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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영화/드라마 등에 엑스트라, 단역으로 출연하며 겪은 경험을 담아 몇 편의 글을 썼었다(미국에서는 엑스트라 대신 백그라운드 탤런트(Background Talent)라는 표현을 주로 쓴다). 

 

‘돈을 얼마나 많이 받나(출연료), ‘밥은 잘 주나’(식사)에 중점을 두고, 글을 썼었다. 반응은 좋았지만, 딴지스들의 반응 종류는 필자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대강 이랬다.

 

김민교.jpg

 

“뭐시? 그 동네는 엑스트라를 인간으로 취급해준단 말이냐?”

 

“뭐라? 현장에서 소리도 안 지르고 욕도 하나도 안 한다규?”

 

“단역 배우가 저렇게 돈을 많이 받는다구? 뻥카지?”

 

“밥도 제때 주고 촬영 시간 넘기만 초과 수당을 준다구? 그런 세상이 있을리가... 믿을 수 없다규!”

 

한국의 촬영 현장에 대해서는 필자가 실제로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영화, 드라마 등 미국 영상업계에 대해서도 엑스트라나 단역배우 등 잡스런 일만 했기 때문에(내가 주연 배우를 할 수 있을리가 없다...)그 외 미국 영상업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도 필자가 직접 겪은 경험담을 위주로 미국 영상 산업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주제는 ‘미국 영상업계는 엑스트라에게 어떻게 인간대접을 해주는가’ 정도라 하겠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모티베이션(동기)을 준다

 

최소한 필자가 겪어본 미국 영화/드라마 촬영 현장은 참 ‘나이스’ 했다. 소리 지르거나 윽박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군중 100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촬영이든, 엑스트라가 4명밖에 없는 스튜디오 씬이든, 영화 스태프들은 엑스트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촬영 시작할 때)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프로입니다. 이 장면은 대단히 중요한 장면이고 여러분들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들 통제에 잘 따라서 오늘 끝까지 잘 부탁합니다.” 

 

“(촬영 끝날 때) 오늘 모두 잘했습니다. (굿잡!) 여러분이 없으면 오늘 촬영 못 했을 거예요. 서로 박수 한번 쳐줍시다. 고맙습니다”

 

송혜교 짤.gif

와우~ 멋지다. 연지... 아니 여러분!

(아, 물론 이런 뉘앙스는 아니고 대세에 함 따라가 봤...)

 

촬영 전에는 백그라운드를 통제하는 PA(Production Assistance, 촬영보조 정도로 알아두자)들이 엑스트라 대기실에 와서 대강 어떤 신인지 설명해준다. 이런 식이다. 

 

“오늘 찍는 장면은 주인공의 라이벌이 라이벌 기업의 주주총회에서 처음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여러분은 거대 기업의 주주이고, 라이벌은 역대 최대 성과를 발표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인공이 나타날 때 쳐다보고, 경영성과가 발표될 때 크게 소리 지르고 박수치면 됩니다.”

 

만약 소규모 스튜디오 촬영이라면, PA가 아니라 감독이 직접 엑스트라를 통제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가 꽤 된다. 필자가 약간 비중 있는 단역(에헴. 사실 그래봤자 1분이지만...)으로 출연했던 HBO 드라마의 예를 들어보겠다. 

 

195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한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서양식 바 같은 곳에서 한국인 엑스트라 10여 명이 춤을 추는 가운데 술 마시던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특이한 장면(시대극 또는 외국 배경)은 돈을 벌 기회가 더 많아지는데(헤헤), 있다가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암튼!

 

세팅이 끝나자 나이가 좀 있는 백인 여성이 나타났다. 감독이었다. 누가 미국 영상업계 종사자 아니랄까 봐 성우 같은 허스키하고 나이스한 목소리에 우아한 몸짓을 더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오늘 와줘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찍는 장면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여러분은 힘들었던 하루 일과가 끝나고 피로를 풀려고 바에 왔습니다. 감미로운 음악, 적당히 어두운 조명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생각해보세요. (정말로 모두 눈을 감게 한다) 그리고 그런 기분으로 춤을 추세요.”

 

이런 식으로 엑스트라들에게도 최소한의 정보와 배경을 주는 것은 모티베이션(movitation), 즉 동기와 의욕을 주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도 출연자가 상황을 이해하고 동기를 얻냐 아니냐의 차이가 영상 퀄리티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최소한의 자부심을 준다

 

이처럼 미국 영화/드라마 업계는 엑스트라에게도 최소한 자부심을 주고 일을 시키려 노력한다.

