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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關原) 전투, 이어지는 오사카 겨울, 여름의 진으로 전국시대는 끝이 났다. 이제 일본의 주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넘어갔고, 에도 막부 시대가 열렸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 주목해 봐야 하는 게 바로 쵸닌(町人 : 정인)계층이다. 우리로 치자면, 조선 시대 중인 계층, 유럽으로 보자면 부르조아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상인 계층은 일본의 ‘성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재들이다.

 

150여 년간 이어진 전국시대가 끝이 나자, 이들의 존재감이 서서히 떠오른다. 특정 영주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상거래를 할 수 있었고, 도쿠가와 막부가 강력한 중앙집권화(참근교대 만으로도 영주에게는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를 추진하는 덕분에 막대한 부를 쌓게 된  쵸닌 계층.

 

17~18세기 우리나라에서 중인계층을 중심으로 거대한 상인 세력이 등장했고, 유럽에서는 부르조아가 등장했다. 이들은 사회적 성공과 부를 얻은 다음 자연스럽게 이에 걸맞는 사회적 발언권을 얻으려 노력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중인 계층이 사회적 발언권을 얻으려 노력한 경우는 없었지만, 숙종 시절 장희빈이 중전의 자리에 오른 걸로 당시 중인 계층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장희빈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중인 계층 왕비였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떠했을까?

 

당시 일본의 실질적인 경제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쵸닌 계층이었다. 이들은 경제계를 좌지우지 하며 명실상부한 실력자로 떠올랐다. 반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 중에서 사(士)에 해당하던 무사 계층은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일본 사극에 종종 등장하는 가난한 사무라이 이야기는 과장된 게 아니다. 겉으로는 대우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상인에게 돈을 빌렸다가 이자를 갚지 못해 핍박을 받곤 했다. 에도 시절 지방의 어지간한 다이묘들도 상인에게 돈을 빌리고 빚을 갚지 못해 곤란해 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다. 다이묘들의 주된 수익원이 ‘쌀’이었기에 곡물가의 변동, 흉년과 같은 천재지변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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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변화를 미처 따라가지 못해 영지와 재산을 날린 무사들부터 시작해 사기를 당하는 영주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바야흐로 ‘돈’의 세계가 열리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돈이 권력으로 치환되지는 못했다. 지배층인 무사계급은 칼을 들고 서 있었고, 상인들은 정치적 참여가 원천적으로 막혀 있었다.

 

쵸닌 계층은 쌓아놓은 돈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이 고민은 곧 해결된다.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오사카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이하라 사이카쿠는 돈 대신 새로운 세계에 눈 뜨게 된다. 바로 ‘문학’이다.

 

일본 근세 소설 작가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 그의 작품은 좋게 말하면,

 

“17세기 일본의 시대관을 자세히 묘사한 작품”

 

이라고 볼 수 있고, 문학사적 관점을 떠나 바라본다면

 

“야설”

 

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작품으로 비교하자면, ‘강안남자’라고 봐야 할까? 돈과 섹스를 주제로 현세에 충실한 당대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의 대표작인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은 일본 소설의 분기점이 됐다.

 

우키요조시(浮世草子)의 등장이다. 세간에서는 이를 ‘서민소설’이라고도 하는데, 문학적 감성이 무딘 이라면, 그냥 ‘야설’로 봐도 된다. 이하라 사이카쿠는 서민의 ‘성생활’과 ‘돈벌이’에 천착해 희대의 ‘괴작’을 만들어 낸 거다.

 

역시나 문학은 ‘돈’이 있어야 가능한 건가? 그러나 이런 조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야설이 나왔다면, ‘야한 그림’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

 

 

우키요에(浮世絵)의 등장

 

태양의 화가 ‘고흐’와 현대 음악의 시작을 알렸던 ‘드뷔시’에게 엄청난 영감을 건네 준 그림이 있었다. 자포니즘(Japonism)의 등장이다. 19세기 인상파들은 일본에서 건너온 목판화 몇 장에 충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영감을 얻어 수많은 작품들을 양산해 낸다.

 

고흐의 경우에는 이 목판화를 모사할 정도였고, 드뷔시의 경우에는 가쓰시카 호쿠사이 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에서 영감을 얻어 교향곡 '바다'를 완성시켰다.

 

이 목판화의 이름은 바로 우키요에(浮世絵)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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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미건조하게 이 우키요에를 설명하자면,

 

“에도시대 민간에 퍼진 목판화”

 

라고 볼 수 있지만, 목판화로 보기엔 그 ‘의미’가 너무 크다. 일단 생각해 봐야 할 게 우키요에란 이름이다. 우키요(浮世)란 단어의 뜻은, ‘저 세상’에 대응하는 ‘이 세상’이란 뜻이다. 이걸 좀 더 깊게 설명하자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이 한 세상 즐겁게 살다 가자.”

