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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레터] <반딧불의 묘>의 세츠코에게


2004.8.6.금요일
딴지 팬레터부


 




to. 세츠코


오랜만이야. 세츠코. 생각해보니 벌써 7년이나 지났구나. 너를 처음 만난지도. 까닭 모를 울분과 외로움에 지쳐있던 그해 가을, 친구의 소개로 너를 처음 만났던 그때가 지금도 생각나. 사위는 고요한 채 귀뚜라미 울음소리만 들려오고, 자욱한 밤안개에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던 그해 가을밤. 남루한 자취방에서의 기억들...


생각해보면 만화영화는 어린애들이나 보는 것이란 나의 편견을 깨기 위해 친구가 너와의 만남을 주선해 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어. 하지만 그만큼 잔인한 선택이기도 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


처음 <반딧불의 묘>라는 제목을 봤을 때 많이 의아해 했어. <마이크로코스모스>식의 자연다큐멘터리를 만화로 그린 것일까. 이걸 왜 보라는 것일까. 전쟁의 와중에 굷어 죽는 남매의 이야기라는 설명을 들은 후에도 의구심은 더 커져만 갔지. 이런 신파조의 이야기와 만화영화에 대한 편견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 의구심은 오래지않아 풀리게 되었지.


그래 맞아 신파.


2차세계대전 중에 전쟁고아가 되어 굶어 죽는 너와 니 오빠 세이타의 이야기는 설정만으로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할 만한 전형적인 신파조의 이야기임에 틀림없어. 하지만 너와 니 오빠의 사연을 접한 어느 누구도 그걸 탓하지 않더구나. 너희 남매의 사연에는 어떤 특별함이 있길래...
 









나중에 알 게 된거지만 너희 남매의 사연은 원래 1967년 노사카 아키유키라는 작가에 의해 소설로 발표된 것이었더구나. 이 작품으로 다음 해 나오키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우리가 너희 남매를 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1988년 동명의 원작을 바탕으로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기 때문이야. 말이 나온김에 너희 남매에게 명확한 형체와 목소리를 부여해준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에 대해서 조금만 얘기해 볼까.


다카하타 이사오는 미야자키 하야오로 유명한 스튜디오 지브리 소속의 감독이야. 흔히 지브리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만 떠올리지만 실제로 둘은 평생을 함께 작업해 온 콤비이자 일본애니메이션을 지탱하고 있는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어. 하야오가 연출하는 작품은 이사오가 프로듀서를 해주고, 이사오가 연출하는 작품은 하야오가 프로듀서를 해주고 이런 식이지. 이사오는 하야오의 6년 선배로 도에이 동화시절 노조위원장을 했을 정도로 좌파적 성향이 강한 감독으로 유명해. 하야오 애니메이션에서 특징적인 무정부주의적, 생태주의적 성향도 이사오의 이런 성향에 영향 받은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 있는 대목이지.


하지만 둘의 작품 스타일은 판이해. 하야오의 작품이 무국적적, 코스모폴리탄적인 배경의 환타지라면, 이사오의 작품은 일본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 리얼리즘의 추구에 가깝지. 그래서일까. 유독 너희 남매의 창조주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 속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쉽게 보기 힘든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


1988년, 오토모 가츠히로가 <아키라>로 사이버펑크를 이야기하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웃의 토토로>로 안온한 일본의 1950년대 전원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이사오는 오히려 일본인들 스스로가 잊고 싶어했던 반세기 전의 처참한 과거로 돌아갔어. 이미 현대인들의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너희 남매의 사연을 통해 이사오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쇼와 20년(1945년) 9월 21일 나는 죽었다.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던 오프닝을 너도 알고 있을거야. 이미 죽어 유령이 된 너의 오빠 세이타가 역 구내 기둥에 기대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며 담담하게 내뱉는 나레이션... 이후 죽은 세이타의 발길을 따라 우리는 너희 남매의 안타까운 사연을 지켜보게 되지.