 

또 경험담으로 예를 들어보겠다.

 

언젠가 온 가족이 프로레슬링을 다룬 케이블TV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다. 5일 동안 근처 스테이지를 빌리고 레슬링 경기장을 설치한 후, 300여명 이상의 엑스트라를 관중으로 동원해서 찍었다. 머릿수로 승부하는 장면이라 온 가족이 총출동해 돈을 벌었다. 그런데 마지막 5일 차 촬영이 끝날 즈음 되자 감독이 레슬링 링에 올라서 마이크를 잡고 엑스트라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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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친절하지만 포스는 이렇... 

 

“여러분, 5일간의 촬영에 함께해줘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있었기에 이 장면이 더욱 활기차고 박진감 넘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작은 선물을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촬영분을 활용해서 우리 쇼의 트레일러(예고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구상에서 예고편을 처음 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보시고 주변에 자랑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일했는지 직접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주변에 많이 알려주십시오”

 

그러고는 경기장 LED 전광판에 5일 동안 촬영한 분량을 편집한 3분짜리 예고편을 상영해줬다. 나중에 봤더니, 우리가 그날 본 예고편은 며칠 후에 언론에 “예고편 최초 공개”라는 제목으로 릴리즈되었다. 기분 좋으라고 한 농담이 아니고 진짜 최초 공개였던 것이다. 물론 관중 300명 가운데 내 얼굴이 보일 리가 없지만, 적어도 엑스트라 한 명 한 명에게 돈 말고도 뭔가 큰일을 했다는 자부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거장의 경우도 엑스트라 대접에 결코 소홀하지 않다. 이건 필자가 직접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말 까다로운 감독은 엑스트라 중에 그나마 비중이 있는 엑스트라(코어 백그라운드 core background라고 한다)나 스탠드인(stand in, 먼거리 또는 뒷모습만 주연배우 대신 촬영하는 배우)을 정할 때, 한 명 한 명 오디션을 본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바로 거장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다. 지난해 10월 필자가 캐스팅 에이전시에서 받았던 엑스트라/스탠드인 캐스팅 공고는 대강 다음과 같았다. 

 

“여러분의 일생일대의 기회(lifetime chance)입니다. 설마 모르는 사람이 없진 않겠죠. 거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최신작 ‘메갈로폴리스’입니다. 아담 드라이버, 포레스트 휘태커, 존 보이트, 로렌스 피쉬번 등 유명 배우가 출연합니다. 또한 스탠드인도 평소와는 다른 방법으로 캐스팅할 것입니다. 코폴라 감독은 스탠드인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으며, 사실상 스탠드인이 아니라 거의 배우급으로 대우할 것입니다. 따라서 위의 배우들과 외모가 닮은 사람들은 지금 응모하십시오.”

 

특히 구미가 당기는 건 이 부분이었다.

 

“코폴라 감독은 엑스트라도 소중히 생각하며, 중요 엑스트라는 개별적으로 본인이 직접 오디션을 볼 것입니다. 끝내주는 기회입니다!!!”

(Francis will meet with the prospects himself to make choices. This is an amazing opport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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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코폴라 감독

 

필자도 한때 진지하게 지원을 고려해봤다. ‘대부’, ‘지옥의 묵시록’ 감독 얼굴을 볼 기회가 내 생에 몇 번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생업이 있는지라 결국은 포기했다.

 

그런가 하면 중요 엑스트라로 운 좋게 캐스팅되면 쏠쏠한 고정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필자가 받았던 또 다른 중요 엑스트라 역 공지는 다음과 같다.

 

“이번 촬영은 중요 엑스트라가 필요합니다. 중요 엑스트라는 5월부터 9월 촬영 종료까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인공의 친척, 친지로 촬영 때마다 다른 옷을 입고 계속 촬영합니다. 일당은 하루 10시간에 124달러 63센트(현 환율로 약 16만 1천 원)입니다. 그날 촬영분이 하나도 없어도 촬영장에 출근만 해도 돈을 줍니다. 초과근무수당도 시간당 1.5배로 지불합니다. 그 대신 이 쇼에만 출연해야 하며, 일주일에 세 번 코로나19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앞으로 몇 개월간 고정 수입을 거두며 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아무리 작은 지시 사항이라도 돈으로 보답한다

 

앞에서 모티베이션(동기) 이야기를 했다. 현대인에게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모티베이션이 뭘까? 머니 머니 해도 머니, 돈이다. 자본주의의 극단인 미국 영상업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돈을 먼저 제시하고 받아들일지 말지를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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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짤에서 열일해주시는 송혜교 배우님....

