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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4.6.화요일


충용무쌍



부활절이 내일 모레인걸 이제와서 알았다. 아, 남은 이틀 사이 판공성사를 볼 수 있을까?  마지막엔 사람이 몰리기 마련인데.


 


판공(判功)은 천주교의 종교 행사 가운데 하나다. 교인이라면 누구나 연중 두 번 정해진 시기에 고해성사를 봐야한다. 겨울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한 번, 지금같이 봄의 부활절이 다가오면 또 한 번. 이 때 치르는 의무적인 고해성사를 특별히 판공성사라 부른다. 출석 확인을 위해 미리 회수용 판공표까지 나눠주니 출석확인 하겠다는 뜻이다. 


 



영화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이런 분위기


 


'불륜 행각 타이거 우즈, 오프라 쇼에서 고해성사?' 같은 관용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는 만큼, 고해성사라는 게 대충 어떤 건지는 다들 아시리라. 그리고 아시다시피 그거 유쾌한 일은 못 된다. 말하자면 '제가 이런 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아멘' 하고 이실직고 하는 자아비판의 시간인데 그게 적성에 맞으면 마조히스트지. 진짜 털어 버리고 싶은 마음의 짐이 있거나 하지 않고선 스스로를 죄인 취급하며 빌어야하는 이 시간 참으로 막막하다. 그 걸 매년 두 번씩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구나 다 해야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 지은 게 없어요 하는 변명은 씨알도 안 먹힌다.


 


기독교적 원죄론에 입각해서 보자면 우리는 죄다 잠재적 죄인이란다. 아니,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던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었단다. 세상 빛을 보자마자 숨을 거둔 불쌍한 어린 영혼도 일단 천국행은 보류라는 그놈의 원죄. 날 때부터 죄인이니까 태어난 거 자체가 이미 죄! 고로 천국 안녕! 


 


이런 신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던 중세 천년.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는 불신의 대상이었고 불신은 광기와 폭력의 암흑을 낳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바야흐로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넘치는 인간의 시대. 이제 글줄 읽었다는 사람이라면 무신론적 회의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표현 하는 게 아주 자연스럽다. 어쩔 때는 당연시 될 정도로.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특히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고 한 맑스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만나 '천주교도' 임을 밝히면 은연중에 동정 어린 눈빛을 받게된다. 어서 빨리 천주당을 뛰쳐나와 신의 품을 벗어 나야한다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난감하다. 나라고 딱히 신비한 영성체험이나 굳건한 신념으로 세례를 받은 게 아니다. 그냥 외할머니가 성당에 다녀서 어머니도 다녔고, 나는 덤으로 유아세례를 받았을 뿐이고, 주일학교 성령캠프 보내니까 자연스럽게 '천주쟁이' 가 된 거지. 견진성사는 어물쩍 넘어갔지만 이미 교적에 이름이 올라 갔으니 천주쟁이가 맞다. 그러나 이렇게 타의로 얻게 된 신앙이지만 지금은 이걸 벗어야만 하는 굴레로 여기지는 않는다. 아니 때로는 자랑스럽기 까지 하다. 대체 왜?


 


천주교와 전교조


 


애들은 몸도, 마음도 유연해서 그저 가르쳐주면 곧잘 따라하는 법이다. 어린 마음에 엄마손 잡고 성당에 나가 미사를 봤고 여차하면 지옥불에 떨어진다는 엄포에 벌벌 떨면서 고사리 손으로 성호를 긋고 기도문들을 외웠다. 순진했던 어린 시절. 그랬던 내가 천주교라는 종교에 대해 좀 금 다르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중학교 입학과 함께였다.


