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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금 추천0 비추천0

 

 

 

 

[역사] 역사는 오늘을 보는 거울이다.

 

2009.10.16.금요일
역사전달자

 

역사는 오늘을 보는 거울이다. 어제의 모습이 모여 오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오늘을 보는 거울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대하거나, 혹은 그때 그 사람이 다른 판단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식의 사고에 머물곤 한다.

 

그래서 이번 연재부터는 20세기의 역사를 통해 오늘의 시사점을 살펴볼까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직면한 모습은 바로 20세기의 격동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지난 20세기를 살펴보면, 오늘의 우리 모습이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매년 마다 있었던 일들을 다룰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몇 년 단위로 묶어서 연재할 계획이다. 어떤 형식으로 쓰던, 그저 영상실록처럼 한 해 한 해의 사건들을 장황하게 나열하는 데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20세기는 엄밀하게 따지면 1901년부터 시작이지만, 그냥 1900년부터 다루도록 하겠다. 그 전에, 우리는 어떻게 20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0세기를 맞이하기까지.

 

개항 이후 국제질서에 편입되면서, 내부적으로는 위정척사 세력과 개화 세력, 민중들이 서로 대립하였고,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를 향한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만 했다.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후 강력한 개화정책을 펴기 위한 갑신정변도 있었고, 개화정책을 되돌리기 위한 임오군란도 있었고, 동학농민항쟁과 같은 민중들의 거대한 저항도 있었다.

 

이것들이 되풀이되면서 조선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수많은 움직임들의 명암이 엇갈린 것은 1894년~1895년이다. 민중들은 동학농민항쟁(갑오농민전쟁)으로 봉건체제와 외세세력을 물리치려 하였다. 한편 일본은 경복궁 쿠데타로 정권을 강탈하고, 개화 세력들을 지원하여 정권을 넘겼다. 또한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학농민항쟁을 진압함으로써 명실공히 1894년의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1895년에 들어서자 러시아·독일·프랑스는 일본을 견제하였고, 일본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개화파 정권의 개혁정책은 나날이 약해졌으며, 민중의 동의도 얻지 못했다. 이 틈을 타서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하였고, 당황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위정척사 세력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명분으로 일부의 민중과 함께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불안을 느낀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였고, 갑오개혁을 이끈 개화파 정권을 붕괴시켰다. 다시금 역사는 격동하기 시작했다. 친러세력이 권력을 잡았으며, 개화세력은 일단 한발 물러나 독립협회에 기반을 두고 움직였다. 그리고 이들이 일부 민중과 연결되고 확대되어 만민공동회가 열리면서 민권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897년 고종 황제가 환궁하자, 일본과 러시아는 서로를 노려보면서 한반도에는 불안한 평화 가 찾아왔다.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 틈을 타 고종은 스스로 황제가 되고, 대한제국을 세움으로써 운신의 폭을 마련하였다. 고종 황제가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고종 황제는 광무개혁을 통해 서양의 수많은 문물을 빠르게 수입해 나갔다. 서양의 문물을 빨리 수입해야 빨리 근대화를 이룰 수 있으며, 자주 독립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한편으로는 민권운동을 진압하면서 강력한 황제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만민공동회의 헌의 6조는 입헌군주정을 모태로 하고 있지만, 공화정을 꿈꾼다. 는 모함 한마디에 고종 황제는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작살 내 버린다. 고종 황제는 어영부영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근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위와 권력이 필요했다. 그는 이런 비상시국에 권력을 나누고, 이것저것 토의하고 의논할 여유가 없었다.

 

고종 황제의 전제권력으로 상처를 입은 개화세력들은 일본에 더욱 의존하면서 계몽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민권운동이 실패한 민중들은 끊임없이 저항을 다시 시작하였다.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 진출을 위해서 온갖 머리를 쓰고 있었고, 평화를 담보하는 대가로 열강들은 수많은 이권을 챙기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20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종 황제의 1900년

 

고종 황제는 황제 즉위 이후 내각을 약화 시키고, 전제권력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근대 문물을 대규모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근대 문물 수입을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황실기구인 궁내부에서 국가재정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재정권을 확보한 고종 황제는 비싼 비용을 치르면서 서양으로부터 문물을 수입하였다. 이것이 본격화 되는 것이 1899년부터이고, 1900년에는 더욱 확대된다.

