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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내 생애 최고의 경기


 


2008. 1. 24. 목요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봤다. 대통령 당선자의 눈물까지도 끌어낸 영화고 같이 본 아내도 가슴 찌릿찌릿했던 모양이지만 내 느낌은 덤덤과 감동 사이의 어중간한 중천을 헤매고 있었다.   그저 그런 영화로 치부될 수준은 분명 넘었었는데 왜 이럴까  곰곰 되짚어 봤더니 그건 내 시선이 영화 스크린을 훌쩍 뛰어넘어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전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로 만들어질만큼, 아니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빛이 바랠만큼 (주관적 판단임) 그날의 결승전은 글자 그대로 명승부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소파에 누워서 보다가 나중에는 눈물 글썽인 기립박수를 보냈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스포츠를 몸으로 즐기는 이들에게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눈으로 즐기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명승부의 생명력은 질기고도 빛난다. 그리고 한 명, 또는 집단이 자신의 모든 체력과 지혜를 짜내어 맞부딪친 시간의 위력은 15라운드나 90분이나 40분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 릴레이로 내가 만난 명승부들의 추억을 되짚어 본다.








남한의 GNP가 북한을 추월한 것이 1975년 무렵이라고 하는데 그 이전까지 북한은 다방면에서 남한을 압도했다. 스포츠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남북한 공히 즐기고 열광했던 축구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다. 2002년의 월드컵 4강은 66년 천리마 축구단의 이탈리아 격침과 포르투갈과 벌인 희대의 명승부에 비하면 그 감동의 질이 떨어진다.  오죽이나 그것이 부러웠으면 중앙정보부가 축구팀을 창단해서 당시로서는 상상을 절하는 "유럽 전지 훈련"까지 시켜가며 닥달을 해 댔을까.  


아시아의 호랑이라 자칭하면서도 북한과의 맞대결을 끈질기게 피했거나, 아니면 운 좋게 (나쁘게?) 면해 왔던 한국 축구가 처음으로 북한과 맞닥뜨린 것은 76년의 아시아 청소년 축구 대회 때였다. 이 대회에서 태극 마크와 인공기의 오각별은 처음으로 일합을 겨루었고 그 일합에서 남은 북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2년 뒤 또 한 번 청소년들이 맞대결을 벌인다. TV 중계가 되지 않고 라디오로 들었던 것 같은데 그때 기억나는 두 이름은 박영수와 나봉기. 물론 한국의 게르트 뮐러 이태호도 뛰었고 2002년 히딩크로부터 자신의 대머리에 열렬한 키스를 받은 박항서도 있었지만 남한의 골키퍼 박영수와 북한의 풀백 나봉기가 기억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승부차기 5대 5 상황에서 나봉기가 찬 공을 박영수가 막았기 때문이다. 



그 선방 하나로 남한 축구는 남북대결에서 첫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그리 유쾌한 승리는 되지 못했다. 전후반 내내 밀린 것은 남쪽이었고, 승부차기로 가기 위해 발버둥친 것 또한 남쪽이었다.  어쨌건 승리였고 나를 포함한 초딩들은 나봉기라는 녀석은 분명 아오지 탄광 갔을 것이라고 떠들어 댔다.  그리고 이때 뛰었던 남쪽 선수 중에 정해원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그 이름을 기억해 두시라.


그 두어 달 뒤 벌어진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차범근 김재한 조광래 최종덕 박성화 등 한국의 골드 제너레이션이라 불릴만한 선수들로 구성된 대표팀이 무난하게 결승에 올랐고 상대는 북한이었다.(요때 중공이라는 나라의 팀이 한국에게 졌는데, 그게  공한증의 시작이었다.)


최초의 A 매치인 이 경기도 명승부로 꼽을만한 경기였지만 득점이 나지 않아 득점 위주로 기억하는 내 두뇌 회로에는 정확한 영상이 남아 있지 못하다. 그러나 사상 첫 남북 A매치의 긴장감은 상상을 초월했었다. 


박성화는 쥐가 난 다리에 못을 찔러가면서 뛰었고 분데스리가를 앞둔 차범근이 피를 흘리자 아나운서는 안타까운 비명을 질렀다.   끝내 공동우승으로 경기는 끝났지만 북한 주장은 한동안 남한 주장 김호곤이 시상대에 오를 자리를 내주지 않고 버텼다. 결국 주최국 태국인들이 중재하고서야 남북은 공동 시상대에 오를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일단 시상대에 같이 오른 뒤에는 어깨동무에 친선 무드가 넘쳐 흘렀다는 점.   


