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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통신원]덩샤오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 우리가 잡아야 할 쥐는 무엇인가

 

2009.8.6.목요일

 

덩샤오핑(鄧小平)의 부인인 줘린(卓琳)이 지난 7월 29일 세상을 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말년의 덩샤오핑과 줘린

 

줘린 여사는 중국 공산당 1세대 인물이다. 본명은 푸징잉(浦琼英)으로 1916년 운남성에서 태어났다. 푸징잉은 어렸을 적 좋아했던 선생님이 공산주의자로 밝혀져 잡혀가는 광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그 후로 사회주의 사상을 본격 공부했다고 한다. 그게 초등학교 시절의 일이었다. 명석한 머리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15세가 되던 해에 집을 떠나 혼자 공부를 시작했고, 1936년에는 베이징대 물리과에 들어갔지만, 1937년 일본의 전면 침략이 시작되자 그녀는 옌안(延安)으로 떠나 공산당 활동에 몸담게 된다. 이때 만든 줘린이란 가명은 훗날까지 그녀의 이름이 되었다.

 

그녀가 덩샤오핑을 만난 건 1939년. 덩샤오핑이 그녀에게 반해 자꾸 치근덕거렸지만 줘린은 나이가 너무 많고(12세 차이) 또 일본에 이기기 전까진 결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며 그를 여러 차례 거절했다. 그래도 결국은 덩샤오핑이 이겼다. 1939년 둘은 결혼했다. 당시 줘린의 나이는 23세였다.
 

 


결혼 당시 부부의 기념사진

 

덩샤오핑에겐 세 명의 부인이 있다고 한다. 첫번째 부인은 장시유엔(張錫瑗)으로 1928년 결혼했으나, 2년 후 난산 때문에 죽었다. 두 번째 부인은 1931년 결혼한 진웨이잉(金維映)으로, 아마 조선 사람이 아닌가 하는데, 1933년 등소평이 숙청당할 때 이혼했다. 그 후 병 치료를 이유로 모스크바에 보내졌다가 정신병으로 또는 폭격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덩샤오핑이 온전한 가정을 꾸린 건 줘린을 만나고부터다. 1997년 덩샤오핑이 죽기까지 두 사람은 58년간 함께 살았다. 1968년 덩샤오핑이 숙청을 당해 쟝시(江西)에서 귀양살이할 때도 줘린은 함께 있었다.

 

덩샤오핑이 집권하는 동안 줘린은 대외 활동을 삼가하고, 실질적인 그의 비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경력으로나 두뇌로나 아마 남편에게 밀릴 게 없었겠지만, 그녀의 인품이 그랬는지 혹은 마오저둥의 부인 쟝칭(江靑, 문화대혁명의 주동자로 사인방의 일인)이 연상되어서였는지(쟝칭은 이후 무기징역을 받았으며 1991년 자살했다), 그녀는 당의 감투를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직함은 중앙군사위원회 행정부서 고문이었다. 덩샤오핑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는 더더욱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1997년 덩샤오핑은 93세로 세상을 떴고, 2009년 줘린 역시 향년 93세로 작별을 고했다.

 

 




줘린 여사가 세상을 뜬 소식을 들으니, 다시금 덩샤오핑을 추억하게 된다. 

 

 

덩샤오핑. 동방의 작은 거인. 몇 번의 피비린내나는 숙청 속에서도 살아남은 오뚝이. 80세에도 하루 5갑의 담배를 피웠다는 애연가. 1세대 공산당원이면서도 시장경제를 중국에 끌어들였으며, 또한 청년들의 민주화 개혁을 무참하게 짓밟은 인물.
 

 


발밑에 보이는 항아리는 담배 피울 때 침 뱉는 용도로 쓰였으며,
정상회담 자리에도 꼭 있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책, 그리고 1989년 자행한 천안문 사태는 경제적으로 개방되고 정치적으론 폐쇄된 지금의 중국을 만들었다.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근대 중국의 아버지라고 마오저둥을 표현한다면, 덩샤오핑은 현대 중국의 창시자다. 쟝저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淘)는 그를 충실히 계승한 후계자일뿐, 덩샤오핑의 그림자를 넘지 못한다. 공과를 떠나 그의 이름이 역사에 오래 남으리란 건 분명하다.

 

그러나 필자에게 있어 가장 인상 깊은 덩샤오핑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이것이다.

 



 
 

덩샤오핑 흑묘백묘론의 뒷이야기
출처/ 중국공산당신문망 2008년 12월 17일

 

...시단(西單) 동남쪽에는 스촨호텔(四川飯店)의 옛 자리가 있다. 덩샤오핑은 평소 이 호텔을 즐겨 찾았는데, 실내에 흑묘백묘도가 한 폭 걸려 있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그는 종종 여기서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얘기들을 꺼냈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의 집에도 쌍묘도가 한 폭 걸려 있다. (중략) 그림의 윗 부분엔 몇 행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 그린 화가는 강남에서 고양이 그리기로 유명한 화가 첸리엔타오다. (중략)

 

1992년 봄, 88세의 덩샤오핑은 우창(武昌), 센젠(深圳) 주하이(珠海) 등지를 방문했다. 그 해가 바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란 말이 가장 유행하던 때였다. 2001년 APEC 정상들의 회담 석상에서, 말레이시아 총리는 개막 연설에서 이 말을 빌려 아시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발전임을 우의적으로 표현했다.

