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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27. 화요일


백골프


 


 


예고편 : 메이저行을 앞둔 괴물


 


 


 


 



 



6년 전 일입니다. 2006년 4월 12일, 괴물이 탄생한 날. 7과 3분의 1이닝 무실점으로 엘지 타선을 틀어막고 승리투수가 되며 데뷔한 괴물, 그 괴물을 보기 위해 저는 경기 후 한화선수단 버스앞에서 기둘리고 있었습니다. 저와 같이 온 일행들 단순히 일행이 아니라 제가 리더가 되어 이끄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류현진 선수의 가족과 친척들이 버스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현진군 아버님과 마주치자 기쁨의 포옹을 하고


 


“아버님 박용택이고 이병규고 아주 꼼짝을 못하던데요 ㅎㅎㅎ"


 


또 오랜만에 뵌 고모님과 인사를 하고.


 


여자, 남자할 거 없이 모두 키 크고 체격이 좋은 현진군 가족과 친척들, 할머니도 손주의 데뷔전을 보기 위해 인천에서 오셨는데 손주가 등장하는 순간 내 새끼 장하다며 우시더라구요, 이른바 기쁨의 눈물.


 


현진군과 인사를 하고 가족분들과 인사 후 헤어지고 일행들과 더불어 감자탕집에 가서 소주 파티를 했죠. 다들 저로 인해 아마시절부터 류현진에 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사람들, 저와 같이 기대하고 또 마음을 졸이며 데뷔전을 기다렸던 분들. 그 분들과 조촐한 파티를 하고 또 류현진 선수와 통화를 하는데 “건순아. 현진이 좀 바꿔봐” 옆에 형님이 그러시더라구요. 그 분이 류현진과 통화를 하고 그리고 옆에 분이 통화를 하고 그렇게 사람을 바꿔가면서 제 전화기는 룸 전체를 돌았습니다.


 


정말 축하한다, 많이 기대한다. 격려를 하는 제 벗들.


 


뭐 하냐는 질문에 게임방에서 총쏘는 오락한다는 류현진군.


 



 


사람들과 자리를 끝내고 전 잠실에서 서울 강북까지 걸어왔습니다. 여러 가지 머릿속에 생각할 것들, 정리할 것들이 많아서요.


 


여러 가지 기억들이 제 머릿속을 스쳐가더라구요, 티비를 통해 류현진을 처음 봤을 때인 03년 미추홀기 대회. 그리고 현장에서 처음 관찰을 하고 오프라인에서 첫 인사를 했던 05년 나라님 그릇 다투어먹기 온나라 들야구 큰모임 인천지역예선(줄여서 대통령배 대회 인천예선, 한글 전용이 이렇게 힘듭니다.)제물포고와의 경기.


 


또 류현진 관련해서 이러저러 사람들의 입방아와 악성루머도 많았고 악의적인 비아냥도 많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제 머릿 속을 스쳐갔습니다.


 


“임건순이가 그렇게 류현진을 띄운다며? 얼마나 잘하나 보자고”


 


“SK가 류현진을 1차지명하지 않은 이유가 다 있다고”


 


“괜히 SK와 롯데에서 걸렀겠나?”


 


“걔 팔꿈치가 온전할거 같아?, 토미존 서저리 받아 일찍 복귀한 애가”


 


이런 이야기들을 때마다 '개새끼들 두고보자' 하는 생각이 안든 건 아니지만 류현진 선수가 실력으로 다 덮어낼 거라 믿었기에 그냥 나머지 한 귀로 흘렸지요. 마음 졸이고 마음 고생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감정이 격앙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안희봉, 김민규등 내 가슴에 묻었던 고교야구 에이스들, 바닥에 기는 팀성적에 좀처럼 크질 않는 팀의 영건들. 이러저러 사연들로 인해 많이 서러웠던 시간들.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집에 가는 길에서 참 많이도 울었던거 같네요.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 훔치며 갔습니다.


