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102. 9. 10. 월요일

백골프


 


 


묵자 그는 누구인가?


 



 


 


자 이제 묵자란 인물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대략의 생몰연대, 출생지, 역사에 그가 남긴 흔적등 그의 생애, 그리고 누구의 목소리르 대변했고 어떤 이들의 자의식을 대표했는지등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일단 묵자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선 말씀드리고 싶네요. 통일제국 진이전, 즉 흔히 우리가 말하는 先秦시대 인물에 대해선 우선 역사의 아버지 사마천의 사기를 참고할 수밖에 없는데요, 사마천선생님은 공자에 대해선 따로 공자세가를 지어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중니제자열전까지 따로 써서 제자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해 두었는데 묵자에 대해선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맹자와 순자에 묻어가는 식으로 해서 끝머리에 살짝 묵자에 대해 간략히 적어 둔 것이 전부입니다, 겨우 24자


 


“묵적은 송나라의 大夫로서 나라의 방어를 잘하였고 절용을 주장하였다, 어떤 이는 공자와 같은 때 사람이라하고 어떤 이는 그보다 뒤의 사람이라 한다.”


 


한비자는 묵자의 사상이 유가의 사상과 더불어 양대현학으로 당대의 사상계를 지배했다고 했고 여불위가 펴낸 춘추전국시대 사상의 백과사전 여씨춘추에서는 공자와 묵자의 제자와 무리들이 천하에 가득찼다고 했으며 묵자의 사상을 극렬하게 공격했던 맹자는 양주와 묵자의 철학에 천하에 가득찼으니 천하의 이론은 양주에게로 가지 않으면 묵적에게로 간다고 할 정도로 묵자의 사상은 대흥행을 했는데요. 그러나 그 사상을 만든 묵자는 사마천의 사기에선 겨우 24글자로 서술될 뿐이고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하니 그의 정확한 이름이 뭔지 최소한 성이 뭔지, 정확히 언제 태어났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명확히 합의된 바가 없습니다. 학자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언제 태어났는지 묵자의 墨이 과연 그의 성이 맞는지 말들이 엇갈리죠. 거기다 이름이 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흔히들 적(翟)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맞는지도 학자들마다 이견이 많습니다. 성도 몰라요 이름도 몰라요 이렇게 묵자란 한 개인에 대해서 전해지는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묵자라는 사람의 기록이 분명하게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앞서 말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통일제국 진한이 들어서면서 묵자의 사상과 무리들이 절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유가사상이 줄곧 동아시아 사회를 지배했는데 유가를 가장 극렬하게 공격한 묵자사상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기도 했었고요. 그래서 우리가 묵자라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선 알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습니다. 그렇다고 논어의 공자처럼 그의 텍스트를 읽는다해도 어떤 묵자라는 사람의 인간적인 개성이나 특징이 일관성이 있게 그려지는 것도 아니기에 더더욱 묵자란 사람, 개인에 대해서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굳이 묵자란 한 개인에 대해서 꼭 명쾌하게 알아야할 이유가 있을까 싶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묵자를 그저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는게 필요하고 그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면 묵자란 인간의 자세한 프로필이 그닥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의 이견이 많지만 그의 성으로 알려진 墨이라는 글자 자체가 어떤 집단을 나타내고 드러내는 글자입니다. 어떤 집단인지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특수한 집단을 대표하는 것이라고들 그랬는데요 묵자란 사람은 사실 어떤 특정한 한 개인이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어떤 집단의 대표자, 내지 집단의 의견을 수렴하고 종합한 자라고 보는 것이 좋을거 같습니다


 


자 학자들마다 이 墨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그의 출신과 그가 대변하는 계층 등을 많이들 설명하려고 해왔는데 .


 


어떤 학자는 피지배층으로 노동자 계층이다. 육체노동을 하다보니 얼굴이 검어서 墨子라 했다, 또 어떤 학자는 그의 무리들이 검은 옷을 입어서 묵자라했다고 합니다., 묵자는 군사집단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고 학파(school)로서 성격도 가지고 있고 종교집단으로서 성격도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 사제들을 보면 검은 옷을 많이 입고 스님들은 같은 경우는 회색등을 입죠. 종교인들이 어둡고 단조로운 색등을 많이 입는데 종교집단인 이들이 검은 옷을 입고 다녀서 그렇게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墨이라는 글자를 형벌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이도 있는데 당시에 묵형이란게 있었다고 합니다, 얼굴에 먹물을 뜨는 묵형이라는 형벌이 당시에 있었는데 형벌을 받은 집단 또는 계층에서 墨이라는 글자가 기원했고 그래서 묵자라 칭해지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墨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묵자와 그의 무리들을 설명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각자 묵의 기원에 대해서 시각을 달리하지만 하층민 내지 피지배층, 천인계층의 사람이란 것에선 어느 정도 일치가 됩니다. 학자들 대부분이 묵자는 천인계층이고 묵자 무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의 자의식을 가진 무리라는 것에 동의를 하는데요. 힘들게 노동하고 지배층들의 가혹한 형벌에 노출되어 있었고 혈연집단의 울타리밖으로 나와 집단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지배층내지 귀족층은 절대 아니고 결국 신분질서 밑에 위치한 사람들과 연관이 되고 묵자의 墨은 그러한 점을 잘 대변해준다는 것이죠.


 


묵자가 피지배층, 천인계층출신이라는 것은 묵자 텍스트 곳곳에서 보이는데 예를 좀 들자면 묵자가 초나라로 가서 초나라 군주를 만나고 초나라 왕의 신하 목하에게 자기 주장을 펼치니 목하는 기뻐하면서도 당신의 주장은 훌륭하지만 천한 사람의 것이라 왕께서 쓰지 않을것이라 말했고요, 묵자 스스로 자신을 북방의 천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천민출신임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묵자는 피지배층, 하층민, 천민출신이었는데 학자들 모두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하층민, 피지배층, 천인계층이 아니라 수공업에 종사하던 사람들 거기에 무기를 만들고 성을 쌓고 지키는 무인들로 이루어졌다고들 대략 동의를 하지요. 춘추전국시대 여러 열국내에서 어떤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거나 참여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을 國人이라고 하는데 국인은 나름 지배층이고 문화의 수혜를 받은 사람들이며 혈연집단을 뒷배경으로 하던 사람들인데 묵자 무리는 국인이 아니었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 천인 내지 피지배층에서도 수공업자들 거기에 무인들 대략 이렇게 구성된 사람들이 묵자의 무리였 고 묵자는 그 직업계층에서 나온 사람으로 말해도 무리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 직업계층에서 나온 사람은 아닌거 같다는거죠.


 


겸애를 비롯해, 천지, 절용, 절장, 비유, 비명, 상동, 상현 묵자의 사상은 여러 가지 각론들로 구성되어 있고 묵자 텍스트에서 여러 가지 사상과 주장들이 열거 되어 있는데요. 그런것들을 공자처럼 묵자라는 한 개인이 그의 통찰력과 창의성 내지 개인의 문제의식으로 만들어낸거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묵자는 분명 묵가라는 무리의 종사이고 스승이 맞습니다. 유가에서 공자처럼요. 하지만 仁이라는 사상을 중심으로 전통문화 내지 관습이었던 禮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지배층 내지 지식인들의 각성 내지 자각에 의한 새로운 정치철학을 혼자의 힘과 개성으로 만들어낸 공자와 달리 묵자는 혼자의 힘으로 겸애를 비롯해 사상체계를 만들어낸거 같지 않다는 것. 그렇다면 묵자텍스트에 사상들은 누가 만들어낸 것이며 묵자 개인이 만든게 아니면 묵가 무리에서 묵자가 차지하는 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에 대답을 해야하고요.


 


그런데 앞서 이미 답변을 했죠, 묵자라는 사람 성과 이름도 불분명한데 墨은 성이 아니라 그 글자가 묵자 무리의 기원과 묵자 무리를 이루는 사람들의 직업과 계층을 설명해준다고요. 묵자는요 어떤 특수한 한 개인이기전에 특정집단과 특정신분계층의 자의식을 대표하는 지도자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그래서 굳이 그 인물이 누구인지 집착하면서 매달린 채 접근하지 않아도 보는 것인데 더 부연해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수공업자, 무인, 거기에 가혹한 삶의 현실에 절망하던 피지배층과 천민들 그들 무리들이 모였고 그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주고받고 그러면서 어떤 합의내지 조율된 의견, 또 거기에서 기초해 사상이 만들어졌고 그들만의 시대정신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묵자텍스트의 사상이 된게 아닌지 그렇다면 묵자라는 사람의 역할내지 위상은 무엇이냐면 그런 과정 내지 합의를 이끌어내고 거기에서 나온 사상을 좀 세련된 언어와 시대정신으로 표현하고 재구성하고, 그 사상과 시대정신을 구현할 조직과 단체를 이끈 어떤 카리스마 내지 리더쉽 강한 인물 내지 수장??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잘 종합편집하고 포장하고 그리고 그 포장된 것을 구현할 조직을 이끈 오야붕??