자 자... 너무나 서설이 길었다. 그렇게 1승 1무 1패를 주고받은 남북한 축구는 80년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다시 만난다. 수만 명의 한국 노동자가 쿠웨이트에 외국인 노동자로 나가 있던 시절, 경기장은 남쪽의 홈 그라운드와 마찬가지였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나 "만리타향에서 고생하시는 근로자 여러분"이나 남북 대결을 대하는 심경은 그렇게 다르지 않았을 것.   그런데 잠을 쫓기 위해 몇번이나 세수를 하던 어린아이의 귀에 북한 선수 나봉기의 이름이 들렸다.  "어 쟤 아오지탄광 안 갔네?"


남한에 졌고 거기다 승부차기까지 실축한 나봉기가 아오지탄광에 가지 않고 또 대표팀으로 출전한 것은 작은 충격이었다.  왜곡된 경직이었고 근거없는 편견이었지만 그때는 분위기가 그랬다.  방콕에서 봤듯 북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전박살"과 "명령만 내리소서"의 대결이었고 "새마을"과 "천리마"의 경주였으며 "멸공통일"과 "남조선해방"의 대리전이었다.   아나운서도 예사로 북괴 소리를 했었으니까. 또한 때는 바야흐로 전두환이 집권한 몇 달 뒤였다.   육사 시절 축구 골키퍼를 했다는 이 화상의 각별한 관심이 선수들에게나 코치들에게나 어떤 의미였을지를 추정하는 데는 그리 큰 수고가 들지 않으리라.   


전반전 10분이나 되었나 북한의 위협적인 슛이 골 포스트를 맞고 튀어나와 가슴을 쓸어내리는 찰나 일본 심판이 호각을 불며 한국의 골문을 향했다.   중거리슛의 명수 최종덕이 입과 두 팔을 동시에 벌리며 비명을 질렀고 선수들이 벌떼처럼 일본 심판을 에워쌌다. 페널티킥이었다. 공이 튀어나오다가 최종덕의 손에 맞은 것이다. 


동네 전체에서 욕설이 진동을 했다. 세탁소 집 아저씨가 문을 드르륵 열고 입간판을 차 버리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집 안방도 대폭 꺼지지 않을까 싶은 한숨소리 드높았다. 나는 "나봉기 나봉기 어디갔어 니가 차라 나봉기." 간절히 연호했지만 그도 헛되이 이름 잘 기억 안나는 북한 선수가 깔끔하게 슛을 성공시켜서 1대0으로 앞서 나갔다.  


18살의 축구 천재로 불리우던  최순호.... 보아비스타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프로팀 초청 경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해 기가 막힌 힐킥을 성공시키며 스타 플레이어로 떠오르던 그도 북한의 철벽 수비에 틀어막히고 있었다. 북한은 꽤 냉정하게 게임을 이끌었고 지능적으로 시간을 끌었다. 북한이 골키퍼와의 패스 주고받기 (FIFA에서 이를 금지하기 전 가장 즐겨 쓰였던 시간 끌기)를 되풀이하자 경기장 스탠드에서 먼저 난리가 났다. 그 빈약한 TV 수상기의 오디오에 그 따끈따끈한 욕설의 온도가 전해질 지경으로..... 북한이 만약 지난 월드컵 때 한국이 토고전에서 한 것처럼 프리킥 돌리기까지 감행했더라면  고연전 축구 경기 때 연대 선수 턱을 날려 버렸던 다혈질 이태호가 주먹을 휘두르고도 남았으리라.  


후반전이 시작됐다.  한국 선수들은 열심히 뛰었지만 북한 선수들은 여유있게 뛰었다.   부지런함의 대명사 이영무, 165센티미터의 단신 이영무가 공을 쫓는 사냥개처럼 달려들었지만 북한 선수들은 그 사냥개를 훈련시키는 사냥꾼 같았다.  결국 뜬 공에 머리부터 들이밀던 이영무는 북한 선수의 발에 이마를 차여 나뒹굴고 말았다.   절망적이었다.  플레이메이커 이강조가 열심히 패스를 들이밀어도 , 꾀돌이 조광래의 페인트 모션도 북한 선수들에게는 별반 소용이 닿지 않았다.  비장의 무기 최순호도 안통하고 뒷날 마라도나보다 먼저 50미터 단독 드리블과 골인의 신화를 낳은 정해원도 유독 침묵이었다. 


그럭저럭 경기는 10분 밖에 남지 않았다. 교체해 들어간 한 선수가 거의 골 라인 아웃될 듯한 공을 끝까지 쫓아갔다. 그리고는 그렇게 날카롭다고는 할 수 없는 각도로 크로스 (당시는 센터링이라고 했다)를 올렸다. 185센티미터의 최순호였지만 그날 헤딩 하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도 최순호의 머리를 피했다. 그리고 공은 그 뒤에서 점프했던 정해원의 머리에 덜커덕 걸려들었다. 



