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필독 추천0 비추천0

 

 

 

 

 

 

 

 

[이슈연장전] 영어 or 미국어

 

 

 

 


2008. 3. 3. 월요일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김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재일 미국인이 일본인 독자를 위해 일본어로 쓰고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이 책의 뒤에 보면, 저자의 에세이 두 편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그 중 한 편이 일본에서 성행해온 <영어회화>에 대한 글로, 제목은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

 

 

저자는 영어면 영어지, 영어<회화>는 뭐냐? 라는 말로 포문을 연다. 저자에 따르면 영어<회화>는 몰개성적이고 미국추종적인 일본만의 기현상... 이 아니라 실은, 한국도 다를 바가 없잖아?

 

 

영어<회화> 교재에는 미국 중산층 백인의 일상생활이 그 모델로 제시되는데, 여기에 나오는 대화들은 지나치게 모범적이고 천편일률적이어서 아무런 개성이 없고, 즉 화자 톰, 마이클 따위는 실제로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미국은 아마 이럴 것이다>라는 환상이 반영된 이데아일 뿐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영어권 국가에 유학을 갔다 온 선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원어민(저자에 따르면 원어민이란 표현은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유독 일본에서만큼은, 원어민이란 백인을 가리키기 때문에.)은 한국 유학생들의 어법을 <귀엽다 cute>고 한다고. 그 이유는 지나치게 모범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사를 할 때 아임 파인, 땡큐, 앤유? 라고 하니까. 즉 우리의 느낌으로 치자면, 외국인이 아침에 우리를 처음 만나서 한다는 인사가

 

 

안녕 철수야? 요즘 어때? 나는 좋아, 너는 어떠니?

 

 

따위라면, 그것도 숙취에 쩔은 얼굴로 이런 멘트를 기계적으로 날린다면, 녀석 참 애쓴다고 퍽이나 귀여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외국인이 말하는 <나는 좋아>의 나는,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한국어 체계 속에 암기되어 못처럼 박혀 있는 하나의 공허한 개념일 뿐이다.

 

 

요컨대 저자가 말하는 일본의(내가 보기에는 한일 양국의) 영어<회화>라고 하는 하위문화는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아침 인사를 건넨 외국 친구가 <숙취 때문에 죽을 것 같아, 그건 그렇고 오늘 시험 어떡하지?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라고 말했을 때 <아임 파인, 땡큐, 앤유?>의 체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기형적인 하위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백인 우월주의이며, 무엇보다도 미국으로 대표되는 백인 우월주의다. 저자는 말하기를. 일본인들의 머릿속에서 세계는 일본(이라는 현실)과 미국(이라는 환상)으로 양분되어 있고, 나머지(남미, 유럽, 제3세계)는 공정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 채 저층(低層)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인들은 서구의 백인을 보면 미국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비단 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쌍둥이처럼 적용되는 이야기다. 영어교육능력이 충분한 미국인 흑인보다 단지 외국어로써 영어를 배워봤을 뿐인 유럽 출신 백인이 <원어민 강사>로서 더 선호되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어떤 강력한 공통점이 있다.

 

 

저자는 역사에서 그 이유를 발견한다. 즉 일본은 미국의 피점령국이었던 것이다. 한국은 패전국, 피점령국은 아니었지만, 그 정치적 체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의 우산 아래 있었고 그리하여 우리는 혈맹 미국의 도움 아래 북한과 대치하고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온 것이 아닌가.

 

 

