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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룡 추천0 비추천0

 

 

 

 

[생활] 착하다는 칭찬은 독약이다.

 

2009.10.19.월요일
김지룡

 

우리는 아이들에게 착하다는 칭찬을 많이 한다. 특히 아빠들이 착하다는 칭찬을 많이 한다. 엄마에 비해 사용하는 어휘가 적고, 착하다가 제일 만만하고 많이 쓰는 칭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착하다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칭찬은 귀로 먹는 보약"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착하다는 보약이 아니라 독약 같다. 내가 그 피해자이기 때문에 그 폐해를 잘 알고 있다.

 

 

회사에서 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거나, 프레젠테이션에 필요한 자료를 잘 만들었다고 하자. 그런데 상사가 부르더니 이렇게 말한다.
"김 과장, 참 착하네."
도대체 무슨 느낌이 들 것인가.

 

착하다는 서로에게 동등한 인격을 인정하는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는 말이 아니다.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존재를 칭찬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애완견이나 고양이에게 해주는 칭찬이다. 아이에게 착하다는 칭찬을 하는 것은 무의식중에 아이를 열등한 존재, 불완전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착하다는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가 우월한 존재인 자신을 편안하게 해준 것에 대한 보상의 말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악질적이다.

 

언제 착하다는 말을 사용하는지 생각해 보자. 대개 아이가 어른을 편안하게 해 줄 때 사용한다. 유치원에서 착하다는 칭찬을 받는 아이는 조용히 구석에서 얌전히 놀아서 유치원 교사의 손이 별로 가지 않는 아이다. 학교에서 착하다는 칭찬을 받는 아이는 어떤 경우든 교사의 말에 순종하는 아이다. 활기차게 뛰어 노는 유치원생이나, 자신의 요구를 당당히 말하는 초등학생에게는 절대로 착하다는 칭찬은 하지 않는다.

 

"울지 마, 착하지." 이런 말은 아이의 감정을 무시하는 말이다. 슬플 때는 울음이 나오기 마련이다. 울고 싶은 만큼 울어야 감정이 풀린다. 하지만 아이가 울면 어른이 귀찮다. 어르고 달래주어야 한다. 이럴 때 "착하지, 뚝"이라는 말을 한다. 정말 그 말에 아이가 울음을 그친다면 그 아이는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듣는다.

 

두 아이가 장난감 하나를 가지고 막무가내로 서로 자기 것이라며 싸운다. 흔히 벌어지는 일인데, 이럴 때 아이의 싸움을 뜯어말리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도 이런 말을 한다. "착하지. 네가 양보 해." 혹은 "양보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야."

 

착하다"는 아이가 순종적일 때 해 주는 칭찬이고, 착한 아이는 어른이 다루기 쉬운 아이 어른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아이’를 말한다. 이것이 착하다는 말의 정체다.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란 아이는 어떻게 성장할까. 착한 아이는 대개 착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착한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항상 주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손해를 보고 참고 견디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편하다. 하지만 본인은 힘들어 죽는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친구를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것은 아름다운 우정의 토대다. 타인을 위해 힘든 일을 참고 견디면 보람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착하다는 것은 이와 다른 일이다.

 

착한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고 그에 따른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자기주장을 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싫어할 것 같으니까 억지로 참고, 하고 싶지 않지만 억지로 견디고, 집에 가서 혼자 이불 뒤집어쓰고 우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착하다는 말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착하다는 칭찬을 많이 들으면 착한 아이가 되고 착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바로 내가 그랬다.

 

어렸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칭찬이 바로 착하다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네 형제를 키웠다. 나는 효자 끼를 조금 타고난 것 같다. 매일 밤 어머니 다리를 한 시간씩 주무르고, 새벽에 어머니와 함께 우유배달 리어카를 끌었다. 주위의 친척이나 어른들은 내게 항상 착하다는 칭찬을 했다. 그러면서 무의식 속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강박관념처럼 자리잡았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이사를 하는데 이사짐을 날라주고, 몇 번 우연히 만난 사이인데도 리포트를 대신 써주고 대리 시험을 쳐주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무시했던 친척의 아이에게 공짜로 과외를 해주고, 누가 시키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데 옆 부서 사람들이 야근할 때 함께 남아 도와주었다. 그러면서 항상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고민하며 괴로워했다.

 

이십 대 중반 시절 이런 모든 일이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쁜 사람에 걸맞은 일은 모두 해보고 싶었다. 회사에서 촌지를 받아보고, 회사일로 대출을 해주면서 돈 꾸는 사람에게 거드름을 떨어보고 향락에 찌든 생활도 해 보았다.

 

 

스물여덟 살에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회사를 때려 치고 별 목표도 없이 일본으로 유학 갔다. 예전의 나를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모두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무의식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판 치면서 사는 데는 우리나라보다 일본이 훨씬 여건이 좋으니까.

 

교사의 말이나 학교 규칙에 사사건건 반대로 하는 것은 제대로 된 반항이 아니다. 그런 것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제대로 된 반항은 교사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의지나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일부러 나쁜 짓을 골라서 하는 것도 억지로 착하게 사는 것에 못지않게 바보 같은 일이었다. 그건 여전히 착한 사람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몇 년 간 바보짓을 한 뒤에야 비로소 착하다의 반대말은 나쁘다가 아니라 당당하다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것을 알고 난 뒤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도 아이들에게 착하다는 말을 백 번 정도는 한 것 같다. 말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기 때문에 가끔 나도 모르게 착하다는 말을 쓴다. 아이들이 착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나는 당당하게라는 즐겨 사용한다. 아이들이 서너 살이 되었을 때부터 놀이를 빙자해 발차기 훈련도 엄청나게 많이 시켰다. 우리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려면 싸움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하니까.

 

아이들이 착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곤란하다. 아이들이 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선한 사람은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다. 약자를 돕고 배려하고 관대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펼치는 당당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스스로 느끼게 해야 하는 일이다. 자선단체를 통해 매달 아프리카의 난민 소녀에게 일정액을 기부하고 있다.
딸아이는 묻는다.

 

"아빠, 이거 착한 일이야?"
"아니, 즐거운 일이야."
"나도 어른 되면 해야 돼?"
"즐거우면 하고 즐겁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아프리카의 아이와는 영어로 메일을 주고받는 일이 가능하다. 딸아이에게 "아빠는 영어가 딸리니까 네가 대신 메일 좀 주고받으면 안 될까?"라며 꼬드기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부모로서의 흑심에서 나온 일이다.

 

 

 

애 키우는 일에 미쳐서
문화평론에서 자녀교육으로 직업을 바꾼
김지룡(http://blog.naver.com/edu_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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