 

고양이론의 발원은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2년 많은 농촌 지역에서는 기근과 재해에 맞서기 위해, 빠오찬(包産, 계획생산량 이상의 생산농가는 추가 분배를 받는 방식) 등의 각종 생산 방식이 자연적으로 발생했다. 이러한 변화는 당내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왔다. (주: 당시 중국은 경직된 사회주의 생산방식으로 모두에게 똑같은 분배가 원칙이었는데, 빠오찬은 성과에 따라 추가 분배한다는 점에서 반동적인 시장경제 제도로 보았음)

 

7월 2일,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에서는 이 빠오찬 문제를 토론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그러한 생산 방식이 비교적 쉽고 빠르게 농업 생산 발전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이를 지지했다. 그는 자주 인용하던 쓰촨의 속담을 꺼냈다. "누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그저 쥐새끼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인겨". 이때는 내부적 회의 석상의 말이었으므로, 고양이론은 널리 퍼지지 않았다.

 

1962년 7월 7일, 덩샤오핑은 공산청년단 전체가 모인 회의석상에서, 다시금 이 말을 꺼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 말은 <등소평문선>에 실려 있으며, 처음으로 고양이론이 대중에게 선보인 자리였다. 후에 이 말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란 말로 약간 바뀌어 전해졌다. (중략)

 

"누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그저 쥐새끼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인겨" 이 말은 원래는 쓰촨의 속담이다.

 

하늘이 내린 나라는, 밭도 많고 곡식도 많으며, 쥐가 많으니 고양이도 많다. 농부는 고양이를 기르니, 이는 쥐를 멸해 곡식을 지키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누런 고양이도 좋고 검은 고양이도 좋으니, 그저 쥐만 잡을 수 있으면, 곧 좋은 고양이다.
(원문: 天府之国,田多粮多,鼠多猫亦多。农人养猫,为的是灭鼠护粮。所以,黄猫也罢,黑猫也罢,只要能捉住老鼠,就是好猫。)

 

(중략)...1976년 전후, 마오저둥은 덩샤오핑을 점찍어 비평했다. "그 녀석은 계급투쟁을 염두에 두질 않는 놈이야. 강령을 얘기하는 법이 없다니깐. 뭐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이러잖아, 제국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 상관 없다는 거지." 흑묘백묘론은 이를 계기로 이름 지어졌다.

 

80년대 초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대답했다. "첫째, 이제 와서 그 말을 거둬들이진 않겠어. 둘째, 난 그때 당시의 상황을 지적해 말한 거야."

 

1985년, 덩샤오핑은 미국 <타임>지 그 해의 인물로 뽑혔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란 말도 <타임>지에 실렸다. 이로써 고양이론의 영향은 세계에 확대됐다.

 

 

필자의 기억으론 교과서에서 이 말을 배웠고, 지금도 교과서에 있는진 모르지만 요즘 학생들도 흑묘백묘론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본다.

 

덩샤오핑의 업적, 그리고 과오까지도 어쩌면 이 흑묘백묘론으로 모두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시장경제의 도입도, 민주화를 외면한 것도 그는 모두 중국을 위해서 그랬다고 항변할 것이다.

 

덕분에 중국은 잘 살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또한 덕분에 중국에는 도태된 사람들도 많다. 오늘날 마오저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많은 이유가 그래서다. 특히 노인들이 그렇다. 사회주의 국가를 세워보겠다고 젊음을 바쳤던 사람들은, 잽싸게 자본주의로 전향한 반동분자들이 오늘날 잘 먹고 살며 으시대는 꼴을 봐야 했다. 근본 사회주의자였던 마오저둥 시절에는 다 쏴죽일 놈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국가가 그걸 독려하기까지 한다. 중국의 도농 격차는 갈수록 심해지고만 있으니, 나이든 농민들이 마오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덩샤오핑이 흑묘백묘론을 당시의 상황에 한정지은 이유도 그런 분위기를 포착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세월이 흘러, 덩샤오핑은 갔고 그의 심정을 가장 잘 알았을 줘린도 죽었다. 남은 것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뿐.

 

중국은 자신들이 원하던 쥐를 잡았을까? 아마도 그 쥐는, 예전 덩샤오핑이 생각하던 그 쥐는 아닐 것이다. 시대의 목표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지금, 현재, 이곳에서 잡아야 할 쥐는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역시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은 교과서에서 가르칠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아홉친구(ninthpal@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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