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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5. 30. 목요일

논설우원 파토




 

 

어쩌다 보니 몇달이나 지나서야 다시 연재를 재개하게 됐다. 아는 분덜은 알겠지만 역사책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유럽편' 이 나온 후 벙커에서 장기 역사 강의도 하게 되고, 얼마 전에는 정통 과학 만담 토크 '과학같은 소리하네'도 시작했고, 역시 과학 팟캐스트인 '과학하고 앉아있네'도 첫 편이 나가는 등 참으로 공사다망한 몇 달 간이었다.

 

 

그래서 머 공사가 다 망해버릴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결과적으로 그 동안 글 쓸 정신이 좀 없고 그랬다. 그래도 이제 다시 정신차려서 계속 한다.

 

 

 

- 6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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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Goebekli Tepe 

약 11,000년 전의 석조 유적으로 1995년에야 발굴되었다.

 

 

 

그렇다면 대홍수 이전 초고대 문명의 잔재인 기록과 정보, 지식, 기술, 세계관 등등, 통틀어 우리가 말하는 소위 '비의'의 바탕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여기서부터 이제 문제는 본격적으로 어려워진다. 그 이유는 우리가 대홍수 이전의 문명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그런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도 정황적인 것일 뿐 확고한 물증으로 뒷받침되고 있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이 분야가 주류 역사학과 고고학의 영역에 이미 편입되었을 것이며 우원이 이런 글을 쓸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감한 추론을 통해 대략의 그림을 그려볼 수는 있다. 일단 지난 편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제시된 모습부터 한번 열거해 보자.

 

 


첫째. 이들은 대륙 규모의 해양문명이었다.


비록 이렇게 한 문장으로 규정했지만 실제로 이런 문명을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일단 대양을 항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어울리는 선박 건조 기술을 갖춰야 한다. 거대한 방주 건설할 수 있었던 점이나 지구상에 고루 분포된 대홍수 전설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인류는 15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유럽의 대항해 시대 수준이나 그 이상의 선박 건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와 관련해서 하나 짚고 넘어갈 부분은, 1 만여년 전 이전의 지구는 지금보다 바다가 좁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제 4 빙하기의 최종빙기가 끝난 것은 지금부터 약 1만 2천년 전이다. 공교롭게도 플라톤이 이야기한 아틀란티스의 멸망 시점과 거의 일치하는데, 이 말은 그 문명이 건재하던 무렵에는 극지의 빙하가 훨씬 넓고 두꺼웠다는 뜻이다. 그만큼 전체 바닷물의 양이 적고 수면이 낮았을 수 있는데, 다시 말해 육지가 지금보다 조금 넓어진다. 이런 점이 어쩌면 대륙간 항해를 좀 더 원활하게 만들어 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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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기 시대의 빙하분포도.

유럽과 미주 등지에서 지금과 해안선의 모습이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은 관측 기술이다. 당시 문명이 아무리 발달했다 한들 정지위성에 의한 GPS 시스템을 보유하지는 않았다는 전제하에, 대양의 항해를 위해서는 자신의 선박이 어디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다음의 세가지 지식/장치가 요구된다. 첫째는 나침반, 둘째는 행성과 별자리 등 천체에 대한 정보, 셋째는 정확한 시계가 그것이다.

 

 

왜 그런지 설명을 해 보자. 일단 지구자기장에 의해 남북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이를 통해 동서남북 기본 방위를 확인할 수 있고, 작은 각도로 나누어 더 세세한 방위를 찾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게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해 주는 일은 사실 여기까지다. 나침반은 방위를 상당히 정확하게 알려주지만 - 자북극과 실제 북극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별도의 계산이나 장치로 보정을 해 주긴 한다 - 그와는 별개로 내가 현재 어디 있는지 모르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내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어느 방위로 갔을 때 목표지점에 닿는지 비로소 계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나침반은 12세기나 돼서야 항해에 쓰이기 시작했으며, 나침반이 쓰이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선박들은 태양, 달, 북극성 등을 위시한 천체에 기초하여 자신의 위치와 가야 할 방위를 확인했다. 특정 천체의 위치를 육분의 등의 장비를 통해 관측하면 정해진 계산을 통해 현재 나의 위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수세기에 걸친 관측 경험과 축적된 지식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럼 시계는 왜 필요할까? 그건 바로 경도를 측정하기 위해서다. 위도만으로는 내가 적도 기준으로 지구상의 남북 어디쯤에 있는지 밖에는 알 수 없다. 2차원 평면인 지구 표면에서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경도를 확인해야 하고, 이때 비로소 X축과 Y축의 좌표가 완성되는 거다.