 

1900년 4월에 고종 황제는 미국 전기회사의 도움을 받아 종로에 전등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미 1887년부터 궁궐 내에서는 전등을 설치하였는데, 문제가 많았다. 자주 꺼지는 것은 예사였으며, 발전기를 돌리는 열 때문에 궁궐 연못의 물고기가 몰살하는 등 문제가 많았지만, 종로 시가지까지 전등을 확대 설치했다. 고종 황제는 전등빛이 흐르는 한성 시내가 바로 근대국가 대한제국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7월에는 한강철교를 준공하고, 서울과 인천 간 전화선을 개설했다. 9월에는 광무학교라는 근대교육기관을 설립한다. 9월에는 궁내부 산하에 서북철도국이라는 것을 설치하여, 경의선과 경원선의 부설을 직접 관리하게 하였고, 덕수궁 석조전도 지었다.

 

 

이렇게 근대 문물을 수용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사력 강화와 황제권 강화에도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6월에는 육군 헌병을 설치하고, 7월에는 지방군대를 ‘진위대’로 통일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지방군대의 총 병력은 얼마였을까? 6개 연대가 되었다고 한다. 9월에는 육군법원을 설치하고, 참형제를 부활시켰다. 다시 목을 베는 중세적 형벌을 도입했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에 맞서는 이들을 강력하게 처벌하고 싶었다는 고종 황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측면이다. 육군법원을 설치하고, 11월에는 시위기병대 설치하고, 12월. 포병, 공병, 치중병, 군악대 등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고종 황제에게 1900년은 매우 바쁜 한 해였다. 1863년에 즉위한 이래, 이런 저런 세력아래 치여 살았던 고종 황제에게는 매우 뿌듯한 한 해였을 것이다. 문제는 황제권이 아니라 재정이었다. 이런 것들을 할 돈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대략 3가지 정도의 방법으로 고종 황제는 돈을 융통했다. 하나는 백동화 무작위 발행이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짓기 위해서 당백전을 마구 찍어내었듯이 백동화를 마구 발행하여 재정수입을 늘렸다. 물론 이것의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갔고, 또한 훗날 제일은행권 등 일본의 화폐가 진출하자, 순식간에 그 가치를 잃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각종 이권들을 팔아넘겨서 돈을 마련한 것이다. 대개 광산이나 철도부설권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원래 이권양도 불가라고 못 박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종 황제는 황실을 움직여(대개 광산은 황실 소유. 황제권이 강해지자 자연히 황실의 힘도 강해졌다.) 강제로 이권을 양도하였다. 서구열강은 말 그대로 ‘노다지’를 건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지아문을 설치(1898년)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아닌 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이었다. 토지를 제대로 측량하고 토지를 개간하여 국가 재정 수입을 늘리려는 시도였다. 이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고, 이후 1902년 다시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토지매매를 근대적으로 바꾸고, 토지소유권 관리를 발전시켰다. 물론 이는 국가재정을 늘리려는 시도였지만 누군가 주장하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최초로 한반도에 근대적 토지체제를 확보했다’는 개소리에는 맞설 수 있는 근거라 하겠다.

 

그 해, 대한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고종 황제는 처음으로 군주를 해 보는 맛을 느꼈을 것 같다. 고종 황제는 1900년에 많은 외연적 업적을 이뤘으며, 이를 통해 근대국가 대한제국을 꿈꿨다. 그리고 근대국가가 되면, 대한제국은 서구열강과 비슷한 반열에 오르는 것이고, 그러면 자주독립은 어느 정도 담보될 것이라 생각했다.

 

 민중의 움직임

 

시대가 잠시 평화로워졌으니, 민중들은 가만히 있었을까? 보통 1894년 동학농민항쟁 이후 민중들의 움직임은 잘 모른다. 그리고 시간을 건너뛰어 민중들의 항쟁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1907년 의병전쟁부터이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민중들은 동학농민항쟁이후 새로운 세상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꾸준히 민중항쟁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900년 직전 민중들의 항쟁은 2가지가 있다.

