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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깜빡이 좀 넣잔 말이다

 


2009.8.10.월요일

 

영국에 몇 년 살고 떠나면서 이제 그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는 맘이었다.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엉망진창인 나라, 은행도 관공서도 회사도 정부도 학교도 경찰도 흐리멍덩의 극치에 증명서 하나 떼는데 6개월도 걸리곤 하는 이 나라는 분명 몇 십년 못 가서 3류 국가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거기에 날씨도 너무 안 좋고 물가도 비싸고 불친절하고 교통 안 좋고... 도대체 뭐가 좋아 이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부른단 말이냐. 울나라가 여러모로 훨씬 좋다. 암.

 

머, 이러고는 이제 하지만... 하면서 반전하겠거니 예상들 하겠지만, 아니다. 귀국한지 오래 됐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렇다. 돌아가서 다시 살 생각 없고, 영주권 줘도 이민 갈 맘 없다. 지긋지긋하다.

 


전형적인 런던거리. 도심의 화려함과 고풍스러움과는 달리 대부분의 주거
지역은 그저 낡은 건물과 좁은 길이 거미줄같이 얽혀 있을 뿐이다.

 

귀국해서 참 여러가지로 좋았지만 특히 제일 좋았던 거는 뭐니뭐니해도 배달 문화의 편리함이었다. 그 다양함과 신속함, 새벽까지 계속되는 서비스... 이건 외국 살다 온 사람들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낀다. 반면 제일 놀랍고도 또 싫은 거는 길거리 자동차들의 행태일 거다. 이것도 외국 살다 온 사람들은 비슷하게들 느끼는 거다.

 

그래서 앞으로 여기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할란다. 머 할 이야기는 많지만 다른 건 다 나중에 하고, 오늘은 제목대로 한 놈만 잡고 팬다.

 

대체 왜 깜빡이 안 넣는데...?

 

운전하면서 다니다 보면, 차선 변경은 물론이고 좌회전 우회전, 골목길 들고 나고... 이럴 때 깜박이 안 넣는 넘이 넣는 넘보다 더 많다. 이게 옛날부터 그랬던 건지 그 몇 년 동안 바뀐 건지, 외국 나왔다 들어오니 보이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차선 변경할 때는 깜빡이 넣으면 오히려 안 껴주는 넘들도 있으니 차라리 이해한다 치자. 아 물론 이런 걸 이해해야 한다는 자체가 쪽팔린 이야기다마는 암튼 나름 이유라도 있다. 큰 길에서 좌회전 차선에 서 있으면 그것도 머 좌회전 할려는 게 뻔한 거니 거기까지도 봐준다.

 

내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는 집 앞의 크고 작은 차도들, 골목길들, 교차로, 주차장 들고 나는 차들까지도 깜빡이를 안 넣는다는 거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깜빡이 넣어주면 서로간에 운전에 도움이 많이 되고 사고 위험도 크게 줄일 수 있는 거다.

 

신호가 없는 삼거리나 사거리에서 마주치는 경우 서로 진행 방향을 알려 주면 괜히 쭈뼛거리지 않고 가던 서던 금방 판단할 수 있다. 주차장 앞에서도 들어가는지 지나쳐 직진하는지 등 깜빡이 넣어주면 의사 소통이 명료하다. 특히 내가 좁은 길에서 큰 길로 우회전해서 나가려고 할 때, 큰길에서 오다가 내가 있는 길 쪽으로 우회전해 들어오는 차들이 깜빡이를 넣어주면 내 입장에서는 편하게 진출이 가능하다. 다들 느끼는 거 아니냐?

 

여기에 더해 깜빡이는 뒤차에 대한 배려이자 안전 장치기도 하다. 큰길을 가다가 우회전해 골목으로 빠지면서 깜빡이 안 넣고 들어가는 차들이 많다. 이런 차 뒤를 쫓아가다 보면 이넘이 우회전 할려고 갑자기 속도를 줄이기 때문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이 상황에서 저 빨간 차가 깜빡이를 넣어주면 1)우회전해 나갈려고 하는 오른쪽 구석의 흰 차가 맘 편하게 진행할 수 있고 2)빨간 차 뒤를 쫓아오던 차도 우회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주의할 수 있으며 3) 횡단보도를 지나는 행인 역시 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모두가 편하고 안전해 진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사진 찍는 5분여 동안 저 자리에서 깜빡이 넣는 넘은 단 한넘 뿐이었다.

 

여기에 만약 골목에서 길 건너는 넘이라도 있었다면 그 넘도 차가 들어오는 줄 모르고, 나도 이 차가 골목으로 들어가는 줄 모르고, 결국 앞차는 사람 치고 급정거하고 나는 그 차 뒤를 다시 쳐서 밀어내고 불쌍한 그넘은 거기 또 깔리는 무서운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냔 말이다.

 

대체 왜...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산단 말인가.

