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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개편을 맞아 2018년이 밝았다. 해넘이에 맞춰 개편을 잡은 게 아니다. 개편에 맞춰 해가 바뀐거다. 그게 죽돌 편집장의 우주적 내공이다.

암튼.

 

어떤 키워드들이 2018년 한국을 장식할 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하게 우려되는 상황은 있다. 많은 언론들과 세력들이, 2년 차를 맞은 문재인 정권 흠잡기에 박차를 가하는 것. 연말에 있었던 중국 방문과 그에 따른 홀대론 및 기자폭행 관련 논쟁들이 예고편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예고편을 차근차근 되짚어보면, 2018년을 가득 채우리라 예상되는 문재인 정권 흠잡기 열풍의 타겟이 누가될지 감이 잡힌다. 다름 아닌 ‘지지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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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권 지지자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엠블럼.

물론 이 엠블럼이 지지층 전체를 대표하는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그들의 문화적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지지자들이 타겟이 되는 이유는, 특유의 적극적인 정치참여 활동 때문이다. 이들의 활동은 온라인을 구심점으로 오프라인까지 넓게 퍼져나가는데, 집단지성을 가동하여 원하는 효과를 실제로 만들어 낸다.

 

지지자들의 대척점에 있는 언론이나 세력 입장에선 이 문화와 실질적 효과가 매우 불편하다. 그들 또한 현 정권 지지자들을 비판하는 칼럼을 게재하고, 논평을 내고, 개인 sns에 글을 올리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다.

 

이중 보수세력의 불편함은 신경쓰지 않기로 하자.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수순을 밟고 있기에 이번 정권 지지자들이 하루 세 끼 밥지어 먹는 모습만 봐도 배아플 게다. 그래서 이들은 어떤 기획을 덧붙이려 한다. 예를 들어 현 정권 지지자들의 정치참여 활동에 대해 보수 정치인들은 ‘온라인 테러’, ‘문자폭탄’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선사시대 언론이라 할 수 있는 <월간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음모론적 기획 기사를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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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탄핵에 이어 이명박 정권의 숱한 비리도 심상치 않게 파헤쳐지는 가운데, 뭔가 엮어서 물타기용 그림을 맞춰보려는, 개버릇 남 못 주는 구태의연함이라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십알단이나 국정원 개입 같은 공권력 개입의 구조적 체계를 찾아낼 수 없다. 애초에 현 정권 지지자들의 정치참여 활동에는 권력의 개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수세력의 반응은 별로 신경쓸 필요도 없고, 실제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 지들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하다. 즉, 실존하는 갈등이 아니다.
 
문제는 진보세력과의 대립국면이다. 이는 실존하는 갈등이고, 때때로 과열된다. 2018년에는 더욱 과열되리라 예상된다. 이 갈등이 결과적으로 괴멸해가는 보수세력에게 희망이 된다는 점에서, 현 정권의 실질적 국정운영에 대한 여론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대부분의 갈등구도가 그러하듯, 이 구도 또한 타협하기 어려운 각자의 논리와 입장이 존재하고, 그 논리와 입장이 성립하게 된 역사적 맥락이 있다. 큰 틀에서 같은 편끼리의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보통 이런 경우엔 새해맞이 칼럼에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면서 화합하자'고 대충 제안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한쪽이 틀렸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과 대척하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는 진보세력은 뭔가를 놓친 채 자가당착에 빠져있다. 그리고 그 자가당착은 시대착오적이다.

미리 한 가지 밝히자면 이 글엔, 자가당착에 빠졌던 나에 대한 반성이 담겨있다. 자가당착의 면면을 살펴보기 위해 기본적인 갈등구도의 배경을 보자.

 

 

 

1. 배경: 한국사회 진보세력은 소수이면서 소수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한 번도 진보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다.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이라면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들을 제외한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 진보정당은 집권은커녕 어떤 형태로는 두 자리 수의 지지율을 누려본 적이 없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세력은 명백한 소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누가 봐도 진보사상가의 길을 걸었던 이들의 상당수가 진보정당이 아닌 정당에 있다. 소위 운동권 출신의 좌파운동의 이력을 지닌 이들 중 많은 숫자가 진보정당이 아닌 정당에 속해있다. 김문수처럼 노선을 완전히 바꾼 경우도 있지만, 진보적 색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의 지지율은 진보세력 전체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없다.

