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4. 24. 수요일 익명의 감독 2000년에 영상관련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다행히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국제영화제 두 어 군데에 (수상은 아니고) 졸업작품이 ‘진출’하는
바람에 이런저런 일거리를 하며 바로 데뷔 준비를 할 수 있었죠.
그래봤자 돈 안되는 알바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정도, 딱 그만큼만 벌었습니다. 에로영화도 찍고 핸드폰에 올라가는 야설도
쓰고 인터넷 영화도 찍고, 뭐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모
영화사에서 콜이 왔습니다.
처음 갔을 땐 그냥 뮤직비디오 만들기라고만 했어요. 커다란 방에 짱짱한 스피커로 두 곡을
들려주는데 하나가 한소주(가명)씨의 곡, 하나가 바로 피스(가명,그룹)의 곡이었습니다. 두 곡을 듣고 뮤직비디오로 찍고 싶은 걸 고르라고
하더군요. 제 먹귀로 듣기에도 한소주 씨의 곡이 훨씬 좋았습니다. (사실 둘 다 별로였지만)당연히 한소주 씨의 곡을 골랐습니다. 외국
유학파라는 피디가 어디에 전화를 걸더니 그냥 피스 하라더군요. 알고 보니, 한소주 씨와 피스는 같은 소속사였습니다. 한소주 씨는 파트너인 뮤비 감독이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피스 뮤직비디오 만들기에 바로 착수하게 됐습니다. 스탭을
꾸리고 시나리오를 쓰고... 그 때만 해도 1억이란 예산은
뮤비에 있어선 블록버스터급이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겁니다.)
웬만해선 그런 일들을 귀찮아서 잘 안 하는데 당시만 해도
구경만 할 수 있었던 35미리 카메라로 촬영을 한다는 조건이 솔깃했습니다. 늘 16미리로만 찍었거든요. 데뷔하기 전에 35미리로
촬영한다는 것은 어떤 로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준비하는데 계약금을 안주는 겁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일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냥 진행했습니다.
유학파인 피디가 어느 날 말하더군요. 자기네 영화사는 그냥 하청 받아 일을
하는 거고 원래 제작자는 해당 가수의 소속사 사장이라고요. 근데 이 양반이 전국구라고 하더군요. “전국구요? 국회의원입니까?” 제가 물으니 그게 아니고 사형선고를 받은 바 있는
조폭 전국구라는 거였어요. 그러고 보니 준비하는 내내, 피디는 어디론가 전화해서 제작비
독촉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진행비도 우리 돈 써가면서 일을 하는 바람에(피디도
돈을 주지 않았어요. 스탭들 먹이는 것부터 해서 서울 촬영 헌팅까지 모두 제 돈을 써야 했습니다.) 마이너스 통장도 간당간당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시나리오는 왜 그렇게 썼는지 제주도에서
상당분량을 찍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제주도 헌팅은 언감생심이었죠. 그냥
관광지도에서 대충 사진 보고, 그 전에 제주도에서 촬영한 적이 있는 어느 감독님의 헌팅 자료집을 빌려
사진으로 헌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일이면 촬영을 떠나야 하는 날, 그
때까지도 제작비는커녕 계약금, 진행비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주도 행 비행기 값도 없었던
거죠. 저는 피디를 불러서 안가겠다, 여기서 그냥 접겠다 했어요. 그랬더니 피디가 사색이 되면서 그럼 안된다는 겁니다.
안되긴 뭐가 안돼요, 그 쪽에서 돈을
준 게 없는데. (그렇다고 뮤비 시나리오를 검토한 적도 없고요. 해당
가수는 만나 본 적도 없었죠. 뭔가 이상했어요.) 피디는 뭔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제서야
전 ‘전국구 조폭’이란 말이 떠올랐죠. 뭔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미지의 존재. 근데 전 별로 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저를 해코지 할 일은 없었으니까요.
여튼, 피디는 자기 사비라도 들일테니
일단 제주도 가서 촬영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갔죠.
당시 배우는 김모군과 최모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배우를 써서 드라마 장면을 찍고
해당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찍어서 엮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건 해당 소속사의 요구였어요.)
조성모 이후에 유행하던 고만고만한 드라마 타이징 뮤직비디오, 딱 그거요. 여튼... 제주도에서 한참 드라마 장면을
찍는데 피디가 제작비가 들어왔다며 좋아하더군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찍는데, 와, 제주도 날씨가 그렇게 미친년 널 뛰듯 바뀔 줄은 몰랐어요.
한참 찍고 있는 와중에 비가 내리면 비오는 장면으로 바꿔서 찍고 다시 햇살이 나면
고무 호스로 물을 뿌리며 비오는 장면 계속 이어찍기... 이런 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개고생이었습니다.
근데 피디가 오더니 립싱크 장면을 제주도에서 찍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처음의
계획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날씨를 못 믿겠다고 했더니 어쨌든 검은 현무암 위에 오케스트라를 깔고 그 앞에서 하얀 옷을 입은 해당
가수가 노래를 할 거라는 거였습니다.
허 참, 왜 그래야 하나요? 물어 보니 소속사 사장의 지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검은 현무암 위의 하얀 천사... 뭐 이런 컨셉이었나 봐요. 오케스트라들도 다 검은 옷을 준비해야
한단 거였어요.
할 수 없이 부리나케 제주도 현지의 오케스트라를 섭외하고 일단은 카메라를 돌렸죠. 시간이
없었어요. 대충 카메라 두 대 정도 돌리면서 오케스트라 장면을 먼저 찍고 있는데 해당 가수(피스)가 하얀 와이셔츠에 바지로 통일하고 왔습니다.
전 그들을 프로덕션 기간 동안 처음 본 겁니다. 그 중 키 작은 가수는 무조건 자기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오른쪽 머리에 스트레스성(?) 땜빵이
있는데 바람이 불어서 자꾸만 드러난다며 짜증을 내면서 말이죠.
에이씨, 말싸움하기도 귀찮아서... 그렇게 하세요, 하고 계속 찍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까지요. 어차피 제주도 마지막 촬영이고 해서 막 찍었습니다.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였어요. 빨리 찍고 벗어나고
싶단 생각이 드는 프로덕션이었거든요. 그 때까지 전 계약금은커녕 땡전 한 푼 받지 못했습니다.)
거의 촬영을 끝마쳤을 즈음, 저 멀리서, 검은 세단 몇 대가 나란히 달려와 서는 게 보였습니다. 저게 뭐지? 마치 유에프오를 발견한 사람들 마냥 스탭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세단 중 한 대에서 문제의 전국구 사장이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검은 양복의 엉아들이 일렬로 서서 영전하는 게 보였거든요.
그는 험한 현무암 해변에는 내려오지는 않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다시
세단에 올랐습니다. 뭐야, 저 사람은. 빡치게.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편집부 주 무규칙2종매거진 [더딴지 6호]에서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뮤직비디오 감독의 비사가 공개된다. 여러분은 이미 그 뮤비를 봤을 확률이 높고 어쩌면 그 가수의 팬일 수도 있다. "1등 몬하면 우리 손가락 하나씩 잘라서 형님한테 보냅니다" 더딴지 6호에 실릴 전국구 조폭 수하의 말 한마디로 떡밥을 대신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은 자유이나 본지도 코가 석자라 니덜의 생명은 니덜이 알아서 챙겨야 함을 밝힌다.
익명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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