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의 앞물결을 뒷물결이 밀어낸다고 했던가. 도도한 역사의 흐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 살다보면 어제의 적이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니, 한때의 라이벌이라고 영원히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란 법 또한 없는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자칫 거대한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잊혀질 뻔 했던, 그러나 평범한 우리네 민초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었던 소소한 역사를 복원, 발굴하여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라이벌을 엮어 소개해 왔던 본 시리즈.
지난 2회동안 본지가 소개했던 역사는 식음료의 역사, 빤쓰의 역사였다. 다시 말해 먹거리와 입을거리의 역사였단 말씀. 사람이든 동물이든 먹을 거, 입을 거가 충족되면 절실히 생각 나는 게 하나 있으니, 싸는 문제가 남는다. 싸는 것에도 앉아쏴, 서서쏴, 뭔가 쏴 등의 다양한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는 바, 본지 이번 호에서는 오직 생물학적 남성만이 가능한 쏴에 관련한 라이벌을 준비했다.
지난 80년대, 영상미디어의 영역에서 뭇 소년들의 아랫도리 역사를 관장했던 두 명의 여신, 안소영과 이보희가 그들이다. 허나 이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으니...
먹을 거리 부족하고, 입을 거리 부족하던 시절 우리의 아랫도리 역시 궁핍을 벗어날 수 없었으니, 80년대가 오기까지 이 땅에는 변변한 에로영화 한편 없었다. 마땅한 컨텐츠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친절하게 국민들의 아랫도리 보전까지 신경 써 주시는 고마우신 분들 때문이라는 거 대충 알거다.
1954년 한형모 감독 <운명의 손>
에로영화는커녕 한국영화에서 최초의 키스장면이 나온 게 불과 1954년이었고 이후 수십년 간 검열 관련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벌어졌었다. 6초간의 뒷모습 반라노출이란 해괴한 이유로 1965년 유현목 감독이 구속된 이래, 69년엔 박종호 감독의 <벽속의 여자>를 포함 4편의 영화에 음란죄가 적용되는 등 이 시기 성묘사에 대한 유일한 기준은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였다.(참고로 영화검열을 둘러싼 이 기나긴 싸움은 96년 헌법재판소에서 영화사전심의 위헌 판결이 내려짐으로써 일단락된다.)
허나, 이 땅의 남성들 역시 만만찮았다. 특히 사나이들의 영원한 로망, 여배우의 가슴에 대한 집착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으로, 많이 가렸던 5,60년대엔 한복치마에 눌린 젖가슴의 윤곽이, 그나마 조금 덜 가렸던 70년대엔 숨겨진 1인치 찾기가 장안의 화제였다니 먼저 가신 허망한 헛좃영령들에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별들의 고향>을 비롯 70년대 유력 장르 중의 하나가 일명 호스테스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베드신이라고 해봐야 뽀뽀하고 누울라 치면 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버리기 일쑤였던 암흑의 시기, 아랫도리의 여명은 현재 연희경로원에서 전재산 29만원으로 살고 계시는 전통의 빛나는 이마와 함께 찾아온다.
80년대에 찾아온 건 전두환, 조용필, 컬러티비, 스테레오, 비디오, 만화가게, 오락실만이 아니었다. 전두환의 3S(Screen, Sex, Sports)정책이 통금해제(82년), 두발자율화(82년), 교복자율화(83년), 성 묘사에 대한 검열완화 등의 일련의 문화적 유화정책과 맞물리며 빼앗긴 국민들의 아랫도리에도 제한적이긴 하지만 봄이 찾아왔다. 정책도 정책이지만, 뼈와 살이 타는 밤을 참고 견디기에 울 국민들 너무 오래 참았던 거다.
비디오의 보급과 함께 <엠마뉴엘>, <개인교수>, <차탈레 부인의 사랑>의 실비아 크리스텔이 음지의 스타로 떠올랐고, 피비 케이츠, 브룩 실즈, 소피 마르소 등의 서구 아이돌들이 잡지 화보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특히 세 아이돌에 대한 기억은 당시를 살았던 소년들이라면 누구나 잊지 못할 거다. 당시 온갖 잡지 브로마이드와 연습장 표지는 거의 다 이들이 장식했고, 영원한 소년들의 로망 세계 3대 기타리스트에 대한 논쟁만큼이나 세 아이돌에 대한 순위매기기가 치열했던 기억들... 아, 취향에 따라 다이안 레인이 들어가기도 했었다.
아래를 보시라. 그때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던 <파라다이스>의 그 유명한 피비 케이츠의 올누드 샤워씬 되겄다.
그러나 주의하시라.
지금까지의 설명만으로 80년대의 아랫도리 역사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자칫 사대주의적 발기관(發起觀)에 빠질 우려가 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능력 있고 의지 있는 넘들은 볼 거, 못 볼 거 다 찾아본다. 그러나 여전히 정보와 컨텐츠에 목말랐던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실비아 크리스텔의 노컷비디오를 보고, <파라다이스>를 보고, 포르노를 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아랫도리를 일차적으로 자극했던 것은 골목어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영화포스터로 보는 게 옳을 거다. 당시 연령이 소년에 머물러 있던 층도 마찬가지였데, 서구의 아이돌들이 선망의 대상이자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여신의 이미지였다면, 쌔끈한 카피와 함께 이상야릇한 포즈를 취하고 있던 포스터 속 여인네들이야말로 그들의 직접적인 성적 호기심의 대상이었단 야그 되겄다.
