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검열] 전주영화제 기행기

2002.5.12.일요일

딴지 영진공 영화제 검열위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열린 지난 3회 전주국제영화제(JIFF)에 다녀왔다. 본 우언, 이제껏 영화제에 가 본 적이 없다. 돈 있으면 시간이 없고, 어쩌다 시간이 나도 디비자줘야 그나마 일상이 굴러가고, 시간이 남아돌면 돈이 없는 푸롤레타리아의 처지가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는가.

마침 회사에서 여러 명이 함께 전주로 출장이 났다. 해서 별 큰 부담없이 3박 4일 동안 처음으로 영화제란 걸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촌닭인 본 우언, 그리하여 예향의 도시 전주에서 열린 이번 영화제에 비싸게 돈주고 다녀온 경험을 독자 너들에게 꽁짜로 풀어놓도록 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 우언, 넘 훌륭하다.
 

  첫째날 (4월 26일)

지하철 서울역에서 기차타는 서울역이 그렇게 떨어져있을 줄은 몰랐다. 지하도에서 한참 헤매다가 드디어 11시 45분에 서울역 개찰구에 도착. 참고로, 같이 갈 사람들과 함께 끊은 표는 오늘 11시 50분발 전주행 무궁화호였다. 출발 5분 전에야 도착한 것이다(일행들에게 어떤 구박을 받았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따져보니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 본 건 십년도 더 전에 외할아버지 돌아가셔서 시골에 갔을 때 빼곤 처음이다. 대학 때 MT 가면서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보긴 했을텐데, 그건 기억도 안 나고... 무궁화호가 그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 안도 깨끗하고, 흔들림도 적고. 앞으로 기차여행을 자주 해보리라, 생각했다.

3시 25분에 드디어 전주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전주까지 무궁화호로 고작 3시간 반밖에 안 걸리다니. 생각보다 무지 가깝지 않은가 말이다. 서울촌닭, 사실 굉장히 흥분했다. 차 안에서 잠깐 잠도 자고,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객차와 객차 사이에서 담배도 피우고, 소세지도 사 먹고... 기차여행의 낭만인 삶은 달걀 까먹기 빼곤 다 해봤다.

아, 또 하나... 내가 읽은 책은 <노르웨이의 숲> 이딴 게 아니어서 노르웨이의 숲을 아세요? 라며 접근하는 핸섬한 남정네나 아리따운 여인네는 보이지 않더군. 음, 이건 내 외모가 받쳐줘야 가능한 거니까 예외로 치자.

개막하는 날이라 그런지, 전주역에는 영화의 거리나 개막식장이나 그런 데로 어떻게 갈 수 있는지 안내판도, 부스도 전혀 없었다. 그저, 전주영화제를 알리는 케도그(무슨 행사 때면 길거리 전신주에 쭈루룩 달아놓는 깃발 같은 거를 케도그라고 한단다. 나도 이번에 알았다)가 두어 장 걸려 있을 뿐. 결국은 관광 안내 부스에 가서 지도를 얻었다.

일행 중 작년에도 전주에 와 봤다는 사람의 안내로, 버스를 타고 전북대 근처에 가서 국수를 먹었다. 푸짐하게 나오는 국수들이 3,000원에서 4,000원인데, 맛도 기가 막히다. 잔치국수의 국물은 냄새만으로도 사람 기절시키기 일보 직전이다. 나는 열무국수를 주문했는데, 이건 완전 초계탕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 식성이 별로 고급이 못 되어 시원하게 열무만 얹은 국수를 먹고 싶었다는 것. 그래도 맛은 꽤 좋았다. 맛있는 것만 보면 뱃속에서 이젠 고만!이라고 비명을 지를 때까지 끝없이 먹어대는 본 우언, 다른 사람들은 조금씩 다 남긴 그 양 많은 국수 한 그릇을 국물까지 깨끗이 비웠다(본 우언, 가냘픈 체구와 안 어울리게 먹성이 좋다). 얼마나 시원한지, 뱃속까지 얼얼해져서 그날 열무국수를 먹은 사람들은 유난히 밤까지 추워...를 연발했다. 여름에 먹으면 정말 별미일 듯 싶다. 이 집은 전주에서도 꽤 유명한 정둔면옥이라는 곳이다.