 

 

첫 번째, 방성칠의 난(제주민란)이 있다. 이 항쟁은 제주도에서 이미 1898년부터 이어져 오던 것이다. 그러나 1900년에 들어서면서 이 항쟁은 진압되었다.
두 번째, 영학당 봉기가 있다. 영학당은 동학 남접으로, 1898년부터 흥덕민란, 1899년의 전주 농민봉기, 1899년 5월 전주·고부·흥덕·태인·정읍·무장 등지에서 동시적으로 봉기를 일으켰고, 마지막으로 1899년 5월에 다시금 흥덕에서 농민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 당했다.

 

앞선 봉기들은 모두 실패했지만, 이 봉기로 인해서 민중들은 결집하게 되었고, 그 결과 중요한 조직을 하나 만들게 되었다. 바로 활빈당이다. 어라? 여기서 활빈당이 왜 나오지? 홍길동전인가? 의아하게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활빈당은 실존했던 조직이고, 비슷한 조직들이 이어져 내려오다가 이 시기에 여러 민중 저항세력들을 흡수하여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들은 경기, 충청, 경상, 전라도 지역 곳곳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였다. 이들은 보통 10명~50명의 중소규모로 움직였으며, 철저히 보안을 지켰다. 이들은 양반부호들을 털어서 백성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민중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런 활빈당의 활동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봤자 도적놈들 아니냐? 농민 항쟁 하다가 실패하고, 생활터전을 다 잃었으니 도적질로 빠진 것 아니냐? 하지만 아래 내용을 보면 막연한 도적집단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아래는 활빈당이 발표한 대한사민논설이라는 사설이다. 대한제국에 시급히 개혁해야 할 것 13가지를 사설로 발표한 것이다.

 

 




 
 

1. 요순(堯舜)의 법을 행할 것. 맹자가 말하기를 "임금이 임금다우려면 임금의 도를 다하고 신하가 신하다우려면 신하의 도를 다하는 것이 군신의 대법(大法)이다. 요순공맹(堯舜孔孟)의 효제안민(孝悌安民)의 법을 행하는 것이 천하 만국에 송덕을 받는 까닭이므로 대법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간할 것.

 

2. 복식(服飾)은 선왕의 복제를 본받을 것. 의제와 예절이 번잡하면 어지러워지는 까닭에 어지럽지 않고 사치스럽지 않은 선왕의 의제를 사용할 것.

 

3. 개화법을 행할 때는 흥국안민(興國安民)의 법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음에도 흥국안민이 되지 못하고 뜻밖에 황궁의 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당하고 천황폐하와 황태자가 독차(毒茶)사건(누군가가 고종 황제와 황태자가 마시는 차에 독을 탄 사건. 일본이 범인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사건으로 뒷날 순종 황제가 되는 황태자의 뇌에 타격이 가해져서 순종 황제가 유약한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순종 황제가 유약한 황제인 것은 당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을 당한 후 충신의사가 죽고 백성이 죽는 흉변이 계속 일어나 국가의 위기가 날로 더해가니 무엇이 유익하다 할 것인가. 국민이 기한(飢寒)으로 죽어도 돌아보지 않고 성왕의 예법을 밝히지 않고 기강이 퇴폐하였다. 이 때문에 민간이 화목하고 상하가 원망 없는 정법(바른 법)을 행할 것을 간언하는 것이다.

 

4. 어진 황제가 위에 계시고 효제안민의 조칙이 지엄해도 혜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한다. 백성이 기한을 이기지 못하여 죄에 빠지지 않도록 대신들이 군은을 깊이 살펴 백성이 호소하는 글월을 폐하께 받들어 올려 일국의 흥인(興仁)을 꾀할 것.

 

5. 근래 다른 나라로 곡류를 수출하는 것이 매우 많다. 이 때문에 곡가가 올라가서 가난한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시급히 방곡을 실시하여 구민법(救民法)을 채용토록 할 것.