대세니까 참아주세요...

 

 

예를 들면, 사소한 엑스트라 1명에게도 해야 할 일(job description)을 사전에 대단히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그 대가 또한 노골적일 정도로 명확히 제시한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했던 1950년대 한국 배경의 드라마는 이런 식으로 사전 지시를 했다.

 

의상

 

“1950년대 한국 젊은 남녀 복장을 해야 합니다. 의상 맞춤을 해야 하므로 스튜디오로 와서 피팅하면 20달러를 추가로 드립니다. 사이즈가 맞는 고풍스런 옷을 집에서 가져오면 추가로 20달러륻 더 드립니다. 한복이나 동양풍 분위기가 나오는 옷을 집에서 가져오면 30달러 더 드립니다.”

 

머리 

 

“1950년대 한국 젊은 남녀 복장으로 파마를 해야 합니다. 의상을 맞춘 후 헤어 스타일 부서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하면 10달러 추가 수당을 더 드립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촬영 하루 전에 코로나19 검사 음성 반응이 나온 엑스트라만 촬영 일정 통보를 받았다. 물론 코로나19 검사를 받는 시간도 시간당 25달러씩 보수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디즈니 같은 대형 영화사는 촬영 전 온라인으로 “코로나19 안전 수칙 비디오 1시간 필청”을 의무화했다. ‘예비군 훈련도 아니고 이게 뭐야. 띠발’ 불평하려던 순간!

 

“비디오 1시간을 보면 25달러를 추가로 지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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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르급 태세 전환

 

심지어 신체 접촉도 돈을 지불한다.

 

“진짜 부부 또는 연인을 찾습니다. 술집 장면에서 춤추면서 카메라 앞에서 진짜로 끌어안거나 키스를 하면 100달러를 더 드립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필자의 심정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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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술 더 뜨는 경우도 있다.

 

“동성 커플, 또는 진짜 커플이 아니더라도 거부감 없이 카메라 앞에서 키스할 사람을 찾습니다. 기본 수당에 500달러를 더 드립니다.”

 

... ...!

 

할까? 말까? 상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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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기했다.

 

이성애자인 나에겐 상상력이 너무 뛰어난 게 흠이였다 . 진정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암튼 이런 식으로 별 볼 일 없는 엑스트라라고는 하지만, 스태프가 깜짝 놀래키거나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는다. 캐스팅 공고를 낼 때는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한, 촬영 여건과 역할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대충 이런 식이다.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번 촬영은 스트립바입니다. 주인공은 스트립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고, 그 주변에 있는 손님 역할입니다. 주변은 어둠침침하고 안개가 필 것이므로, 이런 상황이 불편한 분은 응모하지 마십시오. 또한 노출이 심한 여성들이 다수 나올 것이므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불편하시면 이 역에 응하지 마십시오.”

 

“으음…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될 훌륭한 작품이긴 하지만 나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감안해서 안타깝지만, 이 역은 역시 눈물을 머금고 거절… 절대로 와이프 눈치 보여서 그런 건 아니… ”

 

“만약 스트리퍼가 고객 가까이 또는 무릎에 앉는 장면에 스스로 지원해서 출연하면 추가 출연 수당 100달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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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나도 모르게 응모 서류를 제출하고 있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서류는 이미 제출되어 있었다. 

 

 

한국인은 미국 영화 엑스트라에 최적화라고?

 

필자는 주변 한국 사람들에게 엑스트라에 한 번 도전해 보라고 한다. 미국 영상 촬영 현장에서 볼 때, 한국인은 엑스트라 일에 딱 맞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동양인은 소중하니까

 

동양인은 희소성이 있다. 일단 지원하면 캐스팅되기가 쉽다. 백인과 흑인 엑스트라는 미국에 차고 넘친다.

 

2. 옷장의 한복을 꺼내라

 

한국인은 영화사 의상실에도 없는 한복이나 독특한 동양 옷 한두 벌 정도는 집에 갖고 있다. 이런 옷을 갖고 있으면 캐스팅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의상은 한국이나 일본 거리 장면 촬영, 또는 외국 대사관 고급 파티 장면, 관광지의 국제 호텔 장면 촬영에 ‘반드시’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필요한 상황이 많다.

