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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나가는 중,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UAE사태에 대한 청탁이다. 올해부터는 가급적 ‘무거운’ 기사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기에 완곡히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나보다는 좀 더 중량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했지만, 간단히 무시당했다.

 

이 기사는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의견임을 전제로 한다. UAE 사태(사태가 맞는지 모르겠지만)에 관한 정치적 해석이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접근은 최대한 배제하고, 지금 UAE가 어떤 상황인지에 관한 판단준거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이 기사를 반쯤 썼을 때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UAE와 비밀 군사협정을 맺은 거였다. 게다가 그 내용은 아랍에미리트가 유사시 자동개입을 하는 내용이다. 이 정도면 상호방위조약과 같은 거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헌법 60조 1항을 검색해 보면 된다. 국회는 상호원조, 안전보장, 조약 등에 관한 체결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명시 돼 있다. 즉, 국회를 ‘패싱’한 거다. 더 무서운 건 이걸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진행했다면, 헌법 위반이다. 대통령의 통치 행위를 한 거라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그렇게 말하는 ‘야당 패싱’에 ‘국회 패싱’이다. 이건 삼권분립을 부정한 반민주주의적 행위이기도 하다)

 

만약 김태영 전 장관의 말처럼 MB는 모르고, 일개 국방부 장관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거라면, 대통령은 장관 하나 컨트롤 하지 못하는 바보거나, MB정부의 실세는 김태영 장관이었거나(그런데,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에 날아가지 않았나?), 거짓말을 하는 사기꾼 중 하나이다.

 

(지금까지 썼던 기사 다 갈아엎고 다시 밤 새서 기사를 써서 화가 난 건 절대 아니다)

 

...이 기사는 UAE와 UAE를 둘러싼 페르시아만 국가의 현 상황을 말하는 기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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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한국당 유감

 

임종석 비서실장의 UAE 아크부대 방문 직후 자유한국당에서 연일 논평을 쏟아내며 공세를 취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의 범주 안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실질적인 총리급)이 특사로 방문한다는 건 그 자체로 정치적 함의가 있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 최고의 실세가 아닌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자유한국당이 정치적 재료로 삼기에는 더 없이 좋은 소재다. 게다가 명분도 충분했다.

 

원래 외교관례상 특사를 파견할 때에는 상대국에 특사 파견의 목적을 공표하는 게 수순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종석 실장의 특사 파견 목적은 어딘가 ‘냄새’가 났다. 제1야당으로 당연한 의문제기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임종석 비서실장 귀국 후 1주일간 보여준 자유한국당의 행보는 유감스럽게도 수준 이하였다.

 

여당도, 야당도, 청와대도, 국민도 다 알고 있다. 임종석 비서실장의 아크부대 방문은 ‘부차적인 임무’이고(핑계로 봐도 무방한), 실질적으로는 다른 임무가 있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 됐다. 그렇다면, 여기서 멈췄어야 한다.

 

정쟁이 나쁜 건 아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싸울 수도 있다. 그러나 외교, 안보, 국방 분야에 있어서는 막후 채널을 가동하거나 원내대표나 국방위나 외통위를 통해서 비밀스럽게 확인하고 정리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외교, 안보, 국방에 관해서는 미국 상원 정보위처럼 행정부의 비밀보고와 입법부의 동의, 협력 형태로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국내에서 이런 형태의 시스템이 구축되지 못하는 이유 중 상당수는 ‘국회의원’들에게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국회의원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기자들에게 소스를 흘리는 걸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이런 부분에 대한 협의가 있었으면 한다)

 

 

2. 용병, 그리고 쿠웨이트

 

1980년대 초반(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아랍 부호국들 사이에 용병 열풍이 불었다. 여기서 말하는 ‘용병’이란 개념은 우리가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프로페셔널’이 아니라 ‘병사’로서의 개념이다.