실제로 제도권 정치세력을 제외한 사회영역에서 진보세력의 힘은 진보정당의 지지율에 비해 세다. 정당지지율로만 본다면 사회전반적으로 진보가 소수여야 하지만, 실제로 느껴지는 영향력은 그렇게 작지 않다는 얘기다. 언론 판에서 진보언론의 영향력이 국회에서 정의당이 지니는 영향력보다 훨씬 크듯이 말이다.
 
이 상충성은 한국 근현대사의 특수성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산업화 과정에서 독재정권의 의도적인 여론형성에 의해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들어졌고, 반작용으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확산된다. 정치/사회/문화 방면의 엘리트들과 노동단체들 사이에 진보사상이 보편화된다. 이에 더해 남북분단이라는 환경요인으로 엘리트 모두가 빨갱이로 몰리기 쉬운 상황이 더해진다.
 
그 결과, 근현대의 엘리트집단과 대중집단의 극단적 괴리로 인해, 정치/사회/문화 방면의 엘리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스스로 금기하게 된다. 실제 본인의 정체성은 극히 진보적이지만 구태여 천명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대중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진보적 색채를 줄여나가는 경우도 있다. 물론 끝까지 진보적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내용상 유사하지만 명목상으로는 분명히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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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우현과 안내상은 열혈 운동권 학생이었으나, 배우 활동 기간에는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혹은 드러낼 수 없었다.
 

 

내용상 진보세력에 해당되는 이들이 지니는 영향력의 총합은 적지 않지만, 명목상 진보세력은 극히 소수로 제한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 때문에 ‘현대 한국 사회에서 진보세력의 힘은 얼마나 큰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유동적이다. 정당 지지율로 본다면 힘이 매우 미비하지만 대중의 여론에 대한 실질적 영향력으로 본다면 의견이 갈릴 수 있다. 특히나 보수세력이 궁지에 몰려 상대적으로 진보에 대한 여론의 지지율이 상승된 상황인지라, 실제 영향력은 성장추세이기도 하다. 여전히 진보정당의 지지율 합계는 한 자리 수로 매우 낮지만 말이다.
 
이 점이, 현 정권 지지자들과 진보세력의 갈등 배경 중 하나다. 진보세력이 소수냐 아니냐, 약자냐 아니냐는 기준과 주관에 따라 충분히 뒤집어질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이 배경을 바탕으로, 갈등의 대척점과 구분기준을 보자.

 



2. 갈등의 구분선

앞서 말했듯, 한국에서의 ‘진보'라 함은 내용과 명목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이 갈등의 두 대척점 조차도 ‘진보'라는 타이틀에 얽혀있다. 명확한 구분 방법이 있다. 실제로 진보세력이 현 정권 지지자들에게 느끼는 불편함이 촉발된 요인이기도 하다. 바로, 유시민 작가와 김어준 총수다.

유시민 작가는 지난 대선 때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해서 '진보 어용지식인' 발언을 했다. 김어준 총수가 딴지일보 초창기부터 지속적으로 주장하던 ‘한국 진보의 문제'와도 이어진다. 여기에 더해서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의 상영과 비슷한 시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2002년 4월 27일 덕평수련원에서 지지자들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대화가 인터넷 상에서 회자되면서, 현 정권 지지자들의 정치참여 문화가 본격적으로 자리잡혔다.



https://youtu.be/iiOlp1lWneg

편집부 주) 당시 노사모 집행위였던 분의 제보로 정확한 영상을 올립니다.

 

 

바로 이 지점이, 현 정권 지지자들과 이들을 불편하게 보는 진보세력의 명확한 구분선이다. 현 정권 지지자들은 유 작가의 ‘어용지식인' 발언에 공감하고, 김 총수의 포지션을 높이 평가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키지 못한 후회를 바탕으로 현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를 불편하게 보는 진보세력은 유 작가의 발언에 대해 진보지식인이자 전 장관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말이라며 비판한다. 김 총수를 쉽게 인정하지 않아왔고, 그로 인해 김 총수는 진보언론인 중에서도 언더독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같은 맥락으로  '지켜야 한다'는 지지자들의 책임감에 공감하지 않는다.

