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다시 읽는 조선여인열전 - 어우동 1탄 2004.7.16.금요일
문제는 그 담이다. 1980년대 후반, 경제가 폈는지 전국의 나이트클럽이 불야성을 이뤘고 갖가지 희한한 쇼들이 무대를 수놓았다. 불쇼·물쇼 등 음양오행적 쇼는 물론, 뱀쇼·악어쇼 등 파충류 주연의 쇼도 넘실댔다. 그 중 단연 돋보인 게 바로 어우동쇼다. 영화 <어우동>에 나오는 이보희 여사 복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 춤을 추다가 한꺼풀 두껍닥씩 벗어제끼는 거다. 돗자리도 딱 한 번 봤다. 친구 결혼식 피로연으로 마포에 있는 나이트클럽 갔다가 덜컥 보고 말았다. 한마디로 고전적 요소를 가미한 홀딱쇼였다. 아마 기억이 새록한 남정네들 많으실 게다.
자. 황진이 때처럼 姓名부터 뜯어보자. 어우동(於于同)은 어씨가 아닌 박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이라고도 나온다. 풀네임으로 하면 박어을우동이 된다. 길다. 근데 어우란 어감이 그리 낯설지 않다. 아마 <황진이 편> 욜나리 읽어주신 분이라면 눈치까실 게다.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온다. 유몽인의 호가 바로 어우당(於于堂)이다. 그럼 어우는 뭔 뜻인가? <백과사전>을 보니, <장자(莊子)> 천지편(天地篇)에 나오는 "쓸데없는 소리로 뭇사람을 현혹시킨다(於于以蓋衆)"란 대목에서 따온 거란다. 그 게 "뭇사람의 관심을 끈다"란 뜻이라면 그녀의 일생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글타고 해서 어우동의 뜻이 바로 요거라곤 단언 못한다. 걍 참고만 하잔 거다. 글고 어을우동의 어감도 그리 서먹치 않아 생각해보니 장군의 아들의 따님 되시는 김을동 여사 때문인 거 같다. 넘어가자.
어우동을 다룬 학술적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허나 그녀에 대한 이런저런 글들은 여기저기 득실댄다. 최근 나온 글로는 이덕일, 남성 지배사회에 맞선 성해방론자 어우동(<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과 강명관, 누가 이 여인들에게 돌을 던지는가-감동과 어우동(<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등이 있다. <어우동 편> 쓰면서 요 두 글을 자주 언급할 거다. 근데 이 두 글은 물론 딴 글에서도 어우동의 집안 얘기는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아빠가 박윤창이고 엄마가 정씨였으며, 남편이 종친인 태강수 이동이란 정도다. 그치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녀의 부모와 남편, 글고 오빠와 딸에 얽힌 결코 예사롭지 않은 얘기들이 나온다. 그러니 그 현란한 두분가사(豆粉家史), 즉 콩가루집안 내력을 함 훑어보는 것도 그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 하다. 허나 오해들 마시라. 집안이 콩가루니 어우동도 그 모양이란 말을 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콩가루집안 출신이면서도 반듯하게 자란 알라들도 얼마나 많은가. 가까이는 우리 아들도 있구나. 어우동 아빠는 박윤창(朴允昌)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조~성종 때 박윤창을 검색하면 제법 많은 박윤창이 나오는데, 한자 스팰링이 같더라도 동명이인이 섞여 있는 듯 하여 일단 제낀다. 암튼 어우동사건이 일어난 성종 11년(1480) 당시 박윤창의 직책은 정2품인 승문원지사(承文院知事)였다. 그치만 이때 이미 아내 정씨(鄭氏)와는 별거상태였던 듯하다. 왜냐고? 어우동의 엄마 정씨도 남자를 꽤 밝혔단다. 어우동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엄마도 음난하지 않았을까 쑥덕댔단다. 그러자 정씨는 "누군들 정욕이 없겠냐만 내 딸은 너무 지나쳤다"고 말했다(<성종실록> 11년 10월 18일). 이 기록만 갖고는 음난 여부를 판단키 어렵다. 그치만 어우동 오빠 박성근은 어렸을 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난 엄마가 잠잘 때 발이 넷 있는 걸 봤어여" 설마 엄마가 아빠랑 같이 자고 있는 걸 보고 일케 말하진 않았을 거다(처용 생각나네). 이 때문에 정씨는 아들을 미워해서 궤짝에 가두기도 하고 먹이고 입히는 게 꼭 몸종의 자식들에게 하듯 했단다(<성종실록> 19년 8월 22일). 나중에 재산을 나눠줄 때도 쬐끔만 떼줬단다. 결국 남편은 남종과 놀아난 정씨를 쫓아낸다(<성종실록> 11년 6월 15일). 이런 집안에서 다시 어우동사건이 터졌으니 오죽했겠는가. 그치만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성종 19년(1488) 박성근은 엄마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다. 글고 이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어우동의 딸 번좌는 억울한 옥살이를 한다. 게다가 박성근의 처는 조사를 받는 남편에게 "너같은 넘은 빨리 죽어야 한다"고 댕댕댄다. 이 얘기를 들은 성종이 한마디 한다. "박성근의 집안은 모두 사람의 유(類)가 아니다."(<성종실록> 19년 8월 22일) 당대의 콩가루집안으로 국가공인을 받기에 이른 거다. 아, 글고 성종 19년 어우동 딸이 옥살이를 했다니 알라는 아녔을 거다. 적어도 15살은 넘어야 옥에 가두지 않았을까. 글타면 어우동사건이 터진 성종 11년에는 못해도 7살쯤이었을 거다. 가련타.
