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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졸업>의 찌라시를 디비주마

1999.11.30.화요일
딴지 말초 영화부 부장대우 한동원



로맨스가 그리운 계절, 기네스 팰트로우가 왔다.


왕년 성장 영화의 걸작 <졸업(The Graduate)>의 제목을 달고. 
장미빛 가득한 로맨스 영화를 암시하는 찌라시와 함께.


해서, 본지 이 영화의 찌라시 함 디비보겠노라.


 제목


우선 제목.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67년 작 <졸업>의 리메이크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한국판 제목이다. 


하지만 장례식때 관 지고 나가는 넘이라는 뜻의 "The Pallbearer"라는 제목과 "졸업"이라는 제목 사이의 거리는 딴지와 좃선 사이의 거리 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진다.


본기자, 영어든 뭐든 역시 객지에 나가면 고생이라는 교훈 다시 함 되새긴다.


어쨌든 한국의 영화제목 번역에 있어서의 독창성은 이미 일반인들이 범접하기 힘든 상상력의 경지에 도달한지 오래니, 이 정도는 놀랍지도 않다. 하긴 영화 제목을 "관지기"등으로 번역한다면 그건 아무래도 너무 칙칙할 뿐더러, 본의 아니게 <가루지기>등의 명랑 고전 떡치기 무비를 연상시킬수도 있다.


게다가 이 번역, 사기에 가까운 말도 안되는 번역인건 아니다.


우선 이 영화와 33년 전의 옛날 <졸업>과의 가장 큰 유사점은 등장인물들의 설정이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애송이 청년, 그의 예쁘고 청순하고 순진한 여자친구, 그리고 그 청년을 꼬시는 중년의 외로운 아줌마. 얘네덜의 삼각관계 아닌 삼각관계로 로맨스 영화를 가장한 성장 드라마를 만들어낸다는 컨셉도 같다.








옛 <졸업> vs 요즘 <졸업>(일명 <관지기>)

더불어 <식스데이 세븐나잇>에서 그 어설픈 니콜라스 케이지적인 마스크로 꽤 재밌는 코미디를 했던 주연배우 데이빗 슈위머의 마스크, 이 영화에서는 순하고 멍-한 더스틴 호프만적 마스크 쪽에 가까와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 옛 <졸업>과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 아니 거의 관계가 없는 영화라고 하는 쪽이 맞겠다. 옛 <졸업>에 비해 <관지기>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얘기보다는 말에 의존한 코미디에 훨씬 더 집중해 있다.


 이미지


다음은 포스터 이미지. 붉디붉은 장미꽃 무데기 배경에 대문짝만하게 박혀있는 기네스 팰트로우의 얼굴이 그 특유의 싱긋 미소를 보내고 있다. 어헝, 조아..




잠시 침 좀 딱구, 침받이 다라이 좀 비우고... 계속한다. 어쨌든 이 포스터는 이 영화에 대해 두 가지 기대를 하게 만든다. 하나는 핑크빛 가득한 달콤하고도 가슴 떨리는 로맨스에 대한 기대감. 또 하나는 <엠마>에서의 부드럽고 화사한, 또는 <위대한 유산>에서의 차갑도록 세련된 기네스 팰트로우의 얼굴을 질리도록 볼 수 있다는 기대감. 찌라시 맨 위에 쓰여진 "기 네 스 팰 트 로 우"라는 글자는 그런 기대감을 더 강화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를 어쩐다냐. 이 영화, 둘 다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자, 보자.


아래는 이 영화의 오리지널 포스터다. 이 오리지널 포스터는 우리나라의 장미빛 스카프적인 포스터보다 훨씬 영화의 분위기를 정직하게 전달하고 있다.











< 오리지널 1 > < 오리지널 2 >

우선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다. 관객들은 적어도 이 영화가 기네스 팰트로우의 독무대는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또한 영화의 주연배우인 데이빗 슈위머의 얼굴이 기네스 팰트로우의 얼굴보다는 더 부각돼 있다(머리가 커서 그런지도...). 최소한 실질적인 주연배우를 포스터에서 과감하게 검열삭제 해버린 우리나라 포스터와 비교하면 훨씬 더.