특별할 것도 없는 사연. 전쟁의 참화를 겪고있는 나라에서는 어디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전쟁고아들의 사연 말이야. 미군의 폭격에 어머니를 잃고 친척집에 얹혀 살다가, 친척아주머니의 구박에 방공호로 가지만 모두의 무관심 속에 결국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 흔하디 흔한 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했던 이유는 무얼까. 물론 가장 큰 이유로는 진정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 슬픈 사연이 일회성의 최루효과로 끝나지 않고 내내 무거운 가슴의 짐으로 남는건 무엇보다 너희 남매를 지켜보는 다카하타 이사오의 잔인할 정도로 담담한 시선 때문인 것 같아. (너희 남매를 아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도 원작보다 애니메이션을 먼저 봤단다. 원작도 애니메이션만큼이나 담담하고 건조하더구나. 여기서는 애니메이션에만 한정지어서 얘기해볼께.)


너희 남매에 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기 쉬운 감정적, 자극적 연출이 들어설 자리가 다카하타 이사오에겐 아예 없는 것 같더구나. 너희 남매의 사연에 스포일러란 존재하지 않아. 그 어떤 트릭이나 반전도 없는 탓에, 우리는 너희 남매에게 남겨진 운명을 너무나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단다. 남은 것은 예정된 파국을 고통스럽게 지켜보거나, 아예 외면하는 것일뿐.


비극의 순간을 강조함으로써 얻게 되는 일순간의 카타르시스보다 이사오가 노린 것은 끝없는 고통의 유예였던 것 같아. 어떤 해소과정도 없이 차곡차곡 쌓여 나중에 현실로 돌아와서도 그 앙금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네살박이 여자아이의 행동패턴을 관찰하기 위해 유치원에 상주했던 이사오의 집요함 덕택이었을까. 파국을 예감하면서도 쉽게 너희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건, 애니메이션 캐릭터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너희들의 존재감도 한몫을 했단다. 드롭프스를 달라고 떼를 쓰던 니 또래 특유의 천진함부터 흰쌀밥에 엄마의 유품에 대한 기억마저 까맣게 잊고 마는 영악함까지. 그걸 누가 탓할 수 있을까. 대책 없이 너를 데리고 친척집에서 뛰처나온 니 오빠 세이타의 무모함 마저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사오는 버려진 너희들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너희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것이 모두 전쟁 때문이었다고. 전쟁은 영원히 사라져야한다고. 전쟁이 없었으면 너희들의 고통도 없었을 것이라고.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 하지만 단순한 반전애니메이션으로 보기에 이사오가 묘사하는 전쟁의 모습은 제한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지더구나. 구체적 역사로서의 태평양전쟁이라기보다는 어떤 한계상황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


전쟁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구체적 묘사 대신,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각각의 사람들이었어. 너희들에겐 섭섭하게 들릴지 몰라도 모두들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자신의 가족을 돌보기에도 벅차 결국 너희들을 천덕꾸러기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던 친척집 아주머니, 자신이 먹을 것 외에 그 누구에게도 나눠 줄 게 없었던 농부아저씨, 그저 물 한모금의 작은 배려 외에 너희들에게 어떤 도움도 못되는 무기력한 순사, 영양실조 걸린 네게 그저 자양분을 섭취하라는 하나마나한 소리밖에 할 수 없는 의사까지.


그들의 무관심과 비정이 너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건 분명한 사실이야. 현대 고베의 야경이 보이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사오는 현대의 일본이 너희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하고 있지.


하지만 그들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그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가 그들에게 부과했던 몫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그들은 그저 자신이 처한 위치와 지식을 이용해 자신의 생존만을 책임졌을 뿐. 너희 남매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었기에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거지. 그것이 당시의 게임의 룰이었으니.


세츠코 기억해봐.