<한국인물열전>이든 <조선여인열전>이든 다루는 인물마다 해꼬지를 해댔더니 이젠 쫌 시각을 바꿔볼란다. 일단 <어우동편> 1탄에서만이라도 말이다. 그래서 어우동 부부관계가 아작난 이유를 남편 이동에게 돌려보련다. 어우동사건이 터진 건 성종 11년(1480)이다. 하지만 언제 어우동이 쫓겨나서 남정네들과 놀아났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성종실록>에는 다짜고짜 담처럼 나온다. A. 좌승지 김계창이 들어와 일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태강수(泰江守)의 버린 아내 박씨가 죄가 중한 것을 스스로 알고 도망하였다 하니, 끝까지 추포(追捕)하라" 하였다. 김계창이 말하기를, "박씨가 처음에 은장이[銀匠]와 간통하여 남편의 버림을 받았고, 또 방산수(方山守)와 간통하여 추한 소문이 일국에 들렸으며, 또 그 어미는 노복과 간통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었습니다. 한 집안의 음풍(淫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끝까지 추포(追捕)하여 법에 처치하여야 합니다"라 했다.(<성종실록> 11년[1480] 6월 15일) B. 어을우동은 바로 승문원지사 박윤창의 딸인데, 처음에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가서 행실을 자못 삼가지 못하였다. (태강수) 이동이 일찍이 은장이[銀匠]을 집에다 맞이하여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女僕]처럼 하고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속으로 가까이 하려고 하였다. (태강수) 이동이 그것을 알고 곧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서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였는데... (<성종실록> 11년[1480] 10월 18일). 돗자리는 <성종실록> 역문만 봤지 아직 원문을 보지 못했다. 이거 치명적 실수다. 텍스트 노래 부르는 놈으로서 직무유기다. 그치만 현재 원문 볼 형편이 못된다. 나중에 꼭 확인할테니 일단 역문으로 스토리를 엮어보자. A를 보면 어우동은 "처음에 은장이와 간통하여 남편의 버림을" 받았단다. 근데 B에선 쫌 다르다. 간통까지는 안가고 "마음속으로 가까이 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눈치까고 쫓아냈단 거다(A의 간통이 원문엔 어케 나오는지 나중에 확인해보련다). 암튼 B만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간통은 아닌 셈이다. B에선 어우동이 "시집가서 행실을 자못 삼가지 못하였다"고 말한 뒤 은장이와 "마음속으로 가까이 하려고" 했단다. "마음속"의 생각이 "행실을 자못 삼가지" 못한 대표사례란 거다(이거보다 더 화끈한 스캔들 있었으면 그걸 들이댔겠지). 어우동, 진위를 떠나 억울하다고 개겨볼 만도 하구나. 근데 어우동사건이 터지기 4년 전 어우동이 남편에게 버림받았단 내용이 <성종실록>에 담처럼 실려 있다. C.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태강수 이동이 기생 연경비(燕輕飛)를 매우 사랑하여 그 아내 박씨(朴氏)를 버렸습니다. 대저 종친으로서 첩을 사랑하다가,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려서 이별하는데, 한번 그 단서가 열리면 폐단의 근원을 막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박씨와 다시 결합하게 하고, 이동의 죄는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르고 이동의 고신(告身)을 거두게 하였다.(<성종실록> 7년[1476] 9월 5일) 종부시는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요새로 치면 청와대 민정수석실이다. 종실의 비행에 대해 담당관리가 임금에게 꼰지르는 말이니 대략 믿을 만 하다 치자. 뽀인트는 이거다. 이동이 ①기생을 사랑하여 ②부인의 허물을 들춰내서 ③제멋대로 내쫓았으니 ④다시 같이 살게 해줍시다. ①~④ 모두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하나하나 쪼개보자.
