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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4.5.월요일


테츠


 


그러고 보니 잊어버릴 뻔 했습니다. 오늘 4월 3일입니다. 천안함 때문에 제주를 잊어버릴 뻔 했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가 어디서 부터 꼬였냐 하면 저는 제주 4.3사건 때 부터라고 단언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가장 '길었기' 때문입니다. 길면 관성화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겨 체념해 버리거나 도피해 버립니다. 처음엔 맞서 싸우더라도 권력을 가지지 못한 바리케이트 이쪽 편은 지쳐버리고 맙니다. 결국 항복하고 맙니다. 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무려 6년 6개월이나 지속된 학살극이 제주사건입니다.

지금 일본에는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이 전체 재일동포의 30%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영남출신 재일동포들이 40%라고 하니 거의 비슷한 수치입니다. 원래는 다른 지역 출신분들도 많았고, 북에서 오신 분들도 많았는데 귀국선 사업 당시 다른 지역 분들은 북으로 많이들 귀국했습니다.

하지만 제주분들은 거의 일본에 남았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북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가족, 선배, 친구들이 죽어갔습니다. 그 현장을 6년 6개월간 경험한 분들은 남북 모두가 무서운,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디아스포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래 글은 04년 4월에 올렸던 글입니다. 당시 인물과 사상, 아니면 말지에 기고했었던 기억은 납니다만 정확하진 않습니다. 4.3사건 62주년을 맞아 다시 올려 봅니다. 죄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영령들이 저 세상에서 부디 편히 쉬시길 기원합니다.






신간사(新幹社) 고이삼(53) 대표를 통해 듣는 제주 4.3 사건

1.

어떤 권력에 빌붙어 기생한 자(者)들이 운좋게 권력을 행사하게 될 경우, 그들은 한층 더 파괴적인 방식으로 다수 민중을, 그리고 개인을 억압한다. 또 그 억압을 위해서 자신들이 얻게 된 여러 공식적인 국가적(폭력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이용한다. 20세기초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 제국주의의 광기에 적극 호응한 친일파, 그리고 해방이후 오로지 미국만을 외치면서 살그머니 권력을 잡은 후 독립운동가들을 "효율적"으로 감시, 탄압하기 위해 친일파를 등용한 친미파 권력자들.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국가권력의 심장부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에 의해 조작된 현대사의 질곡을 살피는, 과거로의 여행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두 사건이 있다. 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6년 6개월간 지속된 “제주 4/3학살사건”, 그리고 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 이 두 사건은 친미파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정통성(?)을 잇고 있는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국가권력에 의한 민중들의 억울한 희생은 왜 “이제는 국가보안법 철폐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재일동포 2세와의 인터뷰가 왜 이렇게 시작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독자들을 위해 잠시 설명을 해야겠다. 2002년 9월 필자가 도일한지 1년쯤 지났을 때,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하는 “오사라기지로(大?次?) 상”이라는 역사소설 부문의 문학상 자료를 잠깐 찾아본 적이 있었다. 일본 내의 수많은 문학상 중 서열 5위 이내에 들어가는 이 권위있는 문학상의 수상작 목록을 훑어보던 도중, 한국 이름을 쓰고 있는 작가가 이 상을 수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84년 “화산도(火山島. 문예춘추사 발간)”라는 작품으로 제 11회 오사라기 지로상을 수상한 김석범(金石範) 선생. 그때만 하더라도 단순히 흥미로운 사실로만 받아 들였다가, 이후 재일동포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다시 본격적으로 자료를 수집하던 중 김석범 선생의 소설 ‘화산도’가 ‘제주도’를 의미한다는 것과, 그가 제주도 출신의 재일동포 1세에 조선국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동경 우에노의 한 식당에 걸린 “제주 4/3사건 기념행사” 포스터에 김석범 선생이 공동대표로서 이름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 행사에 참가한 필자는 선생과 간단히 말을 나눌 수 있었다. 그때 대화 도중 선생께서 하신 말씀을 2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재일동포의 역사는 제주도의 아픔과 그 맥을 같이 한다.”

