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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11. 금요일

춘심애비


 



 



 


제논의 역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상한 이야기.


 


기본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아킬레스라는 놈이 앞에서 기어가고 있는 거북이를 쫓아간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빠르다고 치자. 그가 10미터 가는 동안 거북이는 1미터를 간다. 그가 1미터를 가면 거북이는 10cm를 간다.


제논의 주장은 이렇다. 아킬레스가 앞으로 가는 동안 거북이 또한 존나 쪼금이라도 가기 때문에, 거북이가 원래 있던 위치에 아킬레스가 도달하면 거북이는 쫌 더 앞에 있고, 그 위치에 도달하면 또 쫌 더 앞에 있고. 결국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는 병신 같은 소리. 또 뭐 다른 것도 있는데, 뭐 어차피 병신 같은 소리인 건 마찬가지니까 그냥 넘어간다.


 


아킬레스는 분명히 거북이를 따라잡고 역전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걸 알고 있다.


그런데, 한 번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술자리에 지금 제논이 같이 앉아있다. 좀 취한 상태로 저런 주장을 한다. 분명 틀린 소리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제논을 존나 병신 취급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막 그럴 거다. 거기서 제논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한 마디 하는 거다.


 



"어떻게 증명할 건데?"



 


누군가가 종이와 펜을 꺼내어 그림을 그린다.


 



 


 


이런 함수그래프를 통해 아주 간단히 설명이 가능하다. 저 두 선분의 기울기는 각각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달리기 속도를 의미하고, 가로축은 시간을, 세로축은 위치를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두 선분이 만나는 지점에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는 거고, 그 이후에는 아킬레스가 앞지르게 된다. 존나 당연한 거다.


 


그런데 말이다.


제논이 존나 꼰대에 술꼬장 존나 부리는 캐릭터인데다가 자존심도 세고 절대 남의 말 안 듣는 놈이라서 수긍을 절대 안 하면 어떨까. 아킬레스는 절대로 거북이를 역전할 수 없다고 끝까지 우기는 거다.


 



"그러면, 내가 말했던, 아킬레스가 원래 거북이 위치로 오는 동안 거북이는 좀 더 앞으로 가서 이미 그 자리에 없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



 


아.. 씨바 어떻게 설명하지? 저 그래프를 다시 그리나? 저 그래프 말고 다른 그래프를 그리나? 무한등비급수에 대한 강좌를 시작해야 되나? 분명히 틀린 얘기인 건 확실한데 말이다.


어떡해야 할까. 이 조현오 같은 새끼를.


 


 


1. 이것이 프레임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달리기. 둘의 속도가 각각 일정하다고 전제했을 때 그 둘의 위치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는 건 저 위의 1차함수 그래프 2개를 이용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제논은 '둘 간의 거리'를 기준으로 해서 그 변수가 '0에 수렴' 한다는 설정을 한다. 이러한 설정을, 요즘 유행어로 표현하면 <프레임>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프레임이 틀렸기 때문에 제논은 결론적으로 틀린 말을 하게 된다. 거북이와 아킬레스간의 거리는 '0에 수렴'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줄어들어 음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좀더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이런 거다. 상대가 잘못된 프레임을 쳐놓고, 그 안에서만 논리적인 주장을 펼칠 경우, 나는 그 프레임 자체의 오류를 지적해야 하기 때문에 프레임 밖의 얘기, 즉 다른 프레임을 제시해야만 한다. 이 때 상대가 이 새로운 프레임을 거부할 경우, 상대를 설득시키거나 굴복시키는 건 진짜 졸라 힘든 일이다. 특히나 상대가 그 프레임을 받아들일 자세라던가, 지적 역량이 조금이라도 미흡하면, 이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제 아무리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이라도, 제논과의 술자리에서 제논의 '내가 틀렸소'라는 고백을 받아내는 건 졸라 어려운 일이다. 그 고백을 받아내는 건, 위에서도 말했듯 설득하려는 자의 지적 능력과는 무관하게 그냥 제논이 얼마나 병신 같은가, 제논이 얼마나 막돼먹은 고집불통인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좋은 예를 가까이 두고 있다.


 



 


변희재의 주장은 대부분, 완전히 잘못된 프레임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면 486은 죄다 종북 좌빨이다, 보수 성향이 아닌 주장은 죄다 무뇌좀비다, 친노는 죄다 종북좌빨이다 등등. 변희재의 프레임 안에서는 진중권이나 조국은 물론이고 하버마스나 키에르케고르, 지젝도 죄다 종북좌빨이 될 판이다.