 


 



 


 


제 생각에 묵자라는 사람의 생몰연대가 분명하지 않고 개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으며 어느 나라 사람인지 말들이 엇갈리는 것은 단순히 통일제국 시대 들어 묵자 무리가 탄압받고 절멸되었기 때문인 것만 같지는 않아요. 묵자라는 사람이 노자나 열자처럼 허구의 인물은 아닐지라도 공자, 맹자, 장자, 순자, 한비자처럼 자신 한사람의 문제의식과 통찰력으로 사상 하나를 뚝딱 만들어낸 사상가가 아니라 하층민들의 여론과 불만, 절박한 목소리들을 잘 조합되고 수렴되어지는 과정이 있었고 그 과정을 만들어낸 무리의 수장 내지 리더정도에 그쳤기에 묵자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나 전해지는 바가 적은게 아닌지 필자만의 가설이지만 사실 묵자 한 사람이 독창적으로 묵자 텍스트에 사상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의견은 심심치 않게 제기 되어 왔습니다, 그로 인해 묵자라는 사람의 기록이 적게 전해지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일은 아직 없었지만요.


 


사실 묵자라는 텍스트를 찬찬히 읽어보면 갑론을박 내지 여러 말들이 오가는 과정하에 합의된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줍니다, 상동편이라는 편에서 그것이 보이고 경설, 대취, 소취등 후기 묵가들이 남긴 묵자텍스트의 부분을 보면 어떻게 합의하고 결론을 도출해내고 서로간의 의견의 차이를 두고 조율해 낼 것인지를 가지고 한 고민의 흔적 내지 그것들에 대한 체계적인 방법 내지 대안제시들을 분명히 보이고 있고요.


 


무엇보다 묵자텍스트를 보면 모아지고 수렴되고 그 과정에서 합의된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이요, 겸애를 설명드릴 때를 기억하시면 되겠는데 "최소한의 무엇무엇 보장" 내지 "이런 저런 나쁜짓과 모순에 대한 시정"에 대한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문제 상황에 대해 토론합니다 그리고 합의를 도출해내는 과정을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그 합의 내지 결론은 우리 최소한 이것만은 지키자 그리고 이런 나쁜 짓만은 하지 말자는 식으로 귀결되기 쉽습니다, 어떤 것을 해보자, 어떤 청사진을 만들어놓고 추진해보자고 식의 의견과 결론이전에 우선 최소한~~의 무엇 무엇은 보장하자, 이것만큼은 지키자, 이것만큼은 우리 하지 말자는 식의 의견과 결론이 서로 동의하고 합의하기 쉽지 않을까요? 묵자 텍스트를 읽어가면 정말 보장해야할 최소한의 무엇, 그리고 하지 말아야할 네거티브한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정말 여러 사람이 모여 갑론을박을 하는 와중에 합의된 결론이라는 냄새가 아주 많이 납니다.


 


그리고 묵자텍스트의 사상이 전제하고 있는 것이 사람은 저마다의 몫이 있고 대등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이 모였으면 그 사람들 의견의 합의되는 과정이 소수에 의해서 리드되고 합의의 결론이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 하는 것이 되면 안되겠죠, 처음부터 합의에 참여한 사람들마다 대등한 지분을 가졌으니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최대한 잘 조화되어 합의가 되어야겠죠. 대등한 몫과 지분을 가진 조합원들의 회의 내지 대등한 주식을 가진 회사의 주주회의에서 소수가 또는 한 두사람이 일방적으로 이끌고 독선적으로 규정과 규칙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할 것이고 묵자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기초인데요, 묵자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몫과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그것을 전제한 채 자신의 사상을 폅니다.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합의를 통해 만들어낸 사상이 묵자 텍스트의 사상이라고 전 생각을 하구요.( 몫과 지분은 주로 물질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야하는 있어야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 그리고 일한 사람이 받고 챙겨할 몫. 몫, 몫 그 몫 이야기가 많이도 나오는데 역시나 노동자들의 자의식이 담긴 사상텍스트라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논어를 보면 그런 냄새가 납니다, 아니 냄새나 심증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설득력 있게 묵자사상 내지 철학이 한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의견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주장할만한 근거들이 논어에 실려 있습니다. 아니 왜 뜬금 없이 묵자 이야기를 하다가 공자의 논어 이야기 하냐고요? 앞서 제가 말씀 드렸죠. 이렇다라고 말한 선발주자인 공자의 사상에 대해 그건 아니다, 이렇다가 아니라 저렇다라고 말하면서 나온 것이 묵자와 묵자 사상이라고요. 공자 사상에 반대하고 또 공자 사상의 약점과 한계에 대해 보완하고자 나온 사상이 바로 묵자사상인데 논어에 이미 공자 사상의 반대 내지 한계에 대한 지적이 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냐면 바로 제자들에 의해서입니다.


 


논어라는 텍스트 말 그대로 論하고 語한 것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論하는 것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 논어에서 공자는 제자들과 더불어서 많이 논합니다, 그리고 語하는 것 역시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語는 흔히 말씀 어라고 알고 있어 말씀 언(言)과 잘 구별을 못하는데 영어로 reply의 뉘앙스가 있습니다, 즉 먼저 입을 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질문이나 주장에 응해서 답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논어를 보면 제자들이 말하고 공자가 대꾸해서 말하고 아니면 공자가 말하고 거기에 제자들이 대꾸해서 말을 합니다. 공자 자신부터가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고 자신을 자극하고 일깨워주기를 바랬지요, 좋은 질문,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기를 원했는데 자신의 수제자이지만 안연같은 경우 스승의 말에 이런 저런 반응을 하지 않고 묵묵히 따르기만 해 그것이 실망스러웠다고 지적할 정도였으니 공자는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수해서 주입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적극적인 쌍뱡한 커뮤니케이션을 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에 논어에 아주 잘 드러나죠. 논어는 사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텍스트 공동체의 어록집입니다.


 


자 논어를 보면 단순히 스승이 말하고 제자들이 알았어요하며 답하는게 아니라 반대의견을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스승과 다른 자신만의 생각을 말하기도 하는데 재밌는건 단순한 반대의견 내지 스승과 다른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어떤 뚜렷한 자신의 사상노선 내지 철학에 기초해서 스승의 의견에 반대 내지 다른 의견을 내보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표적인 인물이 자로인데, 자로 아니고도 자공, 염유, 재아, 번지, 자장등이 있고 이들은 안연, 민자건, 증자, 자유, 자하와는 상당히 다른 색깔의 인물들입니다. 전자의 인물이 공자 문하 야당이라고 하면 후자 문하 학생들은 공자 문하 여당이라고 해야할까요? 공자의 제자들을 거칠게 좌와 우로 양분이 되는데 야당쪽 제자들은 여당쪽 제자들과 다르게 공자와 다른 생각 내지 사상, 노선을 가진 인물들로서 단순히 공자의 말에 no만 하던 사람들이 아니라 뭔가 뚜렷히 공자 사상과 다른 사상으로 클 씨앗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인격수양보다는 제도, 물적토대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현실 정치에 참여해서 적지 않게 수완을 보였던 사람들. 텍스트내에서 적지 않게 공자에 반론을 펴고 힘겨루기를 물밑에서 했죠. 자공 같은 경우 어떤 의식에 쓰이는 희생양을 낭비라 생각해서 없앨려고 했는데 공자는 너는 그 양을 아까워하느냐 나는 그 예를 아낀다라고 지적했는데 단순히 제사에 쓰이는 양을 추가하고 덜고의 문제가 아니라 둘 사이의 정치적 노선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죠.


 


 


[caption id="attachment_104372" align="aligncenter" width="432" caption="공자"][/caption]


 


 


자 논어는 독보적인 리얼리티를 자랑하는 텍스트입니다, 사마천의 사기만 해도 사마천이라는 한 개인에 의해 각 캐릭터와 인물들이 걸러진채 나오지만 논어는 사기등 다른 동양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동서고금 어떤 고전보다 독보적인 리얼리티를 자랑하며 공자와 제자들이 서로 대화하고 갈등하는 장면들이 생생하고 리얼하게 담겨져 있는데 그런 논어라는 텍스트는 공자의 말과 사상 그리고 기타등등 이런식으로 읽고 파악해서 될 책이 아닙니다. 제자들 역시 뚜렷한 색을 가진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며 조연 이상의 조연이고 당대 정치 현실에선 공자보다 더 인정을 받기도 했고요 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그들은 공자 사후 벌어질 사상의 분기와 분화, 제자백가. 백가쟁명의 징후들을 보여주는데 가령 자로는 묵자 coming soon 안연은 장자 coming soon 자공은 종횡가 coming soon 재아는 순자 coming soon….. 이렇게 그들의 발언을 보면요 공자 후발주자 사상가들의 예고편으로 읽혀질 여지가 상당합니다.


