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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과거사 규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2004.8.19.목요일

딴지 논설위원

 



과거사 문제로 연일 공세적 모습을 보이던 여당 당의장의 부친이 일제시대 헌병이었고 당의장 본인은 그 사실을 철저히 숨겨왔음이 드러났다. 그는 ‘당신 아버지 일제시대 경찰이었지?’라는 의혹에 펄쩍 뛰며 아니라고 하더니 나중에 ‘경찰이 아니라 헌병이었단 말여요.’라고 했다 한다. 코메디 프로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말장난이다. 하기사 ‘말장난’은 정치인들이 반드시 이수해야만 하는 전공필수 신공이기도 하다. 어쨌건 신기남 의원은 당의장직 사퇴를 발표하는 수순을 밟았고, 부친의 과거에 발목잡혀 있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을 법한 야당 대표는 ‘할테면 함 해보자’며 거세게 나오고 있다.


이번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과거사를 규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흔히 ‘일제 36년’이라고 한다. 말이 36년이지 필자는 아직 그 세월을 살아보지도 못했다. 그 36년간 체제를 부정하며 투쟁으로 일생을 바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신기남 의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회의원 중 속으로 끙끙 앓는 사람의 수가 적지 않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정치와는 무관한 내 주변인들의 가족사를 들춰보아도 당시 친 체제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수도 없이 발견될 것이다. 이걸 근거 삼아 ‘따지고 보면 옛날에 친일 안했던 사람이 어딨냐. 그러니 과거는 잊어버리고 손에 손잡고 찬란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자’는 이야기도 슬그머니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앞으로 막 나아가는 건 좋은데, 그게 어느 방향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 도착하고 보니 출발지로 되돌아온 거라든지, 되려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 거라면 곤란하잖아. 과거를 되짚어 보는 작업은 그 때문에 필요한 거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친일파에 대해 물어보면 백이면 백 아~주 나쁜 놈들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누가, 언제, 어떤 친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모 TV프로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알고 있는 친일파의 이름을 대보라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때 나왔던 대답들이 기껏해야 이완용, 김활란, 박정희 정도였다. 이 중 박정희는 최근 그의 친일 행각에 대한 문제로 시끄러우니까 비로소 인식의 대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친일파는 철저히 관념속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완용을 제외한 다른 친일파들은 ‘친일파’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 나쁜놈이라 지칭될 뿐, 그들이 실제로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실체가 없는 관념 속의 존재가 욕을 들었다고 해서 아파하거나 가려워 할 리 없다. 그 틈에 친일 행각을 했던 이들은 근대화 세력으로, 혹은 민족지사로 둔갑하며 슬그머니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과거사를 규명하자는 것은 적어도 이런 사기극은 때려치우자는 이야기다. 과거 좃선일보와 똥아일보는 민족지 논쟁을 통해 서로의 벌건 속살(친일 행각)을 들춰가며 대한민국 내에서 횡행하던 사기극의 이면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심히 낯뜨거운 일이었지만 필자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친일파라고 해서 머리에 뿔 달리고 눈가에 사악한 기운을 풀풀 날리는 인간 말종들이 아니다. 기회주의자나 체제 순응적 인간은 어느 사회에서나 득실대는 법이다. 어찌보면 입으로 열심히 친일파를 성토하고 있는 당신이야말로 친일파와 가장 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일전에 썼던 박정희 근대화론과 일제시기 근대화론의 비교도 그런 취지를 담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오류에 대해 ‘그놈들은 원래 근본이 나쁜 족속이기 때문에 그랬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순간 역사는 현재성을 잃고 박제가 되어버린다. 친일을 했던 그들도 당시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았던 장삼이사였다. 그 ‘나쁜 놈들’이 행했던 오류를 현재의 우리가 똑같이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친일의 문제를 절대악과절대선의 대결로 치환시키는 종교적 기만을 포기하고, 일상의 문제로 끌어내려 구체화시키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과거사 규명에 소극적인 이들의 고정적인 레퍼토리가 ‘공(功)도 있고 과(過)도 있으니만큼 어쩌구’다. 맞는 말이다. 어찌 인간이 바른 일만 하면서 살 수 있겠냐. 그러나 과연 대한민국에서 그들의 공과가 함께 논해지고 있는가. 언제나 과는 숨겨져 있고 공만 드러나 있지 않던가. 그러니 이제 솔직하게 공과를 모두 까발려야 한다. 그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은 개개인이 하더라도 최소한 판단의 근거가 될 팩트는 공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과거사 규명 작업은 흔들림 없이 추진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연좌제 문제에 대해서 첨언하자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연좌제는 용납될 수 없다. 이는 신기남도 마찬가지고, 박근혜도 마찬가지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자면 지난 대선에서의 노무현 대통령 장인 문제나 이회창후보 부친 문제도 그렇다. 그동안 자신이 지지하는 당파적 이해에 따라 비난의 기준이 들쭉날쭉했던 경향이 있었는데, 이 참에 연좌제적 여론 형성에 대해서 올바른 문제의식이 정립되길 바란다. 비판을 하려거든 당사자에 대해서 비판을 할 일이지 가족의 행적을 그 근거로 동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만 신기남 의원의 경우 그간 국민을 기만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고, 박근혜 당대표의 경우 그의 부친이 주도했던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본인의 인식’이 문제가 되겠다.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엄연히 다른 포인트를 가지고 있으니만큼 이에 대한 국민들의 섬세한 구분이 필요하다. 과거사 규명 작업에 대한 정치적 의도 의혹이나 한풀이식 마녀 사냥 우려는 그런 섬세함을 바탕으로 극복해야 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어떻게 사셨을까 궁금해진
칸막이( khanmagi@yahoo.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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