대립의 양측이 지니는 명분을 기계적으로 평가하면 이렇게 정리된다. 현 정권은 지켜줘야 할 당위를 지니는 정권인가 아닌가. 상대가 누구든 까야할 때는 까겠다는 태도는 합리적인가 아닌가. 논의가 이 구도로만 진행된다면 아주 점잖은 토론이 되겠지만, 실제 논쟁은 그런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양측은 상대방이 명분 자체를 어겼다고 지적한다. 진보세력에서는 현 정권 지지자들의 구체적인 행동들이 때때로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지적한다. 반대로 지지자들은 진보세력이 전혀 객관적이지 않게, 편파적으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한다고 지적한다. 애초의 명분은 현 정권은 지켜야 하는 대상인가, 비판할 부분은 비판해야 할 대상인가의 대립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집권했다고 완장질 하는거 아님?’과 ‘합리적 비판은 개뿔 그냥 까고 싶은거 아님?’의 대립에 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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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연말에 있었던 홀대론과 기자 폭행 이슈는 대립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애초에 홀대론 보도는 엉성한 보수언론의 프레임을 그대로 차용해서 현 정권을 곤란하게 만드는 목적 이외에 어떤 정책적 지향이나 진보적 가치의 추구 같은 목적은 찾아보기 힘든 보도였다. 다른 나라가 버선발로 뛰어나와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떻게 정부의 진보적 가치추구 여부와 연결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그들이 현 정권의 행위 각각을 엄밀하게 평가하는 게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깔 게 있으면 깐다'가 아니라 ‘깔 수 있으면 깐다'에 가까운 셈이다. 편향적 비우호성의 모순성을 지적한 현 정권 지지자들은 뒤이은 기자 폭행사건에 대해 ‘맞아도 싼 기레기들'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모든 진보논객들이나 정치단체들이 편향적 비우호성을 지니는 건 아니다. 진보언론들의 저런 보도사례들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현 정권 지지자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중간지역에 끼어있다. 어떻게 ‘맞아도 싼 기레기들'이라는 식의 생각을 할 수 있냐고 현 정권 지지자들을 비판한다. 비판논리에는 ‘정권 좀 깠다고 기레기라니, 그럼 용비어천가라도 부르란 말이냐'는 식의 지적이 포함된다. 이 과정에서 논쟁이 격해지고 입장이 완고해진다.

한 사건을 예로 들었지만, 이러한 갈등은 대선 이전부터 이어져왔고, 대부분 유사한 구도를 보였다. 진보세력이 현 정권을 깐다. 지지자들이 진보세력을 깐다. 진보세력은 ‘그건 너무했지'라고 깐다. 지지자들은 ‘너무한 게 아니지'라며 반박한다. 얼핏 보면 진보언론도 어느 정도 공정성에 신경을 더 쓰고, 지지자들도 진보언론에 대한 비난수위를 낮추면 위아더월드적인 화합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나 자신도 지난 대선 직전까지 지니고 있던 태도다. 하지만 서두에 밝혔듯 그렇지 않다. 아직 중요한 맥락을 놓치고 있다. 한층 더 파고들어야한다.

 

 


3. 진보세력의 기본적 오류

배경을 다시 상기해보자. 명목상 진보세력은 소수다. 하지만 실질적 영향력은 소수라고만 볼 수 없다. 여기서 위의 실질적 갈등구도를 연결시켜보자. 현 정권을 까는 진보세력을 소수세력으로 볼 것이냐 아니냐가 갈등구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어떤 기자 한 명을 사석에서 만나 ‘기레기시네요'라고 말하는 건 싸우자는 얘기다. 그만큼 모욕적인 단어이지만 우리는 조중동 기자들이나 연예찌라시 기자들에게 '기레기'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 대해 큰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두 가지다. 일단 기자라는 직업이 보여줘야 할 공정성을 보여주지 않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기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약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자들은 지면이라는, 남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걸로 돈을 벌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지닌다. 상대적 권력을 지닌 자가 권력을 온당하게 쓰지 않는 것에 대해, 권력을 지니지 못한 자가 모욕적인 호칭을 붙이는 건 인신공격이 아니라 풍자의 범위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언론이 소수의 의견을 대변하며 사회적 약자의 지위를 지닌다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그들의 지면은 영향력이 작으므로 그에 대한 접근성을 ‘권력'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 소수매체의 기자는 어느 정도 헛발질을 하더라도 주어진 여건이 척박하다는 면에서 정상참작이 된다. 그에게 모욕적 호칭을 붙이는 건 풍자가 아니라 소수에 대한 박해에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현재의 진보언론이 소수 약자냐 아니냐는 그들에 대한 ‘기레기'라는 호칭이 지니는 의미에 차이를 일으키며, 헛발질에 대한 정상참작의 정도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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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약자와 다수 강자에 대한 대응이 다른 것은, 최소한 진보세력 내에서는 인지상정

 

여기서 중간정리를 해보자. 진보세력은 스스로를 소수에 가깝게 인식한다. 하지만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현 정권 지지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진보세력이 소수 약자에 가까운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이다.

