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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학교는 어땠습니까

 

얼마 전, 친한 대학 동기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사는 이야기를 하던 중, 학교폭력 이슈가 주안상에 올라왔습니다. 요리에 여념이 없던 제수씨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한 유명 연기자의 이름을 꺼냅니다. 지금까지 뉴스 기사에서는 들어 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갑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자신에게 침을 뱉은 일, 온갖 험한 욕설을 들으며 시달렸던 일, 그리고 그 사람은 모 지역에서 꽤나 유명했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음식에 소금 간을 하던 제수씨. 손에 힘이 들어가서인지 조금 짰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소주를 들이켜니 그만한 국물 안주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명인들이 학창 시절 저지른 학교폭력에 대한 폭로가 이어짐에 따라, 연일 학교폭력 예방교육 자료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교보재로 삼는 직업병을 가진 교사에게는 새삼 반가운 소식일 수는 있으나, 피해자가 지니고 살아야 했던 마음의 짐을 생각하면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언론이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 알려지는 학교폭력 미투는 피해자가 그간 숨기고 살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굳이 드러내기 싫었던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는 슬픈 용기가 담겨 있습니다. 나아가 유명인이라는 거대 권력에 맞서 싸우면서 겪게 될 좌절감에 대한 공포도 필연적으로 수반합니다.

 

학교는 행복한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어 주었던 배움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학교의 밝은 면을 내세우며 세상 좋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 한 사람의 잘못으로 규정하기에는 너무나도 조직적으로 개인의 희생과 침묵을 강요했던 그 옛날의 학교. 머나먼 기억 속, 당신의 학교는 어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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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

 

불신 시대

 

학교에서 근무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순히 무단횡단을 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말을 더 예쁘게 하는 것 같은 교사로서 품행을 단정히 하려는 것 만이 아닙니다. 내가 만나게 될 아이들은 커서 또 다른 학부모가 될 것이고, 아이들의 학부모는 모두 어릴 적에 학생이었기에, 나는 그들의 인생에서 ‘학교’라는 기억의 일부분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혼주의가 확산되고, 출산율이 바닥을 치는 사회라고 한들, 교사는 학생 그리고 학부모와 마주하게 됩니다. 연애와 결혼이 개인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교사는 아직 ‘미성숙’을 전제로 하는 학생들 앞에서 행복한 가정이 갖추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하더라도, 학부모가 겪어 온 지난날의 학교의 모습과 그들의 기억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교사가 이 존중의 끈을 놓는 순간, 학부모의 절규는 ‘악성 민원’이 되고, 학교에서 진행하는 모든 절차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죽은 행정’으로 남게 됩니다.

 

자녀가 학교폭력의 당사자가 되면, 학부모는 당연히 격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 보았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가 선명하지 않은 사건도 많습니다. 입에 담기도 힘든 폭력도 있지만, 아이들이 커 가며 겪을 수 있는 갈등으로 보기에 충분한 작은 사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학교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을까요? 수년 동안 학교에서 학교폭력 업무를 담당하며 지켜본 바에 따르면 가장 큰 원인은 ‘불신’에 있습니다. 이 불신의 양상도 여러 가지입니다. 세 가지로 구분을 지어 보았습니다.

 

먼저 공무원 조직에 대한 1차적인 불신이 있습니다. 항상 느리고, 비협조적이고, 일을 크게 만들기 싫어하고, 시간 되면 퇴근하기에 급급한 공무원들. 게다가 고용 위기의 시대에 잘리지도 않고 월급도 따박따박 나오니, 대중들은 이들의 결함을 두고 보지 않습니다.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학교폭력을 당하고 왔든 저지르고 왔든, 관련 학생 학부모는 매 분 매 초가 지옥인데, 학교에서는 그놈의 절차 운운하며 하세월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막론하고 학부모의 분노는 차곡차곡 쌓이고, 한계에 이르면 터지게 됩니다. 그래서 학부모는 계속 참느니 초장에 들이받아 버리자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둘째로 학교가 학교폭력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다는 불신이 있습니다. 학교폭력 피해를 호소해 봤자, 본인이 원하는 수위의 처벌은커녕 학폭위 이후 또다시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걱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교폭력 책임교사였던 때, 초대형 학폭 사건이 접수되어 일요일에까지 출근해서 사안 처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피해 학생 아버지께서 술에 잔뜩 취한 채 대뜸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학교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걸 본인도 잘 아니, 언론사에 제보를 해서 이슈화를 시키겠다고요.