 


새벽녘쯤에 집에 도착후 잠이 들었는데 그후 며칠간 앓아 누웠던 거 같습니다. 긴장이 풀려서 그랬던 걸까요? 한동안 꽤 아팠는데 며칠 후 몸이 제 컨디션으로 돌아온 후 인천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쩌다가 너를 사랑하나봐 죽을만큼 너를~~~♪”


 



 


누구 노래죠? 류현진군 어머님 컬러링은 당시 항상 저거였습니다. 좀 청승 맞은 노래.


 


당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경기 이틀 전, 하루 전부터 청심환을 몇 개나 먹었는지 모른다면서 너무 긴장되어 혼났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경기 후 며칠을 앓아누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매일 같이 아들 경기를 보러온 팬, 그렇게 아들을 칭찬해주고 그렇게 온, 오프라인에서 많이 홍보하고 칭찬한 팬, 고마움 이전에 처음엔 절 좀 신기하게 바라보셨던 거 같습니다. 동대문은 기본에 인천도 자주 왕림하며 항상 그 자리에 있었으니.


 


이렇게 류현진군에 관한 개인적인 사연을 좀 이야기 해봤는데 계속 제 사연도 나올겁니다, 류현진과 관련한 저의 사연도 많이 이야기할 것입니다. 야구는 우리 인생과 같이 가는 거니 어쩔 수 없는 것이죠.


 


이제 본격적으로 류현진 선수 관련해서 이야기를 해봐야지요? 굉장히 밀도 있게 여러 장을 할애해서 할 텐데 뭐부터 해볼까요? 우선은 류현진에 대해 잘못 알려졌거나 잘못 인식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게 순서일 거 같고 또 다음으로 동산고 시절, 아마시절의 류현진 이야기, 어느 정도 완성된 괴물이고 잠룡이었던 시절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 거 같네요.


 


먼저 '한화에 왔기에 그만큼 잘한 거다', '구대성과 송진우 두 좌완 레전드를 보고 배웠기에 대박이 난 거다' 라는 사람들의 인식내지 보통의 야구팬들이 해온 말들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류현진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과 잘못 알려진 것들, 사람들이 잘 못보는 그의 가치, 그런 것들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아마시절 류현진 선수에 대해 아주 자세히, 그리고 그와 제가 얽힌 사연들에 대해서 차분하게 좀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류현진과 좌완 레전드 선배들


가끔 팀 성적 이상으로 중요하고 팬들의 자존심과 직결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팀컬러와 팀의 전통이지요. 제가 응원했던 한화 이글스라는 팀은 빙그레에서 한화로 변신한 이후 성적은 늘 좋지 않았지만 팬들이 자부심을 가지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송진우, 구대성>


 


송진우, 구대성으로 대변되는 리그 최고의 왼쪽 어깨들, 그리고 1기 이정훈-고원부-이강돈, 2기 송지만-이영우-데이빗으로 대변되는 최고 공격력을 가진 막강 외야. 특히 최고 좌완에 대한 팬들의 자부심은 정말 대단했고 지금도 유효합니다.


 


김인식이 한화 감독으로 들어서면서 외야에 있던 저 전통은 사라졌습니다. 외야를 주로 타팀에서 버린 선수를 재활용하는 식으로 메꿨는데요. 조원우와 김인철, 강동우, 윤재국 등 그러다보니 막강 외야라는 무기를 팀 스스로가 버리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래도 한국 최고 좌완의 팀이라는 전통은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전통도 이어갈 수 있을까하는 회의와 우려가 많았습니다. 박정진, 지승민, 이상열, 김창훈 아마 때 한가닥 하던 좌완 유망주들이 번번히 실패하고 드래프트 실수로 대전고의 서승화, 공주출신의 청원고 오재영 등을 놓치고 또 구대성은 해외로 가서 돌아올 기약이 없고 송진우도 은퇴를 생각할 나이가 되어가고.


