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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9. 수요일

정우성


 



 



도깨비에게:


 


그래, 너는 항상 우리와 함께 했지.


너는 늘 안 보이는 곳에 숨어야만 했지.


밤마다 어둠 속에서 도사려야 했지.


너는 왜 아이들을 잡아먹는 거니?


너는 왜 소중한 물건들을 훔쳐가니?


너는 왜 나쁘게 행동하니?


그래, 우린 심하게 너를 대했어.


아이들을 위해서 너는 무서워야만 했어.


너를 나쁘게 말하자 아이들이 순해졌지.


너는 웅크리고 우리는 음모를 꾸미지.


음모가 시작되면


너는 서둘러 자세를 잡아야만 했지.


그럴 때마다 우린 아이들을 더 깊게


안아줄 수 있었지.


아이들은 너를 비난했지.


너는 한 번도 얼굴을 내밀지 못했지.


그래, 우리가 너무 미안했단다.


언제나 몹쓸 짓을 해야 하는 네게


언제나 벽 속에 갇혀 지내야 하는 네게


도깨비가 온다, 도깨비가 온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순해지고


너는 또 도깨비가 된다.


도깨비야, 도깨비야


아이들이 장성하면


한 번도 보지 못한 우리 삼촌이


그리 욕먹으면서


너희들을 키웠노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마.



 



 


 


인간의 속성에 대한 생각


 


육아는 인간이 인간을 키우는 것이므로


한 번쯤은 우리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감정적인 취향과 폭발도 유심히 들어보면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논리를 이해하는 이성적인 사고나 과학적인 지성이라는 것도 물론 있지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의 편차가 너무 심하다. 똑같은 것을 두고 어떤 이는 옳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이는 잘못됐다고 말한다. 통설과 소수견해가 있을 뿐 100% 완벽한 진리를 가늠하기는 극히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어쨌든 간에, 이성적이든 비이성적이든 어떤 행위나 선택을 한다. 사회활동을 해야 하므로 윤리적이거나 실천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데, 사실 이것 또한 무엇이 윤리적인 것이며 그렇지 못한지를 따지기는 어렵다. 단지 수천 년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얻은 교훈을 통해 최소한의 인륜이나 도덕을 따라야 할 가치로 삼는다. 사기, 폭력, 살인, 강간, 협박 등은 형사적인 법제로 편입되고, 거짓말이나 부모에 대한 나쁜 태도 등은 도덕적 비난에 맡기고 있다. 이런 것들 역시 그다지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 인간적으로 그러지 말자’는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합의가 아닐까 한다.


 


쾌와 불쾌의 감정도 사실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개념은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이나 육체적인 쾌락 혹은 정신적인 쾌락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또한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 속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환타지 소설이나 영화를 즐기는 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행동이 아니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꼭 논리적인 것은 아닌 것처럼 문학과 예술 영역이 그러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어떤 것은 인간을 이루는 어떤 한 영역, 곧 ‘지식’의 영역일 뿐, 전부가 아님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지식의 영역에서 자녀교육의 대부분을 행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이를 ‘지식’의 관점에서 키우며 지식을 권하며 강요한다. 공부는 대개 지식의 관점에서 이뤄진다. 공교육/사교육의 관점뿐만 아니라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 또한 그러하다. 말도 되지 않는 것들은 자녀교육의 현장에서 추방되곤 한다.


 


추방되지 않는 유일한 영역은 ‘동화’다. 물론 메시지와 교훈을 주는 동화가 대부분이지만,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동화 속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비논리적인 환상이 과학을 압도한다. 그래야만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야가 발전하여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되며, 환타지 소설이 되며, 환타지 영화가 된다. 다 큰 어른들도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이뤄진 만화, 드라마, 소설, 영화, 연극 같은 것들을 즐긴다. 그런 작품들이 재미있다고 하기 보다는, 원래 인간은 ‘환상적인 것’을 좋아하는 어떤 원형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환상 속을 여행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여행일지도 모른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일전에도 반복하여 말했지만(상당한 거부반응을 초래하기도 했지),


부모의 육아에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런 것은 부모의 몫이 아니라 사회의 몫이다. 솔직히 생각해보자. 어른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과 지성은 사실 우리 부모로부터 배운 게 아니다. 책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사유를 통해서, 학교에서 혹은 사회생활을 통해서 스스로 생각하면서 체득한 것이다. 부모가 그 부분에 대해서 침묵한다고 해서 아이들의 이성과 지성이 발육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언어가 느는 만큼 이성과 지성의 영역은 자연스럽게 늘어나기 마련이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과다한 지식이 주입되고, 주입되는 과정에서 극히 심한 경쟁에 노출되기 때문에, 부모는 가급적 주입하는 지식의 양을 줄여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또 아이의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줄 부모의 위로가 시급한 실정이다. 우리는 이성과 과학의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과잉의 시대에서 지식의 경쟁을 해댄다. 지금 시대에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가르침과 설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그건 이미 넘칠 만큼 넘쳤고), 오히려 예전 인류가 했던 것처럼 환상의 힘을 빌어서 아이들을 위로하는 게 필요하다. 우리는 하늘을 날 수 있으며, 언제든지 동화 속 인물을 불러낼 수 있다. 아이들은 아빠의 등을 타고 좀 더 먼 곳까지 바라볼 수도 있다.


 



 


 


이게 다 도깨비 때문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빚을 많이 진 존재는 다름 아닌 ‘도깨비’다.