 


자 이렇게 만만치 않은 자기 색을 가진 제자들, 그 제자들을 거칠게 분류하면 여당과 야당으로 분류가 되고 야당쪽에선 제자들의 발언과 노선등을 찬찬히 살펴보면 자로의 사상을 중심으로 뭔가 만들어질 것도 같습니다. 실제 자로는 제자들 사이에서 적지 않게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에게 큰형님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자로를 중심으로해서 공자 left 제자들의 사상이 실제 큰 무리 없이 잘조화될 수도 있을거 같은데 찬찬히 그들의 발언과 발언 하의 정치적인 노선과 사상을 살펴보면서 적지 않게 묵자 사상과 친화성을 보입니다.


 


자 뒤에서요, 묵자 사상의 비조라고 할 수 있는 자로에 대해서 따로 한 장을 할애해서 이야기할 때가 이에 대해서 자세히 논할겁니다 , 논어에 등장하는 자로를 비롯해 야당쪽에선 제자들의 말과 생각에 대해서는 그 때 가서 자세히 논해보고요, 여기선 일단 묵자의 사상은 묵적이라는 한 개인이 만들었다기보다는 어떤 여러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합의의 과정 끝에 나온 거 같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고 그런 징후가 논어에 아주 자세히 또 뚜렷하게 보인다는 것이죠. 물적토대에 대한 관심, 혈연공동체에 대한 미련 접어두기, 생산력 제고와 제도개혁등에 크게 관심을 가지는 제자들 그 제자들 의견이 수렴되면 묵자사상에 근접한 것들이 나오는데 저는 이렇게 묵자 사상이 한 개인에 의해서 뚝딱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의견과 생각이 모아져서 탄생한 것이라 보는것입니다.


 


앞서 묵자의 墨을 가지고 묵자란 인물 그의 출신 계층 그리고 그가 대변하는 계층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여러 썰들에 대해 말씀 드렸는데 전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엉뚱한 생각이지만요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빨간 물감, 노란 물감, 녹색 물감, 파란 물감 모두 섞으면 무슨 색이 나올까요? 여러 색을 물에 던져놓고 섞으면 검은색이 나오죠? 묵자의 墨 말그대로 검다는 것인데 정말 여러 사람의 , 하층민 내지 피지배층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만 혼자가 아닌 아주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의견이 합쳐져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많이 엉뚱하죠??


 


 


 


노나라가 낳은 사상가 묵자


 



 


 


앞서 말씀 드렸듯이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묵자를 송나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묵자 연구자들은 묵자를 송나라 사람이 아닌 노나라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묵자 텍스트만 봐도 그와 그의 무리들이 노나라에 대부분 머물렀으며 그가 발언하고 활동하는 공간적 배경은 노나라로 보입니다. 그런데 노나라인지 송나라인지 그의 출생지 내지 국적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되물을 수 있겠는데요. 네 단적으로 말해 묵자란 사상가의 출생지와 성장한 나라, 그의 활동지역과 반경 중요합니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요. 사실 오늘날 중국만 해도 지역마다 사람들의 기질과 관습, 풍습등이 다른데 통일제국성립이전에 중국은 말할 것도 없었겠죠, 실제 춘추전국시대 지역과 나라에 따라 사상적인 기풍과 학풍이 달랐고 풍습과 기질이 달랐는데 묵자의 사상과 그의 출생지 내지 국적은 분명히 서로 연관 시켜 이야기해야할 것입니다.


 


저는 묵자가 노나라사람이라고 했는데 노나라는 어떤 나라냐면요. 노나라는 원맨쇼를 벌이면서 주왕조를 개창하고 만들어간 주공이 주나라 천자에 의해 봉해진 곳으로 주나라의 선진 문화와 각종 전적등 주나라의 소프트파워의 핵심이 잘 보존된 곳입니다. 그래서 노나라에서 공자가 나올 수 있었던거고 그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주의 문화를 이상으로 하겠다라고 그랬던거지요. 그런데 묵자도 노나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공자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공자의 학문을 버린 이후에도 줄곧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고 이야기할 때 후에 시경과 서경으로 격상되며 동아시아를 지배한 텍스트가 된 시와 서를 자주 인용했는데 시와 서는 주나라 선진문화의 핵심이자 유가의 필수교재로서 묵자 역시 노나라사람이고 노나라에서 공부를 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묵가를 유가와 더불어 동방정학 내지 六藝 정학이라고도 하는데 그의 사상은 철저히 검증된 정통의 학문에서 기초한 사상체계이고 그 뿌리는 주나라에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나라는 노나라인데 동방의 학문? 동방의 정학은 또 무슨 의미에서 한 말일까 갸우뚱하실수도 있겠네요. 단순히 노나라가 당시 열국중에 동쪽에 있어서?? 그건 아닙니다. 정학이면서도 동방의 정학이라고 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음 춘추전국시대 때 동방은 제와 노, 송등을 일컫고 남방은 초, 서방은 秦, 북방은 나중에 한위조로 삼분된 晉을 일컫는데요. 동방의 학풍은 서방과 북방보다는 온건하고 민의 입장을 많이 고려해주는 경향이 있었다고들 말을 합니다, 하지만 서방과 북방, 특히 법가가 꽃을 피운 서방의 진은 철저히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악착같음과 투지가 짙게 배여 있는데 동방의 학문과는 사뭇 대조적이죠.


 


춘추전국시대 지도가 있으면 아무거나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없으면 현대 중국지도를 보셔도 좋습니다. 그럼 왜 동방이 서방, 북방과 다른 학풍과 사상적 기풍을 가졌는지 좀 이해가 가실겁니다.


 


유가와 묵가는 기본적으로 동방의 철학입니다. 원산지가 노나라 바로 산둥반도쪽


 


법가 같은 경우는 서방과 한위조(韓 魏 趙)로 갈라져 삼진으로 일컬어지는 북방에서 꽃을 피웠고 향후 서방에서 열매를 맺었는데 한비자가 바로 韓의 왕자였고 상앙도 魏나라에서 활동하다가 .秦에 가서 대활약을 했죠. 그런데 동방과 서방, 북방의 나라들이 있던 곳을 한번 춘추전국시대 지도에서 찾아 보세요. 차분하게 한번 저들 나라가 있었던 지형을 살펴 보시면여 동방과 서,북방 통치철학의 개성과 그것들 간의 차이가 눈에 보이고 또 이해 되실 수 있을겁니다. 거칠고 단순하지만 쉽게요.


 


노나라쪽은 트였습니다, 산지가 많지 않고 바로 옆의 제, 송, 위(衛)나라로 갈 수 있는 곳이 노나라입니다. 하지만 서방 秦과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로 삼분된 북방 삼진은 다르죠. 진시황의 秦은 위로는 사막 뒤로는 티벳산맥이 길을 막고 있고 그리고 무시무시한 바로 전투민족 융족이 옆에 있습니다.


 


삼진은 태행산을 배경으로 하는데 국토 자체가 울타리식으로 여러 칸막이가 쳐져 있는 모양새입니다. 더구나 태행산엔 융족 못지 않게 싸움에 능한 적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서방과 북방의 두 나라는 막힌 지형에 바로 옆에 무서운 이민족이 득시글합니다. 이러니 인민들이 어디로 도망가거나 삶의 터전을 옮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정부의 효율적인 통제와 체계적인 인민 쥐어짜기가 가능하죠. 그러니 강압적인 통치철학이 먹혔고 억압적이더라도 중앙집권화와 일사불란한 체제 만들기가 쉬웠죠.


 


하지만 동방의 노나라는 그리하기 힘들었습니다. 사실 노나라 근처의 송과 제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언제든 백성은 트인 지형에서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에이 정말 여기서 못살겠네"하고 도망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인민들을 달래고 타일러 보고 겉으로나마 민을 생각하고 피지배층을 위해주는 척이라도 해보자는 정치 철학이 생기기 쉬웠겠죠. 동아시아 최초의 경제학자 관중의 제나라 같은 경우는 부유함을 극대화해 풍요로움으로 사람들을 모았고요. 노나라의 공자는 덕에 의한 온정적인 정치로 사람들을 모으자 했는데 이렇게 동방은 서방과 북방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04373" align="aligncenter" width="450" caption="동방신기"][/caption]


 


 


공자나 맹자 특히 공자의 논어를 읽어보면 거리와 오고감, 왕래등과 관련된 수사들이 많습니다.멀어지다 , 가까워지다, 돌아가다, 흩어지다. 논어 첫장에서도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는 즐거움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말대로 어진 정치를 하면 백성들이 돌아오거나 몰려들것이다라고 말하고 파탄난 국정 상태나 어지러운 국가의 현실을 비관적으로 말할 때는 민들이 흩어진지 오래다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거리나 오고감과 관련된 수사들이 많습니다.