 

6. 시장에 외국 상인이 나오는 것을 엄금시킬 것. 근래 개항장 이외의 곳에 외국 상인의 출입이 심하여 도성의 시민들과 향읍의 시민들이 모두 곤궁하게 되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외국상인을 엄금하고 구민법을 제정하여 외국상인과 외국인이 시장에서 곡류를 매입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면 외국인 스스로가 미곡 매입을 그만두게 할 방도가 없어서, 나라의 대리(大利. 국익)와 인민의 영리를 외국 상인에게 넘기게 될 형편이다. 따라서 신법을 제정하여 외국인이 시장에서 곡물매매를 금지시켜 흥국을 도모할 것.

 

7. 행상에게 징세하는 폐단이 심하여 시골의 영세상인이 각처의 시장 또는 연안포구에서 이익을 영위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폐단을 고치고, 민간에서 징세한 것을 모두 반환하고, 즉시 팔도에 현재 있는 방임(시골 관아의 관리들의 업무)을 파하여 폐해를 제거할 것.

 

8.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수십 년 가전되어온 전답 수만 섬지기가 금광용지로 쓰여져 영원히 황폐화되어 백성의 피해가 천만 금이 되었다. 또한 국가의 손해가 산과 들이 황폐화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따라서 금지시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을 도모할 것.

 

9. 사전(私田)을 혁파할 것. 이제삼황(二帝三皇. 중국의 삼황오제를 말한다.)은 세금을 적게 거두고 항상 백성의 춥고 굶주림을 밤낮 걱정하였는데 지금의 소작료는 세금보다 10배나 무겁다. 백성이 춥고 굶주리는데도 정부의 민정을 보살피는 것이 이와 같으니 무엇으로 백성의 기한을 면하게 할 것인가. 왕토가 사전으로 되어 백성이 굶어죽게 되는 것은 목민(백성을 다스리는)의 공법이 아니므로 사전을 혁파하고 균전으로 하는 목민법을 채용 할 것.

 

10. 풍년에는 백미 1두를 상평통보전 30문으로, 평년에는 백미 1두를 40문으로, 흉년에는 1두를 50문으로 법을 일정하게 하라. 세상 인심과 물정을 살피건대 곡가가 오를 때는 즉시 모든 물가가 올라 인심이 흉흉해지고 인륜기강이 무너지며 곡물이 서울과 지방에 산같이 쌓여 있으나 가난한 사람은 오히려 그림의 떡과 같아 굶어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 곡가가 저렴하면 인심이 풍요롭고, 만물이 저렴해져 친척, 친구의 우애로운 정리가 풍비하여 가난한 자가 굶어죽기를 면하게 된다. 따라서 만민의 희망을 받아들여 일정하게 곡가를 낮추게 하는 법을 만들어 구민책을 쓸 것.

 

11. 악형의 여러 법을 혁파할 것. 맹자가 말하기를 "좌우가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해도 듣지 말고 여러 대부가 죽여야 한다고 해도 듣지 말라. 나라사람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한 후에 죽여야 할 것인지를 살펴 죽이는 까닭에 나라사람이 그를 죽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후에야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다."지금 경향의 감옥에서 무고한 수만 명이 죽어가고 있고 윤리와 기강이 밝지 못하여 도적이 점차 들끓는다. 이 때문에 옛날 계강자가 도적을 염려하여 공자에게 물었다. 답하기를 "만일 그대가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상을 준다 해도 훔치지 않을 것이다. 백천 가지 선정을 행해도 세렴과 형벌을 엄하게 하면 백성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선왕의 대법에 따라 형벌을 감하고 세렴을 가볍게 하여 어진 정치를 행할 것.

 

12. 도우(屠牛. 함부로 가축을 도축하는 일.)를 엄금할 것. 근래 우역(소의 전염병)으로 죽는 것이 많다. 팔도의 영읍 및 시장 여염동리에서 도살하는 것이 날로 많아진다. 때문에 종래 농우 수십 두를 길러온 동리에서 최근에는 겨우 5~6두를 키우는 데 불과하다. 이 때문에 농업을 그만두는 자가 많다. 즉시 궁궐에 바치는 것을 제외한 이외에는 일체 도우를 엄금하여 농업을 그만두는 폐를 없앨 것.