 

이 당시 용병 수출국은 파키스탄이나 요르단과 같이 가난한 나라였고, 이들을 수입한 나라는 쿠웨이트나 오만과 같이 돈이 많지만, 인구가 적은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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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랍의 수많은 토후국들은 ‘용병’에 대한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됐다. 간단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른데,

 

① 왕정체제이기에 정치적으로 불안하다.

② 땅이 좁아서 인구도 적다(토호국의 대부분은 외국인 노동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쿠웨이트의 경우 1차 걸프전 직전 전체 인구의 45% 내외가 외국인이었다).

③ 그런데 이 좁은 땅에서 석유가 나오는 통에 돈은 많다.

④ 주변에서 전쟁을 일으키자 내심 불안해진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너나할 거 없이 용병을 수입하게 된다. 이 당시 용병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는데, 연대 단위로 용병 계약을 했고, 전투기 조종사에 전차병들까지 수입하게 된다(에어리어 88이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아라비아 반도와 그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은 제국주의 시절 서구열강들이 멋대로 줄을 그어 국경선을 만든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게 쿠웨이트이다(쿠웨이트란 이름 자체가 ‘작은 요새’라는 뜻이다). 영국이 이라크와 쿠웨이트를 분리시키고, 자신들의 이익(석유)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만약 외부적인 문제가 없었다면, 쿠웨이트는 꽤 괜찮은 삶을 살았을 거다. 이들이 석유를 파서 흥청망청 쓰는 것 같지만, 나름 생각이 있는 나라였다. 이들은 국가수입의 10%를 차세대 준비금으로 축적해 놓고, 이를 가지고 금융 시장에 뛰어들어 나름 ‘큰 손’으로 살았다.

 

강소국이라고 해야 할까? 쿠웨이트는 막대한 오일머니를 가지고 이슬람 국가의 ‘중재자’로 활약했다. 이슬람 형제들끼리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외교적으로 뛰어들었고, 충돌의 문제가(거의 대부분이) 돈일 경우 이에 대한 염출이나, 지원 등을 아끼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맏형이라면, 쿠웨이트는 눈치 빠른 막내처럼 움직이며 나름의 입지를 다져갔다. 그러다 덜컥 ‘1차 걸프전’이 터진다.

 

외교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국가이고, 남부럽지 않게 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전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경찰병력 포함해서 3만 5천명 수준의 쿠웨이트 수비군은 채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용병들? 용병들의 전투력은 기대할 수 없었다.

 

쿠웨이트는 종심이 짧아 아무리 지연전술을 펼친다 해도 하룻밤을 버티기 힘들 정도다. 만약 우리나라처럼 산지 지형이라면, 혹시나 하는 ‘기대’도 할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이기에(해발 10~80미터가 고작이다) 기갑사단 3~4개 동원해 포위하고, 주요 길목만 차단하면 쿠웨이트는 손발을 다 들어야 한다.

 

이전까지는 막연한 불안 정도로 끝났던 일이 현실이 됐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전쟁 한 번에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사실. 이 짧지만 강한 추억은 이후 아랍의 수많은 국가들(주로 토후국)에게 군사력의 필요성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3. 아랍에미리트

 

아랍에미리트(UAE)는 7개의 토후국의 연합체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UAE의 수도 아부다비나, 아랍에미리트 최대의 도시 두바이 등은 각 토후국이다. 이들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아부다비의 왕이 대통령이 된다(7개국의 수장이 투표로 뽑는다. 지금까진 아부다비 왕이 계속 대통령으로 뽑혔다). 이 나라는 쿠웨이트의 교훈을 잊지 않은 모범적인(?) 토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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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왕정국가 체제지만(전제 군주정이면서 대통령제를 하는),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 중 하나이지만, 토후국으로서의 문제점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문제점을 하나씩 살펴보면,

 

첫째, 인구문제

 

현재 아랍에미리트의 인구는 900만 정도다. 서울 인구보다 적어 보이지만, 이건 정말 대단한 숫자다. 1960년대 아랍 에미리트의 인구수는 불과 9만 명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나게 인구가 늘어난 이유는? 간단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아랍 에미리트의 시민권을 가진 이는 불과 100여만 명 수준이다. 그 나머지는 전부 이방인이라고 보면 된다.

