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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9. 02. 수요일

정체불명 옛날엔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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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신문광고란]


 

노비 관련 참고 서적을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클로텔 제퍼슨의 딸들'(Clotel ; The President's Daughter)이란 책을 접했었다. 이 소설은 1852년 여류소설가 해리엇 비처 스토의 '엉클 톰스케빈'이 나온 지 일 년 뒤인 1853년 도망 노예 출신인 윌리엄 웰스 브라운에 의해 쓰여진 최초의 흑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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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여러 소문과 자신이 직접 겪었던 실화들을 소설 형태로 엮은 이 책엔 충격적인 일화들이 많이 실려져 있고, 또한 그 당시의 신문 기사들도 실려져 있었다. 특히 클로텔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노예 소녀를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딸로 그려내고 있어서 그 당시 미국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제퍼슨은 자신의 딸들을 보살피기 위해 처갓집에서 상속받은 14세의 흑인 노예 소녀 샐리 헤밍스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 소녀 노예와 관계를 맺었으며 그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한다. 당시 그러한 루머가 돌았지만 계속 부인을 했었던 그는 죽기 전에 그들을 해방시켜 주었다고 한다.

 

국부로 추앙받던 그를 흠집 내기 위한 루머로만 여겨졌던 이 이야기는, 1998년 샐리 헤밍스의 막내 아들 이스턴 해밍스의 후손과 제퍼슨가의 DNA검사를 통해 제퍼슨의 아들임이 밝혀졌고 그로인해 나머지 4명도 제퍼슨의 자녀일 가능성이 있는 걸로 추측이 된다고 했다. 만민평등의 기치아래 독립선언서에 기초한 미국 정신의 아버지라는 제퍼슨 그도 한 개인으로 보자면 당시의 흔하디 흔한 노예 소유주 중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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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743~1826)


남북 전쟁 직전 노예들의 거래가는 약 $778정도였다고 하는데 이 소설 속에 보면 보통 경매가가 $500 단위부터 시작이 되고 있었다. 당시 그 가격은 노새 한 마리 정도의 값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가치로 환산을 하자면 약 $14,400정도라나.


그러나 가격의 차등이 있었으니 혼혈녀 중에서도 백인에 가까우며, 용모가 아름다웠던 여인들은 더 높은 가격에 매매가 되었으며, 또 노예 중개상인들은 노예를 사서 좀 더 젊게 보이도록 꾸미거나 치장을 해서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자 애를 썼으며, 때론 노예를 대여도 했다고 하니 아메리카 흑인 노예들을 그들이 어떻게 취급을 했는지 익히 짐작 할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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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예 12년> 중 한장면 


당시 배를 타고 긴 여행을 하는 중에 도박판이 벌어져 가지고 있던 현금이 다 털리면, 어떤 백인 노예주들은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승선했던 자신의 노예를, 시세가의 반액 정도를 걸고 계속 노름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노예의 입장에서 보면 자고 나니 주인이 바뀌어져 있는 것이 되겠고...


윌리엄이 직접 겪은 경험담을 하나 소개하도록 하겠다. 그는 증기선에 한동안 급사로 대여가 되었었다고 했다. 그의 새 주인은 노예 상인인 제임스 워커였는데, 윌리엄은 그가 뉴올리언스의 노예 시장으로 노예들을 끌고 가는 일을 도왔다고 했다. 그 덕분에 윌리엄은 다른 노예들보다 더 노예제도의 다양한 측면을 볼 기회가 많았었다.

 


아이와 어머니를 떼어내다니!

하나님의 자녀를 사고 팔다니!

미국인들의 시장에 가면

사람을 짐승처럼 교환한단다.


존 그린리프 휘티어 - <훈계>



새 주인인 제임스 워커는 악질 투기꾼이었는데 노예 매매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어느 날 워커는 눈먼 아이가 딸린 여자 노예를 샀다고 했다. 물론 워커가 보기에 눈먼 아이는 아무 쓸모가 없었겠지만, 그 전 주인이 어미와 아이를 떼놓고 팔수가 없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모자를 함께 샀다고 한다. 당연히 어린 아이가 딸린 그 여인은 다른 노예들과 보조를 맞추기가 힘이 들었을 것이고 전체 이동이 그 모자로 인해 지체가 되었다.

 

그들이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고 출발하기 전, 워커는 눈먼 아이를 엄마에게서 떼 내어 여관주인에게 단 돈 몇 달러에 팔아버렸다. 불쌍한 여인은 아들과 헤어지게 되자 미쳐 날뛰었고 한동안 아무도 그녀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는데, 워커는 사슬로 그녀의 사지를 꽁꽁 묶어 다른 노예들과 연결을 시킨 후에 억지로 끌고 갔다고 한다.


이교도에게 성경을 보내자.

그들의 굶주린 영혼을 돌보자.

서둘러라. 힘을 모아라.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을 보내자.

그리고 글을 배우겠다는

건방진 검둥이는 채찍으로 혼내 주리.


