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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니들이 감히 역사왜곡을 말하느냐(2)

 

 3.1 운동, 그 미완의 반쪽짜리 혁명
(정치/사상사를 중심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조선 민중의 독립운동.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의 국사(하)에서는 ‘III. 민족의 독립운동’이라는 단원을 따로 꾸려 놓았다. 그런데, 이 단원의 차례를 보면 조금 재미있는 점을 찾게 된다. 이 단원은




 
 

1. 민족운동의 동향
2. 민족의 시련
3. 독립운동의 전개
4. 사회/경제적 민족 운동
5. 민족문화 수호 운동

 

의 다섯 개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 그러면서도 국사(하)의 집필진의 집필 의도가 졸라 멋지게, 그리고 전나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1. 민족운동의 동향 이라는 단락이다.

 

이 단락은 말하자면 세계사적인 흐름에서 민족의 독립운동을 살펴보자는 의미로 편집되어 있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나가 윌슨이여..

 

1차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을 해먹고 있던 윌슨이란 넘이 각 민족은 지네들 꼴리는데로 할 권리가 있다라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식민지 지배로 신음하던 아시아는 일제히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도 이러한 흐름에 부응하여 졸라 일제에 저항하기 시작한 거시다. 봐라, 열라 폼나지?

 

정말이냐 이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국 대통령 윌슨이란 넘이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따식의 한마디에 아시아의 민중이 총 궐기 했다는 말은 심한 구라성(?) 표현이 아닌가 하고 의심의 경종을 울리지 않을 수 엄는 거시다.

 

그런데, 이 단락에 재미있는 문장이 또 눈에 확 뜨인다.




 
 

한편, 1917년 11월 혁명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한 소련은 코민테른을 결성하여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 및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과 연계를 꾀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을 침투시키려고 하였다. [국사(하), 128p]

 

오호, 그러셔? 이 문장에서 우리나라의 국사(하) 교과서는 사회주의 세력의 졸라 치사한 행적을 묘사하고 있다. 반제국주의 민족운동과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꾀했다는 것이다. 씨바 근데 좀 딴지좀 걸고 넘어가자. 이거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냐? 결국 민족의 시련과 그에 따른 반동적 민중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마련된 첫 번째 단원인 [1. 민족운동의 동향]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국정교과서 편집위원들은 과감하게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의 피동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쌈싸먹는 왜곡이냐?

 

일본령 조선에서의 반제국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은 대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상적 대립이라는 시대적 환경에서부터 진지하게 살펴봐야 하는 거시다. 그런데 일본령 조선에서의 반제국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을 이용하여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꾀했다는 poison the wall(우물에 독 풀기)식 왜곡을 일삼아 사회주의계열의 민족운동을 호도하는 것은 과연 용서가 되겠는가?

 

 당시의 사상적 흐름

 

일단은 3.1운동을 전후한 사상사적 흐름부터 함 고찰해 보면서 얼만큼 우리의 국사(하)교과서가 왜곡되어있는지 함 살펴보자.

 

당시의 사상적 흐름은 크게 자본주의 VS 사회주의의 양대 산맥으로 갈려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주류 사상으로 존재하던 자본주의. 그러나 당시의 자본주의는 현재의 수정자본주의와는 판이하게 다른 원론적 자본주의로, 말하자면 돈놓고 돈먹기 식의 독과점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판을 치던 초창기 자본주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사회주의, 즉 맑시즘이다. 맑시즘은 자본주의 붕괴에 대한 계시록적인 저주를 바탕으로 노동자 농민, 즉 피착취계급의 천국을 알리는 다분히 종교적이며 몽환적인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3.1운동은 때마침, 이러한 양대 사상,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 속에서 잉태되고 태어나게 되었다.






 
 

 

모스크바의 마르크스 동상..
"폭발적이었제, 거럼..."

 

3.1운동이 있기 16개월 전인 1917년 11월은 인류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 기념비적인 날이다. 그토록 막강해 보이던 제정 러시아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타도되고, 결국은 노동자 농민의 천국을 부르짓던 맑스의 사회주의 국가가 지구상에 첫 탄생을 알리던 해였다. 3월혁명에 의해 탄생한 자유주의자들의 정권을 무너뜨린 러시아 11월 혁명이었다.