 

 

영국이라는 나라에는 150년 전에 만들어진 좁아터진 마차길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이 나라는 교통 법규나 합의된 규범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아예 교통이 마비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많았던 로타리(얘네들은 라운드어바웃 이라고 한다)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특히 깜빡이 사용은 필수다.

 

이런 로타리들은 아주 복잡한 곳을 제외하면 신호등이 아예 없다(위 사진의 거대한 로타리도 신호등 하나 없이 유지되는 곳이다). 따라서 여기를 이용하는 데는 운전자들간에 합의된 룰이 있는데, 이 원칙만 제대로 지키면 교통 흐름이 스무스하게 이어지니 신호등으로 된 교차로보다 빠르고 원활할 수 밖에 없다.

 

그 룰이라는 것은 열라 단순해서, 오른쪽 길에 있는 차들이 우선적으로 로타리에 진입하고(영국은 우리하고 차선이 반대) 로타리에서 나갈 때는 깜빡이를 반드시 사용한다는 것뿐이다.

 


이 그림을 잘 보면 영국 라운드어바웃의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우측에서 진입하는 차가 우선이고, 좌측의 길에 있는 차들은 우측에서 오는 차가 없을 때만 로타리에 들어선다. 그리고 나갈 때는 깜빡이를 통해 어느 길로 나가는지 주변에 알려 줌으로써 대기하는 다른 차들은 그 정보를 기초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로타리에서 나갈 때 깜빡이를 켜 주지 않으면 앞에서 로타리로 진입하려는 다른 차는 내 차의 진행 방향을 알 수 없고, 그러다 보면 눈치로 적당히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결국 위험스럽게 끼어들 수 밖에 없다. 이러니 만약 울나라 운전자들을 영국의 로타리로 보내서 통과해 보라고 한다면 수분 내로 뒤엉키고 싸우고 사고 나고 난리가 아닐 거다.

 


잉글랜드 중남부 스윈든의 유명한 매직 라운드어바웃. 잘 보면 중심의 큰 로타리 하나 주변에 다섯 개의 작은 로타리가 모여 연결된 걸 알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육거리의 복잡한 교통을 효율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솔직히 처음 갔을 때는 헷갈리긴 했다...

 

이쯤 되면 울나라에는 로타리 없는데 뭔 상관이냐 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울나라에 옛날에는 많았던(7,80년대) 로타리가 이제 다 사라져 버린 이유가 뭔지도 좀 생각을 해 봐야 되는 거다.

 

부산의 중심가라고 할 서면에는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멋진 탑이 중간에 세워진 큼직한 로타리가 있었다. 이곳을 서면로타리라고 불렀는데 30대 중반 넘긴 부산 사람들은 기억할 거다. 버스 뒷좌석에서 타서 이 신비로운 탑을 바라보며 스무스하게 로타리를 돌아가던 유년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는 차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 로타리가 나름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중반 소위 마이카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 로타리는 점점 쓸모 없는 물건이자 공간만 차지하는 흉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차들이 원칙도 순서도 없이 아무렇게나 끼어들고 아무렇게나 나가다 보니 얽키고 섥히고 싸우고 사고 나고 엉망이 된 거다.

 

그래서 결국은 부산의 명물이었던 이 멋진 탑과 녹지를 다 헐어버리고 그냥 아래와 같은 평범한 교차로로 바꿔 버리고 말았다. 요즘 서울 광장이니 광화문 광장이니 하는 거보면 이 반대로 가야 맞는 거 아니냐.

 

 

사실 로타리를 잘만 활용하면 웬만한 교차로에는 신호등도 필요 없고 신호등 설치 안 하면 돈도 그만큼 아낄 수 있으며 교통 흐름도 훨씬 더 원활해진다. 모든 로타리에 저런 탑이나 녹지를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운데 회전을 위한 공간 표시만 해도 된다.

 

차로 미어터지는 울나라에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영국에서는 모든 곳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서울보다 교통이 더 복잡한 런던 한가운데서도 버젓이 운영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깜빡이만 제대로 넣어줘도 시행할 준비가 되는 거다.

 

마, 그렇다고 로타리가 꼭 있어야 된다는 건 아니다. 나라마다 제도도 다르고 교차로의 방식도 다른 건 맞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깜빡이 같은 사소한 원칙도 못 지키는 운전자의 의식 수준이 이 나라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에 로타리를 만들고 싶어도 개판될까봐 겁나서 못 만들고 기존에 있던 멋진 로타리도 헐어야 하는 거라면 그건 심히 쪽팔린 일이라는 거다.

 

이런 좆맨한 노력과 배려조차도 서로 나누지 나라라면 국민소득이 100만 불이 된다 한들 피곤하고 각박할 뿐이다. 반면 가야할지 서야할지 갈등때리는 나를 위해 살포시 깜빡이를 켜주는 작은 마음 씀씀이만으로도, 세상은 쬐금 더 포근한 곳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오늘부터 깜빡이 좀 넣잔 말이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운전대 잡고 눈치 보게 하지 말고. 응.

 


딴지 국제부 브라이-얀 (briyy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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