 


나는 천주교 재단에서 설립한 남자 중학에 들어갔다. 종교적 이유로 선택한 건 결코 아니다. 고르고 봤더니 천주교 재단이었을 뿐. 아줌마들 사이에선 '공학에 보내면 여자애들한테 치여서 우리 아들 기죽는다' 는 의견이 팽배했다. 자연히 부모님은 남학교에 보내려 했고 나는 부모님을 말씀을 순순히 따랐다. 다만 우리 구역내 남학교 중에서 하나 있는 '교복을 입지 않는 학교'에 가겠다고 말해 한 군데를 찍었더니 마침 천주교 재단이 세운 학교였단 말이지. 그렇게 신앙과는 별개의 문제로 나는 '신부님' 이 이사장을 맡은 중학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곳의 권력 구조가 몹시 흥미롭던 거다. 통상의 사립학교의 권력 구조라면 돈을 댄 이사장은 태양, 이사장의 최측근인 교장 교감은 달과 별 같은 존재. 학교의 중간 보스는 교감, 최종보스는 교장, 그 위에 히든보스 이사장이 도사리고 있어야한다. 그리하여 그들끼리 자족하는 당신들의 천국이 완성되는게 일반적인데, 천주교 재단의 학교는 그게 아니었던 거다.


 


먼저 재단 이사장은 명목상 지역 교구의 주교가 맡고 있지만 그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쩐주’ 가 결코 아니었다. 해당 교구의 책임자라서 엉겹결에 꿰찬 명함이지, 사실 교구 내의 다른 여러 일로도 충분히 바뻐 학교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으신 양반. 이사장 신부님이 학교에 등장하는 때는 일 년에 두 번, 입학식과 졸업식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학교에 남은 건 브레이크 없는 교감과 교장 뿐인가? 아니다, 히든 보스는 분명 존재한다. 교구에서 이사장 권한 대행으로 파견시킨 종교감 신부님이 학교에 버티고 있는 것. 학교 안에 설치된 사제관에서 생활하는 종교감 신부님이 교내 순시에 나서면 교장과 교감이 손을 마주 부비며 종종 걸음으로 수행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발언권은 응당 종교감, 교장, 교감 순이었다. 그렇다면 종교감 신부가 대장인가? 맞다. 하지만 그의 치세도 영원하지 않으니 천주교의 사제들이 다들 그러하듯 발령지마다 근무 기한이 정해져 있다.


 


종교감 신부도 예외는 아니라 일반적인 성당의 주임신부들처럼 5년을 전후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 된다. 이렇게 저마다 약점과 강점을 가진 (종교감) - (교장,교감) - (평교사 집단)들이 자연스럽게 상호견제와 연합을 통해 세력 균형을 유지해온 것이다. 교장과 교감이 위에서 쪼아대면 평교사들은 종교감 뒤로 숨었고, 종교감이 찍어 누르려하면 교사들끼리 뭉쳐서 막았다. 태양과 같은 이사장님의 교시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학교 분위기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전교조와 만날 수 있었다.


 



난 아직도 담임의 가슴에 빛나던 이 마크를 기억한다.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그렇게 많이 재직하며,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학교가 대한민국에 몇 없었다는 사실은 졸업하고 나서야 알게 된 일이다. 위에서 말한 세력균형에 힘입어 전교조 교사들도 일정한 지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이유하나 만으로도 나는 천주교 재단 학교에서 보낸 3년이 다행스럽다. 그들은 내가 만난 수십 명의 교사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보다 더 학생들의 권익을 대변했고 체벌에 괴로워하며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한 교육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참교육' 뱃지를 항시 가슴에 달고 출근하던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기억한다. 그는 푹푹 찌던 여름방학의 어느 날, 학급 등교일로 나온 아이들에게 제초작업을 시키라는 교감의 명령을 거부하고 교무실 문을 열고 에어컨을 틀어준 사람이었다.   


 


 


정의구현 사제단 


 


와, 전교조 교사가 그득했던 그 학교가 비범했던 거구나 하는걸 깨닫게 될 즈음, 대한민국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월드컵이 열렸고 4강에 진출했다. 서해는 어수선했고 대통령의 임기는 말년이었다. 대법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야당 후보와 고졸 변호사 출신의 여당 후보가 대권을 겨루고 있었다.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 둘이 깔려 죽었고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차가운 계절, 길바닥에 선 시민들이 떨고 섰을 때 나는 그들과 광장에 함께 선 로만칼라 입은 남자들을 보았다. 정의구현 사제단이다.