 

이는 곧 초창기 자본주의의 부작용으로 인해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전세계 피착취 민중들에게는(그리고 일본과 조선의 피착취 계급에게는) 희망의 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노동자 농민들, 약소민족들, 그들을 위한 세상이 도래한다는 종교적이며 몽환적인, 그리고도 불완전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런데 뭐? 코민테른을 구성하여 전세계에 사회주의 세력을 침투시키려 했다구? 사회주의 계열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그럼 소련의 코민테른에 의한 꼭두각시 놀음이었겠네? 지랄 자빠지구 있다. 대체 뭔 생각으로, 어떤 의도로 이 문장을 거기에 삽입한 건데? 사회주의 계열의 역동적이었던 활동이 자발적이었다고 평가하기엔, 대한민국의 보수계층, 그 잘난 지주와 상인 출신의 부르조아 계급의 입장이 너무나 난처했던 것이냐?

 

이쯤되면, 필자를 친일파 쪽바리에 사상성이 의심스러운 빨갱이 정도로 생각하는 독자들이 계실까바 설명해 드린다. 필자, 이미 역사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회주의 사상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다. 다만, 같은 민족 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자기를 헌신했던 많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이데올로기의 갈등이란 비극적인 조국의 분단현실에 의해 잊혀지는 것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말했지만 필자가 요구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사실적인 역사적 진실이다. 어떤 사상을 가지고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고수했건 간에,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자들을 기억해 주어야 하는 것은 후손된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물론 국사(하)에서는 p.162에서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 일단 언급을 해 주고는 있다. 그러나 오히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의 한계성을 강조하는 문장을 삽입,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사적 위치를 격하시키고 있다.




 
 

....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은 그 노선에 따라 이해를 달리하는 계열이 있어 마찰과 갈등이 심화되어 갔고, 더욱이 민족주의 운동과는 사상적인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인해 대립이 격화되어 민족 운동 자체에 커다란 차질을 초래하였다.

 

윗부분의 노선차이라 함은 아나키즘과 볼세비즘의 격렬했던 아나-볼 논쟁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독립운동 계열에서 분열을 조장할 만큼 격렬했던 논쟁은 아니었다. 그 다음부분 민족주의 운동과의 사상적인 이념 차이라는 것은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실력양성론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반발을 말하는 것이다.

 

실력양성론이란 일부 지주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주의의 과격한 혁명론을 배제하며, 아직 실력이 안되니 민족의 힘을 늘려 언젠가는 독립을 쟁취하자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어느 정도 옹호하던 모호한 논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뭐? 독립운동 안 된 게 전부 다 사회주의자들의 책임이라고?

 

고의적으로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철저히 배제시키려 하는 의도는 또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국사(하) p.16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노동운동은 주로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추진에 따른 가혹한 노동조건 때문에 일어났다. 노동쟁의는 값싼 임금 문제와 열악한 노동 조건이 주요 쟁점이었는데, 파업이 전개될 경우, 예외없이 경찰이 개입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쟁의가 발생한 곳은 대부분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장이었으므로, 쟁의는 반제.반일 투쟁으로서의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불행하게도, 당시 일본령 조선에는 노조가 성립될 만큼 커다란 공장을 소유한 민족자본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소규모의 공장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당연히 조선인 소유의 공장에서는 노동쟁의가 발생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노동쟁의를 반제.반일 투쟁으로 규정짓는 국사(하)의 논조는 왜곡이다.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당연히 사회주의 계열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의 반자본주의 운동의 일환이다. 즉 국사 교과서의 기술이 지나친 "반일"적 오바라는 것이다.

 

 

 

일본 사회주의 발전과 젊은 조선 지식인들

 

우습게도,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은 일본 사회주의 운동사에서도 기념비적인 해이다. 1919년, 일본에서는 수많은 노조가 결성이 되고, 총 2388건의 노동쟁의가 일어나, 연간 32만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노동자 운동을 일으켰다. 왜 이렇게 조선 민중의 3.1 운동과 일본 민중의 사회주의 운동은 짝짝쿵이 잘 맞아 떨어지는 건데?

