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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희망과 압도적인 지지로 기득권에 맞서 국가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국가가 있다. 이후 성공하지 못한 개혁은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더욱 처참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왔다. 불합리하고 불평등하다 못해 기형적 사회구조를 잉태한 라틴아메리카의 ‘과테말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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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안티구아

 

 

(신)지배자 미국과 손잡은 과테말라 기득권 

 

스페인은 1898년 쿠바를 마지막으로 아메리카의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이로써 아메리카에 수백 년간 지속된 유럽의 식민 통치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제국주의로 급성장하고 있던 미국의 새로운 지배가 시작되었다. 

 

20세기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북미 이남의 국가는 없었다. 1823년 미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선언한 “먼로 독트린”의 완벽한 정치적 성과였다. 먼로 독트린이란 

 

“유럽은 아메리카에 간섭 말라. 우리(미국)도 유럽에 간섭 안 하겠다.”

 

라는 미국의 고립주의 외교정책으로, 이 정책은 1900년대에 들어서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은 아메리카를 더는 간섭 말라는 유럽 열강을 향한 ‘선포’였고, 유럽의 식민지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선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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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재임: 1817년-1825년)

 

미국의 지배는 과거 유럽의 방식과는 달랐다. 

 

소위 경제적 예속 관계를 통한 지배 관계를 구축한 것인데, 이는 대부분 신생 독립국들의 ‘근대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찍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진행된 근대화란 ‘합법적’인 제도와 형식을 통해 착취와 수탈경제를 공고히 하는 방식이었다.  

 

과테말라에서는 1871년 이후 약 70여 년간 ‘자유주의자’라 하는 미국과 결탁한 이들이 집권했다. 그들은 국가의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여러 정책을 시행했고, 그 정책들은 현재 기형적인 과테말라 사회구조의 기틀을 제공했다. 그리고 양극단의 빈부격차와 대중 빈곤의 일상화로 점철된 현재 과테말라 사회의 신(新)봉건적 질서가 그 기틀 위에 세워졌다. 

 

질문을 던져본다.

 

어떻게 유럽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시작된 과테말라의 근대화가 국민의 삶을 더욱 고되게 만들었을까. 1944년 이 뒤틀린 근대사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수많은 희생을 치룬 채로 끝이 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후퇴해버린 개혁으로 과테말라 사회는 무슨 대가를 치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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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Paula(오른쪽)는 학교에 가지 않고 대신 Los Duraznales 마을에서 여성 가족들과 함께 옷을 빨고 일한다. / 이미지 출처-<MotherJ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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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의 빈민층들은 먹을 것을 찾거나 돈을 벌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진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려고 쓰레기를 옮기는 트럭에 달려들다가 쏟아지는 쓰레기 더미에 묻혀 다치거나 죽는 경우도 있다.

 

다시 한번, 대체 과테말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과테말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과테말라는 멕시코 남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한반도 절반의 면적에 해당한다. 전체 인구의 50% 이상이 아메리카 토착민인 ‘마야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과테말라에서 진행된 근대화의 양상을 잠시 살펴보면 이렇다. 여타 역내 국가들과 달리 과테말라는 금광산업이 아닌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경제가 우세한 곳이었다. 

 

다시 말하면, 토지가 유일한 생산 수단이자 부의 주요 원천이었으며, 이는 땅을 경작할 수 있는 풍부한 노동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세계 시장의 수요와 맞물린 커피 생산과 20세기 초엔 열대과일 재배와 같은 대규모 플랜테이션 생산의 농업 수출경제가 번성한 이유다. 

 

이 농업 수출경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토지 독점과 충분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동원하고 공급받는 것이 필요했다. 원주민을 강제 노역으로 동원하던 과거 유럽 식민지 방식이 더는 가능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테말라 근대화는 소유권이 불분명한 방대한 규모의 토지를 사유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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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원주민 ‘마야인’의 후손들.

 

원주민 공동체 소유의 토지, 교회 재산 등과 같은 공동 소유지나 재산권을 적법하게 증명할 수 없었던 부동산 등이 주요 대상이었다. 이런 토지의 대부분과 국유 재산들은 정치 권력과 결탁한 토착 유지들에게 소유권이 대량 이전되었고, 이를 매수하기 위한 외국자본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과테말라 토지의 소유구조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여, 1930년대에 이르면서 외국인 투자 증가로 전체 농업 경지의 30% 이상을 외국인이 소유하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 유나이트 프루트 기업(United Fruit Company)이 과테말라에서 생산되는 바나나에 대한 무역 거래를 시작으로, 1906년에는 철도와 교량 등에 대한 독점적 통제권을 얻으며, 경제의 주도권이 자연스럽게 미국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미 1950년대에 과테말라 전체 토지 72% 이상을 고작 2%가 소유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은 결과다. 

