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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피튀기는 중세 유럽 전쟁사 - 군대와 장비 편

2003.9.6.토요일
딴지 군사부

모두 지난 2주 잘 보냈습니까? 저번 기사에 이어 오늘은 스또오리가 아니라 뭔가를 연구하는 시간입니다. 그 뭔가가 뭐냐구요? 일단 보시고 얘기하십시다.





지난 시간에는 서유럽에서 세 명의 경쟁자가 서로 땅따먹기하는 스또오리를 얘기했다. 이번엔 그 너마들의 장비를 살펴보도록 할란다. 먼저, 세 경쟁자의 군대의 장비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서유럽 전체가 비슷한 기술력을 지녔고, 서로간에 교역도 활발했으므로 약간의 지역적인 개성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왼쪽은 노르만 기사를 그린 것으로, 이정도가 이 시기 직업 군인의 표준장비이다. 하지만 직위에 따라, 취향에 따라 다양한 물품을 소지했고, 특히 일반 병사들의 경우에는 경제적인 이유와 대물림의 전통으로 몇 세기 전의 물건들도 계속 사용했다.


1. 코가리개 달린 뾰족투구


2. 머리 덮고, 팔꿈치와 무릎까지 오고, 가랑이가 트인 사슬 갑옷


3. 줄 달린 연모양 방패


4. 베기에 좋은 양날 칼


5. 가죽 신발 뒤에 달린 박차    (기병의 경우)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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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세기 전부터 사용되던 조립투구(Spangenhelm). 금속으로 먼저 뼈대를 만들고, 금속판을 리벳으로 붙인다.


2. 뼈대가 없이 금속판 네 장을 맞대고 리벳으로 붙인다. 코가리개도 역시 리벳 사용.


3. 머리부분은 금속판 한 덩어리로 만들어졌다. 코가리개는 리벳 사용. 이것부턴 최신기술.


4. 코가리개까지 모두 하나. 완전 일체형. 일체형 쪽이 더욱 충격에 강함. 투구 안쪽에는 쓰기 편하게 천이 대어져 있고, 착용 후 줄을 이용하여 머리에 고정시켰다.


 


위 오른쪽은 노르웨이에서 발견된 10세기 유물, 안경 달린 투구. 다른 지역에선 발견되지 않는걸로 봐서 주로 바이킹들이 사용했다고 여겨진다. 안경 바로 오른쪽에 쇠사슬이 보이는가? 이렇게 투구에 사슬을 달아 목을 보호하기도 했다.


 갑옷



쇠 고리 하나 당 다른 4개를 연결하여 리벳으로 고리 완성. 팔뚝과 무릎 아래는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는데, 지위가 높은 몇 명은 그림과 같이 추가 보호대를 했다. 그리고 말을 타기 쉽도록 앞뒤로 터져있다. 머리부터 입었으며, 대략 14kg 정도하는 무게는 어깨에 집중되었고, 추가로 허리띠를 하면 무게 분산에 도움이 되었다.


이런 갑옷은 비쌌기 때문에 가죽 갑옷을 입거나 갑옷 없이 전투에 참가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그리고 몇 세기 전에 유행했던, 머리 덮개가 없는 T-셔츠 모양의 것이나, 엉덩이까지 오는 좀 짧은 것이나, 앞뒤가 아니라 옆으로 터진 갑옷도 사용되었다. 미늘갑옷도 존재했지만 그리 많이 쓰이지는 않았다. 


 방패



나무로 모양을 만들고, 가죽을 대고, 테두리를 둘렀다. 줄을 달아 목에 걸거나 등에 맬 수 있게 했고, 가운데 아래 부분에 보이는 것과 같은 죔쇠를 사용하였다. 이 죔쇠는 안장, 허리띠등 여러 곳에도 사용되었다. 손잡이는 X자뿐만 아니라 사각, 그냥 1자 줄등 여러 가지가 사용되었다. 방패 바깥쪽 한 가운데에는 금속으로 된 돌기를 붙였고, 동물이나 기하학적 문양을 그려 넣었다. 개인이나 가문의 문장(紋章)은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


오른쪽의 것은 노르만들은 이제 폐기해 버린 원형방패이다. 색슨과 바이킹들은 아직도 이 전통적인 모양의 방패를 사용했다. 제작방법은 연모양 방패랑 별 차이 없고, 역시 줄을 달았다. 한 가운데에 돌기를 붙였고, 그 부분을 이용하여 손잡이를 달았다.


 무기 - 칼



가장 선호되던 무기는 양쪽으로 날이 선, 베고 휘두르기 위주의 칼이었다. 칼 몸은 대략 78cm 정도이고, 브라질 호두 모양의 칼자루 끝이 유행했다. 칼집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가죽으로 둘러졌다.


바깥에는 튼튼한 강철을, 안쪽에는 연한 철을 이용하여 튼튼하지만 쉽게 부러지지 않는 칼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기법으로 최상급의 칼날을 만드는 데는 한 달이나 걸렸다. 가운데에는 홈을 내어서 무게를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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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세기 초부터 12세기 후반까지 사용되는 브라질 호두 모양 자루 끝이 달린 칼자루,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


2. 전통적인 바이킹 칼자루, 9~10세기에 유행.


3. 전통적인 색슨 칼자루, 역시 9~10세기에 유행.


