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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가 생긴 이래로 포르노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있어 왔지만, 그것을 허용할지 여부는 각 나라마다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미권에선 포르노를 합법적인 표현물로 취급하는 나라가 많은 반면에, 아시아나 아프리카에는 제한하는 나라가 월등히 많습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어떨까요? 흔히 '성진국'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포르노 합법국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엄연히 일본형법 제175조는 음란물의 반포, 판매, 진열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루에만 백여 편이 쏟아져 나오는 성인비디오, 일명 AV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누가 봐도 음란물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죠. 벌거벗은 임금님의 새 옷처럼 누군가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기라도 하는 걸까요? 법과 현실의 간극이 벌어져도 너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걸까요?

 

2017년 결산을 맞아 이번에는 AV의 흥망성쇠를 좌우했던 결정적 사건들 19가지를 선정해 보았습니다. 여명기부터 오늘날까지 AV가 지나온 발자취들을 차근차근 더듬어 가며, 위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찾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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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비데륜'에서 심의를 받은 비디오는 영상 초반에 이런 화면이 뜹니다.

 

 

1. 비디오 자율심의체제의 성립 (1972년)

 

우선 AV가 법령의 철퇴를 피해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선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비디오 자율심의체제의 성립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찍부터 일본의 영화, 방송 등지에서는 자율심의기조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제도적 메커니즘에 익숙한 한국사람들이 보기엔 낯선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체의 공권력이 언론과 표현에 개입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취지에서 나온 시스템이었습니다. 군국주의 시절의 파시즘적 통제를 반성하고 민간에 모든 판단 권한을 넘겨준 거죠.

 

비디오 매체에서 자율심의가 시작된 건 1972년부터였습니다. 그해 1월 10일 4편의 에로 비디오가 당국에 의해 적발되었고, 비슷한 시기엔 '로망 포르노'라고 불리던 성인 영화들이 음란물이라는 이유로 기소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비디오 제작사들이 '성인비디오윤리자주규제간담회'라는 심의기구를 발족시켰습니다. 이 단체는 훗날 '일본비디오윤리협회', 약칭 '비데륜(ビデ倫)'으로 명칭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심의제도는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받곤 합니다. 민간 심의위원들이 관련 사업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인지, 심사단체들이 본래의 기능을 망각하고 그때그때 기업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비데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원들 대부분이 영화계 원로 인사들이었어요. 게다가 요직에는 퇴직 경찰 간부들을 낙하산으로 앉혀 수사기관과도 연줄이 맞닿아 있었죠. 비데륜은 경찰이 업계에 끼어들지 않도록 완충작용을 하며, AV산업이 뿌리내리도록 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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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음란물이라는 이유로 기소되었던 『사랑의 사냥꾼 - 러브 헌터』(1972).

 

 

2. 로망 포르노 재판의 확정 (1980년)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일본형법 제175조는 음란죄를 처벌하고 있습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음란의 판단기준을 '사회통념'이라고 판시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모호한 개념입니다. 무엇이 사회통념에 부합한 걸까요?

 

1957년 『채털리 부인의 연인』 사건에서 재판부는 '성행위 비공개의 원칙'을 천명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성행위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도덕이기 때문에, 성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표현이라면 소설이든 영화든 간에 사회통념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를 근거로 제시한 겁니다.

 

반면에, '로망 포르노' 재판은 무려 8년을 질질 끌어오다가 1980년 7월 18일에 영화사 측의 승소로 끝이 났습니다. 재판부는 사회통념이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자율심의기구인 영화윤리관리위원회(일명 '영륜')의 심의를 통과했다면 사회통념상 음란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비데륜은 영륜의 조직과 운영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었기 때문에, 로망 포르노 재판은 비데륜에게도 그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비데륜의 심사를 받은 작품이라면 음란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 걸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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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로망 포르노 재판에 연루되어 오랫동안 활동에 제약이 많았던

 요요기 타다시 감독은 1981년 AV로 진출합니다.