2.

1948년 5월 10일, 국제연합(UN) 조선위원단의 감시하에 남한 자체의 단독선거가 이루어 진다. 이 선거 결과에 의해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고, 9월 9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한반도는 공식적으로 남북으로 갈라진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국사교과서 말미에 담겨진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면에 숨겨진 사실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1948년 3월, 이승만 세력이 주도한 남한 단독선거의 움직임이 감지되자 머나먼 이남의 제주도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조선반도를 분단으로 이끈다"는 조선남로당 제주지부의 거센 항의가 일어나게 되고, 그들은 "단독정부 반대", "조국의 자주통일"등을 부르짖으며 단독선거 반대 시위에 나선다.

사태가 민중저항의 움직임으로까지 발전하는 모습을 띠자 당시 미군 지휘하의 군경과 이승만 세력의 사주를 받은 우익테러단은 발빠르게 제주도로 상륙,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죽여도 된다’는 상부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한다. ‘킬링필드’를 방불케 하는 무차별한 민중학살.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6년 6개월동안 지속된 이 대학살로 인해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정부통계(1999년)로는 이때 희생된 제주도민의 수가 2만 5천명이라고 하지만, 대개의4/3사건 연구자들은 3~5만 정도라고 말한다. 당시 제주도민이 20~30만 규모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정부측 통계를 따른다 하더라도 전 인구의 10% 정도가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억울하게 희생당한 제주도민들에게 덧씌워진 대부분의 죄명은 남로당의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지나버린, 작년 3월 29일 국무총리의 명의로 발표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조사보고서”를 보면 14%가 무장대에 의해 희생되고 84%가 토벌대(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그리고 희생자중 33%가 노약자와 어린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게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400명 이상이 떼로 몰살당한 ‘북촌학살사건’의 경우 토벌대가 사격연습을 하기 위해 죽였다고, 보고서는 증언한다. 백주대낮에 아무런 영문조차 모른 채, 사격연습의 타겟이 되어 사라져간 수많은 영령들. 이 무차별한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을 역사는 “제주4/3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과거 친미, 친일 정권하에서 감추어져 왔다가 97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 99년 12월에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고, 이 법률에 의거 현재 국가적 차원의 명예회복이 진행 중에 있다. 2003년 3월 29일에 ‘제주4/3사건 진상규명 조사보고서’가 국무총리의 이름으로 발표되고, 그해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가권력의 과오에 대해 유족들과 제주도민에게 깊은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공식적인 사죄를 했다. 그 이후 제주시 봉개동에 오키나와의 평화공원을 본 딴 ‘제주 4/3 기념공원’이 설립되고, 국가가 파악한 희생자 약 1만 4천여명의 이름을 전부 비석에 새기는 등 의 구체적인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동포, 특히 1세들에게 '제주도'는 여전히 '아픔'의 상징이다. 반세기전 그 잔혹한 학살을 피해 10여 년에 걸쳐 일본으로 밀입국한 제주도 출신의 재일동포는 약 3~4만명에 달한다. ’제주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경수 리츠메이칸대 교수에 따르면 "48년 한 해에만 6천명이, 그리고 그 이후 약 3만명 정도가 일본으로 넘어왔다"고 하며, 총련계 단체에서 내어놓은 자료에 따르면 “현재 60만이라 불리는 재일동포 중 제주도 출신은 약 13~14만에 이른다”고 한다. 물론 귀화해 버린 동포까지 따진다면 그 수는 더 불어난다. 게다가 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여행자유화가 실현되기 전까지, 즉 65년까지 밀입국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제주도 출신의 불법체류자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된다. "재일동포의 역사는 제주도의 아픔과 그 맥을 같이 한다"라는 김석범 선생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닌 셈이다.