 


공자의 仁이란 것은 결국 가까이 있는 민들을 편안하게 해줘서 딴 곳으로 갈 생각을 가지지 않게 하고 폭정에 지쳐 삶의 터전 버리고 도망간 민들을 돌아오게 하게끔 하는 그런 정치철학이죠. 쉽게 이야기하면 그렇습니다. 공자의 인이란게요. 그리고 묵자의 정치철학 역시 공자와 방법과 수단은 달랐지만 민을 위하는 것이고 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피지배층출신이다보니 더더욱 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상을 말했습니다. 자 이렇게 노나라가 낳은 동방사상들의 개성과 특징은 바로 노나라의 지역 환경과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책이나 대학 수업에서 고대 동아시아 철학과 철학자들을 개관해서 설명할 때 이런 지형들이나 배경들과 함께 말해주면 이해가 쉬울텐데 그런 점들이 언급이 안되어서 아쉬운데요. 자연환경, 기후, 지형 이런 건 요새도 사람이 극복하기 힘들고 아직도 사람을 어느 정도 지배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철학과 사상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닐테고 인간의 환경과 무관한 게 아닐텐데 유가와 묵가, 법가를 말할 때 저런 공간적인 배경들도 분명 같이 이야기를 해서 이해를 도우는 것이 좋겠죠..


 


자 이렇게 묵가는 노나라, 그리고 동방의 사상가입니다, 기억해두세요.


 


여담


 


묵가와 유가를 동방의 사상이라고 하고, 법가를 서방과 북방의 사상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도가는 어디일까요? 흔히들 춘추시대 사상을 일러 유묵도법(儒墨道法)이라고 개괄하는데 도가의 위치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시작? 아니면 어디에서 꽃을 피웠는지?? 이런 것들이요 전 기본적으로 장자와 노자의 문제의식은 크게 다르다고 보기에 장자와 노자를 하나로 묶어서 도가라고 하는걸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자만을 말한다면 서방 진의 철학입니다. 노자철학을 보면 옳으니까 해야한다, 아니면 선한 동기가 중요하다. 백성들을 위해야 한다. 감싸야한다는 건 조금도 없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지지 않으려는 악착같음이 잘 드러나는 텍스트가 노자고 그 노자 사상은 서방의 秦에서 완성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도덕경은 춘추시대 문헌도 아니고 논어보다 훨씬 늦게 만들어진 책이며 전국말기의 책으로 보이는데 전국말기 그것도 진에서 완성된 것이 아닌가 하며 분명히 노자철학에는 동방의 학문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가의 문제의식과 일치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법가철학이 환영받고 완성된 지역에서 노자철학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법가와 노자는 쌍둥이입니다. 그런데 이란성 쌍둥이죠. 얼핏 보면 조금도 닮아보지 않지만 닮은 부분이 많고 또 같은 부모를 두고 있는 철학. 그 부모가 누구일까요??


 


바로 병가사상 병법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자의 유가 이전에 이미 시작되고 체계화 되었 등장한 것이죠. 공자가 자신의 사상을 완성하고 세상에 주목 받기 이전에 동시대의 손자는 손자병법을 완성시켰고 손자병법이전에 사마양저의 사마병법, 강태공의 육도삼략이 있었는데 병가는 사실상 중국의 첫 번째 사상이며 그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을 이해하는데 있어 반드시 공부해야할 것들입니다. 괜히 중국전문가, 말 그대로 중국연구 관련해서 대가인 헨리키신저가 손자병법을 중국을 이해하는데 있어 기초적인 열쇠로 강조하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병가 사상, 병가 논리의 기본은 무엇일까요?


 


병가텍스트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과 기본자세를 말한 책입니다. 전쟁터에선 우선 살아남아야합니다, 이기든가 지지 않아야합니다. 옳으니까 해야한다? 모두가 더불어 잘살아야한다?? 그런건 알바 아닙니다. 일단 어떻게든 내가 살고 봐야하고 타인을 생각하는 온정주의는 없습니다. 그러니 냉철한 이성이 강조가 되죠. 최대한 냉철해야 살아남고 이길 수 있고 상황을 잘 읽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변화하는 상황을 전제로 합니다. 전쟁터의 상황은 항상 변하고 예측을 불허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원칙과 대전제를 고집할 수 없습니다. 불리함이 유리함으로 유리함이 불리함으로 강함이 약함으로 언제든 상황은 변화고 반대로 변할 수 있고 그 변화의 흐름과 기미를 읽는 냉철함이 필요하고 읽고 난 뒤 유연하게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손자는 물을 극찬했죠. 병법은 물과 같이 잘 변신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물을 극찬한 사상가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바로 상선약수를 말한 노자죠. 노자는 노골적으로 이겨야한다고 말하지 않고 또 전쟁을 실패한 정치행위라고 보는 사람이지만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정확히 말해 궁중에서 왕이 어떻게 해야 오래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는 악착같은 투지가 노자 텍스트에 잘 드러나고 노자 텍스트는 줄곧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냉철한 계산능력과 상황에 대응하는 유연함을 강조합니다. 먼저 그가 말하는 虛가 바로 그것이죠. 비움을 위함 비움이 아닌 상황에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왕으로서의 가져야할 덕목이 바로 虛입니다. 그리고 냉철히 상황을 잘 읽고 난 뒤 물처럼 유연하게 변해야한다고 하는데, 이 모두 병가에서 영향을 받았지요 아니 기원하다시피했지요. 그리고 그것 말고도 노자가 말하는 반대되는 것들끼리의 상호 유전내지 상호공존의 논리 가령 미추와 선악, 화복이 같이 존재 또는 한쪽에서 반대로 변한다는 것 역시 병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흔적입니다.


 


변화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 그리고 첫 번째로 말한 냉철함을 강조하는 것은 법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수시로 법을 바꾸고 갱신해야함을 말합니다. 하나의 원칙을 고집하는 것은 수주대토하는 얼간이나 하는 짓입니다. 실제 수주대토라는 일화는 한비자에서 나오는거지요. 그리고 동기주의나 온정주의가 아닌 냉철함을 말합니다. 그래야 국력을 극대화 하고 신하들을 빈틈 없이 통제할 수 있다고 하죠. 법가 역시 병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법가에서 말하는 법은 누구든지 차별없이 적용되어야하고 그것이 아주 엄정해야한다고 스스로 강조합니다. 군법과 비슷하죠. 역시 병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병법의 기본은 숨기고 내 상황을 위장하고 상대에게 내 허실을 보이지 않는 것인데 노자와 법가 모두 그런 위장과 은폐를 강조합니다. 이란성이지만 어쨋거나 쌍둥이입니다, 병가라는 부모를 둔 형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위장하고 은폐하고 또 의도된 노출을 해서 개인이 아니면 단체나 국가가 살아남을 것인가하는 강한 문제의식. 또 그에 기초한 중국인들의 전략만들기와 전술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합니다. 그래서 중국을 이해하려면 동방의 철학 못지 않게 서방과 북방쪽 사상의 부모가 되며 첫 번째 중국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병가사상을 알아야하죠.


 


여담이 너무 길어졌는데 묵자관련 책이지만 독자들께 춘추전국시대를 좀 깊게 보여드리고 싶어서 논의를 넓혔습니다. 또 동방의 사상과 대조되는 사상들을 알아야 더 뚜렷하게 동방의 사상중 하나인 묵자사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장황하게 나가봤습니다.


 


 


 


戰國시대가 만든 사상가


 


묵자가 산 전국 시대.


 


 



 


 


성도 이름도 분명치 않은 인물 묵자,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흔히 말하는 생몰연대도 확실치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거죠. 그러니 그가 살았던 시기도 분명하게 말하기 힘듭니다. 대락 BC몇년전에 태어나서 몇 년에 죽은거 같다라고 추정해 말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청말엽부터 묵자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는데 묵자가 공자의 후대 사람, 그것도 약간 후대 사람이고 또 맹자 이전의 사람으로 알려졌고요 이것에 대다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분명 공자의 후발 주자였으며 또 맹자란 사람에 앞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맹자란 텍스트에서 맹자가 그러죠. 온 세상에 묵자의 사상을 따르는 무리가 가득하다. 이렇게 말하면서 묵자의 공격에 유가사상을 잘 방어하겠다는 맹자의 신념과 다짐이 보이는데요. 분명히 공자와 맹자 사이의 사람이었던 것만큼은 틀림 없는 거 같습니다, 공자가 등장하고 도전자 묵자가 나타나 공자 사상의 반대자로 등장해서 자신의 사상을 크게 흥성시켰고 맹자라는 사람이 등장해 다시 묵자 사상을 극복하려 했고 그게 춘추전국시대 철학사의 흐름인데(이 중간에 상앙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맹자책을 보면 맨 처음에 양혜왕에게 유세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죠, 그 때가 바로가 상앙이 죽음을 당한 시기라고 하는데 공자-묵자-상앙- 맹자 그리고 장자는 맹자와 동시대인 이런 흐름으로 갑니다)


 


호적이란 중국의 대학자에 따르면 대략 그는 BC 480년전쯤에 태어나 BC 380년쯤에 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연대기적인 시기도 알면 좋고 공자와 상앙, 맹자등 이런 사상가들 사이에서 크게 활약했다는 것도 분명 기억을 해두셔야겠지만 가장 중요한건 묵자는 공자와 달리 전국시대 사람이었다는겁니다. 즉 전국시대가 만든 인물이라는 거죠.