 

 

3. 『음욕의 고통』의 상업적 성공 (1981년)

 

70년대 일본에서 제작되던 에로 비디오들은 극장 개봉 영화를 재수록한 게 대부분이었지만, 가정용 비디오 플레이어가 저렴하게 보급되고 촬영 장비가 발전하면서 1981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AV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요요기 타다시(代木忠) 감독입니다. 그는 영화제작사와 연예기획사의 사장이기도 했는데요, 자기 회사에 소속돼 있던 영화배우 '아이조메 쿄코'와 조감독 '키토 히카루' 등을 설득해서 『음욕의 고통(淫欲のうずき)』이라는 AV를 촬영했습니다. 이 작품은 큰 히트를 쳐서 단숨에 2~3만 편이 팔렸어요. 이듬해 발매된 『도큐먼트 더 오나니(ドキュメントオナニー)』 시리즈는 편당 3~5만 편, 최고 8만 편을 판매했고요.

 

요요기 감독이 달성한, 경이로운 기록은 "AV가 장난 아니게 돈이 된다"는 걸 사람들에게 똑똑히 각인시켰습니다.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을 높이 본 업자들의 신규 진입이 이어졌습니다. 영화계나 출판계에서 건너온 자본이 양대 축을 형성했고, 개중에는 방송 외주나 풍속업으로 돈을 벌다가 AV로 전환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불과 1~2년 만에 AV에는 백 개에 달하는 제작사들이 들어섰고 전체 시장은 100억 엔 규모로 부쩍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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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미스 혼반』 세 번째 작품에 출연한 AV배우 '요시자와 유키코’.

 

 

4. 『미스 혼반』 시리즈 발매 (1984년)

 

초창기 비데륜은 지금에 비하면 아주 엄격한 심사기준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베드신의 수위는 물론이고 러닝타임, 타이틀 등이 꼼꼼히 체크되었으며, 성기 주위에는 반드시 동그란 흐림 처리(보카시)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AV 제작사가 늘어나면서 심의를 피하기 위해 비데륜에 가입하지 않는 업체도 늘어났습니다. 무심사 비디오들은 대부분 성행위를 흐림 처리 없이 곧이 곧대로 화면에 담아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라 비디오(裏ビデオ)'라고 불렸습니다. 당연히 우라 비디오가 비데륜의 심사를 거친 것보다 인기가 많았습니다. 

 

우라 비디오의 인기에 당황한 비데륜은 심사기준을 대폭 완화했습니다. 흐림 처리가 '모자이크'로 바뀐 것도 이 무렵에 타협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혼반(本番)’, 즉 실제 성행위를 하는 AV도 조금씩 증가했습니다.

 

1984년부터 발매한 『미스 혼반(ミス本番)』 시리즈는 오늘날 AV의 기본적인 포맷을 완성시킨 비디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코지타니 히데키(小路谷秀樹) 감독은 마치 취재 촬영을 하는 것처럼 배우들의 인터뷰와 성행위를 즉흥적으로 담아냈습니다. AV배우들은 연기를 따로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개연성 있는 이야기 구조는 포기했습니다. 각각의 장면들은 최대한 배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화사하고 아름답게 꾸며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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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1985년 AV배우 ‘타구치 유카리’는 규슈에서 우라 비디오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수배되었습니다.

 

 

5. '신 풍속영업법'의 시행 (1985년)

 

AV의 노출 수위가 적나라해지는 상황을 경찰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려 했던 건 아닙니다만, 비데륜을 직접 건드리기에는 부담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로 경찰의 단속이 이루어진 건 심의 없이 막장으로 치닫고 있던 우라 비디오였습니다.

 

1984년 전면 개정되고 이듬해에 시행된 풍속영업법은 AV를 풍속업으로 새로 포함시켰는데요, 법 시행에 앞서 경시청은 "앞으로 무심사 AV는 음란물로 보겠다"라는 취지의 행정지도를 내렸습니다. 우라 비디오를 박멸하겠다고 쐐기를 박은 것이었습니다. 

 

이후로 비데륜의 심사를 받는 것이 AV를 적법하게 내놓기 위한 필수 절차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경찰은 수십 년간 비데륜을 수사하지 않았고요, 비데륜이 요구하는 수준의 모자이크는 자연스럽게 적법성을 인정받은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음란물을 처벌하는 법령은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게 되었죠. 1988년 경찰이 AV배우를 공급하던 연예기획사들을 직업안정법 및 파견법 위반 혐의로 적발해 해산시킨 적도 있었습니다만, AV산업에 브레이크를 걸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경찰이 AV를 음란물이나 성매매라는 이유로 처벌할 자신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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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SM이 좋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AV배우 쿠로키 카오루와 무라니시 토루 감독.

두 사람은 한때 연인 사이이기도 했다.