그런 살아남은 분들의 아픔과, 48년 당시 돌아가신 원혼들을 추모하기 위해 시작된 ‘제주 4/3사건 기념행사(이하 기념행사)’가 올해로 16년째를 맞이했다. 지난 4월말, 동경 닛뽀리에 위치한 써니홀과 오사카의 모리노미야 피로티 홀에서 열린 이번 기념행사는 과거 어느 때보다 상징적이었고, 또 희망적이었다. “제주 4/3 사건, 그 희망의 시작”이라 명명된 민속굿의 제목만 보더라도 과거의 기념행사와는 다른 분위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국가최고책임자의 사죄 영상이 흐르는 제주 MBC의 2003년 10월 31일자 뉴스가 방영되자, 객석을 가득 메운 재일동포 1세들은 소리없이 눈물을 훔쳤다. 강연자로 나선 강창일(배재대 교수, 한일관계사 전공. 제주4?3사건 연구소 이사장) 열린우리당 당선자는 “앞으로는 제주 4/3 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파헤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며, 이번 국가차원의 사죄가 제주도민만의 명예회복이 아닌 자유와 인권을 위한 제주도민들의 투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혀 뜨거운 박수를 받기도 했다. 2부에서는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제주지부 김수열 선생이 직접 연출한 제주민속굿이 인간문화재 71호인 정공칠(44) 선생의 신명나는, 그러나 슬프고도 애달픈 살풀이로 펼쳐진다. 제주 칠모리 굿 기능보유자인 그는 제주의 아픔을 표현하면서 스스로 눈물을 삼킨다.

그리고 객석의 군데군데서 들려오는 흐느낌의 잔잔한 파도. 객석을 가득 메운 재일동포 할머니들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훔친다. 어느샌가 손에 들고 있던 팜플렛 위에 번지는 얼룩진 방울들. 필자 역시 무언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서러움과 북받침,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뒤범벅되어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부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수많은 제주의 원혼들이 무사히 극락으로 갈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비는 것만이 필자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것이 그 자리에 모인 살아남은 분들의 한을 풀 수 있기를 또한 기원하며.

4

그 무대 옆편, 당당한 풍채에 걸맞지 않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행사내내 스탭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고이삼(高二三. 53) 씨가 눈에 들어 온다. 지난 86년 '탐라연구회'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제주도 4/3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 온 재일동포 2세 출판인. 88년부터 시작된 이 기념행사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개최할 수 있게끔 온 정력을 쏟아온 기념행사의 산증인이다. 올해부터는 공동대표 역할까지 맡은 그 역시 제주도 출신의 양친을 두고 있다. 재일동포와 한반도 관련의 사회과학전문 출판사인 신간사를 운영하는 그에게 제주 4/3사건은, 아니 ‘제주도’는 곧 자신의 정체성(Identity)과 직결되는, 영원히 풀고 싶은 숙제이자 놓을 수 없는 끈이기도 하다.



 


제 16회 기념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 출판사로 밀린 일을 하러 들어간다는, 술한잔 마실 시간도 없이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와 동행했다. 총련계 단체가 많이 위치하고 있는 동경도 내 하쿠산 도오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제주 4/3 사건” 기념행사와 “재일동포 2세로 출판사 업종에 종사하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약 1시간 가량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을 많이 뺏은 것은 아닌가 혼자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는 마치 홀가분한 짐을 내려놓은 듯한 심정으로 경쾌하게, 막힘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 이 기념행사가 무려 16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김석범 선생이나 양석일 선생, 아쿠타가와 수상작가인 현월 선생 등 참가자들의 면면이 대단한데,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나 할까요?