 

3. 영화는 문신을 싫어해

 

영화 현장은 문신과 염색한 머리를 싫어한다. 엑스트라는 어느 시대, 어느 역할로 캐스팅될지 모르기 때문에 노랑 머리, 핑크색 머리나, 눈에 띄는 문신을 하면 캐스팅 확률이 매우 낮아진다. 그러나 한국인은 보통 머리를 물들이거나 온몸에 문신을 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배경에 투입해도 좋다. 

 

4. 한국인은 밀리터리 솔져?

 

한국인 남성은 독특한 경험, 예를 들면 군대 경험과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기 때문에 국제적이거나 외국 분위기를 내기에 매우 좋다. 한국인 남성은 총기를 사용하는 경찰 장면, SWAT 장면, 소방서 장면 등에 투입하면 물 만난듯 뛰어다닌다. 물론 촬영 중간에 쉬는 시간에는 예비군 모드로 바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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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발... 힘들다...

 

5. 한국인은 유니버설

 

한국인은 외모가 유니버설해서 여차하면, 일본인, 중국인 역할로 투입이 가능하며, 심지어 의상만 잘 맞추면 북한 테러리스트, 아랍 테러리스트, 중동 ISIS 반란군으로도 캐스팅이 가능하다. 실제로 필자도 북한군이나 아랍 예언자로 출연할 뻔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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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관점 외모 구분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대우한다

 

물론 영화 촬영이 언제나 스무스하게 진행되는 건 아니다. 필자도 힘들거나 실수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이런 공고가 뜬 적이 있다.

 

“금요일 밤 촬영입니다. 다운타운에서 저녁 6시에 촬영 시작해서 새벽에 끝납니다. 야간 촬영이라 수당도 더 드립니다. 금요일 밤에 열심히 일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 공고를 보고 당시 대학생이던 필자는 머리를 굴렸다.

 

“오오, 다운타운이니까 지하철 타고 가면 되니 주차 걱정 없겠네. 금요일 오전에 학교에서 공부하고 오후에 좀 쉬었다가, 금요일 밤에 빡시게 일하고 목돈 좀 벌고, 토요일 새벽에 퇴근해서 잠깐 잤다가 불타는 토요일, 일요일을 보내면 되겠네, 좋아 콜!”

 

문제의 장면은 암표상인 주인공이 다운타운 지하철역에서 야구 경기 암표를 파는데, 제대로 팔지도 못하고 망신만 당한다는 장면이었다. 엑스트라 30명 이상이 투입되었고, 지하철역 옆에는 엑스트라들이 탄 자동차들이 10여 대 이상 투입된 나름 규모가 큰 장면이었다.

 

금요일 저녁 6시에 집합한 30명의 엑스트라들은 먼저 고기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쌀쌀한 날씨에 대비해 지급된 핫팩을 챙겼다. 밤 촬영에 들어간 엑스트라들의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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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뻐킹... 언제 끝나냐...

 

졸음을 참지 못한 엑스트라 30여 명 가운데 30여 명이 “예비군 훈련 중인 대한민국 군필자” 모드로 변신해 지하철역 대기 좌석 여기저기서 짱박혀 자기 시작했다. 

 

당황한 스태프들이 “엑스트라!” “롤링!”을 외쳐대도 멀뚱히 본척만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것은 스태프들이 퍼질러 자고 있는 엑스트라들에게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최대한 나이스하게 대했다는 사실이다. 스태프들은 짱박혀 패잔병 모드로 쓰러져 있는 엑스트라 가운데 그나마 체력이 남은 생존자 몇 명에게 

 

“헤이, 마이 프렌드. 플리이즈”

 

를 외쳐대면서 사정사정하여 다시 촬영장으로 복귀시켰고, 필자도 비몽사몽한 가운데 어찌어찌하여 촬영은 새벽 6시쯤 마무리됐다. 영화사 측에서 대기 시간도 모두 시급으로 계산하고 야근 추가수당까지 해서 보수를 지급한 건 물론이다. 체력이 별로 좋지 않았던 필자가 촬영 후 너무 피곤해 집에 가서 자느라 주말을 모두 날려버린 것도 물론이다. 그 이후로 새벽 촬영은 절대 나가지 않게 되었다.

 

 

실수가 있어도 돈은 제대로 지급한다

 

이런 해프닝도 있었다. 사람들이 들으면 알만한 마블 영화에서 캐스팅 제안이 왔다.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하는데, 그중 중동 씬에서 아랍 예언자로 출연할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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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한국인인데 나보고 아랍계로 출연하라구? 싶었는데 또 이런다.