 


저라는 놈은 당시 많이 절박했습니다. 팀성적은 충청도 말로 '개갈 딱지' 안나도 지켜가야할 우리 팀의 전통이 있는데 그것이 단절될까 걱정되어서요. 그렇게 걱정하는 와중에 아마 야구팬인 저는 자연히 아마 야구에 있는 씨알굵은 좌완들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그 때 제 눈에 들어온 두 선수가 있는데 바로 군산의 차우찬과 인천의 류현진.


 


특히 류현진을 좋아하고 높이사서 '송진우, 구대성의 후계자가 지금 아마야구에 있다'고 주변인들에게 많이도 말했고 입단했을 시에 '송진우, 구대성의 후계자가 들어왔다'고 좋아했는데 정말 그 선수는 송진우, 구대성의 대를 잇는 최고 좌완이 되었고 팬들의 자존심 그 자체가 되었지요.


 


그런데 거기까지!!!

 



 


팀의 역사와 전통이 단절되지 않게 해줬다는 의미만 보고 거기까지 해야지, 너무 나가는 이야기들이 많았고 그게 야구팬들의 인식으로 거의 굳어지게 된 거 같았습니다.


 


송진우, 구대성의 팀에 들어와서 그들을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성공할 수 있었다, 저 레전드들이 없는 팀에 갔으면 심심했을 거다, 그런 말들이 많았고 대부분이 그렇게들 알고 있었습니다.


 


허허참, 우리 상식적으로 이야기 해봐요. 보고 배울 선배가 있는 거 중요하고 선수와 팀간에 궁합이란 게 분명히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선수가 원래 가진 실력과 잠재력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 시작해서 십년 가까이 야구를 배우고 연마한 선수가 프로에 입문하게 되어 기량을 겨루는데 프로에서 보이는 기량과 실력, 성적 등은 대부분 그 선수가 가진 원래의 재능과 실력에서 판가름 나는 거 아닐까요?


 


데뷔전부터 아주 화끈하게 잘하고 데뷔 후 7년간 항상 정상의 자리에 서 있었던 선수. 정말 타고난 선수지요. 야구재능과 실력 타고난 선수. 그런데 그렇게 난 사람이 타팀에 갔었더라면 고전했을 것이고 성공이 불확실하다, 내지 한화에서만큼은 못했을 거다라고 하는게 과연 상식적인 말들이고 판단일까요?


 


김동주가 두산 아닌 타팀 갔었더라면 별로 였을까요? 손민한이 롯데 아닌 팀에 갔으면 리그 에이스급은 힘들었을까요? 사실 애초에 그런 가정과 질문을 하질 않죠. 당연히 어느 팀 가서도 잘했고 발군의 실력을 보였을 선수들입니다. 타팀의 중심선수, 타팀의 레전드들을 이야기할 때 어느 선수에게도 저런 식으로 질문을 하던가 해당 선수의 소속팀에 갔기에 성공하고 대박난 거라고 이야기 하질 않는데 어째서 유독 류현진을 가지고, 류현진은 한화에 갔기에 , 좌완 레전드들이 있는 팀으로 갔기에 그렇게 잘할 수 있었다, 타팀 갔으면 신통치 않았을 거다, 한화에서 한만큼 못했을 거다, 라고 하는지 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단순히 왼손으로 밥먹는 애라서 좌완 레전드들이 그의 프로 적응과 성장에 절대적이었다? 첫경기부터 무척이나 잘한 선수 적응에 성장은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원래 아마시절부터 무시무시한 실력을 가진 선수, 그 선수가 그냥 입단 초기부터 자기 실력 발휘한 것이죠.