 


전국시대라……..


 


춘추전국시대를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누어서 이야기들 합니다, 춘추는 공자가 지었다는 역사책 춘추에서 그 이름이 기원했으며 전국시대는 유향이 썼다는 전국책이라는 역사책에서 그 이름이 기원했다는데 공자는 춘추말엽 사람입니다, 춘추시대 끝물 사람이죠. 그 공자가 죽고나서 얼마 안지나 묵자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묵자는 공자와 달리 전국시대의 사람입니다. 즉 그가 살고 부대꼈던 배경과 무대가 공자와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단순 시기적으로는 공자와 크게 차이나지 않지만 살았던 환경이 크게 달라진건 그만큼 급변하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는 것인데 네 묵자가 살았던 시기는 전국시대적 논리와 환경으로 급변하던 시대였습니다. 급변하던 시대 사람들이 느낀 위기감과 피로도 정말 장난 아니었을텐데 묵자는 그런 시대의 사람이었죠.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나누는 기준이 학자마다 다른데 가령 晉의 3분 아니면 강씨의 제나라가 제후 자리를 전씨에게 빼앗겼던 사건등 기준이 학자마다 다릅니다. 기준이 되는 사건은 달라도 전국시대는 춘추시대와 다른 배경과 시대정신을 가진 시기였다는건 다들 동의를 하죠. 주례, 또는 주나라 문화를 계승하겠다 그것을 살리겠다고 말한 공자는 춘추말엽이라고 해도 그가 산 시대는 춘추시대입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주나라의 문화 내지 주의 전통관습 그것을 계승하고 살리겠다는 건 공허한 주장내지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는 이상(異常)한 이상(理想)이 되었습니다 , 말 그대로 戰國 전쟁이 일상화 된 시대에는 다른 이야기와 설득의 주제가 있어야겠죠. 맹자도 순자도 공자의 계승자지만 전국시대적 수요에 맞게 자신의 사상을 만들어갔어야했는데 실제 순자는 훌륭하게 당대 시대적 수요에 맞게 공자의 사상을 재해석했습니다(맹자는 엄밀히 당대에 잘팔린 사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맹자사상은 상당히 과대평가된 부분이 있는데 애초에 묵자와 양주 , 농가등 다른 사상가들과 전방위적으로 싸운 언더독을 후세 학자들이 우호적으로 독해하고 띄워준걸수도)


 


자 이렇게 전쟁이 일상화 된 시기 각 나라는 전쟁을 잘 수행하고 국력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군주 중심의 일원적인 중압집권 체제 형성에 안간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일상화가 된 원인으로 생산력의 큰 발전이 있었는데요. 생산력이 발전되어야 전쟁수행능력도 커지고 또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커지게 마련인데 전국시대는 이제 본격적으로 철기가 도입 내지 정착이 되어서 춘추시대보다 훨씬 생산력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산력 발전이 전쟁의 격화 외에 여러 가지 춘추시대와는 다른, 전국시대의 모습들을 만들어내게 되었죠.


 


묵자는 춘추시대가 아닌 전국시대 사람입니다. 그리고 전국시대에 맞고 전국시대에 장사가 될 수 있는 이상을 말한 사람이고요. 자 분명히 기억해 두세요. 묵자는 전국시대 사람 그것도 전국초기 본격적으로 전국시대가 열린 시기에 산 사람이란 것을요. 그래야 묵자 사상의 이해가 쉬워집니다. 그럼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라는 배경과 무대가 그의 사상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제가 설명을 드려야하는데 자 차근차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묵자가 주장했던 사상 중 유명한 것이 바로 비공이라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사상입니다. 사상으로만 주장하지 않고 실제 현실에서 열렬히 몸으로 부대끼며 운동으로 전개했고 많은 제자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걸고는 했는데요. 전쟁…… 가장 민초들 삶의 뿌리를 흔드는 것이 전쟁이고 보통의 사람들을 정말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이 바로 전쟁이죠. 그 전쟁을 가장 앞에 나서서 반대했던 사람이 바로 묵자고 그가 주장했던 것이 바로 비공입니다. 겸애와 더불어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의 사상이기도 하구요. 말씀 드린대로 戰國 허구헌날 전쟁하는 시대, 단순히 빈도수만이 아니라 규모와 범위 살상과 국력소모정도에서 춘추시대와 완전히 달라진 시대가 바로 전국시대인데 그렇기에 묵자가 그렇게도 비공을 주장하며 반전을 위해 뛰었겠죠.


 


 



 


 


전국시대 들어서서는 전쟁의 규모와 강도가 춘추시대와 차원이 다릅니다. 춘추시대에는 대부와 사. 지배층과 귀족들이 주가 되어서 참여한 전차전 중심의 전쟁이 많았다면 전국시대에는 보병전으로 바뀌면서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하층민들까지 모두 투입해 대규모로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에 하층민들은 참여한다고 해도 보급에 주력하고 실제 전투는 높으신 분들의 의무이자 권리였는데 전국시대 들어선 하층민들도 죽기 살기로 싸우도록 내몰리게 되었죠. 이제 전면전이 된 전국시대 전쟁은 춘추시대처럼 단순히 명분에서의 우위나 힘의 과시 정도가 아니라 적국의 병사를 절멸시키고 적국을 완전히 초토화, 멸망 시키는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쟁의 규모와 잔인함이 커지게 된 원인들을 살펴보자면 생산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당시 생산력 문제는 철기의 생산, 도입과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돌이나 청동기로 만든 농기구와 철로 만든 농기구의 기능성과 효용성은 상대가 되질 않기 때문에요, 춘추시대에는 철기 생산이 시작되지 않거나 생산이 되어도 보급이 시원치 않았고 무기로서 철제가 많이 쓰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생산력이 약해서 비축된 재화가 많지 않아 장기간의 전쟁이 불가능했고 또 역시 생산력이 약하다보니 전쟁에 이긴다고 해도 획득할 수 있는 이익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철기와 우경이 정착된 전국시대는 이야기가 달라졌죠. 무기의 화력이 더욱 세졌고 발전된 생산력으로 인해 축적된 재화는 규모 큰 군주 휘하 상비군의 운영을 가능케했고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했으며, 또 발전된 사회의 생산력은 전쟁에서 이겼을 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커지게 했습니다.


 


철저히 명분을 가지고 전쟁을 하고 나름 게임의 룰을 지키려고 하고, 장기전이 아닌 단기전으로 승부를 보던 춘추시대와 달리 전국시대는 명분이 약해도 또 명분이 없어도 전쟁을 하고 장기전도 마다하지 않고 수십만이 넘는 적국의 군사를 모두 죽이기도 하고 상대 나라를 통째로 접수하고 그랬는데 이런 아비규환의 시대에 묵자가 살았던 것이죠. 이렇게 전쟁이 일상화되고 전쟁의 규모와 강도가 세진 시대 한쪽에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생산력을 발전 시키고 왕중심의 일원적이며 효율적인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내려 힘을 다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또 한쪽에선 어떻게 하면 전쟁을 막아보고 없앨 수 있을까 고민하던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는데 후자에 선 사람들이 바로 묵자였죠. 사실 전자의 문제도 외면하지 않고 고민해서 훌륭한 대안들을 말했는데요. 괜히 당대에 대흥행을 한게 아닐것입니다. 그만큼 이 사람 저 사람 가려운 부분을 잘긁어준 것인데 전자와 관련된 이장에서도 그리고 후에서도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고 일단 그가 전개했던 반전운동과 비공문제는 철저히 전국시대적 산물임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 통일을 슬슬 이야기하고 꿈꾸게 된 시기가 바로 전국시대였습니다, 중원 열국들간에 통일을요. 공자시대만 해도 여러 제후국들간의 통일을 이야기하기는 힘든 시대였습니다. 공자가 꿈꾼 이상은 이렇습니다. 중원의 각 나라가 공자 자신이 말하는 어진 정치를 행하고 그러고 나서 그 나라들끼리 사이좋게 이상적인 연대를 하는 중원 정치공동체 이것이 바로 공자가 꿈꾼 이상이었습니다. 공자시대만 해도 통일을 이야기하진 않았죠. 아니 정확히 말해 통일을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었죠. 통일을 위해선 전쟁이 불가피하고 그렇기 위해선 생산력이 크게 확충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각 나라가 국력을 극대화하고 총동원할 수 있도록 사회시스템과 체제가 크게 변해야합니다, 그러나 공자 시대만 해도 각 열국의 상황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일단 각 열국, 즉 제후국 하나 하나 자체가 확실히 일사분란한 영토국가가 아니었어요. 일원적으로 움직이고 돌아가던 정치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열국들 하나 하나도 제대로 응집되지 못했는데 중원의 통일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였죠.


