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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몰입교육] 영어몰입교육에 대한 몰입 논평 2탄


2008.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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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지난 번에 이어 영어 이야기 좀 더 하자.


인수위원장의 ‘오렌지/어린쥐’ 론으로 상징되는 미국식 발음에 대한 강박관념은 우리 사회에 아주 심하게 뿌리 박혀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며칠 전 미국 생활을 오래 하고 공부도 많이 한 지인이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인도인 영어 선생이 가르치긴 잘 가르치는데 발음이 엉망이라...


필자에게 이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에 대해 가진 고정관념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마디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 내막을 좀 더 깊이 살펴보기 전에 좀 과감한 명제 하나를 제시해 볼란다.


영어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은 발음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니 몇 년 전만해도 강남 일부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영어발음을 염려한 나머지 혀 뿌리를 끊어내는 수술까지 유행했다고 하는데, 그 많은 영어 연수생들이 해외에 나가서 제일 집착하는 것이 딩글딩글 굴리는 발음 만들어 오는 것인데, 그런 발음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니?


그러나 이것은 ‘미국어’가 아닌 국제어로서 영어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잡힌 사람들에게는 더도 덜도 아닌 상식일 뿐이다. 왜 그런가?


이를 생각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영어를 왜 공부하는지부터 다시 상기해보자.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나라에 있어서 영어의 효용은 ‘바깥 세상’ 과의 소통이다. 그 바깥 세상은 그럼 어디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미국. 그리고 이어지는 앵글로 색슨계 영어권 국가들로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다. 그리고는 영어가 공용어로 쓰이는 인도, 말레이시아... 등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순서는 단지 우리 머리 속에서의 사고의 흐름일 뿐이며 실제 우리가, 혹은 우리의 자녀가 언젠가 영어를 사용하게 될 대상국의 순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영어가 중요한 이유는 지난 시간에도 언급한 제 3의 언어로서 ‘국제어’의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러분이 학업이던 업무던 친교던 네덜란드 사람을 하나 알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이때 90%의 경우 그 네덜란드 사람은 한국어를 못하고, 여러분은 네덜란드 어를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그 중간의 언어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어이며 이것이 영어의 진정한 국제어로서의 기능이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제 아무리 미국식 발음을 열심히 공부해서 ‘어린쥐’에 통달한다 한들 네덜란드인은 네덜란드인대로, 영국인은 영국인대로, 인도인은 인도인대로 자기들 식으로 오렌지를 발음할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미국식이랍시고 ‘어린쥐’라고 하면 그들이 과연 여러분에게 ‘좋은 발음’을 한다고 박수 쳐 줄 것이며, 쉽게 알아먹을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여기서 유일한 예외는 여러분이 미국에서 살거나, 아니면 미국인과 매일같이 접촉하는 일을 하는 경우이다. 이때는 미국식 발음 가깝게 해주면 의사 소통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고 또 듣는 저쪽은 기분 좋을 테니 머 나쁠 것이야 없다. 하지만 과연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이런 절실한 필요를 가질 것인가. 물어보나 마나 대답은 뻔한 것이다.


그럼 앞의 인도인 영어 선생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그 양반이 자기 발음이 나쁘다는 소리를 직접 전해 듣는다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이 인도인은 평생 영어를 자기 모국어나 다름없이 사용해 온 사람인데, 대체 누구 기준으로 발음이 나쁘다고 욕하는 건가. ‘한국인이 생각하는 미국 발음의 기준’ 으로 영어 네이티브 스피커인 이 사람의 발음을 감히 평가한다는 건가? 게다가 인도의 영어 사용 인구가 미국보다도 더 많은데?


이런 불공정한 일이 대체 어디 있나...







그럼 과연, 영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의사 소통 능력’ 이다. 그리고 이 의사 소통 능력이라는 것은 아래와 같이 구성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전체적인 영어 지식의 총합 3 + 실전 경험 7


전체적인 영어 지식이란 물론 영어의 각 요소를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느냐는 것이다. 단어, 문법, 표현, 발음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앞서도 말했듯이 발음의 중요성은 영어에서 그리 높지 않다. 미국이나 영국 대학에도 ‘나쁜’ 발음의 외지인 대학 교수들도 수두룩하고 그렇다고 그들이 그 발음으로 인해 무시당하거나 직장을 잃는 일은 없다.