 


한화에 좌완 유망주들이 류현진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박정진, 지승민, 이상렬, 김창훈, 아마야구판에서 난다 긴다하는 좌완 투수들이 많이도 팀에 입단했지요. 하지만 입단 후 신통치 않고 본궤도 집입에 실패했습니다, 대부분이 그랬죠. 그들이 뛸 때는 송진우와 구대성이 증발된 상태였을까요? 같은 좌완 레전드 선배들 덕분에 류현진이 잘할 수 있었다고 하시는 분들, 한번 답해보시길.


 



<박정진>


 


박정진, 95학번 최고 좌완 세광고 시절부터 연세대까지 항상 동기들 중 좌완 넘버원이었습니다. 경북고의 이승엽, 선린, 단국대의 이승호, 모두 그의 상대가 아니었죠. 졸업반 시절 박정진을 우선 지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한화구단이 그를 흘렸으면 해서 그의 팔꿈치 부상설을 흘린 지방 모구단도 있었을 정도였고 박정진은 대단한 좌완에이스 재목이었습니다.


 


이 박정진은 고려대와 추계리그 대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최희섭을 3연타석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박용택을 연속삼진으로 찍소리 못하게 눌러버렸습니다. 당시에도 지금도 보기드문 좌완파이어볼러였는데 박정진을 제외하고도 지승민, 이상렬, 한화엔 아마야구에서 날리는 좌완들이 많이 입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옆에 구대성과 송진우가 있었고 특히 박정진은 세광고 선배 송진우가 많이 신경을 써줬죠. 하지만 입단 후, 거의 강산이 변할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본궤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류현진의 성장과 대박이 좌완 레전드들 덕분?


 


그냥 원래 난놈이 들어와 실력발휘를 했던거고요, 또 난 사람이라는 건 팀합류 직후 바로 현장코칭스텝에서 간파를 했습니다.


 


사실 류현진 선수가 05년 가을, 팀에 합류해서 같이 입단을 한 유원상군과 불펜피칭도 하고 이거저거 현장코칭스텝에게 테스트도 받았는데 며칠만에 결론이 나왔습니다. 유원상은 류현진 상대가 아니다, 류현진이 훨씬 낫다고.


 


당시엔 1차지명 제도가 있었죠, 해당팀이 연고로하는 지역고교 선수 중에서 한명을 독점해서 수급할 수 있는 제도인 1차지명제도. 한화는 북일의 유원상을 1차 지명해서 입단시켰고 인천을 연고로한 SK에서 1차 지명되지 못해 2차드래프트의 장으로 류현진이 나왔는데 당시 1순위를 지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롯데가 Pass해서 2순위 지명권을 가진 한화가 얼씨구나하고 그를 선택해 입단 시켰습니다. 그리고 1차 지명 유원상과 2차 1번 지명자 류현진, 그들이 동시에 입단해서 이거저거 점검을 받아봤는데 그냥 며칠만에 답이 나와버렸습니다.


 


류현진 선수가 이듬해 동계훈련 때 물건이 나올거 같다라는 현장 코칭스텝의 기대를 받았고 무지 성장해서 그 때쯤 두각을 드러냈다, 이렇게들 알고 있는데 사실 마무리 훈련 때부터 극찬을 받았고 거의 입단과 동시에 현장코칭스텝에겐 굉장히 큰 기대를 받은 선수였습니다.


 



 


송진우 선수.


 


깔끔히 또 완전하게 자기 할 일을 끝내고 퇴근하는 능력 있는 직장인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후배들이 먼저 다가와서 물어보지 않는 이상 먼저 접근해서 이거저거 알려주고 하는 선수가 아니였습니다. 본인의 고교후배 세광고 출신 박정진 제외하고는 옆에서 끼고 노하우를 듬뿍 전수해주고 그런 일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사실 연배도 있고 팀에서 거물인데 후배투수들 자주 지도하고 가르쳐주고 하면 팀에 투수코치들도 있는데 모양새가 충청도 말로 저~기 헐 수도 있죠. 원래 본인 스타일도 그렇고 또 그렇게 처신했어야했던 게 맞는 상황일 수도 있었죠.