 

둘째, 외교문제

 

쿠웨이트의 경우에는 그래도 1차 걸프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마당발로 이러저러한 국제외교문제에 개입을 했었고, 주변국과 나름 친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에미리트는 주변국 모두와 관계가 좋지 않다(UAE가 성격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하다 보니 싸우게 됐다). 대표적으로 이란,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국 모두와 좋지 않다(예맨은 파병까지 해서 싸우고 있다) 하나씩 보면,

 

1) 이란 : 이란과는 싸울 수밖에 없다. 당장 수니파와 시아파로 종교적으로 다르고, 민족 자체도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으로 다르다. 결정적으로 페르시아 만의 아부무사와 툰브 제도 등등 영토 문제가 얽혀있다. 일본과 한국이 독도를 두고 으르렁 거리는 걸 생각하면 된다.

 

2) 오만 : 밑에 붙어 있는 오만과는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 오만 제국 시절에 지배받던 안 좋은 추억에 영토분쟁과 국경문제가 걸쳐있다.

 

3) 사우디아라비아 : 수니파의 맏형 격인 사우디아라비와도 과히 좋은 관계는 아니다. 대승적 차원에서(같이 살아야 하니까) 예맨에 같이 뛰어들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석유 때문에 으르렁 거렸다(유전지대 영토 때문에).

 

4) 예맨 : 지금 아랍에미리트군이 예맨에 들어가 전투중이다.

 

보면 알겠지만, 아랍에미리트는 주변국들과 사소한(?) 다툼이 꽤 있는 나라다.

 

(상호방위조약 수준의 ‘협약’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지금 꽤 ‘위험한’ 문서에 사인 한 것일 수도 있다)

 

셋째, 정치체제

 

이슬람 문화권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통치를 보여주는 국가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왕정’이 기반이 된 상황이고, 변형된 전제군주정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들의 ‘돈’ 때문이다. 아랍 에미리트는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11%를 차지하는 엄청난 자원부국이다(게다가 땅만 파면 바로 석유가 올라오는 나라이기에 채굴 원가도 싸다!). 그런데, 이 체제에 위험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오일머니로 돌아가는 나라인데, 셰일가스의 등장으로 저유가가 이어지게 되면서 재정적자에 들어간 거다. 그 결과 세금을 걷게 된 거다(UAE는 무세금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가시장에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석유로 돈 버는 아랍에미리트는 고생을 좀 해야 할 거다(그럼에도 그동안 쌓아놓은 돈과 부동산이 있으니... 두바이를 보면... 쿨럭)

 

이는 비단 아랍에미리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저유가 때문에 상당히 고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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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리고 사드(THAAD)

 

우리나라는 사드 도입 때문에 미중 사이에 끼여 외교 갈등을 겪어야 했지만(덤으로 국내에서도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아랍 에미리트는 이 비싼 사드를 척척 사들였다. 이 작은 나라가 사드가 왜 필요했던 걸까? 누가 봐도 ‘이란’ 때문이었다. 이란의 탄도탄을 막아내겠다며 사드를 배치한 거다.

 

이 ‘사드’가 아랍에미리트의 국방 현실을 그대로 대변하는 재료다.

 

하나, 주변국의 확실한 ‘위협’이 있고, 이를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둘, 전쟁을 대비해 군사력 투자에 나서고 있다.

 

앞에서 쿠웨이트 이야기를 했었다. 아랍에미리트도 토후국이다. 인구수도 적다. 이전까지만 해도 쿠웨이트처럼 용병들을 고용했지만, 주변의 위협이 실질적으로 다가오면서 아랍에미리트는 징병제로 돌아섰다(얼마전 징병제로 돌아섰다). 물론, 용병들은 아직까지 존재하지만 그 비율은 상당히 축소됐다.