게다가 세 명의 주요 인물들을 연기한 배우들 이름이 배역의 비중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되고 있다. 데이빗 슈위머(탐 탐슨 역 = 애송이 청년), 기네스 팰트로우(줄리 드마코 역 = 예쁜 여자친구), 바바라 허쉬(루스 애버네티 역 = 외로운 아줌마). 포스터 어디에서도 로맨틱 코미디의 느낌이나 주인공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포스터에 비하면 이 오리지널 포스터의 정직함은 연정히 앞의 서갑수기라 하겠다.


덧붙여 제목을 적은 폰트를 보라. 바람에 살랑 날리는 야리야리 하늘하늘한 느낌의 우리나라 포스터보다는 오리지널 포스터 쪽이 훨씬 더 로맨틱 코미디적인 분위기에 가까운 디자인이다.


하지만 이 오리지널 포스터 역시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건 오리지널 포스터의 밝고 발랄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리, 영화의 분위기는 온통 순정만화스러운(또는 러브호텔 벽지스러운) 장미빛이지도, <101 달마시안>스럽게 만화적이지도(또는 귀엽지도) 않다는 것이다.


사랑에 배반당한 중년의 여인 루스... 
사랑의 상처를 준 젊은 넘 탐이 나타난다... 
루스 열받은 나머지 컵을 집어던진다... ( 와, 이거.. 언론탄압이다.. )


이 장면에서 보통의 로맨스 영화들 같으면 여기에서 컵 뒷처리를 안하고 끝날텐데, 이 영화에서 비련의 중년 여인은 컵을 깬 즉시 그걸 빗자루로 쓸어 담는다.


이렇게, <관지기>의 세계에서는 일상적인 세계에 로맨틱 코미디적인 사건들이 짬뽕된다. 아니지, 미국인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로맨틱 코미디와 성장 드라마가 짬뽕된다.


 카피


그리고 카피. 


이 영화의 찌라시 분위기로 미루어본다면, "밀레니엄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블랙 로-즈향 가득한 뷰티풀 코믹 러브로망"같은 장르해설 카피가 붙을만한데, 그런 건 없구 대신 이런 카피가 붙어있다.


7년만의 우연한 만남.
문득, 친구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근데, 이 카피는 사실과 다르다.


두 남녀 주인공이 7년만에 둘이 우연히 만난 건 맞는데, 그때부터 "친구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건 아니거덩. 주인공 탐은 대학 동기동창 줄리를 이미 대학생 시절부터 "여자"로서 좋아했었거덩. 이 넘, "7년만에" 만나게 된 줄리 앞에서 쌔끈해지기 위해 친구 옷까지 뺏어 입을 정도로 최선을 다한다.


근데 왜 이런 사실과 다른 카피가 붙었을까. 이런 카피가 붙은 배경에는, 세월을 흐름에 따라 자신들도 모르게 우정이 애정으로 변해가는 걸작 로맨틱 코미디들(대표주자로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때>)의 이미지를 살짝 등에 업으려는 포석이 깔려있다고 보는게 옳겠다.


 영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몇몇 개그적인 요소와 데이빗 슈위머와 기네스 팰트로의 귀여운 연기 - 특히 야심한 밤에 탐 탐슨의 방에 잠입하자마자 딱딱이(그 봉알같이 생긴 알 두 개에 줄 달아서 따다닥닥 부딪치는 장난감...)를 하는 기네스 팰트로의 귀여움이란 - 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땐 딱히 손이 갈 곳이 없는 밋밋한 영화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 초반부의 자막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수다스러운 코미디, 도회적인 느낌으로 깔리는 재즈 넘버들, 눈높이에서 등장인물들을 따라가고 훑어보는 카메라는 우디 앨런의 영화들(특히 <부부일기>나 <한나와 그 자매들>같은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의 자학적 코메디나 도시인의 일상을 파고드는 폐부를 찌르는 고독,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같은 건 없다. 