 



 


구대성 선수.


 


구대성은 류현진 선수를 아주 많이 이뻐하고 결정적으로 체인지업을 전수해줬기에 류현진의 성장에 지분이 있는 사람인 건 확실합니다. 그런데 류현진은 체인지업 배우기 전에도 아주 잘했거든요. 좋은 커브가 있었고 그 이전에 품질 좋은 직구를 아주 잘 잘 제구해서 던질 수 있는 류현진 선수는 구대성에게 배우기 전에도 리그를 초토화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뭐, 구대성에게 배운 체인지업을 날 더워지면서부터 아주 요긴하게 써먹은 건 사실이고 커리어 내내 직구 다음의 무기로 써먹은 것도 사실인데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걸 단순히 구대성의 공이라고 보긴 좀 무리가 있어요.


 


자, 류현진선수는 고교시절에 팜볼을 던졌던 선수입니다, 체인지업과 유사한 구종으로 넓게 봐서는 체인지업의 범주에 들어가는 구종이지요. 그리고 애초에 구대성이 알려준 체인지업의 그립이 정통적인 쓰리핑거 세손가락 체인지업이거나 OK볼이라고 불리우는 교과서적 써클체인지업이 아니라 팜볼과 써클체인지업을 합친 그립이었는데 고교시절부터 팜볼을 던져온 류현진은 그 토대위에서 배워 바로 실전에서 써먹은 거지요.


 


류현진은 고교시절 커브와 직구만 던졌다고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팜볼 던진 걸 모르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류현진은 시즌 중에 체인지업을 배워 바로 써먹은 것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는 걸 넘어서서 구종 습득이란게 고스톱쳐서 돈따는 것처럼 쉬운게 아닌데 류현진은 바로 습득을 했다, 이야 쟤 정말 재능이 대단하구나, 이렇게들 칭찬을 하고.


 


새로운 구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문제. 동계훈련 기간에 연습 꾸준히 해도 개막 후 실전에서 재미볼 수 있을 정도로 익혀 체화 시키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류현진 자신도 한참 전부터 슬라이더를 배웠지만 아직 그의 슬라이더 완성도는 낮은 편이지요. 구종을 완전히 소화해서 장착시키는 게 참 어려운 거고 그게 야구의 상식인데 시즌 중간에 생전 던져본 적도 없는 체인지업을 바로 배워서 써먹었다?, 그걸로 리그를 재패했다?


 


그렇게 써내려 가면 류현진의 재능을 더 칭찬하고 그를 추켜세울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과 어긋나는 일이죠. 원래 고교시절 팜볼을 던지며 타이밍 뺏는 공인 오프스피드 구종을 던지는 감각과 요령이 있었던 선수고 그러니 그렇게 빨리 팜볼과 써클체인지업의 교배로 탄생한 구종을 자신의 자산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사실 야구를 떠나서 그렇죠. 누구든 많이 해왔던 것, 잘해왔던 것을 계속 잘하기 쉬운 겁니다. 체인지업과 유사한 팜볼을 많이 던졌고 그랬기에 체인지업을 금방 배워 자기것으로 만든 거지, 고교시절에 직구와 커브만 던진 투수였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인간은 누구든 맥락과 과정 안에서 노는 존재들이고 류현진의 체인지업 습득 뒤엔 그런 맥락이 있었지요.


 


사실 구대성의 공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구대성이 후배 중 류현진 하나만 지도한게 아니고 많이들 조언하고 가르쳐줬는데 배워 대박 난 사람은 류현진 딱 하나이고 세상에 체인지업 그립을 가르쳐줄 사람이 구대성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대성불패 제자 류현진으로 이야기하는 건 좀 어폐가 있습니다.