 

(우리나라 아크부대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다가왔는지 알겠는가?)

 

문제는 아랍에미리트의 인구다. 시민권을 가진 이가 100만 정도이기에 아무리 징병제를 하더라도 병력수는 7만 명을 넘길 수 없었다(쿠웨이트 보다는 압도적이지만). 여기에 덤으로 ‘여군’들도 모집했다. 이슬람권에서 여군을 모집한다는 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UAE 내부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그 만큼 UAE로서는 다급했던 거다.

 

병력이 적은 이들이 선택한 대안은 다른 아랍 국가들의 그것처럼,

 

“최신장비로 떡칠”

 

하는 것이다. 오일머니로 돈은 넘쳐나는데, 주변의 위협은 눈에 들어오고, 인구는 적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자, 가장 확실한 대안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란의 팔레비 왕이다(팔레비 2세, 샤 국왕). 밀덕이 왕이 되면(그것도 돈이 많은 나라의),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몸으로 보여준 이가 바로 팔레비였다.

 

소련의 Mig-25R 정찰기(마하 3을 자랑하던)가 이란의 영공을 넘나든 거였다. 이에 화가 난 샤는 미국으로 달려가 당시 차세대 전투기였던 F-15와 F-14 둘 중 하나를 사겠다고 나선 거다. 이 둘은 왕 앞에서 경연(?)도 했고(앤드류 공군기지에서 이 두 기체가 왕을 위해 공중제비를 돌았다), 결국 톰캣이 이란의 방공 전투기로 낙점 된다(샤는 두 기종을 모두 사 버리는 게 어떨까를 고민했다).

 

이 당시 계약규모는 F-14 80대, 공중급유기 3대, 조기경보기(이건 손에 못 넣었다) 였다. 이 덕분에 미국은 F-14를 더 싸게 살 수 있었다. 당시 F-14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의회에서 74년도 회계연도에서 톰캣 제작비용을 동결시켰다. 이 때문에 그루먼은 은행 융자를 받아야 했었는데, 팔레비 국왕은

 

“그럼 우리가 돈 대주면 톰캣 더 빨리 받을 수 있냐? 우리가 돈 빌려줄게.”

 

단번에 7,500만불을 빌려줬고, 그루먼은 도산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톰캣은 대당 가격도 떨어지게 되고, 양산 시기도 앞당기게 됐다(팔레비 왕의 위대함? 아니, 오일머니의 위대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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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란은 중동의 패권 국가였다. 경제력뿐만 아니라 군사력에서는 넘사벽이었다.

 

영국에 설계를 의뢰한 샤 전차(치프틴 계량형)인데, 훗날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자 챌린저로 개명 영국군이 떠안는다. 당대 미국의 최신형 전차였던 M 60패튼 전차에 M109 팔라딘 자주포, 기계화 보병을 만들겠다고 M 113 장갑차까지 떡칠을 했다. 개인화기도 최고를 요구했기에 총 하면 떠오르는 독일의 H&K의 G3 소총을 라이센스 해서 이란 국내에서 찍어냈다.

 

공군전력은 당대 최강... 아니, 서방 국가에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F-4 팬텀 시리즈만 200대(60~70년대다!), F-5 시리즈만 180대였다. 여기에 F-14톰캣 80대까지 더해지면(결국 마지막 몇 대는 못 받았지만, 거진 다 받았다) 중동 최강 군사국가라 해도 무방했다.

