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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한민족이 세운 국가들 중에서 군사적으로 유의미한 족적을 남긴 국가였다. 태생적인 한계. 그러니까 ‘체급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외적에 대한 방어책으로

 

“청야입보(淸野入保) 이일대로(以逸待勞)”

 

전략을 선택했다. 

 

즉, 전쟁이 터지면 전략물자를 다 산성으로 들고 가거나 다 없애버리는 초토화작전(焦土化戰術)을 기본 전략으로 삼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덮어놓고 방어만 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농성전은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아군을 응원해 줄 병력이 있는 경우”

 

에 승산이 있는 거다(적어도 농성의 이유는 성립이 된다는 거다. 외부에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농성은 그 자체로 실패한 농성이며, 최후의 발악같은 항전일 뿐이다). 적에게는 끊임없이 후방에 대한 경계를 품어야 하고, 시간에 쫓기게 해해야한다. 즉, 후방에 빠진 병력만큼은 공성전에 투입할 수 없게 된다. 아울러 응원군이 올 수 있다는 전제 때문에 시간에 쫓기게 만드는 거다. 

 

지원군1.PNG

 

즉, 농성의 핵심은 외부에서의 지원군. 바로 ‘전략기동군’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성립이 된다는 거다. 

 

고구려의 일자방어선의 성들은 저마다 상호유기적으로 지원을 해줬고, 고구려 중앙에서도 지원병력을 보냈다. 여기서 중요한 게 고구려의 개마무사(鎧馬武士)들이다. 이들은 철갑기병(鐵甲騎兵)으로 고구려의 전략부대였다. 이들은 개활지에서의 전면전이 가능했다. 즉, 대규모 회전에서 중핵이 돼 움직이던 부대였다. 

 

고구려는 ‘기병’이 있었다. 이들은 언제나 농성병력을 지원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원병력 때문에 공격하는 쪽에서는 언제나 뒤통수를 걱정해야 했다. 

 

즉, 농성(籠城)에 특화된 전략을 가지게 됐다는 거다. 

 

여기서 고민해 봐야 하는 게 성을 공격하는 방식이다. 성을 공격하는 수많은 방식이 있지만, 크게 3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성문을 깨고 들어가거나 

둘째, 성벽을 타고 넘어가고 

셋째, 성 아래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방식이다.

 

공성전에 대한 여러 가지 공략법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3가지의 변형이다.

 

이 공략법을 펼치기 위한 행위는 

 

①성벽을 뚫기 위해 충차(衝車 : 성문을 공격하던 공성병기)로 대변되는 공성병기를 사용하든가, 

②성벽을 넘기 위해 운제(雲梯 : 구름사다리)로 대표되는 성벽을 넘는 사다리를 걸치든가, 

③땅굴을 파는 혈공(穴攻)이다. 

 

산성의 경우는 성벽을 뚫고 넘어가는 것과 땅굴을 파는 게 기본적으로 제한된다(산악지형을 극복하는 것도 여의치 않고, 화강암을 파고 들어가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사다리.PNG

 

이렇게 되다보니 활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거다. 당장 성안에서 농성을 할 때 가장 많이 필요한 게 활과 화살이다. 이러다 보니 고구려 시절부터 활에 대해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 거다. 

 

결정적으로 가성비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게 기병 같은 경우는 말을 키우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말 한 마리가 하루에 먹는 양이 콩 15킬로그램에 달한다. 여기에 말에 올라타기 위해 필요한 각종 마구들, 기병들의 무장과 훈련비용 등등을 생각하면 기병을 함부로 늘리는 건 보통 각오가 아니면 안 된다. 물론 전장에서의 그 효용성은 보병의 그것을 압도한다. 문제는 역시나 돈이었다. 

 

그런 의미로 농성을 배경으로 한 궁병의 양성은 가성비 면에서는 탁월한 선택이다. 전략적으로 ‘청야입보’를 선택한 상황에서 궁병의 양성과 활의 개발에 박차를 가한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문제는 고구려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다음이다. 

 

 

고구려 이후에도 궁병 양성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고구려의 패망 이후에 한민족은 기병을 양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바로 말의 부족이다. 우선 요동에서 말을 구하는 게 어려워졌다. 고구려 시절의 개마무사가 활약했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가 되면 기병을 위한 말을 구하는 것 조차 어렵게 됐다. 

