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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18.월

영국 특파원 장조림







자 이제 가자
우리 저기 먼 곳으로
더 이상 여기서
땀을
눈물을
흘리지 말자

땀박아지 노동으로 흘린만큼
받고자고 더 이상
돈없고 빽없고 힘없어도 살 수 있는
그곳을 만들자고 더 이상
날밤까며 얘기하며
그날이 올 것이라 더 이상


해가 떠도 우리 곁엔 널부러진 빈소주병
쓰린 속 그것처럼
너도
나도
여기도, 아무것도
변한건 없다 변하지 않는다


자 이제 가자
우리 저기 먼 곳으로
더 이상 여기서
땀을
눈물을
흘리지 말자




비행기를 타기 얼마 전 저는 이 글을 쓰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약 3년 전, 기명사미 대통령은 결국 명동 성당에 까지 공권력을 투입했고, 노동자 시위는 무산되었으며 한총련은 와해되었고, 그들의 쇠파이프를 손에 쥔 정치인들은 이렇게 말했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살인도구다.


정권이 바뀐 지금도 악습은 계속 됩니다.


그리 크진 않았지만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경영하시던 아버지는 결국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부도를 냈으며 그날부터 김 사장님 아버지는 김 씨로 전락하며 노가다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워낙 성실하셨던 아버지께서는 노가다를 하시면서도 밤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건설 공부를 하셨습니다. 사업을 하시던 기질을 발휘해서 몇 년 뒤 부터는 조그마한 건설업체를 다시 설립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설날이나 추석에도 일터에 나가셨고 일년 중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아마도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셨던 얼마간의 기간이 몇 년 동안 유일하게 가진 휴식의 기간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때마침 불어온 건설 붐으로 저희는 약 12년 만에 그 동안 진 빚을 모두 갚을 수가 있었고 빚쟁이들에 시달리던 악몽의 세월을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즈음에 우리 부자는 함께 소주를 마셨는데 노가다를 다니실 때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처음으로 자식들에게 보이셨죠. 이제 고통은 끝났다면서 버는 일만 남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 큰 공사를 따낼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성실성을 높이 산 한 분이 무명의 중소 건설 업체에게 엄청난 금액의 빌딩 공사를 맡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두계약이 끝나고 공사 준비를 하던 중 한 건설 대기업이 그 사이로 들어와 건설비만 받고 이윤을 남기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건물주의 마음을 돌려 버렸습니다.


전화상으로 계약 취소를 알리는 전화를 받으시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시고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셨죠. 결국 그 회사가 건물을 완공하고 얼마 후에 부도로 문을 닫더군요. 그런데 워낙 부실공사를 해서 건물 입주 단 한달 만에 여기저기 물이 새고 난리 였죠. 그 건물주는 다시 아버지를 찾았고 아버지는 화가 나긴 하셨지만 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수공사를 하셨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는 말씀에 물러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신 아버지께서는 얼마 후 다른 공사를 시작을 하셨는데 또 말썽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조그만 관급 공사였는데 감독하던 감독관 몇 명이 돈봉투를 요구했던 겁니다. 아버지는 당시 50대 중반이셨고 그 감독관들은 이제 삼십도 안 된 사람들이었죠.


공사장에는 관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간의 돈봉투가 오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러 거나하게 저녁을 접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아버지는 술을 사셨죠. 오십이 넘은 분이 이제 이십대 후반의 그들에게 감독님, 감독님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요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봉투 주는 게 어렵다면 함께 현장에 가서 고스톱이나 치자는 것 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계속 잃기만 해라. 그러면 결국 봉투를 준 게 아니라 놀이에서 돈을 잃은 것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결국 격분한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던 다른 50대 아저씨는 참지를 못하고 20대, 30대의 감독관 서너 명과 말 다툼 끝에 편싸움을 벌이셨습니다. 당시 학생이었던 저는 연락을 받고 현장에 가보니 가건물인 현장 사무소는 난장판이 되어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유리는 깨어지고 집기는 부숴져 있고... 그날 아버지와 소주를 많이 마셨습니다. 아버지는 갑자기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한 만큼 얻을 수 없는 이 나라가 이젠 싫다. 너는 이런 곳에서 살지 마라. 자유롭게 살 수 있고 일한 만큼 누릴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떠나라....이곳은 젊은이들이 살만한 그런 곳이 아니다. 그리곤 다시는 돌아 올 생각을 하지 말거라.. "


대충 이런 말씀을 하시곤 아버지는 다시 우셨습니다. 내 나이 오십에 당신 자식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과 싸움박질이나 하는 자신이 정말 부끄럽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를 중퇴하고 영국으로 왔습니다. 거의 3년 전 입니다.


저는 이 곳에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불법으로 일하다가 경찰이 가게로 들어와 뒷문으로 도망친 적도 있고, LA특파원처럼 손님이 남기고 간 음식물을 주인 몰래 봉투에 넣어서 집에 와 행여 한집에 사는 사람들이 볼까 봐 방문을 잠그고 깨끗한 부분을 골라내 먹기도 했었습니다.


한번은 너무 배가 고파 식당에서 버리는 음식을 먹다가 그걸 본 주인이 나중에는 저를 위해 따로 음식을 해주곤 했습니다. 제가 국가 망신을 시켰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처음에는 여기서 어떻게든 일해서 자리잡고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일부 유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입니다. 대부분 정말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지만 소수의 유학생들은 수영장이 딸린 아파트에 고급 승용차를 몰면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우연히 그들 중 꽤 유명한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공부하는 한명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구조조정에 관한 문제였는데 학자들이 하는 말의 복사판 이었습니다. 일단 회사를 살려야 나중에 다시 고용인원을 재창출 할 수 있으니 짤린 사람들은 억울하겠지만 나중을 위해 그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도 쉽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 분은 귀국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사회 지도층 인사란 말을 들을 수가 있을 겁니다. 한국에서 명문대 석사 출신에 다시 영국의 명문대에서 학위를 공부하고, 게다가 재력있는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이천 오백 파운드 (그 사람과 만났을 당시는 우리 돈으로 사백만원이었고 지금은 약 칠백만원입니다)가 생활비인 그를 생각하고, 대학 중퇴인 저를 생각했습니다.


미래에 사회지도층 인사가 될 그를 생각하고 그 아래서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을 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그런 사람 밑에서 당하고 살 수만은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무리인 줄 알지만 작년부터 대학에 들어와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정말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사람들... 결국엔 좋은 성적을 받고도 학비가 없어 다음 학기를 등록하지 못해 귀국한 형님도 계셨고 끝까지 버텨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그들,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대해 글을 올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기서 저의 개인사를 올린 것은 결코 내세울 것도 없는 제가 잘났다거나 아버지의 삶을 과장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제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힘없는 우리 모두 아버지들의 모습이며 제가 살아오고 선택한 길 또한 여러분 모두의 삶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다면 아마도 그렇다. 내 아버지의 모습, 나의 모습이다. 라고 공감을 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무리 술에 취해 떠들고 한탄을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들도 이번 IMF 시대에 약자의 설움 속에서 많은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기력함 속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술에서 깨어나고 낙심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다가올 돈 없고, 빽 없고, 힘 없는 사람들도 다 함께 잘 사는 그 날을 위해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자 이처럼 긴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들과 또한 우리가 흘리는 그 눈물을 후손들에게는 그대로 안겨주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들 스스로가 그 눈물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영국 특파원 장조림 ( k2001@hani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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