 


즉, 변희재의 프레임은 한 마디로 '나 빼고 다 병신'이기 때문에 지가 하는 소리와 다른 얘기를 하면 다 병신 취급을 한다. 우리 모두는 그의 발언을 보면 혈압이 솟구치고 뒤통수가 뻐근해져온다. 그래서 우리끼리 변듣보니, 변듣보르잡이니 하며 그를 무시하게 된다.


 


문제는 그의 병신성이 너무도 뛰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어지간한 말을 해도 그의 굴복이나 오류 인정을 받아낼 수 없다는 점이다. 필자가 트위터에서도 언급했듯, 이런 '총체적으로 이상한 새끼'가 <논객>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명칭으로 분류되는 일은 역사상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이 병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큰 혼란에 빠져있다.


 


변희재뿐만 아니라,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조갑제라던가, 요즘 조용한 전여옥, 김동길, 신진세력 이준석, 손수조, 윤주진 등등 수많은 인간들이 완전히 잘못된 프레임 안에서 나름대로의 일관적인 논리를 펼쳐 우리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한 아름씩 안겨주고 있다. 이들의 말이 잘못된 이유는 수없이 많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반박이나 비판이 얼마나 정확하고 논리적이냐는 문제와는 무관하게, 그들은 존나 들어쳐먹지를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고스란히 계속되는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게 된다.


 


아주 좋은 예들을 찾다 보니, 다소 한쪽에 치우치게 됐는데,


이런 제논스러운 병신스러움은 단지 저쪽 편에만 있는 건 아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병신스러움은 우리 모두 지니고 있다.


 


 


2. 우리 주변의 병신성


 



 


아마 많은 딴지스들이 머리 속에 이 분을 떠올리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진중권도 이런 병신스러움을 종종 보여주곤 한다. 나꼼수를 대하는 태도나 10.26 재보선의 선관위 홈페이지 사태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는 거의 변희재에 근접한 병신성을 잘 보여준 바 있다.


 


'나꼼수는 개그프로다', '나꼼수 팬들은 사이비종교를 믿는 광신도다', '나꼼수의 주장은 음모론이다' 등등 잘못된 프레임 안에서 특유의 논리전개를 펴다 보니, 그 프레임 안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지적하다가 블락 당하고, 또는 다른 프레임을 제시하다가 블락 당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묵직한 스트레스에 신음한 바 있다.


 


또 진보진영 안에서의 핫이슈 또한 비슷한 병신성을 드러내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좀 극단적인 <탈 민족주의>성향이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딴지스들과 의견이 좀 다를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개인적으로 민족이라는 말 자체를 졸라 싫어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길 바란다.


 


암튼,


애초에 NL이라는, 졸라 극우적인 사고를 베이스로 한 세력이, 극우 세력이 할 법한 사고체계를 세운 채, 정치적으로 비주류라는 이유로 좌파 취급을 받는 해괴망측한 현실. <투쟁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며, 그 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한다>는 식의 병신같은 프레임에서 수십 년 버텨온 집단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가 어디서 어떻게 틀렸고 어떠한 이론적 오류를 내포하는 지를 아무리 밝혀봤자 먹히지 않는다.


이 병신성이 응축된 사건이, 이 중요한 시국에 터져버리니 우리 모두는 다소간의 멘붕에 빠져, 아 씨바 이 새끼들을 어떡해야 되나...는 생각만 되뇌인 채 그냥 지켜보고만 있게 된다.


 


요는, 이렇게 오류를 내재한 프레임 설정으로 스스로 병신짓의 함정에 빠져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는 단순히 어느 한 부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거다. 우파든 좌파든, 수구든 진보든, 그러한 잣대와는 무관하게 그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러면 그 함정은 애초에 왜 발생하고, 많은 이들이 빠져들게 하는가.


 


 


3. 제논 vs 제논


 



 


다시 술자리로 돌아가보자. 제논이 꼬장을 부린다. 우리 모두는 그의 오류를 알지만 그를 굴복시키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러면 이제 솔직히 생각해보자. 나는 어떤가. 나는 술자리에서 뭔가 주장을 할 때, 제논과 얼마나 다르게 주장하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덜 병신같은가.


 


기본적인 틀은 우리 모두가 같다. 어떤 사태나 사안을 보고 나름대로 프레임을 짠다. 그 프레임은 일단 나에게 어느 정도 자신 있는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좀 더 노골적으로 얘기해보자.


 


내가 복싱을 잘 한다고 치자. 상대방이 검도를 잘 한다. 둘이 맞짱을 한 판 떠야 되는 상황이 됐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고 싶을 거다.


 



"우리 인간 대 인간으로, 정말 아무 것도 없이 맨주먹으로 한 판 붙어보자."