 

 

근데 내가 있는 곳의 경도를 파악하는 것은 위도를 아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이걸 위한 가장 정확한 방법은 출발한 곳 - 이미 경도를 알고 있는 - 에서 맞춘 시계와 현재 내가 있는 곳의 시간 간의 시차 - 해상에서의 현지 시간은 해가 가장 높이 뜨는 정오를 기준으로 한다 - 로 산출하는 거다. 지구는 360도의 구체고 24시간에 한번 돌기 때문에 한 시간을 15도로 계산하면 된다.

 

 

그런데 지구 둘레가 4만 킬로미터나 되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시계가 1분이 틀리면 15마일의 오차가 생긴다. 이것은 정확한 항로나 목적지를 찾기 어려움은 물론 해상에서 자칫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수준의 오차다. 따라서 배에서 몇 주, 몇 달을 파도와 폭풍우에 흔들리면서도 틀리지 않는 시계가 필요한데, 추의 규칙적인 움직임에 의존하는 시계를 만들던 때에 배의 진동은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유럽에서도 18세기 중반이 돼서야 제작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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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 존 해리슨이 만든 크로노미터 H4.

 

영국에서 자마이카까지 81일의 항해 동안 8.1초만 늦어진 당시로서는 초정밀 시계였다.

큼직한 상자에 들어있던 것에서 이런 회중시계 형태로 만들기까지만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각설하고, 이상과 같은 기술의 뒷받침이 없이 대륙규모 대양 문명의 전면적 융성은 어렵다. 그런데 또 하나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실은 위 기술과 장비들은 이것 없이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정확한 지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지도를 만들려면 현지에 가서 측량을 해야 한다. 근데 현지를 가려면 지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소위 대항해 시대에도 초기 탐험가들은 목숨을 걸고 맨땅에 헤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탐험가들 덕에 서서히 지도가 만들어지고 항로가 개척되고 기술과 장비가 갖춰 치면서 결국은 지금처럼 상선이나 여객선 같은 일상적인 배들도 다닐 수 있게 된 거다.

 

 

그리고 이런 일은 속성상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조금씩 이루어진다. 이는 초고대의 해양문명도 잠깐만 존재했던 게 아니라 우리 현대문명처럼 적어도 수세기에 걸친 발전과 탐험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었을 거라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는 나름의 증거도 있다. 아래는 피리 레이스라는 터키인이 1513년에 작성한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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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에 그려진 곳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안과 아프리카 대륙의 서안인데, 아래쪽에는 남극대륙 해안선의 일부도 그려져 있다. 이 지도의 놀라운 점은 1513년이라는 시점이 1492년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지 불과 20년 후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미 당시에 남아메리카가 이렇게 자세히 매핑되었을 가능성은 없으며 남극대륙은 그 존재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피리 레이스 본인이 직접 측량해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고지도를 참고했다고 지도에 명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려져 있는 남극대륙의 해안선은 해당 지역에 빙하가 덮이기 전인 최소 BC 4,000 년 이전의 모습이다. 이런 점은 지도 분석 의뢰를 받았던 미국 해군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대홍수 이전의 해양 문명은 멸망 당시 이미 오래된 문명으로서 천체 관측과 시계 기술 등등의 각종 고급 지식과 정보, 기술이 오랜 세월 축적된 상태였을 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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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들은 우리와는 다른 정신적 기조하의 문명이었을 것이다. 


이때 정신적이라 함은 철학이나 종교는 물론 과학 기술의 컨셉이나 방향까지도 포함한다. 그 중요한 근거는 바로 거석의 사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돌, 특히 수 톤씩 나가는 바위 덩어리는 건축에 그리 유용한 소재는 아니다. 반면 흙을 구워 만드는 벽돌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고 가공과 운반, 시공이 모두 어려운 돌에 비해 훨씬 편리한 소재다. 그런데 왜 그들은 굳이 암석을 사용한 걸까.

 

 

기자의 피라미드 건설을 위해서 이집트인들은 900킬로미터나 떨어진 아스완에서 수십 톤의 바위덩어리들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기자 지역에 널려있는 모래와 나일강의 물, 진흙을 사용해서 질 좋은 벽돌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피라미드에 쓰인 석재는 주로 석회암이고 중심부 등에 화강암도 쓰였는데, 그 무게는2톤에서부터 무려 70톤에까지 이른다.

 

 

주류 학계의 주장은 이런 거대한 바위들을 원시적인 밧줄, 도르래와 수많은 인부들의 완력으로 운반해서 지상 14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탑을 쌓았다는 건데, 이는 무진장 어려운 일일뿐더러 극히 위험하기까지 하다. 일례로 70톤의 바위를 옮기기 위해서는 1인당 100킬로그램씩을 커버한다고 보면 700명의 인원이 필요하다. 도르래나 각종 장비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한들 100여명 이상의 인력이 소요될 것이다.