배를 채운 후 미리 예약해 둔 숙소인 운남장으로 갔다. 운남장은 영화의 거리 가까운 곳에 있어 1회 때부터 서울서 온 사람들이 많이 묵는 곳이라 한다. 부천영화제 스탭, 충무로 영화사 중에서는 유일한 전주영화제 후원사인 미로비전, 그리고 이런 저런 문화단체 사람들이 꽤 많이 이 곳에 묵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일단 짐을 풀고 몇 명이 방 세 개를 어떻게 나누어 잘 건지 정한 뒤에 간단한 복장으로 밖에 나왔다.

전주영화제 개막식은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모악당에서 열렸다.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은 올해 새로 연 곳이라는데, 정말 엄청난 곳이다. 일단 메인홀로 모악당이 있고, 연지홀, 명인홀 등의 공연장 겸 상영장이 있는데, 좌석수도 많지만 스크린도 크고 사운드도 빵빵하다.

나는 운 좋게 이런 저런 줄을 통해 아이디 발급처에서 데일리 카드를 받고 모악당에 들어갔지만, 개막식 표를 팔았다는데 표를 돈 주고 산 일반인이나 게스트들의 자리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것 같았고, 표도 아이디 카드도 없는데 아무 문제없이 입장 가능한 사람도 많은 듯 했다.

자리정리가 안 되어 한 동안은 매우 어수선했고, 개막식이라고 기자들이 자리에 앉아있던 영화계 유명인사들에게 계속 카메라 후레쉬를 터뜨리는 덕에 더 정신이 없었다.

이윽고 예정보다 10분 늦은 7시 10분, 장내에 불이 꺼졌다. 도깨비 스톰이라는 퍼포먼스 극단의 축하공연으로 개막식이 시작된 것이다. 알록달록한 도깨비 분장을 한 배우들이 일정한 스토리가 있으면서도 극 전개는 단지 몸짓 연기와 연주 - 전통적 가락을 난타 형식으로 두들기는 - 로 이어가는 퍼포먼스였다. 가락도 신명났지만 의상과 분장, 소도구가 돈을 많이 들였다기보다 아이디어를 쌈박하게 낸 것이었고, 연주도 워낙 훌륭했기에 관중의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드디어 정식 개막식 시작. 올해 개막식 사회는 조재현과 김규리였다. 조재현은 임기응변도 뛰어나고 순발력도 있어서 개막식 사회자로서 의외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실수나 썰렁한 순간이 나올 때마다 재치있는 말로 좌중을 편안히 해주었다. 김규리는... 사실 그날 최고의 웃음을 안겨준 사람이다. 특별게스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예진 님이라고 호명한 뒤 자꾸 버벅 거리길래 그런가보다 했는데, 조재현이 정정해주면서 그만 웃음바다가 된 것이다. 문예진흥원 xxx님...

한 시간 가량 식이 진행된 후 장내에 다시 불이 꺼지고 시작된 개막작 <케이티>는, 음... 잘못 썼다간 영화 홍보사 사람들한테 돌 맞을지도 모르니 그냥 여기서 끊겠다.

영화가 끝난 후 영화제에서 운행하는 셔틀 버스를 타고 리셉션장에 잠깐 들러 구경만 한 뒤, 숙소 근처 술집에 모였다. 영화의 거리에서 씨네21 극장 바로 옆에 있는 이 주크박스란 곳은, 원래 전주에서 유명한 주크박스란 음악카페가 로즈가든으로 개장한 뒤 새로 자리잡고 이름을 받은 곳이다. 그러니까 주크박스 2 정도 된다는 얘기다. DJ가 음악을 직접 틀어주고, 간단한 멘트도 하고, 손님들의 신청곡도 받아 틀어준다.