 

그럼 여기서 일본 사회주의의 발전사를 쬐메만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 赤旗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많은 일본의 유학생들은 유럽 것이라면 변기닦는 솔까지도 위대하게 보일 정도로 유럽 문명에 경도 되어있었다. 그런 와중에 맑시즘이 일본 사회에도 소개가 되어, 일본에서는 1898년, 이미 일본공산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 연구회가 결성되었다. 사회주의 연구회는 이후 사회민주당으로 본격적으로 하나의 정당이 되었으나,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치안경찰법으로 이들을 탄압해 해산시켰다. 그러나 다시 노동쟁의, 소작쟁의가 활발하게 벌어진 1900년대 중반이던 1906년, 결국은 다시 일본사회당이 결성되고, 이들은 동경시 정부가 전기요금을 인상하는 것에 대해 대대적인 민중운동을 전개, 결국은 다시 경찰 기동대와 충돌하는 사태까지 번졌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듬해 1907년에는 대대적인 노동자 파업을 전개, 일본군이 출동하여 이를 진압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는 사회당의 해산을 집행했으며, 이때 구속된 당원들이 출소할 때, 사회당원들이 모여 붉은 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것을 다시 경찰들이 공격, 수많은 사회당원이 다시 체포된 유명한 아카하타(赤旗)사건으로 이어져, 현재도 일본공산당의 기관지 명은 붉은 깃발, 즉 아카하타(赤旗)로 남아있다.

 

1908년 성립된 제2차 카츠라 내각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 결국 1910년에는 대역사건(大逆事件: 천황 암살 모의 사건)을 날조, 사회주의자 검거에 열을 올려 일본 사회주의을 1919년까지 깊은 겨울잠에 빠뜨렸다. 이것에 대해서는 일본사에 나와있는 문장을 소개한다.




 
 

[한국병합에] 대하여, 그때까지의 일본정부의 조선 정책을 비판하며 조선민중에게 동정을 보내던 일본 사회주의자들도, 5월부터 8월까지의 대역사건에 의한 살벌한 검거열풍과 사회주의자 탄압 때문에, 병합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이지도 못하였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특징은 자연발생적이라는 데 있다. 일본자본주의가 유럽, 특히 영국을 모델로 했던 것을, 그리고 맑스가 자본론을 저술할 때 특히 영국 노동자들의 비참한 일상을 주 모델로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일본 사회주의 운동이 어째서 자연발생적이었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만큼, 일본이 직수입한 영국의 원론적 자본주의의 폐해는 심각했던 것이다. 코민테른? 일본사회당이 결성된 것은 코민테른이 성립되기도 훨씬 이전의 일이다.

 

그렇담, 일본령 조선에 사회주의는 어떻게 소개되었을까? 일본령 조선에 사회주의가 전파된 주요한 루트는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령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 있었는데, 이들이 당시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불던 좌파 바람에 크게 고무되었음은 당연하다.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은 일본의 식민지 경영에도 반대했으며, 조선민중의 운명은 조선민중의 힘에 의해 이룩되어야 한다고, 일본으로 유학와 있던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근, 여기에 뻑 간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모국 조선에 이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조선 노동당, 특히 남로당 계열의 사상적 모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독립 쟁취를 위한 노력이 폄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사(하)에서는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을 이렇게 설명한다.




 
 

1923년 일본 관동 지방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명과 재산상에 큰 피해를 입어 일본 내 민심이 흉흉해 졌다. 이 때 일본 당국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을 죽이고 있다.’는 유언 비어를 퍼뜨려 사회불안의 원인을 한국인의 탓으로 돌렸다. 이로 인해 재일 동포 6000여명이 일본인에게 학살당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국사(하) p.170]

 

사실, 조선인 학살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조선인 학살 사건이 발생한 진짜 이유는 일본 정부가 대 지진으로 혼란해진 사회분위기를 틈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려 했던 사회주의자들을 일제히 소탕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이 방화와 테러, 그리고 조직적인 사보타지 활동을 개시하자, 이들을 불량선인(不良鮮人:불량한 조선인)이라 몰아 붙여 한꺼번에 일망 타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부추김을 받은 일부 자경단이 사회주의자, 반 정부인사들을 학살하는데 덤으로 조선인까지 닥치는 대로 살해한 불행한 사건이다. 결국, 일본 사회주의자들과 일본령 조선의 민중의 운명은, 어느 정도 동일 선상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사(하)는 이러한 사회주의자들의 이야기는 단 한줄의 문장으로도, 아니 단 하나의 수식어구에서도 차용하고 있지 않다. 무슨 이유일까?