 


춘추시대의 제후 즉 춘추시대 여러 나라의 왕은요 진한등 통일제국 시대의 왕과 다른 건 물론이거니와 전국시대의 왕과도 상당히 달랐습니다, 어찌보면 귀족들의 대표이자 제사를 지낼 때 맨 앞에서 폼을 잡고 그것을 주최하는 종교, 제사 공동체의 수장에 가까웠지. 한 나라를 자기 손에 완전히 장악하고 끌고 가는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춘추시대만 해도 각 중원의 상황은 邑을 단위로 만들어진 읍제 국가 내지 성읍국가였습니다. 중원 각 여러 곳에 邑이 산재해있고 읍단위 하에서 정치와 군사행정, 제사등이 벌어졌는데 그 읍 하나 하나가 곧 하나의 國이기도 했습니다. 그 작은 범위와 적은 인민들로 이루어진 읍이 국이기도 했다는 것인데요, 國이라는 한자 아시죠? 나라입니다, 국가를 뜻하고요.. 우리는 이 한자를 보면서 나라국, 국가국 하다보니 어떤 영토 국가를 떠올리기 쉬운데 國은 처음에 그런 의미하곤 거리가 멀었고 邑과 호환이 되는 말이였습니다.


 


중앙의 천자 주왕이 제후 한 사람을 어느 곳에 봉합니다, 그럼 거기서 邑을 세우죠. 邑은 그냥 편하게 city내지 town 또는 vilage라고 보시면 되구요 나라국(國)를 한번 볼까요. 나라 국 자 구성요소를 보시면 창을 뜻하는 戎과 비슷한 글자가 있고 큰 네모와 작은 네모가 보이시죠. 큰 네모 口 말그대로 큰 울타리를 뜻하는 것이고 작은 네모는 그냥 입구자가 아니라. 이건 축문이라고 기도문을 담는 그릇을 뜻합니다. 제사에 쓰이는 아주 중요한 도구지요. 무기와 제사도구를 어떤 큰 네모가 감싸고 있는데 그건 바로 성을 말합니다. 읍은 그런겁니다. 동일한 조상을 모시고 군사적이해 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성과 그 주변. 이렇게 읍을 만들어 놓고 외부의 이질적, 적대적 존재를 대비해 성을 쌓아 제사와 전쟁공동체로서 존재합니다. 그 공동체의 수장이 바로 제후고 춘추시대 왕이었습니다. 이렇게 제후의 國은 협소한 공간이었고 그렇게 작은 규모 정치공동체의 수장으로 시작한게 춘추시대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싶으면 제후는 자신의 씨족중 거물을 國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다른 곳에 봉합니다. 거물이 다른 곳에 가서 읍을 개척하는 것이죠. 그것을 都라고도 하는데(도읍이란 말이 여기서) 그 대부 역시 읍을 만들어 자신의 근거지를 만들고 제후에게 간섭 받지 않는 독자적인 area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국과 도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鄙라는 읍에 살기도 하고 野라는 공간에 살기도 했고요 이렇게 중국땅에는 읍들이 점처럼 산재해 있었죠. 노나라라고 하면 노(魯)라는 읍을 뜻했다가 점차 읍안에 여러 친인척 귀족들을 다른 읍을 개척케해 분가 시키고 왕과 그 대부들의 읍을 선으로 열결해서 대충 그들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권역이 향후 점점 진하게 영토국가의 성격을 띄게 되었는데 전국시대는 그 연결과 영향력 관철이 상당히 느슨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지도를 보면 점선과 실선으로 경계가 그어져 있는 지도를 보실 수 있을겁니다. 송나라든, 노나라든, 제나라든. 국토의 크기가 대략보이고 국가간의 영토 경계도 보이실텐데요. 그렇게 점선내지과 실선으로 파악되는 나라의 영토 안을 왕이 확고히 지배했다?? 그건 전국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춘추시대 왕은 자기가 직접 관할하는 지역이 협소했고 다른 지역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권력행사를 할뿐이었고 때로는 자기 나름의 근거지와 또 근거지를 바탕으로 무력과 경제력을 지닌 대부들과 싸우고는 했습니다. 이런데 왕이 자기가 다스리는 국 말고 대부의 읍, 그 밖에 여러 비읍과 야에 사는 민들을 일괄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을까요? 제후들마다 열국마다 사정이 달랐을거지만 쉽지 않았을겁니다.


 


하지만 조금씩 춘추시대 중기부터 조금씩 여러 나라들은 중앙집권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거나 그것을 위한 시동을 걸었고 제후와 대부들간의 싸움도 승자가 가려지며 내부정리가 슬슬 되기 시작했습니다, 제후는 대부들을 찍어누르고 왕권을 확고히하고 제후를 이기며 하극상에 성공한 대부는 스스로가 강력한 군주가 되어 국토장악력을 늘려갔습니다, 이제 하층민들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며 이제 國이 단순히 하나의 도시에 불과한 邑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영토국가가 되어갔습니다. 읍과 호환이 되는 말이 아니게 된 것이죠. 그런 흐름은 三晋이라는 북방의 晉이 먼저 시작을 했습니다. 앞서 동과 서의 차이 말씀 드렸죠, 그걸 떠올리시면 이런 그들이 스타트를 끊은 중앙집권화의 시작과 성숙도 이해가 빠르실겁니다. 자 이렇게 삼진이 중앙집권화와 그것을 기초로한 국력극대화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것을 시발점으로 여러 나라들도 각자 중앙집권화와 영토국가 만들기에 주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과제에 주력하지 못한 나라는 경쟁에서 도태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약소국들이 많이 멸망하고 열강들 중심으로 중원이 재편됩니다. 자 이런 중원 여러 나라의 중앙집권화와 확고한 영토국가로의 재편성, 재탄생은 전국시대에 와서 완수가 되었고 이제 안으로 통일되어 내부 역량을 극대화한 나라들끼리 싸우게 되면서 더 큰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맹자만 읽어봐도 중국의 통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누가 통일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통일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울것인가? 묵자 얼마 뒤의 인물인 맹자 시대에 이렇게 통일을 이야기 하는데 통일하면 먼저 묵자 이야기를 해야할겁니다. 묵자가 통일은 가장 먼저 이야기했기 때문에요. 또 단순히 먼저가 아니라 어떻게 통일 해야할 것인지 고민도 했고 답도 나름 충실히 제시했고요.


 


묵자가 말하는 전쟁 , 그 전쟁상황의 격화는 어떻게 되어야 궁극적으로 사라질까요? 단순히 생각하면 싸우는 나라들끼리 합쳐져서 폭력을 확고히 독점한 하나의 통치권력이 생기면 됩니다. 그 통치권력밖에 외부의 적이 다시 생기면 모르겠지만 최소한 분열된 시대만큼 전쟁상황으로 인한 가혹함은 사라지겠죠. 실제 묵자의 무리들이 반전운동을 통해 많이 죽어나면서 여러 열강들 중 가장 싹수 있어 보이고 통일제국 포텐셜이 풍부한 진에 배팅을 하게 되는데 통일되면 전쟁상황은 종식되겠지라는 생각을 한 나머지 베팅을 한겁니다.(모든 묵가 무리들이 이런 행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묵가 사후 줄곧 묵자 무리들이 하나로 움직였던 것도 아니고요. 그 안에서도 분열되어 서로 사이비 묵가 무리라는 뜻의 별묵이라고 서로를 비난도 했습니다)


 


요새도 중국인들은 분열을 상당히 두려워합니다, 역사에서 중국이 쪼개지고 쪼개진 나라들끼리 전쟁을 하고 그 때 겪어야했던 보통의 중국인민들의 고통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거 같은데 그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거의 유전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사는 사람들이 바로 중국인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한 후 문화대혁명, 대약진운동 실책등을 많이 저질렀고 그와중에 무수한 인민들이 죽어났고 중국은 크게 후퇴했습니다, 그래도 많은 인민들은 그를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왜냐 닥치고 분열을 막고 중국을 통일 시킨 사람이니까요. 괜히 중국에서 안정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고 하는 것이 아닌거 같습니다, 그만큼 분열과 분열이 초래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통일된 중국을 원하는 것이 중국인들이지 않나 싶어요.