또 한 가지의 쟁점은 현 정권 지지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이들은 소수 약자인가 아닌가. 문재인 정권의 지지율만 보자면 내내 7~80%를 유지했고 연말에 다소 줄어들었다는 수치마저도 70%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였다. 여당의 지지율도 거의 50%를 유지한다. 진보세력은 이 점에 주목하고 현 정권 지지자들을 다수 세력에 속해있다고 본다. 하지만 현 정권 지지자들은 스스로를 기득권 세력이라 보지 않는다.

두 가지에 대한 진보세력의 관점을 조합하면 이런 논리로 이어진다. 진보세력 스스로는 소수 약자인데, 다수인 현 정권 지지자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건 소수에 대한 상대적 다수의 폭력적 억압이라는 것. 이러한 결론이 현 정권 지지자들에게 진보세력이 느끼는 불편함에 내재된 첫 번째 오류다.

왜 틀렸는지를 기술하기 전에 두 번째 오류를 보자. 위와 같은 논리의 전제, 즉,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소수 약자로서의 진보세력에 대해서는, 주류 다수세력과는 다른 배려가 필요하다는 전제는 다분히 진보세력 내부에서 통용될 전제다. 진보세력의 외부에서 보자면, 그 소수성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소수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논리 자체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논리다. 즉, 진보세력의 현상파악은 진보세력 내부의 논리를 근거로 성립된다. 진보세력은 현 정권과 그 지지자들을 진보적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두 번째 오류는, 진보세력은 이들을 외부의 대상으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자기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전제로 이들을 비판한다.

이 두 가지 오류를 면밀히 디비기 위해서는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 그 작업 내용이, 진보세력이 오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슬슬 자가당착의 실체를 열어보자.

 

 


4. 오류의 근원 - 시대착오

이 시대의 젊은이들, 10대에서 20대, 나아가서는 3~40대까지도, 아직 사회에서의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그들이 버텨야 하는 치열함은 기성세대가 거쳐온 그것과는 다르다. 어떻게든, 어쨌든 먹고살고 있는 세대는, 이 시대에 삶 자체가 도전인 세대가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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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서울신문
 

 

역사적 탄핵의 시작을 상기해보자. 시작점은 ‘이화여대가 쏘아올린 공'이었다. 돌이켜보자. 이대생들이 시위과정에서 밝혀낸 정유라의 부정입학특례 관련문제들은, 박근혜 일당의 전체 악행에 비해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더욱 심각한 악행들은 꼭꼭 숨겨진 정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드러나있었다. 하지만 이대생들의 시위는 초기에 있었던 비아냥 여론을 이겨내고서 끝끝내 한국 현대사에 남을만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를 더 치열하게 제기한 이들이, 더 큰 문제를 보고도 그러려니 넘어갔던 이들을 압도하는 역사적 진보를 촉발했다.

이에 대해 이대생들이 작은 문제도 넘어가지 않는 엄정한 도덕성을 지녔다고 평가하는 건 불성실한 평가다. 이들에게 그 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학생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학생들의 치열한 노력을 가벼이 여기는 학교권력이 학생들에게 남긴 좌절감은, 기성세대가 수백억이 오가는 비리현장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좌절에 비해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이다. 더 심각한 좌절감이, 더 치열한 투쟁으로 이어졌다고 봐야한다.

말하자면 이들이 맞서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기성세대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 구분은, 앞서 논의했던 현 정권 지지자들과 진보세력의 주류를 구성하는 집단과 어느 정도 합치한다.

현 정권 지지자들은 20~40대가 주축을 이루고, 노무현, 문재인, 유시민, 김어준 등의 특정 인물들을 좋아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세력적 연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의당이 떨어져나오면서, 기존 민주당의 지역정서 기반 지지층이나 전통적인 민주당 정치세력이 상당수 이탈하여 더더욱 다른 세력의 개입이 없다. 이들은 철저히 ‘개인들'이다.