보수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그 표현대로 우리가 미국을 <혈맹>이라 부를지언정, 그게 우리만의 짝사랑이라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미국은 인접국인 캐나다와 멕시코에게 보내는 만큼의 관심을 한국에 보인 적인 단 한 번도 없다. 그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미국은 외국 그 자체이자 혹은 외국의 총량, 또는 가장 전형적인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외국이었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심각하게 짝사랑할 때, 그의 눈에는 오직 그녀만 보인다. 그러나 정작 <나의 그녀>는 그를 단지 수컷들 중의 하나로 볼 뿐이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소련의 2차 대전 뒤풀이 땅따먹기에서 미국이 깃발을 꽂은 곳이고, 일본은 미국에 깨지고 미국의 피점령국이 되었다. 두 나라 모두에 미군이 주둔해 있다. 이 수동적 과정을 거쳐 아시아에서 가장 잘사는 두 나라가 되었으며, 어쩌면 가장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그러니까 가장 "미국적"인 나라가 되었다. 그러니까 한국과 일본은 영어에 대한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 닮은꼴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일간지에 게재되었다는, 이명박 정권의 영어몰입교육에 대한 기사가 이런 공통점을 반증한다. 기사는 한국이 화끈한 영어교육정책으로 국가경쟁력을 높여 일본을 압박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바보들은 한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닮은꼴 이데올로기.... 영어몰입은 사실상 미국화몰입이라는 것을 우리의 오렌지 할머니가 친히 증명해 주었으니, 그녀의 사랑하는 어륀쥐는 영어의 원형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진, 미 서부의 사투리 발음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일본보다 더 고립된 섬이었다. 가장 중요한 주변국은 미, 중, 일, 러, 북. 예전에는 러시아가 아니라 소련이었고, 소련은 악의 본부였다. 중국(이 아니라 중공)은 악의 2중대, 북한은 악의 행동대장으로써, 가장 실질적이고 위협적인 진짜 적이었고, 일본은 정치적으로는 우방이지만 따라잡아 이겨야 하는 얄미운 부자였다. 그렇다면 오직 미국만이 우리의 든든한 친구(가 아니라 사실은 보스), 우리가 닮아야 하는 역할모델, 온갖 긍정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이상향이었고, 너무나 이상적인 탓에 현실성을 잃어버려 하나의 환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어륀지는 한 개인의 무지에서 발생한 천박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반세기 동안 이어진 절실한 짝사랑의 결과이기도 하다. 요즘 유행하는 <영어마을>의 생김새를 보라. 코스모폴리스가 아니라 전형적인 미국 주택가다. 이 낯 뜨거운 촌스러움, 세계화란 사실 위장된 미국화에 불과한 현실 속에서 식민지적인 촌스러움은 현대적인 세련으로 둔갑한다.

 

 

 

중고등학생 시절 <미국 명문대 유학>을 꿈꾸던 나도 이 짝사랑의 참가자였음이 틀림없다. 나는 당시로는 예외적으로 영어조기교육 비스무리한 것을 받는 바람에(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신 분의 사모님에게 영어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영어신동 비슷한 존재가 되어 어른들로부터 꽤나 각광을 받았는데, 그건 수학을 잘한다거나 학교성적이 좋다거나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그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어떤 경이로움의 대상이었다. 이 경험이 나를 들뜨게 해서, 나를 오랫동안(청소년 시절동안) 미국 유학에 대한 환상 속에 살게 했다.

 

 

나를 이 기형적인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 준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철학으로,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철학에 빠져(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가 주범이다.) 결국 철학과에 입학함으로써 영어에 대한 달뜬 흥미를 잃어버렸다. 철학은 지금도 나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데, 철학과 졸업생이라는 이력은 취직에 매우 적대적이라는 현실 덕분에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가난한 글쟁이로 살며 적성을 살리고 있다.

 

 

두 번째는 내가 <모두가 영어를 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거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토익 900점은 별다른 메리트도 되지 않는 현실, 강남 초중고 교실에 두어 명 이상은 입에 버터를 물고 있는 영어 조기유학생이라는 현실이 영어구사에 있어서의 나의 특이성을 없애버렸다. 나는 그저 그 흔한 떼거지들 중에 하나가 되어 버렸고, 그래서 나는 쉽게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더 이상 나를 떠받들어주지 않는 환상 속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지금 나는 <악의 2중대> 중국에서 살고 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대학생에게 중국어 과외를 받고 있고, 다행스럽게도 오렌지가 <쮜즈>라는 것을 배울 때 어륀쥐 어쩌구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여기는 미국도 한국도 일본도 아니라 중국이어서, 영어는 어디까지나 국제어지 미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어 성조는 발음하기가 어렵다. 현지 대학생에게 유치원생 가르치듯 발음교정을 받고 있으려니까 이런 생각이 든다. 영어 잘하는 ‘인재’에게 군 면제의 길을 열어준다고 한다. 그럼 중국어를 잘 하는 ‘인재’는? 일본어는? 아랍어는? 프랑스어는? 독일어는? 스와힐리어는? 한자능력시험 만점자는? 세계의 지평은 그 세계를 온전하게 인식할 때만 열리는 법이다.