이동이 연경비란 기생과 놀아난 건 분명하다. 연경비라, "제비처럼 가벼이 난다(燕輕飛)"란 뜻이니 몸매나 자태가 죽여줬나보다(이 연경비란 기생,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실록>에만 9번 나오는 걸물이다. 남자관계 물론 뽁잡하다). 그치만 기생을 사랑하면 첩으로 들여앉힐 일이지 왜 부인을 쫓아냈을까(연경비는 뒤에 딴 종실의 첩이 된다). ② "부인의 허물을 들춰내서" 어우동이 뭔 잘못을 저지르긴 저질렀구나. 아마도 은장이와의 스캔들인 것 같다. ③ "제멋대로 내쫓았으니" 오잉? 이게 뭔 소리냐. 정말 어우동이 은장이와 간통했다면 이건 당연히 쫓아낼 껀수가 된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제아무리 유명무실했다 쳐도 간통만큼은 얄짤없다. 근데 왜 이 관리는 이동의 처신을 제멋대로라고 했을까. 별거 아니란 뜻 아닌가. ④ "다시 같이 살게 해줍시다" 간통한 부인과 다시 같이 살게 해줘? 이게 관리가 임금에게 할 소린가. 위의 C에서 고신(告身)이란 "관리로 임명된 자에게 수여한 증서"다. 그러니 고신을 거뒀다는 건 관직을 빼앗았단 뜻이다. 성종 7년 9월 5일의 일이다. 하지만 몇 달 뒤인 11월 29일 "직첩(職帖)을 되돌려" 준다. 그럼 이동이 다시 어우동을 불러들였단 뜻인가? 모른다. 이 날 "직첩을 되돌려" 받는 넘들은 무려 129명이다. 일종의 일괄사면인 셈이다. 즉, 이동이 어우동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도 성종은 종친인 그를 어영부영 스리슬쩍 눈감아줬을 수 있단 거다. 여기서 잠정 추정, 어우동은 은장이와 간통하지는 않았다. 만약 정말 간통했다면 위와 같은 대화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어우동은 기생이랑 놀아나던 남편의 눈밖에 나 은장이와 간통하려 했단 심증만으로 내쫓긴 건 아녔을까.
근데 성현의 <용재총화>를 보면 앞서 나온 자료들보다 훨 구체적 내용이 실려 있다(이것도 원문은 못 봤다. 죄송시렵다). 글고 <성종실록>보다 <용재총화>의 내용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D. 남편이 나가고 나면 여종의 옷을 입고 은장이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교한 솜씨를 칭찬하다가 내실로 끌어들여 마음껏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들어오면 몰래 숨기곤 했다.(<용재총화> [1525]) 변호사 입장이 되어 어우동을 감싸보자. 여종의 옷으로 갈아입고... 내실로 끌어들여... 마음껏 간통을 하다가... 남편이 들어오면 몰래 숨겨? 명색이 종실 집안이니 남녀 종들도 여럿이었을텐데? 어차피 내실로 끌어들일 거라면 뭣땜시 여종의 옷을 입고 나와? 내실에서 놀아나가 남편이 들어오면 몰래 숨겨? 어느새? 어따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용재총화>에선 이리저리 부풀려진 풍문을 그대로 실었을 가능성이 크다. 변호하자만 글탄 거다. 글고 사료적 가치로 본다면 <성종실록>이 <용재총화>보담은 훨 높다. 물론 돗자리 논리의 뽀인트는 1476년 이동이 어우동을 버린 이유가 은장이 스캔들이었어야 하며, 물증이 없이 심증만으로 쫓겨났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글타면 어우동이 조선의 대표급 음녀(淫女)가 된 데는 남편의 책임도 크다고 하겠다. 그치만 솔직히 아직은 자신 없네. 술 마시랴... <빠리의 연인> 보랴... 글 쓰랴... 바쁘다. 아무래도 욕 절라 먹을 거 같다. 까짓것, 2탄에서 만회하면 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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