일행들과 영화제 첫 인상에 대한 얘기, 이번 영화제 기간 동안 보고 싶은 영화 얘기 등등을 하며 술을 마셨다. <흑수선>의 원작소설인 최후의 증인을 이두용 감독이 영화화한 <최후의 증인>이란 영화가 그렇게 뛰어난 영화라고 추천하는 사람이 있었다. 본 딴지에서도 주저없이 쒯!이라 명명한 <흑수선>에 원작소설이 있었단 건 어렴풋이 들었던 것도 같은데, 이미 스크린에 옮겨진 바 있다니.

하지만 본 우언은 이번 영화제에서 유현목 감독님의 영화 세 편을 다 보리라 결심을 했고 그 중 하나가 <최후의 증인>과 시간이 겹치기 때문에,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꼭 볼 기회가 있으리라.

전주에서의 첫날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둘째날

유현목 감독님의 영화 세 편을 다 보리라 결심했고, 세 편 중 첫 상영작인 <순교자>를 보기 위해선 늦어도 10시엔 일어나야 했다. 실제로 난 10시에 일어나 세수도 하고 옷도 입었다만... 전날 퍼 마신 술 때문에 골에서 계속 징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엎어져서 더 잠을 청했다. 에구에구 죽겠다... 하지만 12시에 다시 잠이 깨었을 때, 나는 쒸파, 아까 그냥 일어나서 보러 갈걸 하는 후회에 시달렸다.

생각해 보라. 유현목 감독 하면 한국 영화사에서 리얼리즘 계보의 영화감독으로 가장 손꼽히는 감독이 아닌가. 대 딴지의 전방위 검열우언이라는 자가 유현목 감독의 영화 한 편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쪽팔려 죽을 지경인데, 술 퍼먹고 어지러워 그노무 잠 한 시간 더 자보겠다고 유현목 감독의 영화를, 그것도 볼 기회가 그닥 흔치 않는 영화를 져버리다니... 이 어찌 영화를 사랑하는 자라 하겠는가! 그러나... 어쨌건! 밥은 먹어야지!

전주, 하면 유명한 음식이 바로 비빔밥과 콩나물 해장국이다. 마침 유명한 콩나물 해장국집 하나가 숙소 근처에 있다 하여 찾아갔다. 이름하여 삼백집. 콩나물 해장국을 하루에 딱 삼백 그릇만 판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메뉴는 달랑 콩나물 해장국과 선지 해장국 둘 뿐이니 참고하시고.

영화의 거리에 위치한 씨네21 극장은 현재 3관이 오픈되어 있고 나머지 5개관을 8월까지 만들어 멀티플렉스화할 예정이라는데, 이번 영화제에서 3관이 다 사용되었다. 11시의 <순교자>는 놓쳤지만, 이곳 1관에서 2시에 상영된 <오발탄>은 다행히 볼 수 있었다.

이번 전주영화제의 주제는 전쟁과 영화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쟁이 없었던 적은 단 며칠뿐이라 할 정도로, 우리 인간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계속해 왔다. 하고 싶어서 한 전쟁보다는, 하기 싫어도 억지로 휘말리게 되는 전쟁이 대다수다. 국가가 오라면 군대가서 사람 죽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안 가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다.

특히 대한민국은 전쟁에 반대하고 살생하는 법을 배우기 싫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하고, 대신 스스로 대체복무를 하려 하는 오태양 씨 같은 사람을 오히려 손가락질하고 범죄자를 만드는 이상한 시스템이 오히려 정상인 곳이다.

대한민국 이전엔, 미국 같은 소위 세계 최강대국이란 나라도 그랬다. 얼마 전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개봉한 <알리>의 이야기에선, 베트남 전에 징집된 알리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전쟁 거부를 했다가 챔피언 타이틀을 뺏기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아예 징집 자체가 되지 않았던 이등국민인 소녀들은 <처음 만나는 자유>에서처럼 정신병원엘 가기도 했고...

아직도 전쟁의 그늘에서 그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는 소위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는, 지금까지도 인간에 대한 증오를 공식적으로 교육받으며, 강요받으며 살고 있다. 안 하면 빨갱이란 딱지가 붙고 또 왕따당한다.