 

문제는 당시 이란의 기술력이다. 최신 전투기라는 건 그저 기름만 넣고 띄워 올리는 게 아니다. 전투기를 정비할 정비사, 무장을 장착할 무장사, 항공기 유도를 하는 관제사가 필요하고, 이들 전투기를 조종할 조종사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아울러, 시간이 되면 창정비를 위해 통째로 분해하고 조립도 해야 한다. 기본적인 공업 기술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란에는 그게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건 역시 돈이었다. 샤 국왕은 그루먼과 미 해군에 지원요청(이라 말하고, 돈을 주고 임대)을 했고, 300여명의 기술자와 27명의 교관들을 지원 받았다. 이들은 전투기 정비와 A/S 그리고 이란 전투기 조종사들의 훈련을 맡게 된다.

 

샤 국왕은 이들 외부인력들의 편의를 위해 이들의 가족들까지 통째로 이란으로 불러들였다. 그 수가 무려 800명이었다. 국왕은 이들을 위해 가구, 가전제품과 일체의 생활용품에 학교, 탁아소, 수영장이 딸린 체육관까지 필요한 모든 체제비용을 무료로 제공했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란 이야기를 한 건, 지금의 아랍 국가들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돈이 많기에 최신 장비를 사들이는 것. 이건 하나의 ‘법칙’이다.

 

인구수가 적기에 군대의 규모가 작다. 이 작은 규모의 군대가 최대한의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단 육군의 경우는 기계화를 하게 되고, 공군이나 해군에 집중적인 투자를 해 기술집약형 군대를 만드는 게 정석이다(이스라엘의 경우를 떠올리면 된다).

 

아랍에미리트도 마찬가지다. 돈이 많은 덕분인지 프랑스, 러시아, 미국 가리지 않고 좋다하는 무기는 다 사들였다.

 

(아랍에미리트는 병력은 7만이 안 되는데, 국방비로 200억 달러 가까이 쓴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우리나라가 병력이 60만이 넘는데, 국방비로 40조 수준, 즉 400억 달러 수준 이쪽저쪽을 쓰는 걸 감안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병력은 우리의 1/10인데, 군사비는 우리의 절반을 쓰는 나라가 아랍에미리트다. 이들이 ‘돈지랄’을 하는 걸까? 실질적인 ‘위협’을 느꼈기에 이렇게 투자를 하는 거다)

 

(프랑스의 르끌레르 전차에, 러시아의 BMP장갑차란 보기 드문 조합을 만들어 낸 괴랄한... 아니, 부러운 나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들의 인구수와 국력의 한계를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오일머니가 넘쳐난다지만, 이란의 경우처럼 이들의 운영과 정비, A/S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란 거다.

 

(이란의 경우도 미국의 기술자를 통째로 데려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한 가지가 있다. 아크 부대가 파병될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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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민 혁명”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은 2011년까지 이어지고, 이어서 아랍권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시기 아랍에미리트는 민간군사기업으로 그 악명을 떨친 ‘블랙워터’ 社 의 창업자 중 한 명이 구성한 용병부대와 계약을 하나 체결한다.

 

800명.

 

1개 대대규모 병력의 이 용병부대의 계약내용은 전통적인 업무. 그러니까 경비, 적 제압, 침투, 시설물 방호 등등의 계약과 함께 ‘군중 통제 작전’도 임무에 포함시켰다.

 

군중 통제 작전? 간단하다 시위 진압이다.

 

(재스민 혁명을 전후로 수많은 용병 업체들이 아랍권 왕정국가에 고용 돼 용병으로 활동하거나 군사고문으로 현지 군대 혹은 경찰병력의 ‘시위진압훈련’을 해준 건 유명하다. 이들 업체 중에는 국내업체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크 부대가 파병됐다.

 

2011년 1월 11일 아크 부대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로 파견됐다. 아크부대는 아랍에미리트 군에 공중침투, 건물, 항공기, 선박 대테러 작전 등과 같이 전술훈련을 가르쳤다고 한다.

 

...재스민 혁명으로 뒤숭숭하던 그때 아크부대의 존재가 아랍에미리트 왕족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당시 UAE의 원전수주는 프랑스와 한국의 2파전이었다. 재미난 건 두 나라 모두 UAE가 가장 원했던 ‘군사적 요구’를 옵션 카드로 내놓았다.