 




 


이진영 선생님의 말씀대로 야구는 원래 잘 하는 사람이 잘 하는 것, 원래 야구 아주 잘 하는 선수가 들어와서 자기 야구 실력을 발휘했을 뿐인데 그 선수의 성공을 말하는데 저 선배들의 존재를 원인으로 단정짓는다면 동의할 수 없겠네요.


 


그리고…


 


굳이 팀 선배들 중에 류현진 대박의 촉매제가 된 선수를 찾아보자면 저들이 아니고 따로 있습니다.


 


바로 신경현이라는 포수.


 



 


자 다음 시간엔 신경현이란 선수에 대해서 그리고 포수의 리드에 대해서 거기에 이상훈과 최동원, 투수에게 중요한 중심이동 등에 대해서 좀 이야기 해볼텐데요.


 




 


여기선 일단 그 이야기를 좀 하면서 정리를 해봐야할 거 같네요. 제가 그렇게 류현진선수가 원래 난 놈이었고 동산고 시절 어느 정도 완성된 괴물이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그렇게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면서 입단하지 못했냐고 질문하실 분들이 많으실겁니다. 전 그 질문에 답을 해야겠죠.


 


리틀야구, 동산중, 동산고 시절 고2때 수술과 재활로 인한 공백기를 제외하고 그는 항상 전국구였고 탑에서 놀던 선수였는데 그의 실력과 잠재력을 모두가 보지 못했던 건 아닙니다.


 


사실 주류언론이야 아마야구 제대로 보고 조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그렇지 팬들 사이에선 류현진이 꽤나 이야기 되었던 선수죠. 그리고 언론에서도 아주 다루지 않았던 건 아니고 정확히 말하자면 실력과 잠재력에 비해 언론의 조명을 못 받은 선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대로 그의 실력과 잠재력을 평가 받지 못했냐면요.


 


일단 구속의 문제.


 


동기생 한기주는 3학년시절 154까지 때려주는데 류현진은 그에 비해 140대중반에 불과(?)한 구속을 보여줬습니다. 일단 아마야구 선수 관련해서 언론은 구속에 주목을 하고 화끈한 구속을 보여주는 선수를 좋아합니다. 구속 좋은 선수가 프로입문해서 성공할 확률이 아주 높기도 한게 사실이라... 화끈하게 구속이 나와야 기사거리가 되고 그 기사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구속 확 나오는 선수를 좋아하지요.


 


그러니 3학년때 아마야구 시즌 개막하기도 전에 이미 캠프에서 154까지 찍어준 한기주에게 언론의 관심이 편향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정말 한기주보다 단순 구속만이 아니라 구위에서 류현진이 쳐졌던건 사실이지요. 하지만 프로입문후 바로 류현진이 중심이동에 눈을 뜨게 되면서 구위에서도 역전 내지 비등하게 가게 되죠 . 그러나 그건 프로 와서 이야기고 아마때는 공의 구위나 속도에서 한기주가 월등했던건 사실입니다.


 


두 번째, 계약금 문제.


 


언론에선 계약금 푸짐하게 받은 선수를 좋아하죠. 기사거리, 화제거리가 되니까요. 그리고 단순히 많이 받는 걸 떠나 프로구단과 줄다리기하는 과정을 보여주면 언론은 더 좋아합니다. 그래야 경마식 보도가 가능하니.


 


류현진의 계약금은 연봉 포함 2억5천. 적은 돈은 아니지만 10억 받은 한기주에 비해 초라하죠. 더구나 같이 한화에 입단한 유승안 감독의 아들 유원상은 5억이상 챙겼으니 더 초라할 수밖에요.


 


류현진이 도장 찍은 계약금 2억5천이 어떻게 책정된 금액이냐면,


 


한화구단이 먼저 류현진 부모님께 제시한게 2억5천이었습니다. 류현진이 실력과 잠재력에 준하는 조명을 받지 못한 선수라서 그렇지 그도 거물이었고 그러니 구단도 첫 제시액을 저렇게 부른 겁니다.


