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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4.1.목요일


나나


 


헨드릭, 당신은 늘 점수 예측을 정확하게 해요. 올림픽 쇼트에서도 놀라울 만큼 점수예측을 해냈더군요. 대체 비결이 뭐에요?


 


비결이랄 것 까진 없는데(웃음) 그냥 자연스러운 거에요. 점수를 맞출 수 있는 건 내가 코치이기 때문이에요. 아마 대다수의 코치들이 경기를 지켜보면 대략적인 점수 예측을 할 수 있을거에요. 그리고 아마도 내 경험이 도움을 주는게 아닐까요. 아홉번의 월드와 한번의 올림픽에 참가를 했고, A레벨 코치 자격증을 가지고 있거든요. 벌써 10년 전이네요. 자격증을 따고 그 이후로 쭉 코치 생활을 해왔어요. 코치들에겐 선수의 프로그램이 끝난 후 점수를 예측하는 건 그닥 대단한 일이 아니에요. 전 다만 해설자를 겸하고 있는 유일한 현역코치일 뿐이고요. 직관적으로 느끼는 거라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냥 보면 알 수 있어요.


 


당신은 그림을 그린다고 했어요. 좋아하는 화가와 그림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그리고 연아의 스케이팅을 비유한다면요?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칸딘스키와 클림트에요. 클림트는 부드러운 색감과, 흘러가는 듯한 형태, 황홀한 빛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도취되는게 좋아요. 칸딘스키는 내가 욕망하는,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이미 다 그려낸 것 같달까. 당신 말대로 곡선과 공간에 대한 그림이니 피겨 스케이팅과 가장 닮아있기도 하네요.


그림을 볼때면 숨이 막히고 할말을 잃어요. 연아의 스케이팅이 그래요. 그녀가 빙판 위에 가져오는 것들을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사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하루의 시간을 더 달라고 부탁했다.)그런데 시간을 가져도 도저히 불가능 하군요.


 


당신이 말하는 그림은 많은 사람들을 이미 사로잡은 일종의 명화에 속하네요. 김연아의 스케이팅은 당신에겐 명화와도 같은 건가요?


 


그 이상이에요. 그림은 정지한 상태에서 머물러 있고 움직임이 없잖아요. 그리고 스케이팅은 연극이나 무용처럼 순간으로만, 눈앞에서만, 현재로만 존재해요.


나도 정말 모르겠어요. 2006년에 처음 김연아를 봤을 때부터 그 눈부신 재능을 알아봤지만 왜 그녀는 그렇게 남다를까요. 모든 스케이터들이 빙판 위를 움직일줄 알아요. 모두들 발레를 몇년씩 배웠다고들 해요. 그런데 김연아는 그들과 구별되요. 그녀는 스케이팅을 하고 있는게 아니라 날아가고 있거든요.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요. 그저께 쇼트에서처럼 좀 실수가 있거나, 어제 프리의 후반부에서처럼 좀 지쳐보일 때, 아주 오랜만에 그녀가 날고 있는게 아니라 스케이팅을 하고 있단 생각을 했네요. 그만큼 김연아는 언제나 빙판 위에서 그 누구보다 남다른 것을 보여줘요. 어떤 형용사도 그녀의 스케이팅을 이야기하는데 충분하지가 않아요.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당신한테 다시 만나 이야기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던 거에요. 그런데  생각할 시간이 있으니 더 어렵네요.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걸 묘사하고 싶어지잖아요. 그림이든 문장이든, 당신 말대로 그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과 동경이 예술의 출발점이니까요. 그런데 절대적인 아름다움, 지나치게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말을 잃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것을 문장으로 구체화 하고 묘사하기 위해 애쓰고 그걸 해내겠죠. 하지만 나는 내 표현의 한계에 다다라버렸어요. 답답하지만 정말 그래요. 내 말로 문장으로, 형용사로는 다 묘사할 수가 없어요.
 
그런 대단한 경지는 재능일까요, 노력일까요? 김연아는 당신이 말한대로, 백만명중에 하나의 재능을 지닌 스케이터이고, 동시에 모두를 놀라게 할 정도의 집중력과 끈기를 가지고 있기도 해요.
  
맞아요. 그런 경지는 경이로운 재능과 엄청난 노력이 함께 있어야 도달할 수 있어요. 그냥 좀 잘하게 되는 것, 남들보다 나은 지점에 다다르는 것에도 두 요소가 모두 필요하죠. 마찬가지지만 무언가를 이룬다는 표현에 걸맞는 성과를 위해서는 더욱 그래요.