 

놀라운 건 두 나라의 정상 모두 ‘꼴통’이었다는 거다. 프랑스의 사르코지, 한국의 이명박.

 

사르코지는 회심의 카드라고 ‘핵우산’을 꺼내들었지만, 이는 정치적인 선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핵과 이란의 핵을 염두에 둔 것 같은데(중동에 핵 가진 나라는 이스라엘 하나이고, 개발하려는 나라는 이란이었으니), UAE 왕족들이 보기에 시큰둥 할 수 밖에 없었다. UAE가 핵 위협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전을 파괴하듯 UAE원전을 파괴할 것도 아니었다. 즉, 이란을 상대로 한 핵우산이었다.

 

실효성이 없었다.

 

이란은 핵을 포기한 상태고, 그 당시 아랍 왕정 국가들이 가장 신경 썼던 건 ‘재스민 혁명’에 대비한 ‘시위진압 훈련’과 곧 닥칠(예상은 곧 현실이 됐다) 재래식 전쟁이었다.

 

(아크 부대의 헌법위반 논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겠다. 날치기이긴 하지만, 헌법 60조 2항을 나름 지키려는 ‘시늉’을 하기 위해 한나라당이 직권 상정해 날치기로 파병하고, 이후 계속 연장해 오늘까지 이어졌다)

 

 

5. 그리고 예멘

 

국제정치에 문외한인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아랍에미리트는 예멘에 파병을 해서 전투중이다. 실제로 교전이 일어났고, 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이다. 최신장비로 떡칠을 했지만, 역시나 한계를 보이고 있다.

 

...예멘

 

90년대 초반에 예멘은 한국에게 하나의 ‘모델’로 제시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전 세계에는 3개의 분단국이 있었다. 한국, 독일, 그리고 예멘이었다.

 

독일식 통일이 엄청난 통일비용 때문에 망설여지던 그때, 우리나라 언론은 비슷한 시기 통일을 한 남예멘과 북예멘의 사례를 들며, ‘통일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우리의 통일 방법으로 연구해 봐야 된다는 신문기사가 쏟아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뻘짓’이었다. 북예멘과 남예멘은 우리와 완전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 식민지 시절 영국이 남북으로 갈랐고, 북예멘이 먼저 독립해 공화정을 시도했고, 시간이 흐른 뒤 남예멘이 독립해 공산정부를 수립했다. 전면전은 아니었지만, 소소한 국경분쟁은 있어왔다가 결국 통일이 된다. 원래부터 민족적 동질성은 있던 나라였기에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가 독립 4년 만에 내전이 발생했고, 북예멘이 분리 독립을 하려던 남예멘을 진압하면서 정리가 됐다. 문제는 ‘재스민 혁명’이다.

 

(재스민 혁명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할 것 같았지만, 결국 남은 건 ‘전쟁’과 ‘난민’, ‘기아’뿐이었다. 하나의 공고화된 권력이 사라지고 나니 그 빈자리를 종교가 치고 들어왔고, 그나마 ‘운이 좋은 곳’은 교조화 된 신정 일치정부를, 재수 없는 곳은 ‘전쟁’이 일어났다. 민주화 혁명에 대해 폄하하는 논조가 될까봐 조심스러운데, ‘아랍의 봄’에 의해 진공상태가 된 뒤에 남은 건 상처 뿐이었다. 초반에는 IT의 혁명, 민주주의 전파 등등 서방 언론에서는 찬사 일색이지만, 7년이 흐른 지금 중동은 어떻게 됐을까?