엄밀한 의미에서 너희 남매 조차도 너희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던 타인에 대한 비정과 무관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단다.




볼 때마다 장면장면 새로운 의미를 곱씹게 되는 너희 남매의 사연이지만, 얼핏 사소해보일 수 있는 한 장면이 쉽게 잊혀지지가 않는구나. 방공호에서 너와 세이타가 처음으로 잤던 날 기억나니. 세이타가 반딧불을 많이 잡아줬었지. 너는 곧 잠들었기 때문에 다음 일은 기억하지 못할거야. 세이타는 방공호 속을 가득 메운 반딧불의 향연을 보면서 달콤한 공상에 빠진단다. 하지만 일순 공상에서 깨어난 순간, 세상에 남겨진 게 너와 자신밖에 없다는걸 깨닫게 되지. 아무리 의연한 척 해도 세이타 역시 기껏해야 10대 소년. 그 절대적 외로움 속에서 의지할 존재라곤 너밖에 없었어. 너를 힘껏 끌어안아 보지만, 니가 잠결에 보인 행동은 오빠의 손을 뿌리치는 것이었지. 폭격이 있는 날이면 마을로 돌아가 피신하는 마을 사람들 속에서 도둑질을 하며 환호성을 질렀던 것도 니 오빠였단다. 물론 너희 남매의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지만.


여기서 누구를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리고 아무도 비난할 수 없다면 너희들의 죽음 역시 어느 누구에도 책임이 없는 것일까.


이사오가 너희 남매를 통해서 하는 이야기가 단순한 반전이 아님은 여기에 있어.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제2, 제3의 세츠코, 세이타들은 죽어가고 있거든. 사회가 각자에게 부과하는 역할이 구성원의 독자적 생존에 한정되는 한, 생존능력이 없는 구성원은 소멸될 수밖에 없는거야. 전쟁상황은 그런 사회의 극단화된 단면일뿐.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이기성을 논하기 전에 사회가 구성원에 부과하는 역할이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 이게 이사오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아닐까. 언제부터 우리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의 안위 따위는 상관이 없게 된걸까.


아울러 한가지만 덧붙이고 싶어. 결국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시험에 들 게 하는건 그 자체가 죄악이란 거야.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동물로서의 본능만을 강요하는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어.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부르주아 아가씨들이 아름다운 풍경과 Home Sweet Home을 노래할 때, 이사오가 보여주는 화면은 그런 의미에서 인상적이야. 오빠가 나간 사이 네살박이 어린아이가 홀로 보내기엔 너무도 길었을 하루. 그 하루동안 혼자 놀면서, 세츠코 그때 너는 무슨 생각을 했었니?





세츠코.


니가 죽은지도 벌써 반세기가 훌쩍 지났어. 그동안 많은 아이들이 너희 남매와 비슷한 이유로 죽어갔고.


그리고 얼마전.


떠오르는 이미지라곤 터번으로 칭칭감은 얼굴에 겁먹은 눈망울밖에 생각 안나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곳. 그곳으로 우리나라가 파병을 했단다. 그곳의 많은 어린아이들이 이미 너와 같은 운명을 맞았거나, 조만간 그 길을 따라가겠지.


미국과 이라크와 한미동맹과 국익과 온갖 어지러운 말들이 넘쳐나고 있어. 하지만 어떤 이유든, 어떤 논리든 이 점만은 분명할 거야. 전쟁을 하려는 자들이 있고 그 때문에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죽는자들이 있다는 것. 죽은자들이 굶어죽었든 총에 맞아 죽었든, 그걸 방치한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해소할 길 없는 죄책감을 가질 것이고, 언젠가 어느 누군가 그걸 바라보며 HOME Sweet Home을 부를 것이라는 사실 말야.


우리는 누군가에게 동물로서의 시험에 들 것을 강요당하는 모르모트에 불과한 것일까.



세츠코 팬클럽회원
신짱(redpia@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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