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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6.금요일


허남웅


 


 


 



 


‘그린존’(Green Zone). 2003년 미국이 이라크 바그다드를 함락한 후, 바그다드 궁전을 주이라크 미군 사령부와 이라크 임시정부청사로 개조한 안전지대를 뜻한다. 미국 침략 전 이곳은 사담 후세인의 고급 청사였던 만큼 전장의 한 가운데서도 그린존의 미국인들은 한가롭게 수영장에서의 일광욕과 칵테일파티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워싱턴 포스트의 현(現) 국내뉴스부 편집장이자 바그다드의 지국장이기도 했던 라지브 찬드라세카란이 저술한 <Imperial Life in the Emerald City>(국내에는 동명의 영화 제목으로 출간 예정)를 통해 알려졌다. 이 책이 의도한 바는 명확하다. 미국의 대(對)이라크 정치학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순수한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폴 그린그래스가 이를 놓칠 리 없다. 국가 권력의 횡포와 음모를 현장에 직접 입회한 것 같은 눈으로 주요하게 다뤄왔던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찬드라세카린의 책에서 설정만을 가져와 주요 인물을 새롭게 배치해 영화를 완성했다. 흔히 ‘본 시리즈’의 콤비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이 다시 한 번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그린존>을 일러 ‘제이슨 본의 바그다드 외전’이라고 얘기한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린존>을 온전히 소개하기에 이 비유에는 뭔가 결여된 측면이 존재한다. <그린존> 공개 후 예상 밖으로 극명히 갈리는 찬반 논란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폴 그린그래스의 필모그래프는 두 가지 형태로 뚜렷이 구분된다. <블러디 선데이>(2002) <플라이트93>(2006) 같은 다큐멘터리 느낌의 정치영화와 <본 슈프리머시>(2004) <본 얼티메이텀>(2007)과 같은 액션히어로물의 새 지평을 연 오락영화가 그것인데 <그린존>은 이 두 가지가 혼합된 작품이라 할만하다.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를 이유로 이라크 침략을 정당화하는 미국이 실상은 현실을 조작하기 위해 제도화된 폭력을 저지르는 한편에서 WMD의 존재를 의심하는 로이 밀러(맷 데이먼) 준위는 내부의 시스템을 향해 교란과 전복을 꾀하려 한다.


 



 


<그린존>에 대해 부정적인 이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듯 폴 그린그래스가 다루는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진실은 이제 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부시만 여전히 아니라고 ‘땡깡’ 부리려나) <블러디 선데이> <플라이트93>처럼 짐작만 했지 사실에 근거한 실체를 접했을 때 가해지는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린존>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뻔한 사실’만을 고발하기 위해 기획된 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랬다면 원작을 그대로 따르지 로이 밀러라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그린존>에 대해서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라기 보다 '로이 밀러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존>을 두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스릴러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방점은 스릴러다. 무엇에 대한 스릴러인가. 이라크 내 WMD가 존재하는 것처럼 꾸미려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통제 메커니즘에 대한 스릴러다. 이를 밝혀내기 위해 가장 적합한 인물은 바로 내부 고발자다.


 


냉전 시대가 막을 고한 뒤 할리우드가 적을 찾지 못해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 혼란에 휩싸인 슈퍼히어로물을 양산하고 있을 때 폴 그린그래스는 ‘제이슨 본’을 등장시켜 테러리즘 시대의 히어로(영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였더랬다. (그러고 보면 덕 리먼의 <본 아이덴티티>(2002)는 냉전시대와 테러리즘 사이에서 과도기적 증세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슈퍼히어로물이었던 셈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감시와 조작 등으로 전 세계에 군림하려는 미국의 ‘통치’ 목적의 메커니즘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돌려 할리우드에 내부 고발과 내부 전복의 이야기로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거대한 감시의 네트워크를 동원해 일개 개인을 넘어 국가 하나 정도 무력화시키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사실을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제이슨 본을 통해 알려줬다. 다만 그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본은 내부 고발자라는 자각이 없었다. (수전증에 걸린 듯 과도하게 흔들어대던 카메라는 본의 정체성 혼란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한 미학적 성취에 다름 아니다.) <본 얼티메이텀>의 마지막 장면, 물속에 빠져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는 장면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바그다드로 간 제이슨 본’ <그린존>의 로이 밀러는 군인정신이 뚜렷한 인물로 묘사된다. 상부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연달은 WMD 수색 실패에 의문을 갖게 된 그는 상부의 지시와 상관없이 어디서부터 문제가 잘못되었는지, WMD 수색 지시가 왜 이뤄졌는지 역으로 추적에 나선다. 이는 기본적으로 WMD가 애초 이라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전제한다. 극중 밀러의 행동 진행 방향은, 그러니까 전복적이다. 그가 찾아나서는 건 진실이 아니라 ‘미국이 어떻게 진실을 은폐했는가’이다.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은 뻔한 진실일지 모르지만 은폐에 대한 것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그 작동 원리에 대해 정확한 바를 모른다.


 


‘뻔하지 않은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밀러가 감수해야할 위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WMD가 이라크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밀러의 일거수일투족은 미국 감시 체계의 손바닥 안이다. 이런 감시와 조작의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 이는 굉장한 용기를, 무엇보다 목숨을 담보해야 한다. 제이슨 본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이를 밝혀내지만 로이 밀러는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으로 나라 잃을 위기에 처한 이라크 국민을 위해 내부 고발을 단행한다는 점에서 미묘한 태도의 차이를 보인다.


 


갈수록 미국의 감시 체계가 미국을 괴물로 만들고 전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서 진정 미국을,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하는 것은 무얼까. 로이 밀러처럼 미국의 치부를 드러낼 내부 고발자가 필요하다는 것, 그야말로 국가 권력의 횡포가 횡행하는 시대에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이 <그린존>의 진정한 주제다. 


 


밀러는 끝내 부시 정부가 원하던 시나리오와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영화는 미국 정부가 꼭두각시 인사를 이라크의 새 정부 지도자로 임명하고 자치정부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그 시간, 이라크 내 WMD에 대한 위험 여론 자체가 조작됐다는 사실을 주요 언론에 고발하는 밀러의 행동을 교차한다. 그리고 또 다른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전장에 뛰어드는 그의 결연한 얼굴을 카메라는 수 초간 응시한다.


 


존재하지 않는 WMD를 찾기 위해 동원된 이가 오히려 미국의 조작을 발견하자 허둥대는 부시 정부의 모습이 전달하는 바는 극명하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존의 ‘포화 속의 향락’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빗대 더욱 더 많은 내부 고발자가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그린존>이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뻔한 사실의 전달에만 그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