 

튀니지에서 시작해, 이집트, 예멘에서는 반정부 시위로 정권이 교체됐지만 그 상황은 녹록치 않다. 이라크, 쿠웨이트, 모리타니,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소말리아, 수단, 시리아 등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리비아와 시리아는 내전으로 번졌고, 시리아는 수많은 난민을 양산해 냈다. 민주주의를 폄하하자는 것도, 이슬람 문화권을 욕하자는 것도 아니다. ‘독재’에 의해 눌러 담았던 종교갈등, 민족갈등이 튕겨져 나오면서 또 다른 갈등, 무정부화, 뒤이어 IS로 대변되는 테러리스트의 발호를 볼 수 있었다.

 

2차 걸프전 이후 사담 후세인이 제거되고, 이라크가 난장판이 된 것과 같은 이치다. 사담 후세인의 독재는 분명 나쁜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가 이라크의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했던 누름돌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이라크는 완전히 붕괴됐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갈라져서 싸웠고, 쿠르드와 이라크가 나뉘어져 싸웠다. 좋게 말하면,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과도기’라 말 할 수 있겠지만, 이 과도기를 파고 들어 IS가 등장하고, 내전으로 이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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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스민 혁명이 아랍 왕정국가에 미친 ‘충격’은 엄청났다. 특히나 ‘이집트’가 뒤집어 지면서 아랍권 내부에서는 엄청난 동요가 있었다. 나름 군사 강국이었고, 수니파 국가 중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형님’ 소리를 듣던 나라인데, 이집트가 넘어간 거다. 이 때문에 수니파의 맏형 격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은 미친 듯이 돈을 풀고, 국내 인터넷을 틀어막았다. 아울러 시위에 나선 이들을 강압적으로 진압하며 국내를 안정시켰다.

 

이때 땡 잡은 게 사우디아라비아 공무원들이었다. ‘오일머니’의 힘이라고 할까? 무려 150조원의 보너스를 공무원과 군인들에게 뿌렸다. 이렇게 손발이 될 ‘고용인’들을 안정시킨 다음 주변국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위로 흔들리는 바레인에 군대를 파병했고, 다른 국가의 독재자들 혹은 왕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간신히 사우디아라비아는 버텼다. 지금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틀어쥔 무함마드 빈살만 역시 이 ‘재스민 혁명’의 여파로 쿠데타에 성공했다고 봐도 된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의 ‘민주주의’와 ‘세속주의’ 요구에 응답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낸 거다. 카타르나 두바이 정도까지의 ‘자유’를 원한다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의 여망을 빈살만은 긍정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 거 같다. 이미 재스민 혁명의 ‘기운’을 받아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상황이기에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탄력을 얻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예멘’이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911 테러 이후 예멘은 완전한 친미 국가로 변신한다. 그런데 덜컥 ‘아랍의 봄’이 도래한 거다. 시위대는 살레 대통령을 축출했고, 이 틈을 타 ‘후티’ 반군이 등장한다. 시아파 반군인 이들은 친이란 정책을 표방하며(이란이 지원을 한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사우디를 압박했다. 이 후티반군에 대해서는 미국도 불편하게 생각하는데, 이들이 주장하는 걸 보면 그럴 만 하다.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유대인에게 저주를, 이슬람에 승리를”

 

어떤 상황인지 대충 느낌이 오지 않는가? 원래부터 내전으로 ‘다져진’ 나라답게 총은 넘쳐났고, 전쟁은 일상인 나라다.

 

전 세계에서 민간에 총기가 가장 많이 뿌려진 나라가 미국인데, 전 세계 민간 총기의 25%가 미국에 있다. 미국 국민 100명 당 102정의 총기가 있다고 보면 된다. 양으로만 보면 미국을 이길 나라가 없지만, 인구비례로 보면 예멘을 따라올 나라가 없다. 예멘 인구는 2800만 명 내외인데, 총은 그 4배 이상 뿌려졌다. 즉, 인구 1명 당 총 4자루 비율로 총이 넘쳐나는 동네다.