이번에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들 중 한국영화들은, 한국전 소위 6.25 전쟁 혹은 그 전쟁의 후유증을 소재로 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영화 <고>에서 주인공 스기하라가 외쳤던 것처럼, 왜 부모세대가 잘못한 걸 우리세대가 떠 안아야 되냐고, 아니 왜 우리도 그 잘못을 계속 이어가길 바라냐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얘기가 옆으로 많이 샜다. 암튼, <오발탄>도 그 전쟁과 영화, 특히 한국전쟁과 한국영화란 주제 하에서 상영된 영화 중 하나다. 개막식 때 무대에 오르신 유현목 감독님을 보긴 했지만, 알고 보니 <오발탄>엔 Q&A 시간도 있었다. 감독님께서 앞에 나와 인사를 하시고, 드디어 영화시작...

<오발탄>은 자유당 말기에 제작된 영화다. 아무도 돈을 대주려는 사람이 없어 대부분의 스탭과 배우들이 무보수로 봉사해 1년 만에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듣던 대로 고전 최고의 한국영화 최고의 리얼리즘 영화 등의 수식을 받을만한 영화다. 김진규의 피로에 쩔은 가난한 집안 가장의 연기나, 최무룡의 앞 뒤 분간 못하고 날뛰는 제대군인(상이군인) 연기도 빼어났고, 무엇보다도 굉장히 치열한 정신이 살아있는 영화였다. 감독님 자신은 네오 리얼리즘에서 영향을 받았다며, 당시에 이 영화가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회고하셨다.

한 가지 안타까웠던 것은, 감독님께서 관객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굉장히 많으셨고 나 역시 듣고 싶은 말씀이 많았음에도, Q&A 시간이 턱없이 짧았다는 점이다. 결국 질문을 세 사람밖에 못했고(본 우언도 그 세 사람 중 하나였다), 쫓기듯 상영장을 나와야 했으니... 이런 기회 정말 흔치 않은데, Q&A 시간을 이렇게 짧게 배치한 건 문제가 있지 싶었다. 가까스로 감독님의 싸인을 받아 그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긴 했지만...

영화가 끝나고 괜히 씨네21 극장 앞을 배회하며 놀다가 연지홀에서 하는 <조용한 마을>을 보러 갔다. <조용한 마을>은 프로그래머 추천 10편에도 껴있던 프랑스 영화다. 서동진 프로그래머가 씨네21 데일리의 인터뷰에서, 요즘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급을 새롭게 다루는 젊은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말을 한다. 이전의 리얼리즘 계열과도 다르면서, 노동자 계급의 일상과 생활을 포착한 영화들이라는데...

이 영화가 한국에 개봉될 가능성은 극히 적어 보이지만, 만약 상영할 기회가 있다면, 딴지 독자들이여, 한번 가서 보기 바란다. 정신없이 많은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고,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펼쳐짐에도 마지막엔 피아노 소리가 희망을 실어 나르나니... 본 우언의 경우, 영화를 보는 와중엔 계속 훌쩍거렸고, 서울에 와서는 이 영화를 계속 떠올리며 노동자인 나와 내 주변, 그리고 또 많은 노동자, 또 여성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생각했다. 이래서 영화는 힘이 세다.

셔틀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 근처로 돌아와, 아는 사람들과 또 술을 마셨다. 이번에도 주크박스다. 술과 영화의 공통점은? 사람을 취하게 한다, 울게도 웃게도 만들다, 때로는 수면제보다 효과가 좋다, 고생고생하고서도 또 찾게 된다, 여럿이 함께 즐기며 수다 떨수록(영화의 경우는 극장에서 나온 뒤) 재미있다, 가끔은 혼자 즐겨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

전주에서의 두 번째 밤도 그렇게 저물어갔다.

덧붙여,
독자제위덜이여 아쉬워하덜 말라. 본 우언의 전주영화제 셋 째날, 넷 째날 기행은 다음주에도 계속된다. 쭈~욱. 기대하시라!

 
영화제도 검열하는 전방위 검열우언
노바리
(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