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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는 두말할 나위도 없는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이자 대륙 합리론의 창시자다. 근대를 열어젖혔다고 평가된다. 무엇이 그를 근대철학의 아버지이자 세계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의 하나로 만들었는가?

 

알프레드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에 붙인 각주의 역사'라고 했다. 진지하게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나는 철학은 철학자 개인의 경험에 붙인 각주라고 믿는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조건과 시대상이 빠질 수 없다.

 

데카르트를 두고 흔히 '가면을 쓴 철학자'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딱히 연기자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인생을 추적해보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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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는 프랑스 '라 에' 라는 동네에서 159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브르따뉴 지방을 관할하는 법원의 법관이었다. 즉, 요즘으로 치면 지방법원 판사다. 동시에 시의원도 겸했다. 한 마디로 고소득 전문직이었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고급인력이었다. 데카르트 가문은 몇십 년 후에 귀족의 작위를 받는 데 성공한다.

 

데카르트는 생후 1년 2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였다. 사인은 결핵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데카르트도 이미 결핵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였는지, 모유 수유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옮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 조아생 데카르트에게는 귀한 아들이었다. 벌이가 좋았던 조아생은 갓난 아들을 살리겠다고 근처의 의사들을 총동원했다. 하지만 진단 결과는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정말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에게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으니, 바로 여자들이었다.

 

데카르트는 외할머니와 유모의 헌신적인 간병으로 죽다가 살아났다. 감격한 아버지는 타시 태어났다는 뜻의 라틴어 Renatus를 프랑스식으로 바꾼 Rene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르네 데카르트라는 이름은 이렇게 탄생했다.

 

우리 한번 병석에 누워 있는 꼬마 데카르트를 생각해보자. 그는 비쩍 마르고 창백한, 걸핏하면 쓰러지는 아이였다. 항상 여자들이 아픈 꼬마를 예의주시하며 도와줄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아이는 잠이 많고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날도 흔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철학자들처럼 그도 기본적으로 천재였다. 누워 있으면 생각이 많아지고, 몸이 아프면 예민해진다. 데카르트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을 제외한 인간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헛점을 짚어내는 작업이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아이는 어른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왜?'라고 묻는다. 어른들의 '근냥 그런 거야'라는 말에 불만을 품고 의심한다. 그러나 몸이 근질거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망각하고 뛰놀거나 유치한 장난감에 집중한다. 몸이 약해 허구한 날 누워있던 데카르트는 그렇지 않았다. 생각이 끊길 틈이 없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의심은 깊어져만 갓다. 몸도 아프겠다, 그냥 퉁치고 넘어가기엔 너무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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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도 힘든 데카르트는 또래 친구들과 뛰놀 수가 없었다. 그의 성장기는 남자 동료가 없었다. 대신 동네에 '프랑수아즈'라는 또래 여자아이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녀는 데카르트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소꿉놀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첫 우정이자 첫사랑이었다. 데카르트는 나중에도 프랑수아즈를 잊지 못했다.

 

데카르트는 유일한 친구 프랑수아즈에게 상당히 의존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혼자 있을 때는 사팔뜨기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프랑수아즈가 사시였기 때문이다(한쪽 눈동자가 안으로 몰리는 내사시였다).

 

데카르트는 평생 여자들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졌다. 여자의 보살핌과 관심이 없었다면 그는 자라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프랑수아즈 덕에 사시인 사람들에 대한 호감도 있었다. 아마 이 때문일 것 같은데, 데카르트는 당시로서는 특이하게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삶을 살았다.

 

훗날 데카르트는 그를 위해 일하는 하녀들에게 이상적인 고용주가 되었다. 때가 때인지라, 하녀들이 받는 인격적 대우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녀들에게 데카르트는 관대하고 친절한 신사였고 하녀의 일을 허드렛일로 치지 않았다. 당당한 업무로 존중하고 감사했다. 어린 시절을 돌봐준 유모에게는 유산의 상당 부분을 남겼고 하녀들의 퇴직금도 두둑하게 쳐 주었다.