 

 

 

 

6. 『SM이 좋아』 발매 (1986년)

 

비데륜 체제가 정착하자, AV산업은 순탄하게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경기호황으로 한동안 '작품을 찍기만 하면 팔리는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자본주의의 필연인지는 몰라도, AV에서의 에로티시즘은 점차 과잉 섹스의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전의 AV가 배우들의 청초함이나 귀여움을 강조했다면, 1986년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인 『SM이 좋아(SMぽいの好き)』는 적나라한 실제 성행위와 과장된 신음소리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주연배우 쿠로키 카오루(木香)는 별로 영상을 많이 남기지 않았는데도, 큰 인기를 몰아 TV 예능에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이후로 쿠로키 카오루처럼 격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이 늘어났습니다. 영상에서 비춰지는 체위나 애무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실제 성행위를 소재로 하는 작품이 늘어났습니다. 붓카케(안면사정), 시오후키(물총) 등도 이때부터 시도된 것들입니다. 변태 성애나 가학적인 표현도 늘어나 "도를 지나친 것 같다"는 우려를 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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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7]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 신문 아카하타 1989년 4월 30일자 기사

 

 

7. 비데륜의 심사기준 강화 (1989년)

 

80년대 말 AV는 첫 번째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제도권에서 통제받을 일은 직업안정법 말고는 거의 없었고, 법에 허점이 많았기 때문에 피해가기가 쉬웠습니다. AV 감독들 중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에 매료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게 과연 팔리기나 할까 싶은 괴작이라도 야한 장면만 어느 정도 있으면 제작사는 딱히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론은 좋지 않았습니다. 1989년 『콘크리트 미소녀(コンクリート美少女)』라는 AV가 발매되었을 때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습니다. 이 작품은 여고생이 성폭행 및 살해를 당하고 콘크리트를 넣은 드럼통에 암매장 된 실화를 각색했습니다. 또 같은 해에 도쿄, 사이타마 연쇄 유아 납치, 살해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 미야자키 츠토무의 집에서 다량의 AV가 발견되었다는 오보가 나오면서, AV에 대한 여론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그러자 비데륜은 자체적으로 심사기준을 강화시켰어요. 사회적 사건을 소재로 다루지 못하게 한 건 물론이고, 세라복, 미소녀 등 미성년자를 암시하는 단어를 제목으로 쓸 수 없게 막았습니다. 폭력적인 성행위를 나타내는 말, 성기를 지칭하는 말, 특정 개인에게 모멸감을 줄 수 있는 말 등도 금지사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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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 다이아몬드 영상이 망하면서

사쿠라기 루이, 마츠자카 키미코, 히미코, 노기 마리코 등

당대 유명 AV배우들의 무수정 영상이 그대로 불법 비디오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8. 다이아몬드 영상의 도산 (1992년)

 

AV 산업은 1990년까지 호황을 누리다가, 이후 버블 붕괴로 몰락을 겪습니다. AV 전체 매출의 15% 가량을 담당하고 있던 다이아몬드 영상(ダイヤモンド映像)이 도산한 건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92년, 위성통신 분야로 무리하게 사세를 확장하다가 30억 엔의 부채를 못 갚았다고 하네요. 회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AV 촬영 테이프들은 그대로 채권자들에게 넘어가 암시장에서 모자이크 없이 팔려 나갔습니다.

 

다른 업체들도 상황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반인을 헌팅하거나, 감독이 배우 역을 겸하는 등 최대한 비용이 덜 들어가는 촬영방식이 선호되었습니다. 예쁘고 인기 많은 배우를 섭외하기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연출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승부를 거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업계 안에서는 불황 타개책으로 음모 노출을 허용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1992년 미야자와 리에의 『산타 페』 같은 헤어누드집이 붐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시대적 흐름에도 맞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비데륜은 그런 요구들을 받아주지 않았고 엄격한 심사기준을 90년대 내내 유지했습니다.

 

비데륜의 정책에 불만을 품지 않았던 연출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심사기준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도 일본사회의 금기를 노골적으로 건드리는 컬트 비디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반골 기질이 강했던 제작사는 V&R 플래닝(V&Rプランニング)이었습니다. 컴퍼니 마츠오, 바쿠시시 야마시타, 토지로, 히라노 카츠유키, 이구치 노보루 등등 현 시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AV 작가, 감독들이 이곳에서 역량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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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9] 아직까지도 '비디오 판매왕'의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고 있는 점포.