 무기 - 그 외




위에서 칼이 가장 선호되는 무기라고 적었는데, 문제는.. 칼은 쇠를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가장 보편적인 무기는 창이었고, 세월이 흐를수록 칼의 보급율이 올라갔다. 창은 기병, 보병 모두 즐겨 사용했고, 던지기도 하고 찌르기도 했다. 도끼의 경우, 원래는 바이킹의 연장이었다가 무기로 발전했는데, 이걸 색슨도 받아들여서 많이 사용하였다. 특히 양손 도끼는 굉장한 파괴력을 보였다고 한다. 궁술은 서유럽 널리 퍼져있었고, 특히 사냥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바이킹 영웅담에는 활을 잘 쏘았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하지만 주력 전사 계급은 전장에서 활을 다루지 않았고, 특별히 궁수들을 고용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투구나 갑옷 등을 착용하지 않고, 활 외에 단도 정도만을 방어용으로 지녔다. 그리고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석궁도 사용되었다.


 깃발



바유 타피스트리에 나타나 있는 깃발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가운데 십자가가 있는 것이 교황이 보내준 깃발로 추정된다. 가장 오른쪽 빨간색의 것은 잉글랜드 웨섹스 왕가의 용(또는 와이번 wyvern)깃발이다. 그냥 천쪼가리가 펄럭이는 것이 아니라 무슨 양말같이 되어있다. 반원 안의 새, 갈가마귀는 바이킹의 신인 오딘(Odin)의 새로, 바이킹들의 깃발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 갈가마귀 깃발이 노르만에 의해 계속 사용되는 것은, 그들의 바이킹 전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징병 


중세 유럽을 관통하는 봉건 제도는 시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그래도 우리가 가장 필요한 부분만 단순화 시켜보자. 전문 전투 집단은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영주나 통치자의 집에 머물면서 급료를 받으며 생활하는 가신. 통치자가 떼어준 땅을 관리하는 영주가 있다. 가신은 항상 고용되어 있는 용병과 같고, 실제로 용병이었다가 가신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많았고, 그 반대도 흔했다. 영주는 땅을 받은 대가로 땅의 가치에 맞는 병역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역시 가신 ↔ 영주의 이동도 흔했다.


노르만의 경우, 의무 병역기간은 일 년에 40일정도였다고 한다.


색슨의 경우, 5가구가 먹고 살 수 있는 땅에서 병사 한 명이 소집되어 두 달 정도 복무하며, 식량과 장비는 그 병사가 직접 지니고 왔다. 만약 병사를 내지 못하면 40실링(shilling)을 내야했다. 이들은 병역기간이 끝나면 집에 돌아갈 권리가 있었고, 왕이라도 그걸 막지는 못했다.


 머리 모양


왼쪽은 노르망디에서 유행했던 머리 모양이다. 수염과 뒤통수를 깨끗하게 면도해 버린, 현대인의 감각으로 보면 상당히 이상한 모양인데, 노르망디의 젊은이들은 이 유행에 모두 동참한 것 같다.


색슨과 바이킹은 모두 장발에 가까웠고, 수염을 길렀다. 색슨은 콧수염과 턱수염을 어느 정도 길이가 되게 다듬었고, 바이킹은 모든 수염이 참 풍성하게 난 것으로 묘사된다.


가끔 턱수염을 머리카락같이 땄다고도 한다.


  기병



아직까지 말에 갑옷을 씌우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안장에 굴레가 전부였다. 오른쪽 위의 것은 말발굽에 박는 편자, 아래 것은 기수 신발 뒤에 다는 박차.


색슨과 바이킹도 말을 잘 몰았지만 타고 싸우지는 않았다. 이들은 말을 그냥 운송수단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참회왕 에드워드를 따라 잉글랜드로 온 대륙 출신인 랄프 백작은 기병을 만들어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지만 1055년에 벌어진 웨일즈와의 전쟁에서 그의 기병은 그들의 장기를 살려 잽싸게 도망쳤을 뿐이었다.


대륙에선 이런 말이 전해진다.


12살이 될 때까지 말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녀석은 수도원에나 보내 버려라.


그냥 말을 타는 것은 쉽다. 하지만 동료와 무릎을 맞대며 돌진하고, 전투 중 양손에 무기를 들고 다리로만 말을 조종하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는 절대로 익힐 수 없다.


종자 좋은 수말을,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을 겁내지도 않고, 옆에서 무기가 날아와도 기수의 다리 조종에 맞춰 움직이게 훈련시키는 것은 많은 시간과 자본이 필요하다.


이쯤 되면 감이 오시나? 그렇다. 이 시기의 기병들은 현대의 전투기와 값어치가 비슷했다.


 



이 시기 교역, 전쟁에 널리 사용된 바이킹 장선(長船, Long Ship). 위의 것은 길이 16m 너비 4m 이고, 5명 정도면 몰 수 있다. 배 한 가운데에 물자를 싣고 가죽등을 덮어 습기를 막았다. 노르만도 이런 종류의 배를 이용하여 말을 싣고 해협을 건넜다.


 



대륙에서 흔히 만들어지던 중세 초기 성(motte-and-bailey, 해자와 방책). 전략적 거점으로 사용되었고, 윌리엄은 잉글랜드에 상륙하자마자 나무 곡괭이와 삽으로 이것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 잉글랜드에는 이런 것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자, 다 봤으니 이제 아까 하자던 얘기하자구요? 다음 편에는 칼과 창이 난무하고 피와 살이 튀는 전투가 펼쳐집니다. 단단히 기대하십시오.



 
딴지 군사/역사/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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