 

 

이 거대한 인원이 작업할 공간이 건조중인 피라미드 위에서 확보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지만, 이런 바위를 움직이다가 한번 중심을 잃으면 그 작업에 관여하던 인부들은 깔려 죽기 십상이다. 여기에 개당 800톤을 넘는 레바논 발벡 신전에 이르면 실현 가능성 여부는 고사하고 그 발상 자체가 지금 기준으로도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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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에서 소개한 발벡 신전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채석장에 있는 미완성 석회암 블록 

‘임산부의 돌’. 무게 약 1천 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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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무게를 옮기기 위해선 지금도 이런 거대한 장비가 필요하다. 

울산의 현대 중공업에 고정 설치된 스웨덴제 코쿰스 크레인. 높이 138미터.

 

 

 

이런 어처구니 없는 난관을 뚫어가면서까지 거석을 사용한 석조 건축을 감행했다면 이유는 두 가지뿐이다. 이런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할 어떤 이유가 존재했거나 당시 이런 건축 방식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기술적으로 ‘쉬웠다’는 거다. 이 두 가지는 아마 혼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충분한 지식과 기술, 능력이 없다면 이런 건축물을 현실화 하는 건 불가능하다. 반대로 뛰어난 기술을 갖추고 있다 한들 동기가 없으면 이런 일까지 벌이게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대홍수 이전, 혹은 이후에 아직 초고대 기술의 기억이 남아 있을 때 지은 건물 이라고 한들 전부 이런 거석 건축물은 아니었을 거고, 특별한 건물만 이렇게 지었을 것이다. 일반 가옥이나 실용적인 건물들의 경우는 목조나 벽돌집들도 많았음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들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다른 시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화재로 불타 버리거나 각종 재해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재해’에는 바로 대홍수도 포함된다.

 

 

확실한 것은 그런 거석 건물이라면 목조나 벽돌 건물과 달리 대홍수의 난리통에도 쉽게 물에 쓸려가지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대홍수 이후에 지어진 거석 건축물들의 동기는 추론해 볼 수 있다. 정치적, 종교적 등등의 이유로 중요한 건물들을 몇 톤씩 되는 큰 바위로 지어 둔다면 다시 한번 대홍수가 엄습한다 해도 무너지지 않고 버텨 낼 것이다. 이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대홍수의 재현에 대한 일종의 대비책이고, 과거의 경험에서 배운 교훈이다.

 

 

그렇다면 대홍수 이전에는 어땠을까? 무엇이 홍수 이전에 지어진 것인지 판별하기는 무척 어렵지만 - 돌에는 탄소동위원소 측정법을 사용할 수 없다 - 방주를 흉내낸 디자인으로 홍수 이후에 지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기자 피라미드조차 비교가 되지 않는 발벡의 비현실적 거석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세워진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때는 절절한 생존의 동기보다는 뛰어난 기술과 능력이 우선했던 것 아닐까. 그리고 그 기술은 무거운 돌과 바위를 비교적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증기기관이나 내연기관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무엇일 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해서, 대홍수 이전 문명을 상징하는 이름인 아틀란티스 문명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

 

 

"아틀란티스인들은 특수한 크리스탈을 사용, 태양에서 에너지를 뽑아내어 원자의 분해를 일으킬 수 있는 광선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들은 중력 자체를 극복했고 가공스러운 힘을 가진 크리스탈을 사용했지만 이것들이 스스로를 멸망시킨 파괴를 불러 왔다."

 

 

엉뚱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유명했던 ‘잠자는 예언자’ 에드가 케이시다. 우원은 이런 류의 사람을 인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이 경우는 좀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는 ‘원자의 분해’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언급했는데 이것은 누가 봐도 핵분열과 관련된 내용이다. 1945년 8월의 원자폭탄 투하를 보고 응용해서 말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는 같은 해 1월에 이미 사망했으며 그가 살아 있을 때 핵분열 관련 정보는 일급 군사비밀이자 고급한 과학정보로 일반인이 알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케이시는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문맹이었다.

 

 

이렇게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절묘하다고 할 이야기를 남긴 사람이, 아틀란티스 인들이 ‘중력 자체’를 극복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일말의 진실이라도 담겨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그런 법칙이나 기술을 발견해 냈다면 발벡처럼 거대한 바위를 옮기고 쌓는 일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실은 현대인들보다 더 수월하게 그 일을 해냈을 것이다. 우연찮게도 중력은 21세기 현대 물리학에서도 가장 다루기 곤란하고 신비한 힘이자 골치덩어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중력을 이해하고 조작할 수 있었다면, 또 이후의 누군가가 그 지식을 전수 받았다면 이는 ‘비의’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엄청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력의 조작이 끌어내는 가능성은 단지 공중을 쉽게 날거나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 실은 케이시의 말처럼, 어쩌면 이것이 그들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었을 지도 모른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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