 


묵자는 통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전쟁 종식을 위해서도 그렇고 그가 말하는 이상인 겸애, 즉 최대 다수의 기본적인 생활 보장은 정치 단위의 규모가 클수록, 그리고 정치단위 내부의 조직과 질서가 안정되고 확고하고 일사불란할수록 달성될 여지가 높은데 그렇기에 하나의 천자 중심으로 전 중국이 다스려졌으면 한다는 것을 자주 자주 말했죠, 그 천자가 정점에 서야함을 말하고 그 천자 밑에 나라를 총괄하는 제후가 있어야한다 말하긴 했는지만 이 때 묵자가 말하는 천자는 춘추시대 주나라의 천자처럼 허수아비 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전 중국을 총괄하는 군주였고 또 여기서 묵자가 말하는 그 제후는 자체적인 무력을 갖추고 이질적인 시스템을 갖추어 중앙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전국시대적인 독자적 정치단위의 수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자의 뜻을 어기지 않는 지역 행정관으로서의 제후였죠. 확고한 천자가 중심에 서고 그 천자중심으로 중원이 돌아가는 것, 그런 질서하에서 자신들의 겸애를 실현해보자 또는 그 질서하에서만 겸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 했었고 묵자는 그것을 이상으로서 제시했는데 그것은 뒤에서도 계속 부연해서 설명을 드릴 것입니다. 그런 천자중심의 일원화된 정치질서와 겸애의 관계에 대해서요.


 


그리고 통일을 위해선 어떤 기준 내지 명확한 스탠다드가 있어야합니다. 물론 통일 이후에도 명확한 기준과 표준이 있어야 그 통일된 나라를 다스려갈 수 있겠지만, 통일 이후에 준비해서 만들면 너무 늦은 일이고 통일 전에 이미 그것을 만들어놓고 가야겠죠. 통일하자는 사람이 전 중국과 인민들을 아우르고 약속이 될 수 있는 기준과 표준을 생각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실제 텍스트에서 묵자는 많이도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스탠다드, 기준, 표준에 대해서요. 공인출신이라 측정기구인 자와 콤파스 이런 것에 많이 비유해서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요. “공인들도 정확한 그림쇠(컴파스)와 직각자등으로 작업을하고 물건을 만드는데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 명확한 기준과 법도가 없어서야되겠냐는 식으로요.


 


생각해보세요. 일을 하는데 측정기구와 도구가 다르면 서로 손발 맞춰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통일을 하고 통일되어서 통일된 제국을 제대로 끌고가려면 전 사회에 통용될 확고한 기준과 규범, 표준등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을 묵자가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묵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표준과 기준을 끌어내고 합의해낼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이 이약기합니다, 가령 삼표법를 말하면서 과거 성인군주들의 업적,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여론, 그리고 실제 사람들의 이익에 합치되는가 여부 등. 이런 것들을 근거 내지 수단으로해 어떤 표준을 만들어보자고 힘주어 이야기 했는데 앞서 통일 제국 진나라와 묵자를 연관 시켜 말씀 드렸죠? 진나라, 진시황 하면 가혹한 이미지 외에 흔히 도량형과 문자의 통일 이런 것들이 떠오를 수도 있는데. 진의 그런 통일된 기준과 표준은 묵자와 연관 시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실제 통일 제국 진의 등장에 묵자 무리들 지분이 크고 묵자 사상에서 비중 있게 통일된 기준과 표준에 대한 강조가 나오니까요. 묵자의 제자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진으로 가서 진의 시스템을 가다듬고 다양한 분야에서 법들을 만들어내고 또 일선 행정을 도맡아 했는데 그렇게 묵자 무리들이 활약을 하며 날로 강대해져 중원을 통일한 진이 괜히 도량형의 통일과 문자의 통일을 이야기한 것은 아닐것입니다.


 


아 그리고 이 이야기도 해야겠네요, 그들이 표준과 기준, 스탠다드, 이런 것을 강조하는데 그들이 애초에 공인집단인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고 했죠. 그런데 애초에 묵가집단엔 상당수 무사들도 있고 무사로서 자의식을 가진 사람도 많다고 했습니다. 표준과 기준, 스탠다드 이런 건 전쟁이나 국방 관련해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전쟁사학 관련해서 탁월한 저술들을 쓰신 임용한 선생님의 글에 따르면 부대마다, 그리고 병사마다 전투력과 무기의 질, 작전수행능력등 이런것들이 천차만별이면 군대가 강해질 수 없는 노릇인데 고대에 어느 국가든 전쟁수행능력과 국방력을 극대화 시키려는 나라는 무기의 질, 전투력등을 군사마다, 부대마다 규격화 표준화시키려고 애썼다네요. 춘추시대 초기에 전쟁을 하면 대부들이 자신들의 영지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나옵니다. 이 귀족들의 군사를 모아 전쟁을 하는데 귀족들 부대마다 주특기와 주무기가 다르고 그것만 다르면 좋은데 군사들이 가진 무기의 질, 군사들의 훈련정도와, 전투력, 전술이해능력들이 다르면 전쟁능력 극대화가 되겠습니까? 오합지졸 되기 십상이죠. 결국 전국시대에 전투력 향상에 있어 중요한 문제는 각자 이질적인 귀족들의 전사를 가지고 싸우는 전쟁에서 탈피해서 얼마나 규격화된 표준과 기준으로 길들여지고 훈련된 왕의 정규군으로 싸우고 또 그것을 규모화 시키냐였겠죠.


 


묵자 무리들이 그렇게 표준과 기준을 강조하고 또 거기에 집착했는데 어쩌면 그들이 무사였고 또 일선 현장에서 자주 실전경험도 해봤던 사람이기에 그렇게 표준과 기준, 규격화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강조햇던것이 아닐까 생각도 저는 해보곤 합니다. 그리고 묵자 텍스트엔 군사관련 이야기도 많은데 후반부는 군사, 국방관련해서 실전에 유용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방어와 축성, 대오 만들기이이에 여러가지들 거기서도 그런 측면이 잘보입니다, 표준화된, 규격화된 여러 가지 방어와 군사매뉴얼이 많죠.구체적인 수치로 정확히 제시하는 매뉴얼들이요.


 


 



 


 


자 그리고 전국시대인, 전국시대 사람 묵자 이야기를 더 해야겠는데 잠깐 쉬었다가 더하겠습니다, 전국시대적인 고민과 과제를 온몸으로 짊어지고 간 묵자라는 사상가에 대해서 더 부연 설명 드릴께요.


 


구체적인 그의 생몰연대보다 중요한게 그가 노나라 사람이었다는 것과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인데 전국시대라는 배경과 그의 사상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말씀 드리면서 그의 사상이 발아하던 환경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도 좀 전국시대라는 배경과 그의 사상과 연관 시켜 말씀을 드려야할거 같습니다.


 


전국시대는 분명 춘추시대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시대라고 했습니다. 앞선 시간에 생산력의 증대와 전쟁의 격화, 통일을 위한 과도기적 시기 여러 가지 말씀을 드렸는데 그것말고도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씨족질서라는 것이 완전히 해체 되고 형해화된 시기라는 것입니다. 씨족질서라…… 생소한 말이실겁니다. 하지만 당대사회와 당대사회이 변화를 이해하기 d위해선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고, 또 제가 설명을 잘 해드리겠습니다.


 


앞서 邑을 단위로 당시 시대를 이야기 했는데 읍에는 여러 익명의 사람들이 사는게 것이 아니라 동일한 조상을 모시고 사는 같은 성, 같은 씨의 사람들이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家라는 말로도 읍에 사는 공동체를 일컬어 말했는데 말 그대로 가족입니다.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고 같은 조상을 가진 유대감을 가지고 살아가며 같이 일을 해서 생산의 결과물을 나누고 그 가족안에서 너와 나 구분이 없고 연장자는 내 형이고 아버지고 어머니고 연하자는 내 동생이고 아들이고 딸이고 그런 연대감과 일체의식속에서 살고들 있었죠.


 


가족하니 오늘날 핵가족 개념을 가지고 당대의 씨족공동체의 가족을 봐서는 안되고요. 아주 많은 수의 사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봐야하는데 생산력이 턱없던 시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면서 공동으로 노동을 해 삶을 영위했습니다. 그렇게해야만 살 수 있는 시대였고요. 그런데 춘추시대말부터 씨족공동체가 파괴되었습니다. 왜 파괴 되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생산력의 증대와 전쟁의 격화등을 원인으로 꼽는데 철기가 등장했고 철기를 바탕으로 우경이 시작되고 농기구가 개량되고 이것이 정말 씨족공동체 해체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소를 끌고 우경을 한다. 소 하나가 사람 일곱명 정도의 일을 거뜬히 해냅니다. 생산의 근원인 경작지 면적은 동일한데 소가 있어 자신을 포함 여덟 사람이 하던 일을 혼자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기존에 일을 하던 씨족 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그 땅에 붙어 있어야할까요? 기존엔 그 사람들이 도와줘서 같이 일을 해야만 겨우 어떻게든 생산을 해낼 수 있었지만 농기구가 개량되고 우경이 시작되고 이렇게 바뀐 상황에서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내가 생산한 것을 축내는 사람 그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됩니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야지요. 생산이 처음엔 아주 대가족으로 이루어졌었는데 이제는 가장 하나에 대여섯명 단위의 소가족 단위로 생산단위가 변했습니다. 수십명이 달라붙어서 하던 일을 몇 명이서도 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제 정말 내 아내 내 새끼가 아닌 이상 같은 조상을 둔 씨족공동체 구성원이고 같이 제사에 참여하는 삼촌, 사촌이라고 하더라도 과거처럼 생존을 위한 협력자가 아니라 어쩌면 경쟁자가 되어버린 상황.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씨족공동체는 온전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생산력이 늘어났습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정치권력이 뜯어먹을 거리가 많이 생겼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죠. 기존에는 그 땅을 경작하던 사람들이 겨우 먹고 살았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잉여 생산량이 많이 늘어났기에 말입니다. 이제 정치권력이 착취를 본격화 합니다. 그렇다면 착취가 덜한 곳으로 떠나야할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그런 정치권력, 행정의 공백지대, 여백지대가 존재했으니까요.