 

우선 말 품종부터 생각해 봐야 하는 게 한반도의 토종 말은 과하마(果下馬)라고 해서 과일나무 아래를 갈 수 있을 정도로 체구가 작은 말이었다. 체구가 작다고 그 힘도 별볼일 없는 건 아니다. 이들은 끈기 있고, 힘도 쎘다. 다리가 짧아 산길도 잘 탔다. 그러나 고구려 개마무사가 타던 군마와는 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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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하마 / 故 김홍인 선생 사진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몽골의 영향으로 좋은 말을 생산했고, 제주도에서 말을 사육하며 나름 군마의 혈통을 유지했으나, 조선시대가 되면 이 모든 게 무너지게 된다. 

 

조선시대 한참 말을 사육했을 당시 전국에 100여개 정도의 목장을 설치해 4만 마리 가까이 말을 사육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최고치를 찍었을 때의 기록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조선 전기까지 조선군의 주력 병종은 기병이었다. 특히나 궁기병의 활약을 주목해 봐야 한다. 문제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말을 구하기가 힘들어졌다는 거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이 군마의 품종 관리였다. 군마로 활용하는 말들은 대부분 과하마가 아니라 체구가 큰 말들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만주에서 수입된 말들이다. 

 

문제는 이렇게 수입된 말들의 품종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이뤄지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조선이 농업국가였다는 점이다. 농본정책에 따라 민간시장에 대한 통제가 들어가게 됐고, 상업이나 공업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말의 수요가 크게 없었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게 고려시대에는 분명 수레가 움직이던 도로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사람이 겨우 지나가게 되는 정도가 됐다. 사람이 짐을 싣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보부상이 유통의 핵심이 됐다는 거다. 말의 수요가 점점 사라진 거다. 덩달아서 가격도 계속 올라갔다. 

 

군마로 사용할 만한 말 한필의 가격이 쌀 30가마 정도의 가격이 매겨졌다. 이 정도면 남자 노비 6~7명의 가격이었다. 

 

군마 1필만 있다고 기병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이 군마를 먹이고, 장비를 실어나를 수송용 말도 최소한 군마 1필당 1~2필은 필요하다. 이 말들을 관리할 병력들을 생각하면 기병은 움직이는 돈 덩어리다. 문제는 이렇게 돈 덩어리라도 계속해서 키워야 하는 게 기병이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점점 기병을 키우는 게 힘들어졌다. 말이 점점 줄어든 거였다. 

 

품종관리의 실패, 중국 측의 말 요청, 민간시장의 부재, 농본국가의 한계 등등 수많은 문제점들이 결합된 결과 조선 후기가 되면 조선의 말 사정은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한때 4만 마리까지 있었던 말의 숫자가 5천 두 이하로 줄어들게 됐다. 

 

(조선시대 부족한 기병의 숫자를 채워준 건 화약무기였다. 임진왜란 직전에 있었던 니탕개의 난에서 2만 이상의 여진족 기병들을 불과 수백의 병사만 있었던 경원진이나 종성진에서 막아설 수 있었던 건 화약무기의 힘이었다. 이때까지 여진족들에겐 화약무기가 없었기에 조선군은 적극적으로 화약무기로 대응했다. 화약무기를 가지고 고수방어를 하며 버티면 신립의 기병들이 달려오는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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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내 총통.jpg

진주성 내 전시 중인 총통들.

 

고구려 시절에는 청야입보로 성을 걸어 잠그고 화살을 날리며 버티면, 전략 예비군인 기병들이 짓쳐들어와 적군의 후방을 내리쳤지만, 고구려 이후 기병 세력 보다는 궁병에 집중하게 됐다.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그대로였다. 

 

가난했고, 말을 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활은 한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무기체계가 됐다. 이건 한민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국 역시도 중세 시절 가난했기에 장궁에 집착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시 영국은 맨앳암즈(man-at-arms : 전문군인, 중장보병, 중세시절 군대의 주력) 1명을 키우는 돈이면, 장궁을 든 궁병 2명을 키울 수 있었다. 

 

영국은 의욕적으로 궁병을 키웠고, 이들이 크래시, 아쟁쿠르에서 프랑스의 기병들을 박살냈다. 

 

한민족이 활에 집착한 이유를 어느정도는 이해가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