 


2008년 월드이후부터 마오 아사다는 쿼드점프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녀의 쿼드 룹 점프 도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마오 아사다가 쿼드룹을 선택한다면 그건 명백한 큰 실수에요. 다운 그레이드의 위험이 너무 커요. 연아의 정교한 트리플 럿츠 트리플 토룹에 대항하려면 불안한 단독 쿼드룹으로는 불가능해요. 그녀가 룹 점프에 강한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한번도 공식 경기에서 랜딩한 적도 없는 점프로 틈없는 연아의 점프를 당해낼 수가 없어요.


만약 마오 아사다가 김연아에게 좀 더 가까이 가고 싶다면 시도해야 할 점프는 트리플 럿츠 트리플 토룹, 혹은 보다 견고한 트리플 악셀 더블 토룹 컴비네이션이겠죠. 실패하거나 다운그레이드 받는 게 아니라 가산점을 받는다는 전제 하에 말이에요. 지금처럼 트리플 악셀을 고집하는 건 그닥 현명한 판단으로 보이진 않아요. 실패하거나 다운그레이드를 받을 때의 타격이 너무 크죠. 프리에서 두 번의 트리플 악셀을 하고 난 뒤엔 후반부엔 체력이 딸려서 쉬운 점프를 실수 하고요.


 


김연아를 이기는게 아니라 가까워 지려면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그게 현실이기 때문이에요. 스스로 실수 없이 경기를 마치고 나서도 이기는 걸 장담 할 수 없고 이번처럼 김연아가 예외없이 5번의 실수를 하기를 기대해야 금메달이 아사다 마오에게로 가니까요.


 


마오 아사다가 아니라 미키 안도가 오히려 좀 더 연아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스케이터라고 생각해요. 지금 그녀는 쇼트에서만 트리플트리플 컴비네이션을 뛰고 있어요. 종종 다운 그레이드를 받기도 하고요. 니콜라이 모로조프는 안전하게, 실수없이 가자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 효과적인 전략인지는 모르겠네요. 그녀는 트리플 트리플 컴비네이션의 두번째 점프를 트리플 룹으로 뛸 수 있는 스케이터에요. 만약 그녀가 트리플 살코 트리플 룹 컴비네이션이나 트리플 럿츠 트리플 룹 컴비를 연마해 온다면 좀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거에요. 전 브라이언 오서의 전략이 참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연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점프와 안무가 정교하게 조화된 작품을 이끌어 냈거든요.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아주 성능이 좋은 쥬서기처럼 연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걸 다 짜내듯 거의 이끌어 냈어요.


 


왜 정형외과 의사가 되었어요?


 


정형외과 전문의가 된 건 스케이팅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스케이터로서 활동하는 동안은 늘 부상이 있어요. 다른 데는 다 건강하니까 가 본 병원이라곤 정형외과 뿐이었고, 만나본 의사는 모두 정형외과 전문의였죠. 의대를 가고 나서도 정형외과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의사로서, 스케이터로서 봤을 때 김연아가 의욕을 잃었다고 보이진 않아요. 다만 좀 체력적으로 지쳐 보여요. 올해 10월 중순에 시작한 그녀의 시즌은 유난히 길었고, 이번이 5번째 경기니 지칠만도 하죠. 그녀가 올림픽 금메달 이후 의욕을 잃었다면 아예 토리노까지 오지도 않았을거에요. 우아하게 한국에 돌아갈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타이틀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니 여기에 왔을 거고요. 올림픽 이후 밴쿠버, 서울, 토론토, 토리노의 일정이 참 무리였을텐데...아무리 그녀가 강하고, 정신적으로 무장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짧은 시간 동안 그 여정을 겪어낸 뒤의 육체적 피로를 이겨내기는 힘들어요. 특히 선수들은 육체적 조건에 영향을 많이 받아요. 누가 뭐래도 몸이 먼저에요.


 


니체의 육체와 정신에 대한 정의와도 같은 건가요?


 


그런 셈이에요. 피겨 스케이팅은 아주 사소한 요소에도 영향을 많이 받아요. 경기장 빙질, 부츠, 의상, 음악, 분장, 웜업, 긴장감... 지푸라기 하나처럼 사소한 거라도 어긋나면 그게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은 아무리 강한 정신력으로 노력한다고 해도 극복할 수가 없어요. 누가 뭐래도 우리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니까요.