거리도 가깝지 않은 거리였고 직선으로 내리꽂혀진 헤딩도 아니었지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터져나온 헤딩이어서 그런지 북한 골키퍼는 금강산 구경을 하고 있었다. 골이었다. 정해원이었다. 155마일 휴전선 이남은 거의 뒤집어졌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쿠웨이트 경기장도 붕괴가 걱정될만큼의 대환호가 휩쓸고 지나갔다. 정해원은 넋을 잃은 듯 두 팔을 치켜든 채 터치라인 앞에 섰고 그 뒤를 몇 명이 덮쳤다.  이제는 최소한 비길 수 있었다. 북한 괴뢰 도당에게 패배는 면한 것이다. 


바로 그 직후 북한의 날카로운 공격이 환호의 뒷덜미를 매섭게 잡아챘다.   길게 넘어온 크로스가 순간 노마크  찬스로 연결되어 북한 공격수와 조병득 골키퍼가 1대1로 맞선 것이다.  그러나 간발의 차로 조병득 골키퍼의 손이 북한 선수의 머리에 앞서 공에 닿았고 공은 골문에서 벗어났다. 그때 아나운서의 멘트..... "적들의 공세 앞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나운서인지 지휘 장교인지 원......   


경기 종료 2분 전..... 이영무가 멋진 개인기를 발휘하면서 북한 수비를 헤집었다.  그리고 돌파할 듯 몸을 틀다가 공을 오른쪽으로 흘러 보냈다.  그 공을 토끼삼아 달려들던 맹수는 다름아닌 정해원.  대포알같은 왼발 슛이 애처롭게 손 뻗은 북한 골키퍼 옆을 스치며 골 네트 오른쪽 상단에 꽂혀 버렸다. 역전.....  2:1이었다.  


정해원은 달려드는 모든 선수를 뿌리쳤다. 한 명은 유도하듯 메쳐 버리고 내쳐 벤치로 달려갔다. 역시 두 팔은 만세를 부르고 있었고 얼굴은 무아지경 그 자체였다. 2002년 이탈리아에서 안정환이 누워 있을 때 표정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는 김정남 코치와 격렬한 포옹을 나눴다. 로미오가 다시 살아났어도 줄리엣이 그렇게  뜨겁게 안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사지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의 포옹이었다. 


전쟁 후 그때까지 대결 국면 이외에는 생경했던 한 민족의 두 나라, 그 나라가 공히 즐기고 열광하는 스포츠에서의 맞대결이라면 명승부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결은 스포츠를 넘어서는 뭔가를 담게 되고,  하나의 작은 역사를 구성한다고 해도 지나침은 없을 것이다. 


그런 슬프고도 치열한 라이벌이 또 있었을까. 한 번 대결하려 들면 목숨을 걸다시피 악을 쓰고 싸워야 했던, 경기장 안 사람이나 경기장 밖 관중이나 작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경기의 승패가 전투의 승패라도 된 양 땅을 치거나 하늘을 찔렀던 그런 대결이 축구에선 흔하다지만 그 열광의 뒤에도 통한의 이면에도 서글픔이 한바가지였던 기괴한 라이벌전은 그리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과의 경기에서 진을 뺀 탓인지 결승에서 한국 대표팀은 맥 한 번 못쓰고 예선에서 3대0으로 격파했던 쿠웨이트에 3대0으로 무너졌다.


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대회 때 북한은 참가팀 가운데 유일하게 영어로 자국 표기를 하지 않은 나라였다. 트레이닝 복 뒤에 큼직한 하얀 글씨 조선은 눈에 띄었으되 빛나지 않았다. 북한은 83년 멕시코 청소년 대회 티켓을 걸고 한국과 대결해서 한국을 꺾고 티켓을 쟁취하여 다시 한 번 기세를 올렸지만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물론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태국 심판이 말도 안되는 판정을 반복하긴 했다.  그러나 그런 꼴을 당한 것이 북한만이 아니었건만, 북한 선수들은 매우 "우리 방식대로" 대응해서 태국인 심판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 버렸고 결국은 스스로를 2년간의 고립에 빠뜨려 버렸다. 잘 알다시피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 축구팀은 북한 대신 멕시코에 건너가서 4강 신화를 일구고 왔다. 


먼저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은 북한이었다.  월드컵 8강에 빛나는 축구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북한은 세계의 존경을 받을만한 성장과 발전을 먼저 일군 나라였다.   한강의 기적에 앞서서 대동강의 기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하기 시작했다.  80년 9월에 있었던 한국과 북한의 아시안컵 준결승도 그 허다한 그래프 중 하나의 꺾인 점이 아니었을까.


 


산하(nasanha@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