 

 

<어륀쥐>식 영어, 즉 <미국 중산층 백인>을 이데아로 설정한 영어는 주객이 전도되어 그 이데아에 속한 그들을 주로, 우리를 객으로 놓고 결국은 우리 자신을 타자화하고 만다. 우리는 미국 중산층 백인의 일상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젊은이들이 할렘식 억양과 표현이 가득한 흑인음악을 듣고 중국어 학습에 열을 올리며, 일본어를 정규교육 받지 않은 학생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본어 콘텐츠를 번역해 웹에 올리는 지금, 새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영어몰입교육 정책은 대체 얼마나 촌스러운 감성에 기반하고 있는 겐가.

 

 

영어몰입교육은 교육 주체인 우리 아이들의 요구가 아니라 끝나지 않을 짝사랑에 애를 태워온 구세대들이 허공에 보내는 러브레터에 지나지 않는다. 이 수신자 없는 러브레터는 (만약 써진다면) 집단적 실험대상이 된 우리 학생들의 피로 써진 혈서가 될 것이다.

 

 

영어는 국제어다. 국제어가 존재하는 이유는 광범위한 소통을 위해서다. 그러므로 딱 잘라 말해서, 영어는 말만 통하면 된다. 국제어로써의 영어는 그냥 간단하고 쉬운 영어다. 또한 특정한 민족문화적 개성이 희미한 기계적인 언어이며, 따라서 다양한 개성의 화자가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그 그릇이 넓다. <미국 중산층 백인>식 영어는 단지 영어라는 언어세계에 찍혀진 하나의 방점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슬프게도 그 합치될 수 없는 점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군생활을 마치고 홍콩에 체류하고 있을 때 경험한 일. 홍콩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한다. 그런데 그 잘 한다는 수준이, 막상 들어보면 우리의 중학생 영어교과서 수준을 넘지 않는다. 나와 이야기했던 홍콩 사람들은 고급스럽게 짜인 긴 문장을 구사하지도 않고, 오렌지를 가지고 어륀쥐 어쩌구 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영어를 잘 한다는 건 뭐냐 하면, 한마디로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 말하자면 자신감 있게 하는 것이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이 정도 영어면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모조리 할 수 있겠다.>였다. 실제로도 그럴 거다. 어떤 이유에서 입에서 떨어지지 않을 뿐이지. 우리가 받는 영어교육의 양은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국제어는 장소와 관계없이 개인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다른 모국어 사용자들 사이에 소통되는 정보의 양을 늘리기 위한 언어다. 우리가 미국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미국화라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몰입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미국산 백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렌지 할머니를 보라. 오렌지를 오륀쥐라고 하고 워터를 워러라고 한다고 어디 백인이 되어 있던가? 그는 짝사랑에 못 이겨 입에 버터를 물고 세레나데를 부르는 선택받지 못한 연인일 뿐이다.

 

 

오렌지 할머니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워러라고 해야지 워터 달라고 하면 물도 한 잔 못 얻어먹는단다. 그래...? 그런데 홍콩에서 워러라고 하면 물 한잔 못 얻어먹는다. 어디서 건방지게 발음을 흐리나? 워터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미국 가봐서 아는데(LA였다.) 워터라고 해도 물 잘만 얻어먹는다. 언젠가 쪽팔렸던 일, 태국 가는 비행기에서 혀 좀 굴린답시고 스튜어디스한테 뤳(레드) 와인, 플리즈라고 했더니 화이트 와인 따라주더라. R 발음 한껏 굴린 <뤳>이 <와잇white>처럼 들렸던 거다. 빨간 거 먹고 싶으면 <레드>라고 똑바로 발음해야 한다. 알겠습니까, 오렌지 학생?

 

 

문제는, 그저 오렌지와 그 패밀리들을 가볍게 비웃어주면 될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어륀쥐식 영어몰입교육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인간들이 정권을 잡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인들이 영어를 그렇게 지겹게 배우고도 제대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떻게 배움의 양에 있을 수 있을까? 영어는 그냥 외국어가 아니다. <국영수>의 그 <영>이다. 영어를 제대로 못 하는 걸 보니 충분히 배우지 못했음이 틀림없는 바, 더 많이 더 맹렬하게 가르치겠다는 거다. 전문가들이 모여 희망찬 청사진을 제시했으니 국민은 잔말 말고 따라오라는 식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건설회사가 아니고, 국민은 건설회사 직원이 아니다.