 


"제주 4/3사건에 관한 진상규명, 명예회복은 최근에 들어서야 급물살을 탔어요. 아무래도 그간 메이저 언론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으니까. 개인적으로는 86년 탐라연구회를 만들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고 할까요? 87년 신간사를 혼자서 세우고, 88년부터4/3 기념행사를 가졌으니까 벌써 18년이나 되었군요. 기념행사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역시 87년에 본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투쟁이지요. 본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그 이후 ‘광주민중항쟁특별법’ 등이 만들어지고 하는 것을 보면서, 솔직하게 말하면 서럽기도 했습니다. 3~5만명이 학살당한 제주도는 무엇인가하는 의문도 있었고. 그래서 제주 출신의 재일동포들이 주축이 되어서 행사를 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렀네요. 그때는 저도 꽤나 젊었었는데, 중늙은이가 되어버렸습니다(웃음)”

- 줄곧 기념행사의 사무국장직을 맡으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해오다가, 이번 행사부터는 공동대표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5년간 사무국장을 했으니, 어른이 되고부터는 거의 기념행사와 더불어 살아온 셈이 되네요. 보통 한 번 기획하는데 6개월 걸리니까… 6개월은 책 만들고, 6개월은 이거 준비한 셈이 되는군요. 그러다가 이번에 공동대표 비슷한 직책을 얻었는데, 여전히 사무적인 준비는 제가 다 해요. 50대지만, 저보다 어린 사람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요.(웃음)"

- 이번 행사의 강연은 열린우리당의 강창일 당선자가 했습니다.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4/3사건 문제 해결을 위해 열심히 했던 추미애 전 의원이 참석하지 못해 아쉽기도 합니다만.


 


"저도 솔직히 추미애 의원이 떨어져서 아쉽습니다. 바람에 쓸린 감도 없잖아 있는 것 같고. 그렇지만 그쪽(민주당) 사정도 있으니까 함부로 와달라고 부탁도 못하겠더군요. 그렇지만, 강창일 의원도 제주 4/3 연구소 이사장직을 수행하면서 15년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온 전문가이기 때문에 앞으로 국회에서 열심히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작년에는 마당극을 했는데, 올해는 민속굿을 했습니다. 김수열 선생이 직접 연출하셨는데요. 직접 보시니까 느낌이 어떠시던가요?


 


"제가 물어볼 질문입니다. 어떻든가요?”

- 저는 좋았습니다. 사실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엄청나게 울었습니다(웃음).


 


“제가 말씀드렸죠? 아마 울거라고. 이번 공연은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제주지부에서 30명가량이 직접 와서 공연을 한 건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네 달 정도 거의 매일같이 준비했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까 한 1년은 준비한 듯 보였습니다(웃음). 80년대부터 4/3 사건을 소재로 약 20편 정도의 마당극을 만들어 온 김수열 선생이 직접 연출하셨으니, 가장 4/3에 대해 잘 알고 계신 전문가가 하셨으니까 작품내용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깊이도 있었고, 무엇보다 <제주4/3사건, 그 희망의 시작>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도 제 마음에 듭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이 민속굿을 가지고 전국순회공연 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16년동안 기념행사 준비와 더불어 <신간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 힘들지 않나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6개월은 기념행사, 6개월은 책을 내는 생활을 한 20년 가까이 하다 보니 적응되어 버려서 별로 어려운 것은 없어요. 그러나 나이가 50줄에 들어서다 보니 좀 피곤해지는 것은 있지요. 직원도 없고 혼자서 하니까, 월급걱정 할 필요도 없고, 출판사가 문닫는 상황이 벌어져도 혼자서 책임지면 되는 거니까. 정신적으로는 홀가분 합니다. 돈이야 항상 없지만…"

- 1인 출판사라는 개념인데요. 과거 한국에서도 강준만 교수가 <인물과 사상>을 혼자서 만들기도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선배이신데요. 원래는 작가가 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네, 저도 사실은 학교를 졸업하고 작가나 르포라이터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문장수업도 겸할 겸해서 들어간 곳이 추사체의 대가로 유명하신 이철 선생님께서 운영하시는 <삼천리>라는 출판사였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삼천리의 위상은 대단했었습니다.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선생님이 편집위원으로 계셨고, 2세 작가로 배우까지 겸했던 양석일, 아쿠타가와 수상작가인 현월, 시인 김시종 선생등 쟁쟁한 재일문인들이 동가식 서가숙 하고 있었죠. 거기 편집부에 있다 보니까, 1세 선배님이나 2세 동기들의 놀라운 필력과 재능을 지켜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작가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좌절하지는 않구요(웃음). 오히려 그들의 저작이나 발언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자료센터’의 일도 좀 했었는데, 역시 출판사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1987년 혼자서 만들었습니다. 공동경영도 좋을 것 같다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만, 그 때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저는 역시 원맨 스타일로 가는 것이 오히려 자기 책임을 질 수 있으니까 좋지 않을까 했던 것이죠. 돈을 벌었을 때도, 실패했을 때도 그리고 망설여질 때도 타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전부 저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요. 또, 아무리 마음이 맞는 친구라 하더라도 10년정도 같이 하다보면 조그마한 부분에서 생각이 변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런 저런 이유로 혼자서 하는게 속편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지금까지 와버렸습니다.”