 


그리고 단순히 내 영향력이 닿는 곳의 민들에 대한 착취를 늘릴 수도 있지만 전쟁을 통해 땅을 넓히고 그 땅 안에 사람들을 착취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빈번해집니다. 그렇다면 또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다른 곳을 찾아 떠나야할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죠. 물론 전쟁을 통해 죽어나는 것도 무시 못합니다. 씨족 공동체의 파괴에요.


 


이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기존의 생활근거지를 버리고 떠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씨족공동체는 무너지고 말았고 다른 질서의 시대가 왔습니다, 바로 전국시대.


 


이렇게 씨족공동체 질서가 무너진 상황은 여러 가지로 통치자와 사상가들을 고민하게 했습니다. 일단 공자 사상에 대한 어떤 한계가 노출되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싹트게 되었죠. 공자 사상은 씨족공동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살던 시기에도 그것이 적지 않게 무너진 상황이었지만 분명 공자는 익명의 사람들이 아닌 부모와 형제, 친척들이 같이 살던 공동체에서 자연스레 배우는 효와 공손함, 어른을 공경하고 아이들에게 자애롭게 대함을 충분히 익혀서 이것을 사회전반으로 확대해나가자고 합니다. 그의 정치철학을 보면 왕은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해서는 안됩니다. 공자에게 있어 군주는 그 사람과 같아야합니다. 해당 지역 거주민들의 지배자기보다는 보호자에 가까웠던 씨족공동체의 대표처럼 자애로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또 과거의 씨족공동체는 여러원로들이 모여 공동체의 일을 토론 토의하는 원시적민주제의 전통이 강했는데 그래서인지 공자 사상을 보면 왕이 홀로 독주하지 말고 여러 지식인들을 우대하고 그들을 국정의 주체로 분명히 인정해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라고 합니다. 유독 논어에서 그리고 맹자에서 더불어, 같이, 함께라는 여(與)라는 글자가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닐것입니다.


 


그런데 씨족공동체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효와 공손함, 어른을 공경하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등의 정서에 기초한 仁을 대신해 다른 윤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저런 정서들을 배울 공간도 없어지고 또 배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먹힐 상황이 아니게 된 시대, 그 시대는 다른 사상과 통치철학이 필요하게 되었죠. 공손하고 효성스럽고 연장자를 존중하고 아이들에게 자애롭게 대하고 다 좋은 것이다, 그런데 어쩌라고?라는 답변이 돌아오게 된 시대가 되었다는겁니다,


 


 



 


 


일단은 씨족공동체가 무너진 상황에서 왕과 군주는 민을 직접적으로 다이렉트로 지배하고 관리해야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기존에는 家라는 씨족공동체 울타리 하에 민들이 생활을 영위했고 울타리 안의 수장들이 민들을 직접 관리하고 돌보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대부들이 있죠.


 


대부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관리하고 왕은 대부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해서 곡물이라던가 군사력을 징발하기도 하고 항상 지역의 수장을 통해 주고 또 받았습니다, 항상 지역의 수장을 무시할 수 없었고 상당 부분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해주었습니다. 최소한 해당지역의 일에 대해서 간섭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춘추시대가 끝나가며 이제 씨족공동체가 해체되고 또 해당 공동체의 수장중 왕권에 방해가 될만큼 성장한 인물들은 왕권에 의해 제거가 된 상황 그런 상황에서 군주는 직접적으로 민들을 다스려야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애로움, 양보에 바탕을 둔 예의나 유가적 온정주의로 백성들을 다스릴 수는 없었겠죠. 이 때 왕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바로 법가입니다. 법대로 민들을 직접적으로 다스려보자는 것, 그리고 법대로 이제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행정구역을 재편해 효율적으로 관리 내지 통제를 해보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앞서 경작하던 땅에서 떠나 살 수밖에 없었던 민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그럼 그들이 떠돌게 하지 말고 다른 생산기반을 마련해주어 거기에다가 묶어두어 효율적으로 그들에게 세금도 거두고 유사시 전쟁에 쓸 군인자원으로도 관리를 해야겠죠, 법가는 이런 전국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수요에 훌륭히 대응을 했습니다. 하지만 법가만이 아니라 묵가도 나름의 훌륭히 수요에 응했습니다. 상동이라는 군주중심의 통치체제, 인이 아닌 겸애라는 정치윤리, 상현이라는 인재등용법, 그리고 법가 못지 않게 그들도 어떻게 상벌로 민들을 통제할 것인가 고민했고요. 실제 법의 제정과 집행에 관련해서 묵가 제자들이 상당히 많은 것을 일구어냈습니다, 이건 묵가와 진이라는 장에서 부연설명하겠는데 상앙의 秦 같은 경우 묵자 제자들의 법의 상당부분을 만들고 운영했었죠. 상앙이 특출난 사상가이고 정치가였지만 원맨쇼를 해서 방대한 법의 체계를 만들고 굴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통치철학과 체제개편을 말고도 새롭게 사유의 지평의 열어야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바로 인간이란 문제. 이제 인간을 다른 각도 내지 다른 시각에서 생각하고 연구해야할 상황이 되었는 다는 것인데요, 기존에는 家별로 민들이 살고 누구 집안의 사람, 어떤 조상의 후손 이렇게 봤지만, 하나 하나 개체화되다시피한 사람들을 상대 관리해야했고 또 적극적을 전쟁을 통해 적국의 백성들을 자국의 백성으로 편입해야하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 균질적인 인간, 평균적인 인간, 개체화되고 원자화된 인간, 그리고 보편적인 인성에 대해 논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맹자가 말하는 성선론, 순자가 말하는 성악론 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지요, 기존에는 사람들은 개체화된 존재로 사유되지 않았고 그저 누굴 조상으로 하느냐 어느 家의 사람인가로 때론 성단위 씨단위로 파악이 되었고 그것들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각자 사람들이 제사로 섬기고 모시는 조상들이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조상들 사이에서도 우열이 있었고요. 어떤 왕이 된 조상을 모시는 사람들과 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 사이는 모시는 조상이 단순히 다른게 아니라 조상으로 인해 우열이 있는 것인데 똑같이 인간이 착하다, 악하다. 이렇게 일반적인 맥락으로 썰을 푸는게 가능했을까요? 또 그렇게 썰을 푼다고 해도 어떤 실익도 없었을것입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답변이 되돌아 왔을겁니다. 하지만 누굴 조상으로 두느냐가 중요하지 않게 된 시대, 그리고 가장 중심의 소가족 시대, 왕은 민 한사람 한사람을 직접 관리해야하는 시대에 보편적인 인간에 대해서 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렇다, 저렇다, 무엇으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고 무엇을 두려워하기에 어떤 것으로 그들을 또 통제할 수 있다는 식의 썰들이 나오게 되었고 사유가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맥락에서 인간을 처음으로 사유하고 이야기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묵자입니다. 성선설의 맹자, 성악설의 순자등 인간 일반은 보통 이렇다라고 한 저 사람들이 우선 떠오를 수 있지만 가장 먼저 보편적인 맥락에서 인간 일반을 사유하고 이야기한 사람은 묵자고요, 맹자든, 순자든 모두 묵자 영향을 받은것이지요, 특히 맹자는.


 


자 이것은 다음장인 묵자의 인간관에서 더욱 자세히 논할텐데요 이제 이장을 정리해보죠.


 


묵자는 전국시대인이다, 통일, 전쟁 반대, 그리고 씨족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새로운 통치철학과 시스템구축, 그리고 보편적 맥락에서의 인간에 대한 논의와 사유 모두 전국시대적 상황과 수요에서 그가 해낸 것들이라는 것. 전국시대인 묵자 절대 잊으시면 안됩니다. 전국시대에 묵자의 가게가 그렇게 장사가 잘된건 다 이유가 있다는 ㅎㅎ


 


자 이번 시간은 여기까지입니다.


 


 










'묵자를 알려주마' 지난 글 읽기


1 – 묵자 더 비기닝

2 – 겸애(兼愛)와 이익(利)




 


 


백골프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