 

13. 우리나라의 철도 부설권을 다른 나라에 주었다고 하는데, 4천여 년 내려온 국가가 다른 나라에 허락된다면 만약 각국이 국토를 강하게 요구할 때에는 이를 양도해야 할 것인가? 도로는 인체의 혈맥과 같고 혈맥 없이는 삶을 바랄 수 없게 된다. 국내 철도 시설용지로 인하여 만 백성의 살 길과 수확하는 논밭 수만 두락에 손상을 가져온다면 국가의 피해가 이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철도 부설권을 허락하지 말 것.

 

 

 

 

활빈당의 사설은 매우 구체적이고, 당시 민중들의 염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아직까지 당시 민중들은 민주공화정이나 정치개혁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임금이 존재하고, 임금이 어질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물론 당시 여러 논설이나 사설을 보면 항상 황제에 대한 극진한 존칭을 쓰고 있다. 개화파들도 다를 바 없었다. 모두 황제를 존중하는 모습이다.)

 

 

이런 인식의 저변에는 위정척사세력들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았다. 1조~3조까지를 살펴보면 위정척사세력의 유교적 관념들이 그대로 나타난다. 당시 위정척사세력과 개화 세력 가운데, 그나마 민중과 친분이 있는 세력은 위정척사세력이었다. 두 세력이 결집한 것이 의병전쟁이다. 두 세력은 서구 열강과 개화 세력이라는 공통의 적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정척사세력은 자신들의 경제적 권리(지주)를 유지하려 하였고, 민중들은 분배를 요구하고 있었다. 두 세력은 이렇게 연대와 대립이라는 이중구조에 놓여 있었다.

 

 

민중들이 가장 관심을 둔 것은 경제개혁이다. 앞에 1~3조는 원론적인 언급이고 4조 이후부터는 매우 구체적으로 근거를 들어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방향은 민중들에게 경제적 분배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고종 황제의 서구문물 도입으로 인해서 갖은 세금이 매겼으며, 세금에 대한 불만이 강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관심을 둔 것은 외세 배척이다. 그러나 이것도 원론적인 접근이 아니라, 다분히 경제적인 접근이다. 외국상인을 막고, 쌀의 해외 수출을 막아야 하며, 철도를 비롯한 각종 이권을 외국에 넘기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당대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피부로 느끼는 외국의 침략이었다.

 

 

당시 한반도에는 일단 외국군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겉으로는 정치적으로 외국이 개입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외세 배척에 있어서 정치적인 요구보다는 경제적 요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렇게 민중들 역시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향해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이 활빈당은 1905년까지 활동을 지속하다, 일본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조직이 와해되었으나, 상당수가 의병전쟁으로 합류하였다.

 

 

 시사점과 1900년 정리

 

 

1900년의 모습을 보면서 현재의 모습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쉽지 않다. 1930년대가 지나면 그 시대와 현재가 직결되는 것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도 이 시기를 보면서 느낀 가장 큰 것은 바로 집권자의 의식이다. 고종 황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서구 문문을 대량으로 들어오고, 서구를 따라하면 어찌저찌해서 근대화가 될 것이라 믿었다. 이를 위해서 강력한 황제권을 구축하였고, 재정을 강화하였다.

 

 

문제는 고종 황제의 의식이 단지 서구 문물만 들여오면→근대화라는 공식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근대화는 그저 문물을 들여온다고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민권운동으로 정치사회개혁과 제도적 개혁이 함께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종 황제는 황제권을 위협하는 민권운동을 탄압하고 근대적 의식을 지닌 세력을 멀리하였다.