 

르네 데카르트는 의심 많은 관찰자였지만 인간성을 따진다면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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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한 편으로는 까다로운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그는 '맘에 드는 게 별로 없는' 아이였다. 항상 사물과 사람을 의심하고 관찰해서 아버지는 그에게 ‘꼬마 철학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지만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법학자다. 법이란 정의에 기인한 것이며, 따라서 정의를 구현하려면 전투적으로 암기하고 실전에서는 과감하게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를 고찰하는 단계는 고민하지 않았다. 데카르트 집안은 말하자면 ‘법무 집안'으로, 법관은 그에게 세습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아들은 그리 편치많은 않다. 아버지는 자식들 중 데카르트를 가장 껄끄러워했다. 형제들도 그를 불편해했다. 온 종일 집안에 누워 자기들이 무슨 실수를 하나 눈동자를 굴리는 녀석이 어떻게 사랑스럽겠는가? 르네 데카르트는 여자들하고만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조아생 데카르트는 아들 르네가 열 살이 되자 드디어 불편한 시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르네 데카르트는 열 살의 나이로 기숙학교에 진학했다. 학교는 예수회 계열의 라 플레슈. 중세 신학을 기반으로 한 스콜라 철학의 명문이었다. 스콜라 철학이란 간단히 말해 기독교의 신학적 믿음을 철학적 방법으로 증명하는 학문이다.

 

이제 데카르트는 큰일났다. 집에서야 여자들의 따뜻한 관심 속에 종일 누워있을 수 있지만 엄격한 기숙학교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스콜라 철학도 이 신동의 기분에 거슬렸다. 스콜라 철학은 결론이 미리 정해져 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령의 역사하심, 신앙의 가치를 결론으로 정해두고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을 설계하는 게 스콜라 철학이다. '답정너'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르네 데카르트에게는 이상하지 않았겠는가. 신의 존재하심과 역사하심과 선량하심이 실재하는지를 증명해보자고? 왜 미리 설정된 결론을 향해 논리를 틀어맞춰야 하는가? 비논리적인 결론을 위해 고정을 논리적으로 정당화 시키려면 수 많은 우회로를 파야 하고 속된 표현으로 '말이 길어진다.' 그래서 스콜라 철학의 별명은 자질구레하고 너저분하다 하여 '번쇄철학'이라고도 한다.

 

스콜라 철학은 전제가 비논리적이기에 역설적으로 논리적이다.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는 고도로 발달한다.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도구로 사용했다. 데카르트는 훗날 자신의 철학을 전개할 때 라 플레슈에서 배운 논리 기술에 큰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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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 학교가 사기꾼 집단이라고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몸이 아픈 아이는 자연스럽게 정치인이 된다. 그는 먼저 타고난 두뇌로 점수를 땄다. 라 플레슈는 데카르트를 최고의 학생으로 평가했다. 어른들 눈에는 순종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며 학구열이 높은 모범 학생이었다.

 

특히 교장선생님은 데카르트의 학습 속도와 올곧은(!) 신앙에 감탄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교장으로부터 원하는 만큼 잠을 자도 좋다는 특권을 받아냈다. 데카르트는 학교에서 하루 열 시간 이상 취침했고 이는 평생의 습관이 되었다. 데카르트는 깨어있을 때도 누워 있곤 했다.

 

데카르트는 남 몰래 반란을 꿈꿨다. 그는 '이것이 진리다'는 가르침을 믿지 않았다. 그걸 누가 보장하는가? 그러나 겉으로는 믿는 척했다. 속으로는 교사들 몰래 자연과학 서적과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한 책들을 읽으며 기존의 가치를 뒤엎을 계획을 세웠다. 물론 속으로만이다. 하루의 컨디션을 위해선 교장의 배려를 받으며 되도록 누워 있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라 플레슈에서 혼자 수학에 몰두하기도 했다. 우주의 언어인 수학은 어른들의 거짓말이 끼어들 틈이 없는 세계다. 그는 라 플레슈의 기숙사에서 8년을 마음껏 누워 지내다가 졸업했다. 그리고는 예정대로 상쾌하게 스콜라 철학을 내다 버렸다.

 

"나는 스승들의 예속에서 벗어나도 좋을 나이에 이르자마자 그동안 배워온 공부를 완전히 버렸다."

 

동시에 데카르트는 남이 하는 말은 웬만해선 믿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이 까탈스러운 성격이 그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만들 줄은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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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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