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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칸타로(鈴木貫太郎) 총리의 ‘묵살’ 발언을 접한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 외무장관은 묵살 발언이 가져올 파장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미국과 영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희망은 사라졌다. 이제 의지할 곳이란 소련밖에 없었다.

 

 “소련을 통한 종전교섭만이 일본의 유일한 희망이다. 소련과의 교섭을 서둘러라!”

 

도고는 소련주재 일본대사인 사토 나오타케에게 교섭을 독촉하는 전문을 계속해 보냈다. 이때까지 일본은 소련이란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에 있던 사토는 희망 대신 현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고 외무장관의 독촉에 사토는 ‘현실’을 말했다.

 

1) 포츠담선언은 당연히 소련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영미 양국은 고노에 특사 건에 대하여 아마 통보를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포츠담선언은 그런 일본의 태도에 대한 삼국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가장 중요한 점은 포츠담선언은 일본에게 항복을 강요하는 것이며, 스탈린도 이를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유혈을 피해야 한다는 폐하의 의중을 받들어, 스탈린을 세계평화의 애창자로 추켜세운다는 의도도 좋지만, 영미 측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스탈린은 이미 일본이 항복할 경우, 만주, 중국 및 조선에 있어 영미 양국을 제압하여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계산을 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힘도 갖추고 있는 그가 지금 새삼스럽게 일본과 협정을 체결하려고 할지도 의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대신의 의도와 이쪽의 실제가 심히 엇갈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토 대사가 일본 본국의 도고 시게노리 외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이다. 냉혹한 현실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고 해야 할까?

 

1항의 고노에 특사에 관한 정보가 영미 양국과 공유되고 있다는 판단과 포츠담 선언이 삼국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란 부분은 당시 일본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린 선언이다.

 

2항은 더욱 더 냉철한데, 스탈린은 이미 일본 항복 후를 대비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럴 의지와 능력을 갖춘 스탈린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일본과 협정을 맺을 이유가 없다는 냉정한 상황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건 외교관이 아니더라도 눈치 챌 수 있는 이야기다. 거래를 하는데, 상대방의 ‘호의’에만 기대 진행한다면 그 거래가 성사될까? 국제정치는 냉혹한 ‘거래’의 현장이다. 상대방에게 뭔가를 요구하려면, 그에 상응할 만한 ‘재료’가 있어야지만, 말을 섞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시 일본에게는 아무런 거래 재료가 없었다.

 

사토의 통찰력이 대단하다기 보다는, 당시 일본 외교의 수준이 그 만큼 떨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사토의 속은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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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소련은 연합국과 거래를 하고 있었고, 다 쓰러져가는 일본과 ‘귀찮은 협상’을 하기보다는 일본을 먹어버리는 게 훨씬 간단했다. 소련은 그럴 힘도 의지도, 이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본국에서는 소련이 마지막 순간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전후 세계질서를 재편하려고 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붙잡고 있었다.

 

협상은 고사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만 하지 않아도 다행인 상황. 사토는 본국에 계속 전문을 날린다.

 

“하루라도 빨리 일본이 선언을 수락한다고 통보하면 항복조건이 완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완화되더라도 독일의 경우에서 보듯이 전쟁책임자의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전쟁책임자가 진정한 우국지사라면 마음을 가다듬고 희생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사토의 간청이다.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일본을 살릴 수 있다고 사토는 굳게 믿고 있었다. 아울러 포츠담 선언 13개 항목 중 유일하게 걸리는 하나. 즉, 전쟁지도부가 전범재판에 회부되는 것에 대해서 솔직한 의견을 피력한다. 이때쯤 되면, 일본의 패전은 시간의 문제일 뿐 이미 확정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전쟁지도부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패전 후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패망 이후 차례차례 자결을 한 이들도 ‘꽤’ 있다. 끝까지 결사항전을 외쳤던 육군장관 아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 같은 경우에는 마지막까지 본토결전을 말하다 히로히토 덴노가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는 걸 보고,

 

“나는 덴노 폐하께 죽음으로써 사죄한다.”

 

라는 유언장을 쓰고 할복을 한다(‘일본 패망 하루 전’이란 영화를 보면, 당시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아나미 고레치카와 같이 나름의 ‘책임’을 진 인물도 있지만,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는 전쟁이 끝난 지 한 달 가까이 지날 때까지 꿋꿋이 살아 있었다. 당시 일본 국민들은 젊은 병사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뻔뻔히 살아남았다고(덤으로 그의 아들 셋도 살아남았다), 죽음으로 사죄하라는 수만 장의 편지를 받는다.