언어의 쓰임새를 볼 때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상징기법이나 비유법을 동원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때가 있다. “그건 이래저래 해서 나쁜 거야.”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건 도깨비가 좋아하는 행동이야.”라고 말하는 게 메시지가 더 분명히 전달되곤 한다. “잠 잘 시간이야. 이제 잠을 자렴.”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잠을 자지 않으면 도깨비가 온다.”라고 겁을 주는 게 더 효과적이곤 한다. 그리고 아이의 하루 일과에서 나쁜 행동이 있었고, 이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아이를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비난하는 것보다, 도깨비를 의인화해서 도깨비가 아이가 했던 행동과 비슷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 아이와 함께 그런 도깨비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꾸미면, 도깨비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거울이 된다. 아이는 의인화된 도깨비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치유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다. 훨씬 교훈적이고 효과적이다. 아이는 어른이 잃어버린 집중력이라는 게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스스로 환상 속으로 들어가서 집중된 교육을 받는 것이다.


 



 


거짓말 하는 것은 나중에 들통날 일이고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아이에게 몇 번이고 요긴하게 도깨비를 써먹었다. 아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을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 종이조각, 어디에서 주워오거나 받아온 물건, 망가지거나 더러워진 장난감, 방 곳곳을 배회하는 별 희한한 것들, 먹다 남은 음식물 등을 정리정돈이라는 이름으로 엄마가 버리곤 한다. 아빠도 동참한다. 혹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찾기 힘들 때가 있다. 아이가 그것들을 찾을 때 엄마가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와 엄마를 긴장시키고 대적시키는 일이다. 또 어딘가로 사라진 그것을 찾기 위해 방 곳곳을 뒤져야 하는 것은 때로 매우 귀찮고 상황에 따라 불가능하기도 한다. 아빠는 아이에게 말한다.


 


“도깨비가 가지고 갔나 봐”


 


그러면 아이는 도깨비를 비난한다.


괜찮다. 여전히 아이에게는 소중한 것이 남아 돌고, 아이의 관심사와 기호는 ‘휘발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또 여기에 잠잘 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에서 어쨌든 나쁜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로 으레 도깨비가 등장을 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도깨비를 ‘나쁜 것’으로 상징화한다. 그렇게 상징화되면 기술적인 면에서 육아가 쉬워지기도 한다. 가끔 동화 속에서 착한 도깨비가 등장하곤 하는데, 그럴 때에는 “세상에는 착한 도깨비도 있단다.”라고 말하면 평화주의자인 아이들은 쉽게 납득해준다. 도깨비 친구로는, 늑대와 괴물이 있다. 늑대와 괴물은 도깨비처럼 행동해서 나쁜 ‘무리’들이 있음을 아이들이 눈치챈다. 아이들은 이 무리들을 비난한다. 비난은 일종의 감정의 배설구다. 그러니까 우리집에서는 도깨비가 아이의 나쁜 감정을 배설하는 변기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인간은 누구나 감정을 배설해야 한다. 그게 정신건강에 좋다. 아이도 인간이므로 감정의 배설구가 필요하다. 감정을 사람에게 배설하면 충돌이 생긴다는 것쯤은 아이들도 알기 때문에 자칫 ‘감정배설의 변비’에 걸릴 수 있다. 하지만 도깨비는 그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도깨비를 비난하면 부모와 함께 ‘공동전선’을 형성하면서 대적할 수 있으므로 마음껏 감정을 배설할 수 있다. 이건 정말 큰 장점이며,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경험이다.


 



 


형제(남매나 자매)가 있는 경우에,


도깨비는 더할 나위 없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 집에서 딸과 아들은 경쟁관계이며 언제든지 질투할 준비가 돼 있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비난하기도 하며 고발하기도 한다. 딸이 아끼는 물건(먹는 것이든 노는 것이든)이 없어지면 가장 먼저 동생을 의심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동생이 아끼는 물건이 없어지면 누나를 먼저 의심한다. 그때마다 ‘도깨비가 그랬나 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누나와 동생은 함께 도깨비를 비난한다. 도깨비에 대해서 누나와 동생은 연대한다. 또 아이들은 도깨비 흉내를 내서 아빠와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어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큰 모션을 동원하며 “아이쿠, 깜짝이야. 깜짝 놀랬네.”라거나 “아이구 너무 무서워! 도망가자.”라고 큰소리로 말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너무나 좋아한다. 이건 이성적인 것도, 합리적인 것도, 윤리적인 것도 아니다. 쾌와 불쾌의 감정이며 환상의 영역이다.


 


물론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도깨비는 잊혀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 부모는 다른 시도를 해야만 한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을 덧붙여야 될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 오면 그것은 그 나름의 기쁨과 보람을 주리라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이성적인 대화는 소통의 면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1/3 소통에 불과하다. 나머지 윤리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남아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환상의 흔적을 함부로 지우지 않으련다.


 


“그래, 그건 과학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재미있잖아.”


 


어차피 그 아이들이 장성해서 환타지 영화나 소설이나 게임을 즐기는 것이라면 여전히 환상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유효하다. 늙어서도 우리는 환상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이것은 순전히 영적인 것이며, 문학적인 것이고 또한 인간적인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인간들은 위로를 받는다. 환상은 인간의 포부이며 날개다. 환상은 이치를 따지지 않는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 날개가 함부로 꺾이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이며, 스스로 날개를 벗을 때까지는 오히려 그 날개를 깨끗이 닦아주고 잘 움직이는지 보고 또 볼 것이다.


 



 


 


정우성


두 아이의 아빠, 변리사, <특허전쟁> 저자, 곧 후속편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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