 

게다가 아랍국가 최빈국인 상황(국민 38%가 절대빈곤층이다)이다 보니 후티 반군이 파고들 틈새가 많았다. 게다가 수니파 시아파 갈등은 아랍권 전체의 뿌리 깊은 갈등 원인이었고, 예전부터 알 카에다 같은 ‘족보있는’ 테러리스트들이 많이 숨어 있던 나라였다.

 

...이건 전쟁이든 내전이든 뭔가가 터지지 않으면 이상한 상황이었다. 결국 예멘은 다시 전쟁에 휩싸이게 됐고(그 덕분에 예멘 주재 한국 대사관은 청해부대. 즉, 이순신급 구축함으로 옮겨지게 됐다. 농담이 아니라 구축함에 대사관이 이사 오게 됐다), 이 상황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으로 치고 들어갔다. 한 때 15만 명의 병력이 예멘으로 들어갔고, 현재도 사우디아라비아 육군 병력의 80%가 예멘에서 후티 반군과 전투중이다.

 

(후티 반군도 대단한 게, 장비빨 하나로는 아랍권 어디에 내놔도 꿀릴 거 없는... 아니, 어지간한 서방세계 장비에도 밀리지 않는 장비로 무장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군을 상대로 전혀 안 꿀리고 잘 싸우고 있다. 심지어는 사우디아라비아 본토로 반격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아랍에미리트도 예멘에 파병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전투를 벌였고, 하나의 사실을 증명했다.

 

“장비 빨이 아무리 좋아도 기본 실력이 안 되면 두들겨 맞는다.”

 

...이런 상황에서 아랍에미리트와 우리나라는 상호방위조약에 준하는 ‘협약’을 했다는 거다. 자동개입 조항이 있는... 어떤 놈이 아랍에미리트는 안전하다고, 전쟁 안 난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놈이 누군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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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타이밍

 

김태영 전 장관이 UAE와의 비밀군사협정을 맺었다고 양심고백(?)을 하기 전 어느정도 예상은 가능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아크부대가 파병 됐던 시기를 보면 느낌이 온다. 아랍에미리트 뿐만 아니라 아랍권 왕정국가, 독재국가 지도자들이 전전긍긍하던 시기였다. 당시 민간군사기업의 주가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한국 컨설팅 업체, 군사 업체 등도 아랍을 찾아가 시위진압 훈련을 전수하던 시기였다.

 

UAE 원전 계약에 대한 자세한 계약내용은 모른다. 자유 한국당 주장에 따르면(김성태 의원이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하는 말에 의하며), 80조 가까운 국가 단위의 사업에서는 이 정도 옵션은 당연하단 듯 발언했다.

 

상호방위조약에 준하는(자동개입 조항이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호방위조약이다) 협약 앞에서 혹시 아랍에미리트에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할지에 대해선, 국회를 ‘패싱’한 사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젊은 시절에 중동에 있어서 당시 상황을 잘 안다고 하는데, 지금 중동 상황을 알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놀라운 건 이명박 정부다.

 

2011년 1월 11일은 재스민 혁명이 한참 불타오르던 시기다. 이 시기 아크부대 파병이 어떤 의미인지 이명박 정부는 잘 알고 있었을 거다. 월남전처럼 우리나라 군인이 다시 한 번 ‘용병’으로 팔려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호방위조약에 준하는 협약을 맺은 거다.

 

돈 때문에 목숨을 파는 건 한 번이면 족하지 않을까? 그래도 월남전은 백 보 양보해 6.25 때 우리를 도와준 미국을 돕는다는 명분, 6~70년대 냉전 분위기를 고려할 수 있다. 그런데, 아랍에미리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당시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이런 계약을 했다는 건 당시 정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씨바 MB한테 가치관을 말한다니 그게 더 웃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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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렇다.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이 쓰라고 해서 썼고, 기사 반쯤 쓰다가 김태영 전 장관의 발언이 나오면서 다 갈아엎고 다시 썼다. 이런 거 쓰기 싫다.

 

편집장 번호를 차단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