 

전범재판에 회부되면 100% 사형이 확정되는 상황임에도 그는 할복하지 않았다. 결국 전범재판에 회부되기 직전인 1945년 9월 11일이 돼서야 권총으로 자살시도를 한다. 그리고 실패한다. 보통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면, 총구를 입에 물거나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미는데, 도조는 가슴에도 총을 쐈다. 그 결과 자살은 실패했고, 때마침 들이닥친 미군 헌병들의 손에 끌려 병원으로 실려 간다. 이 때문에 도조의 자살은 자살미수가 아니라 ‘쇼’라는 의견이 많다. 죽기는 싫은데, 죽는 시늉은 해야겠기에 미군 헌병이 들이닥치는 타이밍에 맞춰 권총으로 가슴을 쏜 거라는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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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미와 도조의 예처럼 전후 일본 전쟁지도부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고 이건 그들에게 엄청난 압박이었다. 사토는 전범재판은 피할 수 없다는 걸, 어차피 처벌을 받을 거라면 일본을 위해 지금 선택을 하는 것이 옳다는 걸 역설한 거다.

 

이 전문을 보낸 게 1945년 8월 5일이었다.

 

 

 

원폭 떨어지다

 

사토가 전문을 보낸 하루 뒤인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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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통령이 원자폭탄 투하 명령서에 사인한 것이 1945년 8월 3일이었다. 이 당시 미국은 ‘작심’한 상황이었다.

 

진주만의 기습공격, 남태평야에서 보여준 일본군의 광신적인 모습, 거기에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희생. 그럼에도 포츠담 선언에서 최대한 ‘배려’를 해줬건만, 일본은 이 마저도 ‘묵살’했다.

 

당시 미국은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기 위해 일본의 항구에 기뢰를 깔고, 곡창지대에 제초제를 뿌려 일본을 굶겨 죽이자는 여론까지 대두될 정도였다(꽤 많은 지지를 얻었다). 계획만으로 존재했던 ‘몰락작전(Operation Downfall)’을 보면, 육해공 총합 백 만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는데, 항공모함 75척, 구축함 380척, 호위함 400척, 폭격기 7,500대라는 어마어마한 물량을 쏟아 부울 예정이었다.

 

이 작전의 핵심은 도쿄 부근에 병력을 상륙 시키는 것인데, 상륙을 전후로 해서 상륙지점을 제외한 일본의 주요 도시 10개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작전이 개시된다면, 1945년 말 혹은 1946년 초였는데, 이때까지 준비되는 원자폭탄 7발을 다 사용할 기세였다), 50여개 중소도시에 생화학 가스를 살포, 전 일본 국토에 6천여 대의 폭격기로 융단 폭격, 일본 곡창지대에 제초제를 살포 농업생산을 마비시키는 등등 말 그대로 일본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리겠다는 선언이었다.

 

그 실행 가능성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지만(능력은 충분히 된다), 당시 미국의 분위기를 확인할 수는 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만’ 떨어진 건 어쩌면 미국의 ‘배려’였다. 만약 도시 기능이 마비된 상태에서 2차로 소이탄 폭격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정치적 효과를 위해선 깔끔하게 1발로 끝내는 게 더 효과적이지만, 군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2차로 소이탄 폭격을 했다면 히로시마는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거다. 아니, 원자폭탄 한 발로도 충분히 도시기능은 마비됐다.

 

당시 히로시마는 인구가 35만 명에 달하는, 일본에서 8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러나 원자폭탄 한 발로 도시 인구의 반 가까이가 사라졌다.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당시 주둔하고 있던 군인 2만 명과 민간인이 7만에서 14만 명 가까이 사망했다.

 

당시 히로시마에 주둔 중이었던 일본군 통신병 한 명은 폭발 당시 지하벙커에 있어서 살아남았다. 그는 즉각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연대본부에 전화로 히로시마 상황을 보고 했다.

 

“히로시마 전멸”

 

그러나 이 보고는 대본영에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그 누구도 폭탄 한 발에 히로시마가 전멸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 인근의 구레 해군기지에 있었던 해군들은 히로시마 시내의 육군 탄약고가 폭발해 버섯구름이 일어난 줄 알 정도였다.