반면 이들과 대척하는 진보세력은 몇몇 확고한 세력의 연계로 구심점을 이룬다. 한경오 언론,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 정의당 등 정치단체. 가장 어리다고 할 수 있는 오마이뉴스도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텼다. 각 단체들의 주요 지도층은 60년대 생이며, 좀 있으면 60대다. 더 이상 젊은 세력이라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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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의 사면 배제에 대해 정의당이 ‘쭉정이 사면'이라는 논평을 냈고, 한겨레에서 기사화했다

 

이 맥락에서, 앞서 논의한 진보세력의 첫 번째 오류가 성립된다. 현 정권을 비판하는 한경오, 민노총, 정의당은 서로 연계된 채 수십년을 함께 한 세력인 반면, 이들에 대척하는 현 정권 지지자들은 젊은 개인들이다. 젊은 개인들이 보기에 이 대립은, 조직화된 세력과 풀뿌리 개인들의 대립이지 소수 약자인 진보세력과 다수 권력인 현 정권의 대립이 아니다. 그렇다고 진보세력을 완전히 압도적인 권력을 지닌 강자라고 보자는 건 아니다. 다만 확실한 건, 진보세력이 스스로 자평하는 소수약자 대 다수강자 구도를 객관적 사실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약자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두 집단이 지니는 구성에서의 차이는, 두 번째 오류로 이어진다. 진보세력은 수십년 간 조직화되고 연대해온 집단들의 조합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내부담론의 역사성을 지닌다. 이는 명목상 진보세력 밖으로도 영향을 끼쳐 일종의 ‘한국 진보의 주류담론'을 이룬다. 하지만 현 정권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담론에 익숙하지도 않고, 공감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진보 내부의 주류 담론을 전제로 한 비평에 동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담론 자체가 구태의연하다는 의견을 지닌다.

현 시점에서의 상호간 비판은 같은 배경과 전제를 바탕으로 한 논리싸움이 아니다. 서로 다른 배경과 전제, 지향점을 지닌 완전히 다른 집단 간의 대립으로 접근해야 한다. 현 정권 지지자들의 상당수, 특히 대립각을 세운 이들의 대부분은 기존 진보세력과 다른 세대로 구성된 다른 집단인 것이다. 진보세력이 체계화된 조직과 성장세를 보이는 영향력, 오랜 시간 정교화된 담론이라는 힘을 지닌다면, 현 정권 지지자들은 집권한 정권 조직과 온라인에 대한 높은 이해, 기민한 행동력이라는 힘을 지닌다. 이들은 마르크스와 레닌과 체와 마오의 사상적 차이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이, 당장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에 실질적인 역할을 해줄 정치세력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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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포, 7포를 넘어 N포 세대가 돼버린 이들. 이들에게 7~80년대식 진보사상은 당연히 관심 밖이다.
 

 

여기서 진보세력이, 이들을 지난 40년의 한국 현대사를 버텨오면서 만나온 다양한 정치집단들 중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이들은 어떤 목적으로 모인 시민단체이거나, 다른 사상으로 뭉친 정치집단이 아니다. 7~80년대에 잘 살아보려고 대기업에 충성한 사람들, 90년대에 IMF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의 연장선 상에서,  2000년대라는 시대의 양극화 벽에 숨막혀하는 사람들 중 다수이다. 맞서 싸워 이겨야 하는 상대방이 아니라, 진보세력 스스로가 진보의 가치를 세움으로써 더 나은 삶을 누릴 대상이 되는, 바로 그 국민들이다.

 

이 상황을 오판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진보세력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대와 세대의 변천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민중의 삶을 우선시해왔는데, 자신들이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보이므로 그들을 민중이 아니라 다른 적대세력이라고 오해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민중이 맞다. 그저 그만큼 시대가 변했고, 기존의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대가 성인이 되었을 뿐이다.


 

5. 서운함. 실책의 유형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오랜 시간 싸워온 진보세력으로서는, 하나의 꼰대집단으로 여겨지는 현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보수꼴통들만큼 챙길 것 챙기고 살아온 것도 아니고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일부 사람들은 스스로의 역사적 기여도를 강조하며 반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반발은 서운함에 대한 감정의 표현일 수는 있어도, 논리적 반박이 될 수는 없다.


실책의 유형을 3가지 정도로 요약해보자.

 

1) 까방권은 없다

공로가 ‘니들이 뭔데 이런 우리를 까'라는 논리로 사용될 수는 없다. 진보세력의 주축을 구성하는 집단 및 지도층의 공로는 부정할 수 없으나, 진보세력의 영원한 까방권으로 이어져야 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진보세력은 그렇게 누구든 깔 수 있다는 태도로 현 정권을 까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진보세력이 현 정권을 깔 권리만 있고, 지지자들이 진보세력을 깔 권리는 없을 리 없다.