 

“마블 영화 세계관이고 디즈니+ 방송 예정이다. 유명 배우가 나오는 인기 영화에 주인공과 4명만 나오는 장면이고 비중 있게 나온다(highly featured).”

 

(영화 이름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진 않는다. 영화 촬영 보안 때문이다. 그 대신 한두 단어로 된 코드네임을 말하는데, 영화업계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무슨 영화를 말하는지 다 안다)

 

여기에 결정타를 덧붙였다.

 

“주연배우가 스시를 좋아한다. 매 끼니를 스시와 사시미로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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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만 주십시오오오오오옷!!

 

이 중차대한 시기에 대한의 얼을 가진 싸나이가 일본 음식에 넘어갔다고 비난하지 마시라. 주연배우가 좋아한다는데...!!(스시는 미국에서도 싼 음식이 아니고 재료도 어차피 다 현지 조달이다...!). 여튼 스시에 홀라당 넘어간 필자는 OK를 외쳤고, 피팅(의상 맞춤)에 참가한 필자는 순식간에 수염 난 아랍계 예언자로 변신했다. 아랍계 예언자 역은 필자를 포함해 4명이었는데, 진짜 토종 아랍인은 있을 리가 없고 중국계나 베트남계였다. 그리고 드디어 피팅과 분장을 완벽하게 마치고 투입될 순간에…

 

비가 내린다.

 

비 그치기를 좀 기다리다가 결국, 지시가 내려왔다. 

 

“오늘은 이만 촬영을 끝내고 3일 후에 다시 촬영합시다. 저는 여러분들이 다시 촬영장에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옷 사이즈랑 분장도 여러분 체형에 맞춰져 있어서, 처음부터 다시 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웬만하면 일정 다 비우고 3일 아침 6시에 오세요.”

 

그런데 필자는 그날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새벽 6시는 도저히 곤란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혹시 아침 8시에 오면 안 되나요?”

 

“오케이. 알겠습니다.”

 

응? 나 땜에 2시간을 미뤄줘? 그냥 던진 말인데?! 겨우 나 때문에?!?! 나조차도 놀랐다. 출연료를 받고, 이제 퇴근하려고 하는데 한마디 덧붙인다.

 

“기왕 온 거 점심은 먹고 가세요.”

 

농담 아니고 그날 점심은 스시와 사시미, 해산물 뷔페였다. 

 

필자를 포함한 3명은 “역시 디즈니는 돈이 많아”라며 실컷 먹었다.

 

3일 후 아침 8시, 부랴부랴 할 일을 끝내고 스튜디오로 다시 출근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스튜디오는 아무도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캐스팅 에이전트 회사에 전화를 때렸다. 에이전트는 곧 알아보겠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에서 할 일이 없이 죽 때리고 있었는데, 1-2시간쯤 지나서 누군가 왔다. 

 

“당신 여기서 뭐하고 있습니까?”

 

“넹? 저요? 저는 이러쿵저러쿵...”

 

“음...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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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몇 번 전화를 걸더니 어쩌구 저쩌구 솰라솰라 이야기한 후,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서 당신 없이 바로 촬영을 들어간 것 같네요. 이미 한창 촬영 중이라서 당신을 투입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출근은 했으니, 기다린 시간 동안만큼 계산해서 출연료를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하루치 출연료를 계산해서 주었다. 일은 전혀 못 했지만, 돈은 받았으니 공친 날은 아니었다. 물론 나중에 완성된 영화가 개봉하고 보니 영화가 너무 좋아 당시 출연하지 못했던 걸 많이 아쉬워했다.

 

 

아이스크림을 둘러싼 노동자 투쟁

 

이런 해프닝도 있었다. 

 

다국적 대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였는데, 외로운 주인공이 아시아계 가족과 히스패닉계 가족의 인정을 배우고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는 내용이었다. 대가족이니까 당연히 인원이 많이 필요했고, 아시아계 가족 5명, 히스패닉계 가족 5명이 주연배우 곁에 붙여졌다. 필자가 맡은 아시아계 가족은 경영학 교수를 하다가 은퇴한 중국계 할아버지 1명, 한국인 할머니와 여성 등 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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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하다 보면 가장 효과 좋은 모티베이션(동기)은 돈이고, 두 번째 모티베이션은 먹을 것이다. 그 촬영장 역시 돈이 잘 나왔고, 식사 수준도 훌륭했다. 그러나 촬영이 예상보다 길어졌고, 길어진 며칠 동안 음식으로 스테이크와 햄버거만 나오다 보니 질려서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몰래 컵라면을 싸와서 뜨거운 물을 부어 나눠 먹기도 했다.