 

이쯤되면 3.1운동의 진정한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독자제위가 슬슬 한두명씩 생기기 시작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담, 이제부터는 일본과 일본령 조선을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로 보고 그 안에서 3.1 운동의 진정한 자리매김을 한번 해 보자. 여기서부터가 필자 나름의 역사 기술이다.

 

3.1운동의 정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자유당이었다. 자유당은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 특히 죠슈와 사츠마 출신의 사무라이 계급이 주축이 되어 구성하고 있던 보수우익적 색채가 짙은 정당으로, 이 자유당은 2차세계대전 이후 자유민주당, 즉 자민당으로 살아남아 아직도 일본의 여당으로 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역사상, 이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적이 딱 한번 있다. 그것은 하라 타카시(原敬)가 주축이 되어 구성한 하라 내각이 1918년 성립된 사건에서 시작된다. 이때가 타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는, 일본의 민주화 운동이 극에 달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초대 조선 총독이었던 테라우치가 일본 자유당의 수반이 되어 이끌던 테라우치 내각은 잇단 실정(쌀소동)으로 국민적인 저항에 직면, 결국 실각하고, 헌법 수호 운동을 펼치던 자유주의 인사이자 민권운동가 였던 하라 타카시가 수상이 되자, 일본에서의 민주화 열풍은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회주의자들이 오랜 기간의 겨울의 시대에서 깨어나 사회운동이 격렬해 진 것은 물론이고, 자유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암튼, 온갖 종류의 사상이 백가쟁명(百家爭鳴)식으로 그 열매를 틔워 일본 민주주의의 성숙을 가져온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6.29 선언을 떠올려 보면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일본 최초의 민주주의 정당 내각이었던 하라 내각이 성립 된 것이 1918년 9월, 그러니까 3.1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6개월 전이다. 왜 하필 3.1운동이 일어나기 딱 반년전에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보인 민주 정부가 일본에서 수립되었을까?  아... 졸라 타이밍 잘 맞는다.

 

우리는 흔히, 민족지도자 33인의 독립선언 낭독이 3.1운동의 방아쇠를 당긴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정말 그러냐?

 

그러나 일본의 민주화 열풍이 거세게 일고 있던 1919년 2월, 동경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2월8일, 먼저 선수를 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로 2.8 독립 선언이라는 것인데, 2.8 독립 선언의 주역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독자제위 혹시 계시는가? 없지? 당근, 우리네 잘난 국사(하)에는 어떤 인간들이 2.8 독립선언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는지 실명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왜일까~~요?

 

2.8독립선언은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있었고, 이들의 실명을 거론하자면 그들이 재적해 있던 학교의 학생명부를 찾아보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거사를 집행한 사람들의 실명을 왜 우리는 모르고 있을까?

 

필자는 앞서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의 사회주의 성향을 공을 들여 설명한 바 있다. 생각해 보라, 2.8 독립 선언을 주도한 학생들의 정치적 성향을. 좌파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이 3.1 운동의 결정적인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을, 우리의 우파 사학자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가르칠수 있겠나? 당근, 2.8 독립 선언의 비중은 졸라 떨어지게 된 것이 아닐까? 독자제위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암튼 민족지도자 33인이 파고다 공원에 모여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함 생각해 보자. 일단, 민족대표33인이라는 사람들의 구성은 대개가 종교인이었다. 음... 우리나라의 항일 단체는 종교단체 뿐이었나? 게다가 당시 절대적으로 많은 인구가 믿고 있던 불교계에서는 단 한명의 대표자도 참여하고 있지 않았다. 정말, 그 분들, 민족 대표들 맞는 건가? 대다수 불교 신자들은 그럼 3.1 운동에서 쏙 빠진거잖나?

 

우리의 국사(하)에서는 3.1운동의 전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급속하게 확산, 파급되었다. 그런데 3.1운동은 확산과정에서 대체로 3단계의 양상을 띠었다.

 

첫 번째는 민족 대표들이 독립 선언서를 제작, 배포함으로써 만세 시위 운동을 점화한 단계로, 이 때의 독립운동의 방향은 비폭력주의였다.

 

두 번째는 학생, 상인, 노동자층이 참가함으로써 시위운동이 도시로 확산된 단계이다.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상인, 노동자들이 만세시위, 파업, 운동 자금 제공 등의 방법으로 적극 호응한 시기였다.