당시 감리교 교회는 약22만 명의 노예를, 침례교 교회는 22만 6천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성공회 교회는 8만 8천명을, 장로교는 7만 7천명을 그 외 교파가 5만 명을 모두 합쳐 66만 여명의 노예를 경건하고 민주적인 공화국의 그리스도 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래도 도망 노예들을 숨겨주고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한 선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정통(?) 개신교단이 아닌 퀘이커 교도들이었고, 더러는 남부에도 노예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퀘이커 교도는 함석헌옹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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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1901~1989)


선교 대국의 꿈을 꾸고 있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개신교! 그들은 왜 그들의 꿈의 모델인 팍스아메리카가 인디언들을 속이고, 노예들의 등짝에 난 채찍 자욱으로 이루어졌다고 증거 하지 않을까? 십계명에 분명히 ‘네 이웃에 거짓증거하지 말라’ 즉 거짓말하지 말란 말이야! 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조선으로 가보자. 뭐 우리도 떳떳치는 못하다. 당시 노예의 정가가 정해졌다고 하나 그 값은 기준이 되었을 뿐이고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노예 방매는 기한(飢寒 : 배고픔과 추위)이 절박하거나 공.사채를 적납한 경우에 관에 알려서 매매허가를 받도록 하고 만일 주색이나 박혁(博奕 : 장기 바둑 도박의 뜻으로도 쓰임)사유로 방매한 자는 관에서 몰수한다. 또 사사로이 합의하여 매매한 자는 노비와 그 값을 모두 관에서 몰수한다. 또 전택(田宅 : 논밭과 집)도 이와 같다.


[경국대전]


하지만 조선 전기에는 노비는 토지보다 매매가 자유롭고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게 기존의 통설적 견해인데 말하자면 토지보다 노비가 더욱 재산적 가치가 높았다는 것이다. 그럼 노비들의 몸 값은 얼마나 되었을까? 북한에서 펼쳐낸 력사 이야기엔 고려 노비들의 몸 값이 말 한 필의 삼분지 일의 값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는데 공식적인 기록으로 보긴 힘들었고 조선대에 이르러 공식적인 노비의 가격이 기록(경국대전)에 남아있다.

 

16세에서 50세의 노비들은 남녀 불문하고 저화 4,000장으로 그 이상과 그 이하는 3,000장으로 거래가가 정해져 있었다. 저화1장의 가치가 쌀 한 되의 가격이라 했으니 요즘 돈으로 환산을 해보니 약 1,800만원이다. 요즘의 말 한 필의 가격이 국산 경주마는 800만원에서 6,000만원사이에서 가격이 형성이 되어 있고, 수입 경주마는 보통 3,4천만 원대라 한다. 좀더 특별한 케이스라면 정윤회가 딸을 위해 직접 구입했다는 독일산 경주마들은 필당 수억 원을 호가하는 모양인데 그런 건 예외로 쳐야겠지. 그 당시 저화 4,000장으로 말 한필을 구입 했다는데 대충 계산을 해보면 경주마 중,하급 정도의 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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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발견이 된 매매문서는 거의 16세기의 것으로 노비 매매 건이 50건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1593(선조26년)-1599선조(32년)사이 임진난 후에 약 30건으로 집중적인 거래가 있었는데 방매사유가 난중 생계비, 난중 장례비, 사채등 주로 생계곤란으로 노비를 싼 값에 방매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80년대 22세 노비가 목면 42필에 거래가 되었는데 1593년 28세 노비가 목면 25필에 거래가 되었다니 비교가 되지 않는가?

 

여러 양반 댁의 분재기(分財記 : 자손이나 가족에게 나누어 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에 보면 자녀들에게 상속을 하면서 노비들도 한 두 명씩 나누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그렇게 분할을 해야 통제가 가능하고 또 만일 도망을 갈 경우엔 추쇄가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와는 다르지만 상전 아씨가 혼인을 하면 어린 계집종이 따라가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 상전 아씨야 시집가는 것이지만 따라간 그 어린 계집종은 그야말로 부모들과 생이별을 하는 경우가 되겠다.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노비들이라고 부모 자식 간의 애틋함이 없었겠는가? 내일이면 먼 길 떠날 어린 딸, 어린 것의 잠든 머리맡에서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그 딸의 얼굴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며 애끓는 마음을 혼자 달랬을, 아니 피눈물을 흘렸을 어느 비녀의 아픔이 문득 내 가슴을 치밀어 오르게 한다.

 

그러나 극히 드물지만 어떤 양반들은 비록 노비지만 가족들이 흩어지지 않게 상속 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하고, 설령 상속을 할지라도 분할하는 것을 금했다고 하니 그나마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조그마한 위안이 된다.






편집부 주

 


독투의 글이 3회 이상 메인 기사로 채택된 '옛날엔소녀' 님께는 가카의 귓구녕을 뚫어 드리기 위한 본지의 소수정예 이비인후과 블로그인 '300'의 개설권한이 생성되었습니다. 


조만간 필진 전용 삼겹살 테러식장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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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 옛날엔소녀


편집: 딴지일보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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