 

 

장담하는데, 그렇게 가르쳐봐야 한국인들 영어실력 하나도 안 는다. 그렇게 해서 늘었으면 다 아메리칸이게? 한국인들이 영어를 해도 해도 안 느는 이유는 영어는 중요한 과목이므로 뒤처지면 큰 일 나는 과도한 경쟁 때문이고, 이 경쟁이 다름 아닌 시험이라는 제도 속에 구체화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지겨운 국영수의 <영>부터 사회초년생들의 목을 죄는 토익 토플 테솔에 이르기까지, 영어는 남들보다 더 많이 암기해서 정답을 맞춰야한 하고 틀리면 조뙈는 일종의 ‘평생에 걸진 시험범위’다. 영어는 학습에 의한 공략, 정복의 대상일 뿐 내가 사용하고 소비하는 내 언어생활의 일부가 아니다. 즉 우리는 영어를 과중하게 강요받아온 탓에 오히려 영어를 실질적으로 소비할 틈이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외국인을 만났을 때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이유? 나도 경험해 봐서 안다. 순전히 ‘틀릴까봐’다. 이 때 한국인들은 그 지긋지긋하고 공포스러운 시험들 중에서도 운에도 없는 최악의 시험에 직면해 있는 거다. 그러니 입이 떨어질 리가 있겠는가? 떨어진다 해도 어딘가에서 달달 외운 영어<회화>구문, 그러니까 <미국 중산층 백인>이라는 이데아를 충실히 따르는 <아임 파인, 땡큐 ,앤유>나 흘러나오겠지. 이러니까 토익 만점을 기록한 신입사원이정작 국제적인 협상에서는 아무 말도 못한다는 뉴스가 나올 만도 하다. 실제 협상의 내용이 토익의 지문만큼 <모범적>일 리는 없을 테니까.

 

 

뉴스는 이 익명의 토익 만점자를 한심하다는 식으로 소개하지만, 사실 그는 이 영어만능주의사회를 누구보다 처절히 살아왔고, 또한 만점이라는 기록을 올린 승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어라는 이데올로기를 지나치게 강요받아온 피해자이다.

 

 

영어몰입교육이 만들어 낼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다. <어륀쥐>의 천박함도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만, 그 천박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기대할 만한 실질적인 열매가 없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다. 영어몰입교육의 이데올로기는 닿을 수 없는 미국적 이상이다. 이 공허한 청사진은 <어륀쥐>와 <워러>에 의해 천박한 포르노그래피임이 확인되고, 그래서 <오렌지와 아이들>이 쓰는 러브레터는 사실 문화적 자위행위였던 것이다.

 

 

이 구역질나는 자위행위에 애꿎은 국민이 동원되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그게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라 ‘매스털베이션’이라서?

 

 

 

PS 에세이의 결론부분을 발췌, 소개하도록 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압축되어 있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와 닿겠지만, ‘일본’을 ‘한국’으로 바꿔 넣어도 무방하다.

 



 
 

... 나는 여기서 서구의 방문자들과 의사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서구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를 척결하면서 영어를 문화지배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아시아와 제3세계의 연대를 위한 언어로 변화시키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공부 자체가 추종적 태도에서 자유의 도구로 변화될 때, 일본인들이 느끼는 그 모든 영어에 대한 ‘특별한 어려움들’이 정말이지 마치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백인 선생들만을 고용하는 외국어학원에 대해서는 보이콧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영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은 서로들 앞장서서 동남아시아인들과 스터디그룹을 조직하여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와 정치 그리고 아시아적 표현을 반영하는 새로운 아시아판 영어를 창출해야 한다. 그리하여 만약 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인들이 새로운 아시아판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듣겠다고 투덜거리게 된다면, 그때는 외국어학원에 나가야 할 사람은 바로 그들이 될 것이다.

 

- 209P (※이 에세이에 한해 ‘천희상 옮김’이라는 별주가 붙어 있음)

 

 

필독(field-dog@x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