 

출근시간에 떨어진 폭탄, 게다가 편대가 아닌 단기로 날아온 폭격기를 보고 기상관측기로 지레짐작해 대피호로도 들어가지 않았기에 피해는 더 커졌다. 문제는 2차 피해였다. 폭격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사망한 상태에서 화상과 방사능에 의한 피부 괴사로 환자들은 죽어나갔다. 히로시마 인근의 의료진들이 황급히 달려왔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가 내놓을 수 있는 대책은 한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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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을 입으면 간장을 바르거나 소금물에 적신 헝겊으로 찜질할 것."

 

2차 투하에 대비한 지침이었다. 군부는 원자폭탄의 투하에 대해서 일반인들에게 함구했다. 심지어 투하 당일,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 질문한 도고 시게노리 외무장관에게도,

 

“강력한 위력의 보통 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라며 거짓말을 했다.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16시간 뒤 트루먼은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진주만에서 하늘로부터 전쟁을 개시 했다. 그리고 그들은 몇 배나 되는 보복을 받았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략) 그것은 원자폭탄이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적인 힘을 동력화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일본 어느 도시에 있는 생산시설도 더 신속하고 완전하게 제거할 준비가 되어 있다.(중략) 만약 그들이 우리의 요구를 거부하면, 하늘로부터 역사상 유례가 없는 파괴의 소나기를 맞을 것이다.”

 

엄청난 파괴력의 ‘신무기’ 앞에서 일본정부와 일본군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껏해야 조사단을 파견하는 것 정도였다. 이화학 연구소의 니시나 요시오(仁科 芳雄 :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길러낸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이 ‘원자폭탄’임을 확인해 줬다.

 

트루먼의 성명이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군부는 ‘강력한 위력의 폭탄’이라고 외무장관에게 거짓말을 했던 거다. 이미, 트루먼의 성명, 니시나 요시오 박사의 확인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군부의 변명이 이어졌다.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국민에게 알리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사기는 떨어질 게 분명하다는 논리. 정보 통제를 해야 한다는 근거였다. 덕분에 당시 일본 언론은 원자폭탄의 투하 소식을 보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원자폭탄이 떨어지자마자 도고 시게노리는 소련주재 일본대사인 사토에게 전문을 보냈다. 상황이 심각하니 소련의 태도를 요구하라는(즉, 종전 중재를 확인해 달라는) 전문을 날린다. 그러나 돌아온 건 또 다른 ‘폭탄’이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난 이틀 뒤인 1945년 8월 8일 소련주재 일본 대사인 사토 나오타케는 소련의 외무장관인 몰로토프로부터 선전포고문을 전달 받았다.

 

“(상략) 일본이 항복을 거부함에 따라 연합국은,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함으로써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고, 더 이상 희생자를 내지 않도록 노력하여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제안해 왔다. (중략) 또한 일본 국민에게도 독일 국민이 받은 것과 같은 철저한 위험과 파괴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입장에 의해, 소련 정부는 내일, 즉 8월 9일부터 일본과 전쟁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을 선언한다.”

 

사토가 선전포고문을 전달받은 시점은 일본 시각으로 1945년 8월 9일 자정이었다. 소련은 선전포고 직후 물밀 듯이 만주로 밀려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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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 팔목 비틀기라고 해야 할까? 1939년 할힐골 전투에서도 판판히 깨졌던 게 일본군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4년간의 독소전을 통해 ‘기동전’과 ‘기갑전투’의 기초부터 완성까지 마스터한 소련군이 내려온 거다.

 

하루 이틀 준비한 전쟁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철저한 준비를 시켰다. 당시 관동군의 전력은 그래도 75만 명이나 됐다. 그러나 그 준비상태와 장비 수준은 열약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소련군과 관동군의 전력차이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였다. 병력, 탱크, 항공기, 대포 등의 숫자는(질적인 비교는 논외로 치더라도) 작게는 두 배, 많게는 4배 이상 차이가 났다.

 

(소총탄에도 뚫리는 치하 전차를 들고 싸우는 일본군과 전면장갑만 120미리에 달하는 스탈린 중전차가 맞붙는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까? 게다가 전차병들은 4년간 독일군에게 철저히 훈련받은 기갑전의 달인이라면?)

 

스탈린은 150여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관동군을 유린했다. 일주일 만에 거의 1천 킬로미터를 주파할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관동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토가 소련의 선전포고문을 받고 몇 시간 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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