그렇다.
전세계에서 야릇한 포스터 뽑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자랑스런 우리의 조국이, 외세의 폭압에 분연히 떨쳐 일어선 써니텐, 오란씨처럼 양뇬들의 일방적인 공세를 저지하고 우리 강산을 푸르게 푸르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자 뭇 사내들의 끈적끈적한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낸 포스터 속 여인네들이 거기 있었던 거다. 민좃자립의 역사적 사명완수를 위해 밤하늘의 별이 명멸해가듯 담벼락에서 찢겨져 나간 그 수많은 이름들. 그 맨 앞줄에 <애마부인>의 안소영과 <무릎과 무릎사이>의 이보희가 있다.
한국대표에로 <애마부인>. 82년 개봉되어 실제 본 사람보다, 그 명성이 더 유명한 이 영화는 이후 쏟아지게 되는 에로영화들의 효시와 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가 가진 기록 중에서 몇 개만 꼽아봐도, 당시 31만명의 관객동원으로 그해 한국영화 중 관객동원 1위, 한국영화사상 최다 속편제작(13편), 한국영화 최초의 심야상영 등이 있다. 심야상영일날 좌석수 1500석인 서울극장에 5000명이 몰려 매표소가 박살 나고 경찰까지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이후 애마걸들의 복잡다단한 스캔들까지 그 화제성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이라 하겄다.
쌈마이 에로의 원조에서 디벼 볼 가치가 있는 전환기적 멜로로 격상되고 있는 이 영화의 성공비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썰들이 있다. 허나 <애마부인>에서 안소영을 빼고 무슨 할 말이 더 있으랴. 그것이 인간 안소영의 실체든 조작된 이미지든 <애마부인>은 곧 안소영과 동의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소영은 1959년생으로 <애마부인>에 출연할 당시 배우 5년차의 조연급이었다. 당초 감독의 의중은 영화의 설정 상 성경험이 풍부한 30대의 기혼여배우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출문제에 대한 의견차로 결국 무명 연극배우 안소영에게 그 역할이 돌아갔다. 약간의 백치미가 느껴지는 얼굴에 키 161 몸무게 44킬로로 아담한 몸매인데, 포인트는 물론 가슴이다. 언론마다 다르게 나오는 바 대략 38인치에서 40인치로 나오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생구라라는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다. 그러나 우짜겠는가. 확인해 볼 수도 없고. 어쨌든 매력적인 가슴을 가진 것만은 분명하다.
이 영화에서 안소영이 맡은 애마의 캐릭터가 이전의 다른 영화들과 차별되는 건 섹스에 있어서 적극적이란 점에 있다. 이전의 호스테스 영화들에서 여성들의 섹스가 주로 돈이나 가족을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것이었다면, 애마는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섹스를 한다. 섹스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된 거다. 이 때문에 애마의 섹스신은 그 자체로 영화의 주요 구성부분이 된다. 지가 꼴려서 빠굴을 뜬다는 이 당연한 사실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시에는 그토록 파격적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남성발기사적 관점에서 섹스심벌로서의 안소영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 외모일 수 밖에 없다. 과연 안소영은 80년대 한국의 마릴린 먼로로 추앙받을만큼 그렇게 완벽한 몸매와 미모의 소유자였는가.
이 영화를 당시에 직접 극장에서 본 관객들은 현재 최소 마흔을 훌쩍 넘은 중년들이며, 당시 관객층의 상당수가 아저씨, 아줌마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연령은 훨씬 높아진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젊은 세대에게 안소영은 당대의 빼놓을 수 없는 섹스심벌로서 각인돼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섹스심벌로서의 안소영의 파워는 실제 외모나 영화내용보다 다른 것에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안소영은 (자의든 타의든) 한국에서 자신의 육체 자체를 무기로 삼은 최초의 여배우였다. 더 이상 고전미니 정숙미니 하는 추상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풍만한 유방을 무기로 삼은 여배우란 얘기다.
안소영 본인에겐 평생의 굴레처럼 여겨질지 몰라도 풍만한 유방이란 그녀만의 트레이드 마크는 당시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 이전의 어떤 톱스타, 가령 당시 트로이카였던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도 자신의 신체를 그렇게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녀들이 만인의 여신으로 만족한 반면, 안소영은 허벅지와 가슴이 깊이 패인 흰색 속옷을 입은 채 게슴츠레한 눈과 붉게 물든 입술을 하고, 밤마다 외로운 소년, 총각들의 상상 속에 초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애마가 자위하면서, 상상 속에 빠지는 장면이다. 애마가 말 타는 유명한 장면.