 


빙판 위에서 그렇게 절대적인 흠없는 아름다움을 아무 흔들림 없이 표현하려면, 아니죠. 그 아름다움 자체가 되려면, 그에 준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필요하다고 믿어요. 피겨는 기술과 예술로서 온전해지는 종목이에요. 거기에 김연아는 곧은 마음, 강한 정신력까지 갖췄어요. 나는 김연아를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르지만요. 왠지 그녀가 많은 예술가들처럼 아이같은 순수함과 아름다운 심성을 갖춘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요. 


 


김연아의 미래에 대해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요.


 


다음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금메달을 따서 카타리나 비트처럼 피겨스케이팅 역사상 2회 연속 금메달 리스트의 기록을 가진다면야 더 바랄 게 있을까요? 세계선수권에서도 몇번 더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거고요. 실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출전하는 한 금메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꽤 많은 세계 선수권 금메달을 선수 생활을 지속하는 한 가져갈 수 있을거에요. 김연아가 빠르게 사라져간 다른 올림픽 챔피언과 구별되는 점은, 그녀의 금메달이 운보다 실력으로 이뤄졌다는 거에요. 타라 리핀스키, 옥사나 바이울, 사라 휴즈, 시즈카 아라카와 처럼 지금까지의 올림픽 챔피언들은 스스로의 실력보다는 운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금메달을 딸 수 있었어요. 강력한 올림픽 메달리스트 기대주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넘어지면서 운좋게 그녀들이 메달을 가져갔어요. 그러니까 그녀들의 경우에는 은퇴를 하는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어요. 아마츄어 커리어를 지속한다 한들, 다시 운좋게 메달을 딸 수 있을 거란 보장은 할 수 없으니까요. 올림픽 메달을 가지고 곧장 프로로 전향하는게 그녀들에겐 가장 영리한, 커리어를 빛나게 할 수 있는 선택이었던거에요.


 


그런데 연아는 달라요. 그녀의 실력으로 본다면 올림픽 메달도, 세계 선수권 금메달도 그녀가 독차지 해야 마땅한, 딱히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요. 실수하지 않거나 약간의 실수만 한다면요. 하지만 누가 그녀에게 강요할 수 있겠어요? 그 고된 컴페티션을 지속하라고.. 참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나도 스케이터였기 때문에 알아요. 그 힘들고 고된 일을 다시 하라고, 아무도 그녀에게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영원한 무적불패의 챔피언으로서 떠나야 할 때를 아는 것도 쉽지 않아요. 어려운 일이죠. 떠나야 할 때를 안다는 건.


그녀의 스케이팅을 오래오래 보고 싶고 코멘터리를 하고 싶은데 동시에 그녀가 모두의 기억 속에 무적의 스케이터로 남기를 바라니,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린다 한들 존중해야죠. 그리고 그녀의 행복을 기도할 거에요.


 


개인적으로는 어쨌거나 아직은 은퇴하기엔 좀 이르죠. 지금 열 아홉인데, 아직 그녀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들이 많아요. 이십대 초반의 좀 더 무르익은 여인의 모습으로 해보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겠어요? 카타리나 비트가 1984년 사라예보에서 금메달을 따고 은퇴했다면, 그녀를 세계에 각인시킨 1988년 캘거리의 카르멘은 없었을 거에요.


 


2006년, 내가 처음 김연아를 류블랴나에서 봤을 때, 그땐 스케이팅을 아주 잘하는 소녀라는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의 10년간 피겨 스케이팅을 이끌어 갈 존재라는 걸 알아차렸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는 스케이트를 타는 게 아니라 날아가고 있더군요. 교정기를 낀 수줍은 소녀였던 그때부터 매력적인 본드걸이 된 지금까지 김연아는 단 한발짝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어요. 놀라울 만큼 해가 바뀔 때마다 진보와 발전을 거듭해 왔어요. 그러니 좀 더 높이 날아가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녀 스스로도 많은 고민이 될 거에요. 피겨스케이팅이 참 고되고 힘든 운동이기도 하고, 그녀 어깨에 걸린 전 세계인이 지켜보고 있다는 부담감도 무시할 수 없는 거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한계가 어딘지를 시험해 보고 싶어하는게 모든 선수들이 늘 도전하고 있는 과제이기도 해요. 김연아의 스케이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카타리나 비트의 카르멘처럼, 야구딘의 아이언 마스크처럼 음악과 동시에 전 세계가 기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더 해주기를 바란답니다. 그녀라면 가능할 거에요. 온 세계를 매혹시키고 사로잡는 일이. 피겨 스케이팅의 다른 차원을 열고 우리를 그 신세계로 이끄는 일이.


 


2010년 3월 28일, 갈라를 앞두고, 토리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