보통 내 실수로 다른 동의 같은 호에 물건을 놔둔 경우였고, 그렇지 않을 경우 아직 배달 완료가 아닌데 오늘 배달된다는 문자만 보고 고객이 착각해 전화한 경우였다.

 

"아, 지금 다시 보니 있네요. 찾았어요."

 

황당하게도 뻔히 있는 택배를 못 보고 있다 전화부터 하는 고객도 가끔 있었다. 이럴 때는 배달 완료할 때 찍어둔 사진을 보내주는 게 가장 좋았다.

 

대학교 기숙사 1층에 쌓아둔 택배를 하나하나 사진 찍는 게 힘들어 그냥 넘어가기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분명히 배달 완료라고 문자 받았는데, 못 찾겠어요."

 

간혹 기숙사에 사는 학생에게 이런 문의를 받을 때마다 식은땀이 났다. 이럴 때는 보통 조금 더 찾아보다 결국 찾았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문의가 하루하루 쌓이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았다.

 

특히 한 학생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는 고의인지 잘 모를 정도로 반복적으로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택배가 없어요"로 이틀을 속 썩이다가 자신이 택배를 받고 반품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택배가 없어요", "아까 찾아봤는데 없었어요", "앞에 다 봤는데 없어요", "도둑이 든 거 같아요"라고 말하다가 항상 이 멘트로 전화를 마무리했다.

 

"아 여기 있네요, 죄송해요."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고 바빠 죽겠는데 조금만 더 성의 있게 찾아보고 전화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택배를 못 찾는데도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고객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기숙사 로비에서 수십 개의 택배를 하나하나 찍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누가 물어보면 배달 일을 하다 그 사진을 또 찾아줘야 하는데, 내가 아무리 어느 호에서 어떤 택배를 시켰는지 기억하고 있다 해도, 매일 쌓여가는 수천 장의 사진 속에서 그 택배를 찾는 일도 고역이었다.

 

_물류센터 아니고 대학교입니다_ 택배 잔뜩 쌓인 이유 _ SBS 0-12 screenshot.png

팬데믹 때 중국 상하이 한 대학 캠퍼스다

출처-<SBS>

 

생각해 보면 사진을 하나하나 찍는 것도 전임자만의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노하우였을 거다. 전임자도 가장 많은 물량을 차지하는 기숙사 택배를 보다 쉽게 처리하고자 나름의 업무 루틴을 만들었다. 우선 터미널에서 택배를 분류하고 차에 싣는 작업을 할 때부터 기숙사로 온 택배들은 커다란 AB형 자동박스(이하 박스)에 따로 챙겨둔다. 여기에 또 하나의 팁이 있다. 박스에 기숙사 택배를 넣기 전에 수령인의 이름을 커다랗게 매직으로 써두는 거다(중간은 *표시를 넣는데 예를 들면 김*우 이런 식으로 쓴다). 이렇게 하면 송장의 작은 글씨를 보지 않아도 본인의 택배를 바로 알아볼 수 있다. 그렇게 수령인의 이름이 커다랗게 써진 많은 택배들을 한 번에 박스에 넣고, 첫 번째 배달지인 기숙사에서 꺼내기 쉽게 적재함 가장 마지막에 실으면 기숙사 택배 배달을 위한 준비가 완료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번거로울 수 있는 많은 일이 해결된다. 내 경우엔 비닐에 들어있는 의류 택배는 커다란 비닐에 따로 넣고 상자로 포장된 택배만 AB형 자동박스에 넣었다. 그리고 1층에 한꺼번에 놔둘 때도 비닐포장 택배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 상자 택배는 바닥에 두었다. 그렇게만 해도 별문제는 없었다. 본인의 택배를 찾지 못해 전화까지 하는 사람은 일주일에 세 명도 안 됐다.

 

AB형 자동박스3.jpg

AB형 자동박스. 이사 때 흔히 본다

출처-<11번가>

 

"휴게실 1층 바닥에 항상 모아 둡니다. 다시 한번만 찾아보시고 없으시면 다시 연락 주세요." 대개는 한 번 더 찾아보고 자기 택배를 찾아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전화 온 학생이 아무리 찾아도 택배가 안 보인다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나는 배달을 멈추고 다시 기숙사로 가 직접 그 학생의 택배를 찾아주었다. 시간이 곧 돈인 택배기사에게 일을 멈추고 다시 돌아가 시간을 쓰는 건 엄청난 손실이었다. 그 후로 기숙사 배달을 마치고 다음 배달지로 갈 때마다 혹시나 오늘도 전화가 오지는 않을지 조마조마했다.

 

'마음이 불편하다.'

 

괜한 불안 때문에 하루의 일을 기분 좋게 해낼 수 없었다. 어차피 매일 같은 일을 하는데, 이런 찜찜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야 한다니.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손실보다 마음이 불편한 게 내게는 더 큰 손해였다. 전임자처럼 택배 하나하나를 다 찍어둬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한번 안 찍는데 맛을 들인 뒤라 다시 전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터미널에서 택배 분류를 하며 습관처럼 기숙사 택배에 수령인의 이름을 커다랗게 다시 쓰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여있는 택배를 한꺼번에 찍어두면 되잖아?' 조금만 확대해도 이름 써둔 건 다 보일 텐데. 그렇게 하면 학생이 본인 택배의 위치를 물어도, 사진에 동그라미를 쳐서 주면 되니 내가 직접 가서 찾아주지 않아도 될 터였다. 요즘 휴대전화엔 모두 간단한 편집 기능이 있어 따로 앱을 사용하거나 하지 않아도 형광펜이나 빨간 펜을 켜서 글씨를 쓰거나 할 수 있었다. 머리로만 알고 있고 써본 적은 없던 기능이라, 시험 삼아 아무 사진이나 열어보니 정말로 그런 기능이 있었다. 당장 해보자.

 

KakaoTalk_20230403_121645204.jpg

(편집자의 실습)

 

더 고민하지 않고 그날부터 바로 택배를 모아두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비닐류는 책상에, 박스는 바닥에 두고 여러 각도에서 모든 택배가 한 번씩은 다 나오게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해도 찍는 사진은 겨우 3장에서 5장 정도였다. 그렇게만 찍어둬도 그날 하루 어찌나 마음이 편한지, 일주일 내내 택배를 찾는 전화가 오지 않는다 해도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했다. 실제로 전화가 왔을 때도 사진에 동그라미를 쳐서 보내주니 나도 편하고 학생들도 편했다. 하나하나 다 찍으면 50장인데 많아 봤자 5장으로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다니. 별것 아닌 작은 변화였지만 나만의 요령을 발견해 실행하니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애착이 갔다.

 

이 일 이후 나에게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일을 더 편하게 할 수 있을까? 매일매일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일을 더 편하게, 고객과 나 모두에게 이득이 되도록 일을 더 편하게 할 수는 없을까?

 

택배기사에게 '일이 더 편해진다'라는 것은 보다 적은 시간에 더 많은 택배를 분실 사고 없이 정확하게 배달하는 것이다. 이러면 나도 들이는 공에 비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으니 좋고, 고객 입장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택배에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파손이나 분실 없이, 택배를 온전한 상태로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받는 것.

 

어제 주문한 옷을 다음날 잠들기 전에 받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최소한 저녁 무렵엔 받아야 입고 술 약속에 나가거나 아니면 최소한 한 번 입어볼 수라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업무를 단순화해 내 일을 빨리 마치면 마칠수록 고객 만족도도 더 높아진다.

 

'최소한 내 구역의 고객들은 저녁식사를 하기 전 택배를 받게 해야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매일 같은 일을 해도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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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