 

그러다 촬영 2주째를 맞이했다. 폐교 건물을 빌려 한구석을 병원으로 만들고, 다른 한 구석에선 엑스트라 수백 명을 동원해 학교 연극 상연 장면을 찍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더웠다. 게다가 폐교라서 냉방도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 엑스트라들은 더위에 미칠 것 같았다. 스태프들이 엑스트라 대기실에 송풍기를 가져와 바람을 쐬어주었지만, 수백 명이 더위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반면 몸값 비싼 주연급 배우들은 대기실 트레일러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그렇게 엑스트라들의 불만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는데, 저녁 시간 때 사건이 터졌다. 주연배우들에게는 더위를 식힐 아이스크림이 지급됐지만 엑스트라들에게는 딸랑 뜨끈한 고기와 야채만 준 것이다. 물론 갑자기 날씨가 갑자기 더워진 탓에 영화사에서 수백 명의 엑스트라 모두에게도 아이스크림을 공급할 여력이 충분치 않았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더워서 미칠 지경인 당시 우리 아시아계 패밀리들은 폭발 직전이 됐다. 

 

“아이스크림 아니면 죽음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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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러시아 수병들의 반란과 러시아 혁명을 그린 ‘전함 포템킨’의 한 장면>

 

더워서 지쳐 쓰러진 엑스트라들은 대충 이런 분위기였다. 혁명은 언제나 지식인이 주도하게 마련이다. 우리 아시아계 패밀리 가운데 가장 많이 배운 중국계 경영학 교수가 아이스크림을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이대론 가만있을 수 없어. 우리는 주연배우의 가족이고, 핵심 엑스트라야. 다른 엑스트라는 한두 명쯤 없어도 상관없지만, 주인공 가족인 우리가 촬영을 거부하면 영화 촬영은 불가능해진다. 지금 캐스팅 에이전시에 연락해 투쟁하는 거다. 아이스크림을 안 주면 촬영을 거부하겠다고! 니취팔러마”

 

정말 그게 가능하냐고 물어보니까 교수님이 이러신다.

 

“옆의 히스패닉 가족도 이미 캐스팅 에이전시에 전화했대. 아이스크림을 주든지, 우리 시급을 두 배로 올려주든지 선택하라고 통보했대. 히스패닉 친구들도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해?”

 

학대받는 이민자들의 아이스크림권을 위해 분연히 들고 일어선 교수님은 마침내 총대를 메고 밤 11시에 에이전시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캐스팅 에이전시에는 보통 돌발상황을 대비해 1명 정도의 당직을 두는데, 그 사람이 전화를 받은 모양이다.

 

“헬로, 우리는 XX영화를 촬영하는 OO이요. 주연배우 AA의 핵심 엑스트라요. 지금 아이스크림을 주든지, 우리 시급을 올려주든지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촬영을 거부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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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자다가 전화를 받았을 당직자는 느닷없는 최후통첩을 듣고 얼마나 황당한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도 안 간다. “일단 알아보고 다시 전화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1-2시간쯤 더 촬영하고 촬영은 끝났다. 우리는 자동차 에어컨을 켜고 집으로 돌아와 잤다. 캐스팅 에이전시에서는 아무런 전화가 없었다.

 

이후에 우리가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에이전시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 후로 촬영은 끝까지 순조롭게 끝났고, 영화는 성공적으로 OTT에 팔렸다. 그런대로 인기도 있었다. 에이전시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스크림 한 개를 둘러싼 우리들의 작은 투쟁은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재미있는 화두를 던진다. 

 

미국 영상업계의 노동 투쟁과 파업은 대충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노동법상 규정된 행위를 시도한 것이다. 사용자와의 단체 협상(collective bargaining), 투표(voting), 그리고 파업(strike)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이 될 때도 있고, 위 사례처럼 해결이 안 되고 흐지부지 넘어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확실한 건 그로 인해 차후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은 미국 영상업계에서 자유로운 고용주, 고용인의 소통을 가능케 하고, 자연스럽게 노동 환경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선순환을 일으킨다. 끗.

 

아. 다음 회를 계속할지 말지는 오롯이 독자 여러분의 반응에 달려있다. 배우(?)는 관심이 고픈 법, 관심 주시라!! 

 

 

 

<슈뢰딩거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