 


자 협상이란게 그렇죠. 내가 3억 받아야겠다 싶은데 처음부터 3억 부르는 사람 없고 2억 줘야겠다, 2억밖에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처음부터 2억 제시하는 경우 없습니다. 다 밀당을 전제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적정선보다 낮게 또 높게 부르고 시작해서 거기서 접점을 찾아가곤 하는 게 프로야구 계약금 협상이고 연봉 협상입니다.


 


그런데 바로 구단의 제시에 류현진선수 부모님이 그렇게 합시다, 하면서 도장을 찍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도 아들과 부모인 자신들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말들이 많고 악성루머가 많아, 돈 밝힌다는 사람들의 뒷다마가 걱정되어 그냥 구단의 첫 제시액에 도장을 찍었던 것이죠, 당시 구단도 참 많이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리 쉽사리 계약이 이루어질지 몰랐던 거죠.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옵션 계약을 했습니다. 첫해에 1승당 천만원씩 주기로 한다는 옵션.


 


우리의 난놈 류현진은 첫해에 18승을 하며 옵션액수 1억8천까지해서 총 4억3천을 주머니에 녹입니다. 원래 그런 선수죠. 계약금 이야기 듣고 류현진 선수 본인에게 “현진아 미안하다, 정말 너무 미안하다”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류현진 선수는 “아니에요” ,“형 괜찮아요, 그러지 마세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랬던 류현진이 자신의 실력으로 네 장 이상 챙겨간 셈이죠.


 


06년 시즌 개막할 때, 스포츠 서울인가요? 올해 신인왕 후보들로 한기주와 유원상, 나승현을 이야기하면서 그 선수들 한 자리에 모아놓고 사진찍은 채 기사를 써서 내보냈는데 류현진은 그 자리에 없더군요. 기자들이 아마야구에 대해서 잘 알리도 없고 선수들의 잠재력까지 그들에게 알바도 아니고 그냥 계약금 순서대로 신인왕 후보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리 된 것이죠. 원래 그렇습니다. 으레 계약금 순위대로 신인왕 후보를 산정해서 기사로 쓰죠.


 


구속도 아쉽고 계약금도 그닥 많이 받지 못하고 이러니 류현진은 그 선수가 당장 가진 기량과, 기량의 완성도에 비해 언론의 관심과 조명을 받지 못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속은 150이 안 나오지, 계약금도 그리 많이 받지 못했는데 구단과 밀고 당기는 과정과 갈등도 없었지... 이래저래 과소평가 받기 쉬운 상황이었죠.


 


자 계약금 이야기 나왔으니 말입니다. 계약금 관련해서 이바닥 관행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이 장을 마칠까요? 보통 계약금 협상이 끝나면 계약금의 절반을 바로 줍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반은 어떻게? 첫 시즌 끝나고 주던가 경우에 따라서 첫시즌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주기도 합니다.


 


저기 위에서 말한 한기주는 계약금 10억을 이례적으로 말입니다, 한큐에 챙겨갑니다. 이면으로다가 풀타임 7년 후 해외진출을 구장이 보장한다는 조항까지 써 넣어서 계약을 했지요. 그만큼 당시 한기주가 거물이긴 했습니다. 한기주 선수 관련해서도 몇 번 더 이야기할 장이 있을텐데 한기주뿐만이 아니라 윤석민, 김광현, 유원상, 나승현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아마시절, 프로시절 이래저래 류현진과 부딪히고 엮였던 선수들이고 아마 때부터 참 많이도 봐왔던 선수들인데 저들 이야기도 하도록 하지요. 사실 류현진을 이야기하는데 저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PS. 제 야구 지식이 궁금하신 분들은 이 책 한 번 읽어보시길.


 



 


이제는 프런트의 총체적인 역량대결로 가는 프로야구판에서 자신만의 능력과 자신만의 진한색으로 치열하게 싸웠던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백골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