 

이로써 과테말라의 근대화란, 

 

첫째, 토지 사유화 개념의 확립 

둘째, 땅을 잃은 농민과 원주민을 저임금의 ‘자유로운’ 신분의 노동자로 양산

 

하는 과정으로 점철된, 20세기 라틴아메리카판 인클로저가 마무리되는 과정이었다. 

 

근대적 소유관계의 확립이라는 수단은 원주민 공동 소유토지를 몰수하거나 국유지의 독점 사유화를 위해 이용되었고, 대다수 원주민과 농민은 대농장의 일용노동자가 되거나, 심지어 강제노동으로 동원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당시 과테말라의 근대화를 “국가의 대 농장화”의 과정이라고 정의한 사실이 지나치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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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나이트 프루트 기업(United Fruit Company)의 바나나 무역에 동원된 원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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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의 커피 농장.

 

외국자본이 소유하고, 이와 결탁한 과두 지배계층이 독점한 토지 사유화의 패착으로 야기된 국가 경제의 식민성, 그리고 봉건적 노동착취에 기반한 새로운 지배 질서가 현재 과테말라 사회의 기형적인 사회 불평등과 만연한 절대적 빈곤층을 설명하는 근대 역사의 시작이다. 

 

 

과테말라의 ‘개혁’, 기득권의 격렬한 저항에 무너지다 

 

그렇게 국민들의 삶은 점점 힘들어지며 시간은 흘러 어느덧 1944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부터 과테말라에는 새로운 변화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과테말라 “10년의 봄”이 시작된 것이다.

 

과테말라 “10년의 봄”이란 1944년부터 1954년까지 약 10여 년 동안 지속된 개혁의 시기를 일컫는다. 

 

스페인 독립(1821) 이후, 줄곧 소수 엘리트 지배계급에 의한 국가 경제의 사유화와 정치 권력의 독점은 자연스럽게 철권통치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반독재 저항운동은 과테말라 최초의 자유 선거로 이어지며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를 맞는 사회의 들뜬 분위기를 연상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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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환호를 받는 아레발로(Arévalo), 1944년.

 

1944년 집권한 아레발로(Arévalo)정권은 노동자 임금개선 및 부의 재분배 정책을 도입하는가 하면, 1945년 헌법개정으로 과테말라 사회보장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과두 지배계급이 독점한 농업 수출경제에 동원되던 강제노동의 의무를 폐기하고 농민의 자주적 권리보장을 위해 노조 결성을 권장하는 등의 정책들을 폈고, 이런 개혁 정부의 정책들은 당연히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와 전면 배치되는 것들이었다. 

 

개혁 정부의 제2기에 해당하는 아르벤스(Arbenz)정부 때에는 토지개혁법이 1952년 6월 의회를 통과했다. 이를 반기는 농민들과 원주민들의 고무적인 분위기는 “영원한 폭정 정치의 나라에 도래한 봄”이라 부를 만큼 과테말라 사회를 압도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를 거부하는 기득권의 저항으로 사회적 긴장과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당시의 토지개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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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과테말라 대통령 아르벤스(Arbenz)를 지지하는 집회.

 

1950년 당시 과테말라 토지의 72%를 2%가 독점하고 있었고, 이 토지의 상당 부분은 미국 기업이 소유하고 있었다. 과테말라는 농업 수출경제에 기반한 지배구조였고, 따라서 토지개혁이 불러일으킨 사회정치적 갈등은 불가피했다. 

 

토지개혁은 단순히 땅의 물리적인 재분배뿐만 아니라, 기존의 사회적 지배 질서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파급력이 높은 정책이다. 특히 당시 과테말라 사회처럼 농업 수출경제의 호황과 맞물리며 소수 지배층에 집중된 토지 소유와 이에 함께 독점하고 있던 정치 권력과 경제력이 정착된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토지개혁이 과테말라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동력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개혁 정부의 개혁은 빛을 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1954년 미국과 공모한 과테말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개혁 정부를 무너뜨렸다. 쿠데타의 직접적인 원인은 ‘토지 개혁법’이었다. 그렇게 과테말라 10년의 봄은 끝이 났고, 정점에 달한 사회의 계급 갈등은 36년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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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CIA가 지원한 쿠데타 기간 아르벤스(Arbenz)를 묘사한 인형에 총을 겨누고 있는 쿠데타군들.

 

민중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정이나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중남미 사회인류학 박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