애마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옛 애인(하명중)이 밤중에 덮치는(?) 장면. 근데 정말 엽기적인 넘이다
여전히 80년대에도 검열은 존재했기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애마부인>의 노출수위는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 장면은 의도적으로 검열을 역이용했는데 심의 받을 때는 일부러 프린트를 어둡게 떴다고 한다. 옷을 입었음에도 안소영의 몸매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참고로 포스터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愛馬夫人이 아니라 愛麻夫人이다. 삼베를 사랑하는 부인이라니. 이 역시 공륜의 심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과연 가위손덜의 뇌가 어디 붙어있는지 연구대상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82년 <애마부인>이 일단 물꼬를 트자 수많은 에로영화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82년만 해도 <산딸기>, <반노>, <빨간앵두>, <탄야> 등이 개봉했고,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각종 시리즈의 속편들은 물론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 <뼈와 살이 타는 밤>, <피조개 뭍에 오르다>, <깊고 깊은 그곳에> 등의 오묘한 작명으로 승부를 걸었던 작품들, 그리고 관객몰이에 성공한 <어우동>, <변강쇠>, <내시>, <뽕>등의 히트작 등이 줄을 이었다.
이 가운데 드디어 84년 안소영에 필적하는 또 한명의 섹스심벌이 탄생하였다. 80년대의 대표적 감독 중의 하나인 이장호가 <바보선언>과 <일송정 푸른 솔은>에서 이미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이보희를 관능의 화신으로 변신시켜 필드에 내 보낸 것이다. 그녀가 정면을 응시한 채 발을 꼬고 있는 이 유명한 포스터,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 많을 게다. 본 기자 기억에도 포스터 자체만으로는 <애마부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일단 제목부터 먹고 들어간다. <무릎과 무릎사이>.
다음 예고편을 보시라. 안성기와 이보희가 짝을 이뤄 운율에 따라 낭송하는 나레이션은 가히 ‘청산별곡’의 ‘얄리 얄리 얄라셩’에 비견될 만 하다.
이보희는 여러 면에서 안소영과 비교되는 데, 59년생 동갑내기에 비슷한 시기 당대 최고의 섹스심벌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섹시미의 코드와 컨셉에 있어서는 확연히 다르다.
이보희는 안소영의 거대한 유방은 없었지만, 안소영이 가지지 못한 새침하거나 토라진 듯한 표정과 늘씬한 몸매로 도회적 세련미를 지니고 있었다. 안소영의 유혹이 고급스런 속옷 사이로 깊게 패인 가슴골을 드러내며 짙은 한숨을 내쉬는 유한마담풍의 질펀함이라면, 이보희의 유혹은 가늘고 흰 팔과 다리의 라인이 언뜻언뜻 제공하는 도발에의 충동에 가깝다. 한마디로 <애마부인>에서의 안소영이 육체는 해방됐으나 뭔가 올드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반해, 이보희는 보다 현대적인 미인의 이미지에 가깝다는 야그 되겄다.
이같은 이보희의 이미지는 데뷔시절부터 함께 작업해 온 이장호 감독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80년대 손꼽히는 유력한 감독이자 다양한 영화들을 만들어 온 이장호와의 공동작업으로 이보희는 당대 누구보다 독창적인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었다. 심지어 사극 <어우동>에서 조차 그녀는 신분과 성차를 뛰어넘어 자신의 성적 매력만으로 남성들을 압도한다. 이런 식의 적극적인 성적 유혹은 당시의 천편일률적인 에로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시도로, 당시의 관객들에게 이보희를 여타 다른 에로배우와 구분 짓는데 도움을 줬다.
대부분의 에로배우들이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에로영화에만 출연했던 것과 달리, 이보희가 <외인구단>,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접시꽃 당신> 등의 다양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80년대 에로영화에서 시작되는 육체적 매력의 적극적 과시라는 측면과 함께 다양한 캐릭터에서 나오는 상상의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이보희는 한 단계 진일보한 섹스심벌이라 할 수 있겠다.
안소영이 가슴 하나로 승부했다면, 이보희의 무기는 가늘고 긴 다리와 균형 잡힌 몸매다.
<애마부인>과 <무릎과 무릎사이> 이후 안소영과 이보희의 행보는 대조적이다. 안소영은 여타 다른 에로배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피하는데 실패했다. <산딸기>, <여자가 두 번 화장할 때> 등의 후속작들은 전작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했고, 88년 <합궁> 이후 5년만에 다른 이미지로 재기를 시도한 <그 섬에 가고 싶다> 에서도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압구정동에서 의상실 안소영 콜렉션을 운영하던 그녀는 98년 홀연히 사라졌는데, 2000년 현재 뉴욕 인근에서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이보희의 경우 93년 <49일의 남자>를 끝으로 영화에는 더 이상 출연하지 않지만, 이후 TV로 진출 예전의 에로배우 이미지를 완전히 벗고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01년 SBS <여인천하>에서 자순대비 역으로 나왔고, 작년과 올해 KBS에서 시트콤 <달려라 울엄마>, 주말연속극 <애정의 조건>에서 각각 공주병 아줌마와 푼수끼 넘치는 노처녀 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암울했던 80년대, 오직 몸뚱이 하나로 이 땅의 아랫도리 역사를 새로 쓰셨던 두분 누님들, 부디 행복하게 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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