 

‘이슈화.’

 

주말도 없이 출근하는 제 입장도 있어서 저 말을 듣고 문득 서러워졌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물론 기자가 학교에 들이닥치는 일은 없었지만, 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제 자신이 무척 초라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학부모님들이 과거에 다녔던 학교의 잔상으로 인한 불신이 있습니다. 존경받아 마땅한 스승님들도 계셨지만, 사랑의 매를 핑계로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때리던 무자비한 폭력배도 있었고, 촌지를 받아 챙기며 돈 봉투의 두께로 아이들을 차별하던 인간 말종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모습들이 거의 근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내 민주성과 청렴이 자리 잡아 있지만, 먼 옛날 그렇지 못했던 학교의 모습을 기억하는 학부모는 학교 구성원의 도덕성을 신뢰하지 않는 경우가 꽤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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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영화 친구>

 

특히 예전에는 아이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도, 심지어는 학생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학폭위와 같은 절차를 밟기는커녕 부모님끼리 알아서 중재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생님들이 오히려 우리 아이를 안 좋게 볼세라, 일을 어떻게든 덮기에 급급해서 학교는 개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당시 학부모들은 ‘저희 아이들 때문에 신경을 쓰게 해 드려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쏟아내며 얼른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었지요.

 

위의 이야기를 마냥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학교 내에서 동료 간 갈등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풀어내는 공정한 절차나 명확한 규칙 없이 그저 덮어두고 갔던 모습들은 학교에 대한 많은 이들의 불신을 키워내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다못해 패싸움 같은 큰 사건이 터졌을 때 학교는 그들을 일망타진하여 일벌백계하는, 그리고 각종 몽둥이로 진압하는 식의 체계 없는 대응밖에 하지 않았고(아니, 그렇게밖에 할 줄 몰랐고) 이런 무질서한 대처로 일관해 온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학교폭력이 양산되었으며 학교는 그것을 철저히 방관했습니다. 그 속에서 폭력의 피해자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긴 세월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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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영화 공공의적2>

 

나의 고백

 

만약 제가 교단에 서지 않았다면, 저는 교사 집단을 신뢰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초등학교 시절의 아픈 기억들을 남몰래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어머니 혼자 분투하시던 가난한 집 자식이 겪어야만 했던 설움은 담임선생의 손찌검과 폭언, 그리고 갖가지 차별 대우로 인해 흘렸던 눈물에 진하게 녹아 있습니다. 물론 교사의 꿈을 키우게 해 주신 스승님 덕분에 제가 지금 교직에 있지만, 저는 절대 저렇게 부패한 마음으로 살지 않겠다고 대학에서 교육학개론을 배우면서부터 다짐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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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사람과 조금 친해지게 되면 저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학창 시절에 어떤 학생이었는지를 물어보곤 합니다. 각양각색의 대답들 속에서, 모두 모종의 상처를 하나씩 품고 있었습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 왕따 피해 경험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담임을 저주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숨기고 살아가는 학창 시절의 상처가 있듯, 저들도 분명히 다양한 상처를 품고 살아갈 것입니다. 굳이 꺼내서 좋을 게 없고, 기분만 괜히 나빠지는 곳. 어쩔 수 없이 다녀야만 했던 학교인데, 그저 즐겁고 유쾌할 수는 없었을까요?

 

이러한 배경에서 저는, 자녀가 친구들과 겪는 사소한 갈등에도 학교에 분노를 표출하는 학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찾아서 제가 직접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사가 학생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듯이, 학부모의 쓰디쓴 절규 역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사를 ‘시대의 우울을 받아 내는 쓰레기통’이라고 하나 봅니다.

 

누가 지워 줬는지 모르는 무거운 사명을 안고, 오늘도 저는 긴장 속에 출근을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