 

 

9. 비디오 판매점의 폭발적인 증가 (1995년)

 

한편, 8~90년대에는 AV를 대여점에서 '빌려' 보는 게 대부분이었지, '사서' 보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사서 보는 게 훨씬 비쌀 뿐만 아니라 살 수 있는 매장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죠.

 

1993년 청년 갑부 사토 타이지는 "저렴한 가격으로 AV를 살 수 있는 매장을 일본 전역에 세우면 장사 좀 되겠다"는 생각에, '비디오 판매왕(ビデオ販王)'이라는 이름의 비디오 판매점을 열었습니다.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쳐 불과 2년 만에 천여 개의 프랜차이즈를 유치했습니다.

 

그러나 비디오 판매왕은 상당히 허점이 많은 회사였어요. 박리다매를 위해 무심사 비디오나 해적판을 주로 팔았기 때문에, 언제라도 적발될 위험을 떠안고 있었습니다. 가맹점에 대한 갑질도 장난 아니었다고 합니다.

 

프랜차이즈를 탈퇴하는 점포들이 속출하면서 사정이 나빠지던 와중에, 풍속영업법 위반으로 사토 사장이 체포되는 해프닝이 발생하면서 투자가 끊깁니다. 1996년엔 28개 AV 제작사들이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비디오 판매왕을 고소하는 사달이 났습니다. 결국 그해 5월, 사토 사장은 계획적으로 회사를 부도낸 다음에 점주들의 보증금을 떼먹고 잠적했습니다. 맙소사!

 

대다수의 피해점주들은 이후로도 영업을 계속하며 판매 비디오 시장을 형성했어요. 이들 판매점은 대여점과 경쟁하면서 치열하게 자기 영역을 넓혀 나갔습니다. 이때부터 AV산업은 판매 비디오 업계를 말하는 셀계(セル系)와 임대 비디오 쪽을 말하는 렌탈계(レンタル系)로 크게 양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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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0] 판매 비디오 『룸 서비스』를 제작한 '할리우드 필름'은

1999년에 음란물 제조 혐의로 적발되었습니다.

 

 

10. 자율심의기구 ‘미디어윤리협회’의 신설 (1996년)

 

판매 비디오는 비데륜의 영향권 밖에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셀계는 렌탈계와 달랐습니다. 비데륜의 규제를 받지 않으니 상당히 표현이 자유로웠으나, 당국으로부터 적발당할 위험성도 그만큼 높았습니다. 1993년 모모타로 영상출판은 있으나 마나 한 모자이크를 씌우다가 행정지도를 받았고요, 1999년에는 할리우드 필름이라는 제작사가 음란물 제조로 기소당하기도 했습니다.

 

법령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제작사들은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윤리심사를 해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전에 렌탈계에서 씌웠던 것보다 훨씬 작고 흐릿한 모자이크가 가능했지만, 그래도 적정 수위는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셀계에서도 비데륜을 본뜬 자율심의기구를 새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출발선은 지금은 대형 제작사로 성장한 SOD가 끊었습니다. 1996년 SOD는 몇몇 다른 셀계 제작사들과 합심해서 자율심의기구 미디어윤리협회(메디륜)를 설립해 자사의 윤리심사를 맡겼습니다. 뒤를 이어 일본윤리심사협회(일륜), 비주얼소프트컨텐츠협동조합(VSIC), 일본영상소프트제작판매윤리기구(제판륜) 등 유사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온갖 심의기구가 난립했고 여전히 제작사 내부에서 자체심사를 하는 회사도 많았기 때문에 AV의 심사기준은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모자이크가 일정 범위 이상 씌워져 있기만 한다면, 경찰은 딱히 내용을 문제 삼으려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새로 생긴 자율심의기구들이 비데륜처럼 퇴직 경찰 간부들을 요직에 앉혀 수사기관의 개입을 사전에 막았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무수정 노(No)모자이크 업체만이라도 제대로 잡자는 방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소비자들은 아슬아슬하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판매 비디오를 크게 환영했습니다. 판매 비디오는 시장의 판세를 뒤엎고 점차 기존의 임대 비디오를 밀쳐 내기 시작했습니다. 셀계 제작사의 대다수가 소규모 신흥업체라서 이들을 '인디즈'라고도 불렀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90년대 말이 되면 인디즈가 메이저의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