 


그런데 반대로 내가 검도를 잘하고 상대는 복싱을 잘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을 거다.


 



"인간은 도구를 쓸 수 있기에, 더 인간다운 거 아니겠나."



 


아무 것도 없이 맨손으로만 붙는 것이 더 순수하다는, <인간 내재적 힘 대결> 프레임,


혹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 정말 인간다운 거라는 <호모 파베르 대결> 프레임,


 


이 프레임은 결국 내가 이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옳기 때문에 그 프레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내가 이기기 때문에 선택한다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어떤 사람은 논리적으로 옳은 프레임을 치기도 한다. 그 싸움에서 승패가 크게 중요하지 않거나, 승패 자체가 없고 싸움도 아니라면, 혹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면 옳은 프레임으로 전제할 수 있다. 하지만 승패가 중요하다면, 우리는 프레임을 선택할 때 옳고 그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유리한 지 여부를 고려한다.


 


그러니까 현실은, 프레임과 프레임의 싸움이다. 이겨야 살아남는 프로의 정글에서라면, 모든 싸움은 프레임 대결이다. 내가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놓고 싸우려 하며, 상대방과 싸우기 전에 이미 그 '조건'을 어떻게 걸 것인가를 놓고 싸움을 시작한다. 즉, 정치 관점에서 모두는 제논이며, 다른 제논과 싸우는 중이다. 싸움에 임하면서, 프레임 싸움을 하는 행위를 비열하다고 볼 수 없다. 그저 누구나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하고 있는 전략일 뿐이다.


 


 


4. 프레임은 비열하지 않다.



위와 같은 이유로, 현실정치에서 어떤 싸움이 시작되려할 때, 그 싸움의 프레임을 <누가 제시했는가>를 보는 것이, 그 싸움의 승자를 예측하기에 아주 좋은 단서가 된다. 어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그 싸움의 프레임을 제시한 것이 '상호 합의'나 '초월적 규율'이 아닌, 싸우는 자들 중 한 쪽이 제시한 프레임이라면 그 프레임은 당연히 그들에게 유리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이 이길 확률이 당연히 함께 높아진다.


 


그러면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프레임 설정은 누가 해왔는가.


일제해방 직후의 레드컴플렉스 프레임. 김대중을 제압하기 위한 지역 프레임. 재벌의 뒷돈을 계속 받기 위한 선성장후분배 프레임. 가장 굵직한 이 3가지 프레임은 아직도 <그들>의 생명줄이다.


 


그들이 설정한 프레임이 유지되는 상태라면 그들은 계속 유리한 고지 위에서 싸우는 셈이다. 물론 항상 이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같은 역량일 때 이길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고, 혹은 역량 차이로 그들이 지는 한이 있어도, 실재하는 역량 차이에 비해 그 결과의 격차는 줄어든다. 마치, 노무현 탄핵정국에서도 17대 국회에서 121석을 차지했던 것처럼 말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프레임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 자체는 비열하다고 볼 수 없다. 모두가 쓰고 있으니까.


유명한 격투가나 장수들 기록을 보면 의외로 반칙도 잘 쓰고, 심리전도 잘 쓴다. 하지만 그건 비열하다고 볼 수 없다. 그냥 전략일 뿐. 이를 비열하다고 하는 건, '그 반칙을 쓸 생각을 못한 사람이, 반칙 없이는 이길 수 있었다고 생각할 때'이다. 즉, 지가 이길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비판하는 것이므로 이 자체도 하나의 프레임인 셈이다. 옳은 프레임이지만, 단지 옳아서만이 아니라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이란 얘기. 이 자체는 비열하지 않다.


그런데, 분명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비열하다. 이건 맞다.


 


그 <비열함>의 조건은 다름 아닌, 프레임 설정 능력 자체가 이미 승자에게 더 많이 주어져 있다는 조건에서 발생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미국에서 이벤트로 LA레이커스와 뉴욕양키즈가 친선게임을 한다고 치자. 여기서 <어떤 종목으로 하느냐>가 <프레임>에 해당한다. 그런데, 야구 한 번 농구 한 번도 아니고, 축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종목을 할 지는 뉴욕양키즈가 정하고, 패배한 팀은 3족을 멸한다>는 조항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일단 저렇다고 하면 저 조건 자체가 존나 비열하다. 뉴욕양키즈가 성인군자들로만 이뤄진 팀이 아니고서야, 3족을 멸한다는데 농구를 하겠나 축구를 하겠나.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4.11총선 패배의 원인 중 아주 큰 테마가 <언론장악>이었다. 나꼼수와 SNS가 아무리 커보였어도, 조중동과 어용 공중파 방송사의 합을 압도하진 못했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팟캐스트와 SNS라는 신흥 미디어에 대한 접근성과 야당 당선이 긴밀한 상관관계를 보였다는 것. 게다가, 반정권적인 목소리만 짓밟고 친정권적인 목소리는 눈감아주는 검찰과 선관위도 한 몫 하고 말이다.