영어 연수생 중에는 모든 게 다 엉망이면서 발음만 딩굴딩굴 흉내 내는 친구들도 많은데, 그런 그들이 영어를 잘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오직 동료 영어연수생들뿐이다. 실제 현지인들은 발음이 좀 안 좋아도 의사 전달이 확실한 사람을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언어의 진정한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편 인수위원장이 미국 유학을 하던 시절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의 수십 년 전 옛날로, 그때는 학교나 동네에서 한국 유학생 몇 명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미국인들 자신이 훨씬 국제화되어 오히려 발음 문제에 대한 인식이 많이 열려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위원장의 ‘철학’은 그 옛날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편견이며 심히 시대착오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암튼 영어에서 오히려 중요한 것은 문장을 구성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능력으로 단어나 표현, 문법 등인데 이것 역시 머 대단한 고차원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내용을 전달만 할 수 있다면 언어로서의 역할은 거기서 충분한 것이다. 물론 잘 알면 알수록 고급 영어를 구사할 수는 있지만 그런 영어를 써야 할 일은 영어권에 살아도 거의 없다.


그렇지만 이런 지식만 가지고는, 영어는 물론 모든 언어는 무용지물이다. 무조건 써먹어야 한다. 발음이고 단어고 오렌지고 어린쥐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부딪혀서 말을 주고 받아야 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영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온 필자도 (아버지가 영어로 먹고 산 사람) 완료형을 제대로 구사하는데 캐나다 생활 2년 전체가 걸렸다. 물론 엉터리 시제로 수많은 대화를 한 결과 얻어진 것이다. 그 경험이 쌓이면 나중에 중고등학교 때 배운 문법 지식으로 소급되고, 그게 종합되어서야 완료형의 사용이 자유자재로 가능해지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이때 발음이나 정확한 표현 등에 너무 신경 쓰면 오히려 입을 열지 못해서 그 시간은 더욱 길어지거나 아예 기회를 잃게 된다.


암튼, 위의 3:7의 비율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실전 경험을 통하지 않으면 결코 활성화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일단 활성화되기 시작하면 과거에 이해하지 못했던 지식의 의미가 살아나고, 그런 다음에는 그 지식이 다시 현실의 언어 생활에 구체적 도움을 주는 선순환이 시작된다. 이때가 진정 영어가 느는 시점이다.


그럼에도 우리 영어 교육은, 실제 공교육 현장에서는 학문에 가까운 어려운 지식의 주입에만 급급하고 있고, 막상 실전 경험의 기회 제공은 전무한데다가 발음에 대해서는 강박관념에 가까운 환상만을 쫓고 있으니 삼박자가 전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 교육의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학교에서 지식과 경험의 결합을 어느 정도만 실현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영어 공교육이나 사교육은 일체 필요 없다. 미국식 발음이나 고급 문법, 보캐불러리 3만3천의 암기 따위는 그것이 굳이 필요한 사람들만 추구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니, 새 정부가 영어 교육을 정상화하려면 이런 영어에 대한 잘못된 관념부터 먼저 극복해야 한다. 막강한 힘을 가진 실세 인수위원장이 개인 철학을 내세우며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면 진짜 영어 전문가들, 영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경험과 통찰을 가진 이들은 그저 숨죽일 수 밖에 없다. 이래가지고야 무슨 공교육 정상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는 영어 몰입교육 따위의 해병대식 관점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영어를 대입을 위한 교과목이나 미국식 발음의 과시, 심지어는 계급적 우월감을 자랑하는 수단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저 언어의 하나로서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적당한 수준의 지식과 적당한 수준의 경험... . 그것이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의사 소통이 가능한 실전 영어 구사의 열쇠다.


그것도 모두 다 그렇게 할 필요 없다. 지난 회 말미에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영어 교육의 이런 광기와 착각, 거품을 제거하고 실제로 정상화 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중고등학교에서 영어의 비중을 낮추고, 고로 고입이나 대입에서의 비중도 낮추고, 영어 실전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회화 수업 등을 따로 만들어 특별히 관심 있는 사람들만 선택하여 공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여러분 자녀들이 영어를 잘할 기회를 영영 잃게 될 거라고? 그렇게 되 묻는다면 여러분은 지난 글과 이번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비중을 낮추나 지금처럼 계속 하나 실제 영어 실력(책 못 읽고 대화 안 되는)은 어차피 똑같을 텐데 뭐가 문제인가? 그러니 쓸데없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만은 줄여주자는 거다. 게다가 대입 비중을 낮추면 영어에 대한 모두의 고민은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니 일석이조다. 이렇게 되면 영어는 이제 본연의 모습, 즉 ‘특기’로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이래도 불안하다면,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한번 되물어 보셨으면 좋겠다. 과연 여러분은 영어 못해서 하고 싶은 거 못했고, 영어 못해서 큰돈 벌 기회를 잃었고, 영어 못해서 불행했던가? 영어만 잘 했다면 인생이 찬란하게 바뀌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영어의 멍에를 왜 우리 자녀들에게 억지로 지워야 한단 말인가. 지금도 이미 충분한 부담과 압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 아닌가...



파토(patoworl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