 

2) 체리피커도 없다

집권에 이른 현 정권과 지지자들에 대해, 진보세력이 이뤄둔 성과의 혜택을 차지한 '체리피커(실속만 차리는 소비자)'라는 논리를 세울 수도 없다. 그런 논리가 성립하려면 산업화 시대를 겪은 이전 세대가 이룬 경제적 성과의 혜택을 진보세력 세대가 차지했다는 논리까지도 성립해버린다. 이런 식의 체리피커 논리가 성립할 수 없는 이유는 모든 성과의 실질적 주체가 국민 전체이기 때문이다. 산업화의 주체가 박정희 전두환이 아닌 당시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을 했던 노동자이듯, 민주화의 실질적 주체는 당시 민주화 세력에 공감하고 함께 일어났던 시민들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국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마주한 역사를 함께 만들어나간 그 사람들이다. 박사모와 어버이연합이 아닌 이상에야 체리피커와 기여자를 나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3) 조직이 아니다

현 정권 지지자들은 어떤 다른 의도에 의해 노무현과 문재인을 지지하기로 하고서 이번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게 아니다. 어느 때보다 다양했던 선택지 속에서, 자신들의 팍팍한 삶에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 줄 도구로써, 다른 모두가 아닌 문재인을 선택한 것이다. 절대다수의 개인들이 과거 노사모나 유시민 작가, 김어준 총수와 같은 사람들의 의견에 공감하였기 때문에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지, 노사모가 어떤 전략을 세워 세력을 확장한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 만약 그런 공감을 갖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이 청와대에 있는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저 공감대를 갖는 국민의 다수일 뿐, 다른 의도로 집합된 정치세력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 진보세력의 언론이나 논객들이 ‘문재인은 지지자들을 자제시키라'는 의견을 내는 것은 스스로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이들은 문재인이 이끄는 조직이 아니다. 현 시대의 본질인 다수의 시민들이고, 문재인을 선택한 것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기본 원칙을 모를 리 없을진데, 대통령의 한마디로 국민들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다는 발상을 했다는 자체로 사실상 진보라 자평할 자격이 없다.



 

6. 진보가 이해해주길 기대하는 것

다시금 강조하지만 진보세력이 한국 현대사에 남긴 공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만큼 놓치고 있던 부분을 깨닫고 실책을 이어가지 않길 바란다. 무엇보다도, 손윗세대가 젊은 세대와 투닥거리기 보다는 좀 더 아량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현 정권의 지지자 전부가 완전 무결하고 완벽하진 않을 것이다. 모든 집단에는 이상행동을 하거나 쓸데없이 과격한 이들이 있듯이, 분명 그런 모습들이 순간순간 보일 수는 있다. 현 정권 지지자들이든 진보세력이든 마찬가지다. 누가 좀 쎄게 했다는 사실이 집단을 대표할 수는 없다. 
 같은 논리라면 진보언론이나 진보집단 내에서의 비리, 성추문, 폭력 사례는 차고 넘친다.

이럴 때에 어떤 특정한 이상행동을 책 잡아서 전체 집단을 매도하는 모습 만큼은 보여주지 않았으면 한다. 자극적인 것에 민감한 한국 온라인 여론 특성상, 그런 식의 전략을 통해 불편한 현 정권 지지자들에게 타격을 주고 혼내주고 싶은 유혹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뒷모습은 군사독재 세력이 과거 진보세력에게 행했던 방식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 정권에 대한 뜨거운 지지는, 앞서 말했든 다른 정치적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진보의 입장에서 보기에 맹목적인 지지처럼 보인다면, 대부분의 경우 다른 의도를 가져서가 아니라, 그만큼 정권에 기대하는 바가 절박하기 때문이다. 이 정권이 여론에 휘둘려 원래 하고자 했던 행동을 하지 못했을 때, 지지자들 개개인이 받아야 할 타격이 실질적으로 너무 크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라고 모든 정책이 완벽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최악은 그 정책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 자체를 시행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만큼 당장 현실을 버티기 힘든 것이다.

다시 말해, 현 정권에 대한 뜨거운 지지는 그 세대의 절박함이다. 절박함의 대상은 어떤 고상한 가치나 사상이 아니라 그저 ‘삶' 자체다.

가치에 대한 절박함으로 청춘을 불태웠던 진보에게

 

새로운 세대의 더 원초적인 ‘삶'에 대한 절박함을 헤아려주길

 

2018년을 맞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