기득권층이 그 권력을 이용하여, 이렇게 <프레임을 제시하는 능력> 자체를 자신들 스스로 <독점>하게 되는 조건을 뿌리깊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에게 유리한,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똑같이 치려 해도 대부분 그들의 프레임이 채택된다.


 


정리해보자.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 <프레임 제시 권한>을 <독점>한다. 프레임이라 함은 자신의 승리를 유리하게 하므로, 그들은 항상 게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 그렇게 게임에서 승리하면 권력을 또 가져가므로 이 비열한 악순환은 계속된다.


 


이 당연한 얘기를 하는 이유는 뭐냐면


<그들의 프레임 내 오류를 지적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거다.


 


제논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건, 병신 같은 프레임을 계속 들이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제논과 싸워 이겨야 한다면, 주장 자체가 틀렸는데도 불구, 프레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가 그를 쉽게 이길 수 없게 만들고 있으므로 제논은 좋은 전략을 짠 거다... 그 프레임 안에서 놀 때, 우리는 정말로 이기기가 힘들다.


그 와중에, 제논이 그 프레임을 제시할 권한을 독점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계속 진다. 그러니까 포인트는 <니 프레임 틀렸어 병신아>가 아니라 <프레임 내놔 이 새끼야>가 되어야 한다.


 


그게 문제의 본질이다.


 


 


5. 프레임 독점 정치의 종말


 



 


그런데 뭐 말이 쉽지 무슨 수로 프레임 권한 자체를 논한단 말인가. 유구한 역사 동안 겨우겨우 해낸 게 노무현 때 한 번, 그리고 나꼼수가 한 번 했고, 그것도 완전 가져온 것도 아닌, 꽤 근접하게 따라갔다는 정도이다. 그만큼 상대편의 <비열함>이 정도가 심각하다는 반증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은 이유는, 현대 정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는 데에 있다. 지난 기사들에서도 언급했던 맥락인데, 아무리 조! 족이든 씹쌔끼들이든 간에 2012년에 직선제 민주주의를 뒤집는 건 존나 리스키한 일이다. 가다피도 죽었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프레임이 절대 다수 대중들의 이해관계와 모순될 때, 그리고 그 사실을 은폐할 수 없을 때, 그 때 모든 판이 한 번 뒤집어질 가능성을 갖는다. 그 때 프레임 독점 정치의 종말이 올 수 있다.


 


이 전제 하에, 현재 시국은 바로 이 지점, 프레임 독점이라는 비열한 조건 자체가 관심사의 핵심이 되는 지점에 다가섰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도 분명 땡전뉴스라는 비판이나, 안티조선이라는 움직임은 있어 왔다. 하지만 워낙에 많은 반칙과 이슈들 사이에 혼재돼있던 지라, <프레임 독점>이 테마의 중심이 되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다르다. 여전히 많은 이슈와 반칙이 넘쳐대고 있지만, 나꼼수와 조중동의 정면대결과 KBS, MBC의 장기파업이라는 테마가 4.11 총선 패배와 연결되어 사태의 핵심으로 집중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의미에서 4.11 총선 패배는 어찌 보면 차라리 반갑다. 애매하게 20석 정도 차이로 이겼더라면 야권은 통진당 당권파들도 그냥 계속 묻어갔을 거고, 야권 전체가 승리감에 도취돼있고, 서로 잘났다고 떠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야권은 졌고, 졌기 때문에 조중동을 더 밟아야 한다는 사실, KBS와 MBC의 노조가 이겨야만 한다는 사실을 졸라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중이다.


 


물론, 아직도 수많은 대중들이 방송사 파업은 그냥 빨갱이들이 놀고 싶어서 떼쓰는 거고, 조중동이 진리고, 나꼼수나 트위터는 그 빨갱이들이 떠드는 놀이터라고 생각한 채 기득권의 프레임 속에서 노니고 있을거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 잘못된 프레임이 독점적으로 제시되는 근본적 이유로 인한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고, 바로 그 근본적 이유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제논의 어거지 주장에서, 이걸 어떻게 수학적으로 한 방에 설명할 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제논만이 프레임을 제시할 수 있었던 그 비열한 조건을, 그리고 그 조건을 제논만이 제시해왔다는 부조리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변화는 파악에서 시작한다.


 


눈 깔지 마, 이 제논 새끼.



 


춘심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