말을 중심으로 한 코미디와 그저 겉모양만 좀 닮았을 뿐.


특히 고독한 중년 아줌마와 젊고 귀여운 대학 동기를 아우르는 탐 탐슨의 애정행각이 뽀록나기 시작하는 후반부에 들어서면 영화는 갑자기 심각/암울해진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는 치명적인, 감정의 비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실연을 당한 직후 거의 인생 끝난 듯 절망하다가,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명랑 발랄하게 일상으로 돌아오는 탐.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 친구의 결혼파티에서 만난 줄리에게 자동차 키를 선물하면서 순식간에 화해에 성공하는 탐. 그리고 셰릴 크로우의 "I Shall Believe"에 맞춰 부루쑤 한 판 땡기는 탐과 줄리.


이렇게 당황스런 감정의 비약이 예정된 화해로 허둥지둥 이어지면, 그나마 흥미롭던 앞부분의 개그와 인물 설정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탐과 루스 아줌마의 이상스런 관계와 이를 극복해가는 탐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더라면 옛 <졸업>의 코미디 버전이 되었을 법도 한, 탐과 줄리의 사랑이 성장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더라면 무척 귀여운 로맨스 영화가 되었을 법도 한, 이 영화 <관지기>. 


하지만, 영화는 안타깝게도 양쪽 사이에서 방황을 계속한다.


뭐, 이 영화가 딱히 성장 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나 그런 영화가 되어야하는 필생의 사명을 띠고 탄생한 것은 아니니 이런 건 문제될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근데, 어쨌거나 문제인 것은,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흐름이 억지스럽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결국 이것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차와 엄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집이라는 자유를 서로에게 선물한다는, 즉 서로에게 구속보다는 자유를 선물한다는 무척 진부하지 않은(또는 용기있는) 결말을 무척이나 뜬금없는 것으로 보이게 한 요인이다.


다시 말해서 관객들이 "오잉? 뭔 영화가 이따구로 끝난다나.."하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극장을 떠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와는 사뭇 다른 결말을 보여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뭇 다른 결말에 도달하는 과정의 설득력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이다.



 정리


자, 인제 정리해보자.


1. <관지기>의 실제 주연 배우라면 데이빗 슈위머라고 할 수 있는데, 찌라시의 전면에 기네스 팰트로우의 얼굴과 이름만이 대문짝만하게 박혀있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그건 이 영화를 관객들에게 기네스 팰트로우가 주연한 신작 로맨틱 코미디(최소한 로맨스 영화)로 알리기 위한 포석이었다.


2. 근데, 사실 이 영화는 기네스 팰트로우가 <세븐>에서 브래드 피트의 아내역을 맡고, 실제로 그와 연인관계가 되고, 그를 통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던 96년에 만들어진 영화다. 


3. 그렇다고 이 영화가 3년이 넘은 이제야 수입돼서 개봉될 정도의 숨어있는 저주받은 걸작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이 영화의 찌라시가 추구하고자 했던 바는 옆구리가 시려운 겨울철이면 나타나는 로맨스 영화에 대한 욕구와 기네스 팰트로우의 관객동원 능력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 자체는 그걸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건 위에서 디빈 바와 같다.


어쨌든 찌라시 하나가득 박힌 기네스 팰트로우의 그 예쁜 얼굴로도 이 영화가 안긴 그 스산한 썰렁함은 감출 수 없었다.


우짜까나, 객지에 와서 고생한건 이 영화 제목만이 아니었던거다. 



 덧붙여서


근데,


여기까지 오고서도 여전히 본기자의 머리 속엔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남아있다.


지금보다는 한참 덜 유명하던 시절 기네스 팰트로우의 때묻지 않은 풋풋함(?)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 3년 창고에서 먼지풀풀 쌓이던 영화를 수입해서 극장에 걸었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그 정도로 헐리우드 스타에 굶주려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 딴지 말초 영화부 부장대우 한동원
( sixstring@ddanzi.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