- 17년간 몇권정도 출판했습니까? 그리고 <신간사>가 출판하는 책은 주로 어떤 장르인가요?


 


"팸플릿이나 출판경로를 타지 않은 소책자까지 따지면 한 150권 정도 되네요. 1년에 약 10권씩은 꼬박꼬박 만든 셈이 됩니다. 크게 분류하면 50%는 재일동포, 30%가 북한과 한국, 나머지 20%는 아시아 전체 민중의 차별이나 인권, 여성문제등을 다룬 책들입니다. 그 안에서도 가능한한 재일동포에 관련된 책을 내는 것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남북의 어떤 책이든지 간에 본국의 책은, 예를 들어 슈에이샤에서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을 내는 것처럼 기업형 출판사가 번역을 하는 시대로 접어 들었어요. 저는 그런 번역물에 힘을 쏟는 것 보다, 장래적으로 사라지고 말 일본의 마이너리티로서의 재일코리안들의 책을 소개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건 제주도 출신의 재일동포 2세인 제 운명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애 마지막 소원이라면, 물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달려 있지만(웃음), ‘재일조선인문학전집”을 발행하고 싶습니다. 많이 팔리고 적게 팔리고를 떠나서 사료로서 남기고 싶으니까요.”

- 한국에 번역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책들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젊은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책이라던가.


 


“먼저 <통곡의 두만강(慟哭の豆?江)>(김찬정, 신간사)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북한의 책은 아직 소개를 하기가 꺼려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 자신 역시 찬성/비판의 두가지 입장의 가운데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필자인 김찬정 선생과는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이분이 ‘주간아사히’에 조금씩 연재한 것을 베이스로 삼고, 다시 중국에서 만난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가면서 북한의 식량문제, 기아문제등을 르포르타쥬 형식으로 모은 책입니다.

북한의 객관적인 현실에 대해 어느정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한권은 <북조선으로 사라진 친구와 나의 이야기(北朝鮮に消えた友と私の物語)>(하기하라, 문예춘추)라는 책인데, 하기하라씨는 오오사카 외국어 대학의 조선어학과 출신입니다. ‘적기(赤旗)’의 기자로서 평양특파원을 지낸 분입니다. 저는 일본인으로서 이렇게 ‘조선’에 착목하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일본인이 조선에 관계를 가진다라는 것에 대해, 또 자신의 고교시절 동급생이었던 친구가 북으로 돌아가 결국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스토리인데요. 필자의 교우관계를 둘러싼 드라마틱한 전개에 압도당하지요. 그외에도 여러권이 있습니다만, 이정도로 하지요.”

- 제주4/3사건에 해박한 전문 출판인으로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제주 관련 책을 추천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물론 한국어로 된 서적중에.


 


"(잠시 생각하다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작성된, ‘4/3사건을 말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완결이 안 나왔습니다. 우리 쪽은 7권까지 완결이 나왔는데 한국쪽은 나오지 않았더군요. 현재는 일본어판만이 완결이 나온 상태입니다."

- 일본어로 쓰고, 한국어로 번역중 인가요?