 

 

제도와 행정은 오히려 후퇴하여 황실을 관장하는 황제 직속의 궁내부가 사실상 전권을 장악하고, 궁내부 안에서 친위세력을 바탕으로 일을 추진하려 하였다. 일종의 밀실정치인 셈이다. 앞서 언급한 서북철도국 같은 것은 당연히 해당 부서의 하위기관으로 존립해야 함에도, 황실 기구인 궁내부의 하위기관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봐도 고종 황제의 일처리 방식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종 황제의 의식과 당시 활빈당이 느끼는 현실 간에는 얼마나 큰 괴리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고종 황제는 문물부터 무조건 들여오려고 하였고, 당대 민중들의 생활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꿈꾼 나라는 문물 도입을 통해 서구열강과 같은 강하고 휘황찬란한 나라이며, 민중들이 꿈꾸는 나라는 분배가 이뤄지고, 최소한 사람답게 살 만한 나라였다. 둘의 생각 차이는 이처럼 엄청나게 컸다. 고종 황제가 민중의 생각을 파악하고, 민중들의 결집과 지지를 얻었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고종 황제의 의식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업적주의에 빠져, 돈을 퍼부어서 그저 행사 하나 유치하거나, 시설 하나 들어서면 문화도시, 생태도시, 첨단도시 라는 휘황찬란한 호칭을 붙이는 단체장들이 매우 많다. 그들은 고종 황제처럼 근대문물만 들여오면 우리는 근대국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이나 인식에는 관심이 없다가, 갑자기 문화시설이 덜렁 들어온다고 그 도시가 갑자기 문화도시가 되지는 않는다. 인식이나 체계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유치된 문화행사장은 행사가 끝난 이후에는 황폐해질 것이며, 문화시설은 초기 몇 번의 사용 이후 처분을 놓고 고심해야 할 것이다. 하긴 대통령부터 분배시스템 개혁 없이도, 무턱대고 강 파내면 뉴딜정책이고, 그러면 나라 경제가 살 것이라고 자기 최면에 빠져 있으니 뭘 더 말하랴?

 

 

 다른 나라의 1900년

 

 

그럼 이 시기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이 부분은 그저 상식적인 내용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먼저 청나라. 청나라는 의화단 운동으로 식겁하고 있는 중이다. 의화단이 수도 북경으로 입성하였고, 서태후는 의화단 세력을 바탕으로 제국주의 세력을 견제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8개국으로 이뤄진 제국주의 연합군은 청나라 수도 북경을 짓밟고, 의화단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연합군은 의화단 잔당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북경과 주변 지역을 샅샅이 돌면서 방화, 살인, 학살, 약탈을 마구 저질렀다. 이는 1894년, 동학농민항쟁을 진압한 일본이 전라도 지역에서 일으킨 학살과 1908년 이후 의병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이 일으킨 ‘남한 대토벌 작전’과 유사한 모습이었다.

 

 

일본에서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가 결성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위해서 만들어진 입헌정우회는 재벌들과 지주 등의 지지를 받은 보수적 세력이었다. 이들은 보수적 자유주의 계열로 일본 내정에 의회의 영향력이 커져야 한다는 의회주의적인 모습을 이 당시에는 드러내었다. 이들은 1930년대까지 권력을 잡고 있었으나, 일본이 파시즘의 길로 가면서 군부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 입헌정우회는 자유당이라는 당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 자유당은 올해 실각한 자민당의 한 축이었다.

 

 

영국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대표와 진보적 세력이 결집한 노동대표위원회가 설립된다. 이 노동대표위원회가 훗날 노동당이 된다. 몇 년 후에 프랑스에서도 사회당이 나타나게 되는데, 역시 영국과 마찬가지로 범 진보적 세력들이 결집된 형태로 나타난다. 20세기 초반에는 이런 진보세력들의 결집이 자주 나타나게 된다.

 

 

 예고

 

 

대한제국의 1900년~1903년의 역사를 정리하자면 딱 한 문구로 할 수 있다. 

 

 

"불안한 평화"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도, 그리고 당대의 사람들도 이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평화가 깨진다고 하더라도 설마 우리가 식민지가 되겠어? 라는 생각들이 많았다. 고종 황제가 구축한 권력이 무너지거나, 열강 간의 세력균형이 한쪽으로 살짝 기우는 순간부터 이 평화는 깨어지게 되어 있다. 고종 황제는 조금만 더 평화가 지속되길 수천 번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편에 다룰 1901년~1902년부터 이미 평화에는 금이 가고 있었다.

 

 

 

 

 

임종금(lim149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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