 

라고 할 수 있다. 느낌이 오는가? 한 세상 즐겁게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뭘까? 바로 ‘욕망’의 발현이다. 우키요에는 이 욕망의 발현에 충실한 그림이었다. 한 마디로 춘화(春畵)였다(춘화가 아닌 것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춘화였다).

 

쵸닌 계층들은 더 이상의 신분 상승이 어렵다는 걸 확인하고, 권력 대신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된다. 아니, 이런 사상이 아니어도 괜찮다. 기본적으로 돈이 있고, 상업자본이 형성된 이후에야 문화 발전이 이루어진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숙종 시절 조선은 초기형태의 자본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조선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이앙법의 등장으로 생산력은 증가했는데, 노동력은 감소하게 된다.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은 도시로 나와 장사를 시작한다. 만약, 이 시절 우리가 임진왜란을 겪지 않았다면, 자본의 대규모 이동이나 장사 같은 건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조선은 ‘화폐경제 시스템’을 체득하게 된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에서의 거래는 ‘물물거래’였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명나라 군이 파병 오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명나라 군은 매월 1냥 50전씩 월급을 받았는데, 이걸 가지고 현지에서 필요한 걸 사야했다. 여기에 더해 명나라 군을 따라 들어온 ‘군상’들이 명나라 군들이 필요한 물품들. 즉, 군량이나 말 먹이부터 시작해 무기까지 조달해야 했는데, 조선인들에게 은을 줘도 도무지 쓸 줄을 몰라 했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 안에서 1년 동안 거래되는 은의 양이 고작 수 천 냥 수준이었는데, 이제 한 달 거래량이 최소 7만 5천냥이 됐다.

 

조선은 임진왜란 덕분에 화폐경제시스템을 이해하게 됐다. 여기에 생산력이 결합하니 초기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게 됐고, 숙종 시절엔 전국적으로 장이 서게 됐고 어린아이도 좌판을 열어 장사하는 상황이 된다.

 

돈이 흐르게 되자 문화도 발전하게 됐다.

 

숙종 시절 판소리 12마당이 정립된 거나 숙종 이후 영조, 정조 시절에 ‘조선의 르네상스’라 하는 진경(眞景) 문화가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때도 김홍도, 신윤복 등의 이름 있는 화가들은 산수화도 그렸지만, 춘화(春畵)를 그렸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쵸닌 계층들은 돈을 가지고 ‘문화’ 투자했다. 글로는 우키요조시(浮世草子), 그림으로는 우키요에(浮世絵), 종합예술로는 가부키(かぶき)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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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닌 계층들은 가부키에 열광했다.

 

지금은 일본의 ‘고급 전통문화’로 대우 받고 있지만, 그 시작은 ‘음란’했다. 이즈모 신사의 무녀였던 이즈모노 오쿠니(出雲阿国)가 신사의 기부금 모금을 위해 춤을 췄는데, 그 춤이 ‘섹시’했다. 여기에 착안해 극적인 요소를 집어넣고, 좀 더 ‘찐하게’ 만들었다.

 

쵸닌들은 열광했다. 이 당시 가부키의 주요 내용은 쵸닌과 게이샤의 애정행각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내용도 야했지만, 무대 뒤의 이야기도 야했다.

 

애초에 유녀(창녀)들이 연기했기에 풍기문란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이렇게 되자 막부가 이를 금지시키게 되고, 결국 여자연예인의 등장을 금지시키게 된다. 그러자 어린 소년들이 대타로 등장한다. 이른바 와카슈 가부키(若衆歌舞伎)였다.

 

여자를 없애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제는 동성애가 횡행하게 된다. 이후 가부키는 막부에 의해 또다시 금지되고, 해금됐는데 그 이유는 거의 대부분 ‘음란함’ 때문이었고, 허가의 조건도 이 음란함을 제거하는 데 초점이 맞췄다.

 

막부가 가부키를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 대중(그 중에서 쵸닌들의)의 열광적인 호응 때문이었다. 어느새 가부키는 쵸닌들과 대중들의 대표적인 유흥이 되었고, 막부도 이런 상황을 고려해 단서 조항을 달고 해금을 했던 거다.

 

돈은 있지만, 이 돈으로 신분을 살 수 없었던 쵸닌들은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고, 권력 대신 ‘음란함’을 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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