 

세 번째는 만세 시위 운동이 주요 도시로부터 전국 농촌 각지로 확산된 단계이다. 농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시위 규모가 크게 확대되어 가는 한편, 시위 군중들은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토지 회사,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였다. 이렇듯 비폭력주의가 무력적인 저항운동으로 변모하여 간 시기였다. [국사(하) p.145~146]

 

혹시라도, 유관순 누나가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을 믿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 독자제위 계시는가? 자,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개 방식과 3.1운동 확산의 2단계와 3단계는 너무나 닮았다. 사회주의자들이 전통적인 혁명 전술, 일단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노동자 농민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사상적으로 교육시켜, 마침내는 그들의 무장봉기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한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개 전술과 3.1운동의 확산은 왜 이토록 닮아 있는 건데?






 
 

 

사회주의자 아니어쓰까?

 

그럼, 진짜루 3.1운동의 주체는 뭔데? 혹시 사회주의 이상향을 꿈꾸던 일본령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은 아닐까? 어째서 종교계 인사들이 3.1 운동의 주체로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지? 만세 삼창하고 선언서 낭독하고, 제발로 일본 경찰을 찾아가 날 잡아 가두세요... 하고 자수를 한 유약한 소위 민족지도자들이 과연 3.1운동의 주체였을까?

 

유관순 누나를 생각해 보라.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무지한 채, 그저 노예로서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농촌의 촌부들을 설득하여 만세를 부르게 한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라. 씨바 그녀의 사상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상은 무엇이었겠나? 더러운 제국주의와 결탁한 원론적 자본주의겠는가? 아님 약소민족과 노동자 농민의 천국을 부르짓던 사회주의 사상이겠는가?

 

3.1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이었다는 결론을 내리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국정 국사 교과서는 이런저런 설명없이 조선 VS 일본 이라는 단순구도로만 설명하려 하며, 이것도 일종의 오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으로....

 

필자는 앞서, 짧은 코멘트로 이 지루한 글의 결론을 미리 이야기 한 바 있다. 대한민국 주류 사회의 친일 콤플렉스를 커버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우리의 국사교과서는 오히려 지나치게 반일본 국가주의적으로 왜곡, 날조 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그런데 사실상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정반대다. 우습게도 1950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1890년대부터 1945년에 걸친 일본 근대사의 복사판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자유당 정권의 무능한 국정 수행과 독재로 4.19 혁명이 일어났다.

 

일본의 경우 같은 이름의 자유당 정권의 무능한 국정 수행과 독재로 타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일련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경우 4.19혁명에 의해 탄생한 제2공화국이 극도의 사회 혼란에 빠지면서 국가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군부가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내세워 5.16쿠테타를 일으켜 군부독재정권을 수립했다.

 

일본의 경우 타이쇼 데모크라시에 의해 세워진 민간 정권이 극도의 사회 혼란에 빠지면서 국가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군부가 서구 열강의 위협을 명분으로 내세워 2.26 쿠테타를 일으켜 군부독재정권을 수립했다.

 

대한민국의 경우 정경유착을 통한 금권정치가 판을 치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 정경유착을 통한 금권정치가 판을 치게 되었다.






 
 

 

자동차, 중화학, 조선, 철강...
울나라 일본나라 주요 수출 품목

 

대한 민국의 6대 주요 수출 품목은 가전, 자동차, 중화학제품, 반도체, 조선, 철강이다.

 

일본의 6대 주요 수출 품목은 가전, 자동차, 중화학제품, 반도체, 조선, 철강이었다.

 

21세기가 눈앞인 지금, 과연 대한민국은 진정 일본으로부터 독립된 국가인가? 치사하게 박정희가 술에 취하면 곧잘 일본 군가를 부르고, 자신의 10월 유신을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견주었으며,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고개 숙여 조아리며 선배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들춰내고 싶지 않다. 겉으로는 반일을 외치지만, 경제, 사회, 문화, 정치의 모든 시스템을 일본에서 차용해온 대한민국 주류사회의 저 비굴하고 안이하며, 결국은 우리 모두에게 일본식 시스템의 불효율성을 실감케 한 친일 근성을 필자는 논하고 싶다. 그넘들, 즉 대한민국의 주류사회를 구성한다는 넘들, 다들 옛 지주계급, 신흥 상인 계급의 후예들이 아니냐?