 


"아뇨. 원래 <제민일보>에 연재된 것입니다. 한 7~8년 연재되었나? 그 연재는 끝이 났고, 한국 출판사가 그걸 묶어서 내더군요. 그런데 마지막 6권과 7권을 내지 않았습니다. 4/3 사건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출판사들은 간혹 그런 경우가 있는데, 전 그건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행본도 아닌 연재물을 중간에 끊어버리는 것은 이쪽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거든요.”

- 그럼 완결된 책 중에 한글로 된 것 한권 추천바랍니다.


 


"고은 시인이 쓴 “제주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시는 아니고 여행기라고 해야될 지 , 엣세이라고 해야 될지 감은 잘 안옵니다만, 아무튼 문장으로 된 책인데요. 아주 명문입니다. 저도 5~6번 정도 읽었으니까요. 눈물이 절로 나오는 명문장이지요. 그 책 머리말을 보면 고은 시인이 청년시절 자살을 결심하고, 이왕이면 할아버지의 땅 제주도 가까이에서 죽자면서 배를 타는 귀절이 나옵니다.

고은 시인의 생각인즉슨, 가다가 바다에서 빠져 죽어야지, 하는 설정인 셈이지요. 그런데 배 안에서 말이 통하는 제주도 의사를 만나게 되어 술을 마시게 되는데, 그런 와중에 배가 제주도에 도착해 버려 자살이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이후 고은 시인은 그 의사와의 인연이 자꾸 떠올라 그를 수소문하면서 제주도 땅을 방랑하게 되는데, 그런 와중에 갑자기 돈오, 그러니까 어느 순간 득의를 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제주도는 죽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살아나게 하는 용기를 주는 곳이다'라고 말입니다."

- 말씀을 듣다보니 역시 고은 선생님 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는데요. 마지막으로 제주 4/3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한국의 시민이나 네티즌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주었으면 좋겠습니까?


 


"제가 이런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주 4/3 사건을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객관화시켜 주었으면 해요. 지금 한국은 인터넷이 활성화 되어 있는데, 이로 인해 깊게 사고하는 풍토가 많이 사라진 것 같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머리속에 갑자기 떠오른 것을 바로 키보드를 두드려 활자화시켜 버리니까요. 순발력은 있지만, 아무래도 깊이 고찰하는 것이 부족하게 되지요. 이게 잘못 나갈 경우 모든 것을 감성적, 아니 감정적으로만 판단하게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성적 판단이 자리 잡을 수 없게 됩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가 ‘가장 민주적이었다는 바이마르 공화국은 역설적으로 나치의 출현을 낳았다’는 말을 했었죠.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의견교환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만약 다른 사람이 내세우는 논리에 감정적으로 따라가서 찬성, 반대를 결정해버리면 자기 자신에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제주 4/3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해결과 진상규명에 찬성의 뜻을 표현해주는 것은 좋지만 그 찬동이 감정적인 찬동이라면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지도 모르거든요. 만의 하나의 가능성도 차단하고 싶은게, 솔직한 마음이기 때문에... 적어도 4/3 사건 해결에 관심을 기울이는 네티즌들이라면, 인터넷에서 정보만을 얻기 보다는 4/3사건에 관한 책을 두어권 정도 읽고 이성적으로 객관화시켜서 판단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진상규명 안해도 되겠네 라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런 사람이 나올 가능성은 0%에 가깝지만, 혹시 그런 사람이 나오더라도 뭐 어쩌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사시라고 해야지요(웃음).”

6개월 동안 기념행사 준비에 매달린 고이삼 대표. 마치 무거운 짐을 풀어놓았다는 듯, 시종일관 웃어가며 친절하고 편안하게 질문에 답해 주었다. 밀린 일거리는 내일하면 된다면서 나를 밖으로 끌고 나간다. 그리고, 우리 둘은 타카다노바바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밤새 재일동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로는 섬뜩해지며 때로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가슴 속의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재일동포>의 수난과 차별의 역사. 그 역사속에서 여전히 자긍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수많은 한국적, 조선적 재일동포들의 일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면 다시 그는 6개월간 책을 만들고, 그 6개월이 지난 이후 다시 기념행사 준비를 할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역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