 

이병도 선생은 조선사 편찬 위원회에서 총독부의 식민지 사관을 완성했다.






 
 

 

"나 박통.. 멋있제?
근디 나는 왜 또 걸고 넘어지능가?"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운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사상을 이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사용하였다.

 

이병철 회장은, 소작인들의 피와 땀이 서린 쌀을 일본인들에게 팔아 기업을 세우고, 결국은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구어 내었다.

 

방씨 일가는 일본기업들의 광고를 실어주며 좃선신문의 사세를 졸라 확장했다.

 

과연, 그들에게 친일 콤플렉스란 존재하지 않을까?

 

역사란 참으로 허무한 것이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를 통치하는데 쓰던 그 모든 방법론을 이어 받은 저 좃선으로 대표되는 보수우익들의 역사관을 아직도 그대로 신봉하고 있다. 씨바, 독자제위여! 그대들은 배알도 없단 말인가?

 

조선의 식민통치를 반대하던 우리와 같은 운명과 다름없던 일본의 민중들. 제국주의 논리에 희생당하고, 국가사회주의 정권의 꼭두각시로 전락하여 먼 남방제도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의 화염방사기에 불타 숨져간 많은 일본의 젊은이들.

 

씨바 그들을 불행으로 내 몬 것은 누구냐?

 

나쁘다면 기득권이 그토록 숭배해 마지 않던 국가지상주의, 즉 파시즘이 아니더냐? 그들을 돗떼기 시장 물건 넘기듯 두리뭉실하게 일본이란 단어에 집어 넣어 동시대의 희생양들 끼리 서로 증오하고 멸시하게 만든 넘들은 과연 누구냐? 그넘들이 우리 선량하고 어리석은 대중의 교육을 조작하여, 미움과 증오의 방향을 친구가 될 가치가 있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소수나마 살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로 향하게끔 한 것은 아니더냐?

 

역사란 민족과 민족의 다툼이기 보다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대립이라는 맑시즘적 역사관을 강요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자 제위에게 묻자.

 

과연, 이 나라의 보수우익은 친일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울수 있겠느냐?

 

필자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위대함을 이야기 하고 싶다. 3.1 운동이 단순한 항일운동이라면, 3.1운동은 민족의 독립과 함께 그 실효를 잃고 만다. 그러나 3.1 운동은 반제국주의, 반국가주의, 반 내셔널리즘 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한다. 3.1운동의 전통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4.19 혁명으로 이어졌으며, 다시 꺼지지 않는 민중의 역사적 개혁에 대한 요구는 광주 민주화 혁명과 6.10 혁명으로 이어져, 마침내는 이 나라를 저 무시무시한 국가사회주의, 즉 파시즘으로부터 구해낸 것이다.

 

일본 민중의 항쟁을 보라. 전공투로 대변되는, 저 유명한 동경대 야스다 강당 점거 사건과 적군파 운동으로 대표되는 반제국주의, 반 국가주의 항쟁은 결국 좌절되어 무라카미 하루끼의 소설 속에서 시대를 스케치하는 하나의 소묘로 전락하게 된다. 그 후로, 일본 민중은 완전히 저 암울하고 음흉한 자민당(구 자유당의 정치적 적자) 일당 독재에 신음하고 있다. 버블 붕괴의 깊은 경제적 추락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미래가 일본 민중보다 더 밝다면, 이 점이다. 저들이 이룩하지 못한 진정한 민주화의 성취, 그것을 우리는 해 냈다. 일본넘들은 미국넘들에게 깨지고 나서야 정신 차렸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우리 스스로 우리의 우경화를 막아내었다.

 

그렇다면, 이젠 다시 우리를 돌아보자. 씨바 우리 역사서가 잘못 되어 있는데, 남의 역사서를 논하지 말잔 야그다. 일본 우익단체 교과서가 맞다거나, 우리가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게 아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게 훨씬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는 것이다. 일본을 성토하는 것도 좋지만 그 와중에 정작 묻혀지는 게 무엇인지 돌아보자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우익화를 걱정하자는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자신의 우경화, 우리 자신의 파시스트가 아니더냐.

 

 

 

딴지 역사고증팀 전문위원
구루마(Kuruma01@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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