 


 


사제단 추모미사에서 퇴짜맞은 이회창 (오마이 뉴스) 


 


" 강론을 하던 김현영 신부는 


 


 당신이 생각하는 국민의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장갑차에 깔려죽는 국민, 미군에게 맞는 국민은 당신을 국민의 범주에 두지 않았다. 선거를 앞두고 자기 사진 찍으러 온 게 뻔한데 '잘 왔습니다' 할 수 없다. 우리는 당신과 같은 반민족, 반통일 주의자를 안아줄 힘이 없다. 우리는 함께 가야할 사람들도 다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다 


 


고 말하고 이회창 후보에게 여러차례 자리를 비켜 줄것을 요구했다."


 


 



이회창 후보가 순수한 신앙인의 마음으로 미사 한 대 올리고 싶어 했다면 몹시 서운했을 일. 허나 그럴 가능성보단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당선이 유력했던 거대 야당 후보를 꾸짖는 남자를 나는 처음 보았다. 고관요직을 두루 거쳐 부와 명예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 없었을 사람의 모습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처음 알았다.


 



지학순,김세환, 함세웅, 문규현 그리고 깡패신부 문정현


 


이제 소년은 자라서 청년이 되었다. 비어있던 가슴 속엔 가눌 줄 모르던 분노만 가득 했던 청춘, 그 때 시작한 게 한국 현대사 공부였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던 친일파와 군부가 벌인 반세기 동안 '바보들의 대행진' 은 슬프다 못해 헛웃음만 나왔다. 인혁당, 12.12 쿠데타, 광주의 봄, 호헌철폐 같은 단어들로 머리를 채워가면서 나는 떨었다. 그런 질곡의 한국 현대사 고비마다, 다시 로만칼라를 입은 이름들을 만났다. 지학순, 김수환, 함세웅, 문규현, 그리고 문정현, 문정현!


 




[딴지일보] 이 어른을 소개합니다 - 문정현 신부



 


안기부 사무실에 단기필마로 난입해 난장판을 만들고 깡패신부라는 별명을 얻은 문정현. 보안사가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외고집. 타인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매사에 도전적, 반항적이다. 신도로부터 존경받음. 금전에 관심 없고 곧은 성격, 저돌적 성격으로 '깡패신부'라 불림. 3·4공화국 당시 반정부 활동으로 실형 수형 경험. 인혁당 사건은 정부의 조작이다 주장." 이라고 기록된 문정현. '신부가 너무 심하다'는 소리는 안 듣습니까?" 라는 질문엔 "싸우기로 작정한 이상 몸을 던져야지. 분노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주님의 가르침이야." 라고 답한 문정현.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신군부가 물러간 뒤에도 멈추지 않았던 문정현.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앞에서 언제나 힘없고 외로운 이들을 위해 앞장섰던 문정현. 용산참사 이후 철거민들과 함께 살며 정권의 폭압을 고발하는 늙은 신부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용산에서 용역 깡패들에게 고초를 겪는 문정현 신부.


근래 3년 사이 이렇게 신체의 일부로 피가 쏠리게 만드는 모습을 본 적 없다.


그래도 저 깡패들이 몇 수 위에 있는 진짜 깡패신부의 예봉을 꺾진 못할 것이다.


 


내가 벽을 보고 소심히 중얼거릴 때 다리를 저는 늙은 사제가 제일 앞으로 나서서 온몸으로 깨지고 있었다. 운이 닿아 한 때 문 신부님이 주임신부로 부임한 성당에 다녔다던 누군가 이렇게 전했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 청년부 아이들에게 바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나는 여전히 바람이 되지 못한 "속 편한 날라리" 에 불과하다.


 



팜플렛


 


그 여름이 가고 다시 겨울. 성탄(크리스마스) 판공성사가 다시 다가왔다. 일 년에 네번 있는 대축일이 아니면 좀처럼 미사를 나가는 준 냉담자(오랫동안 신앙활동을 하지 않는 교인을 지칭하는 말)인 내가 성당 문턱을 다시 밟을 때가 온 것이다. 오랫만에 본당과 교구의 소식이 빼곡히 적힌 주보 쪽으로는 손을 뻗어 봤다. 그러나 그 날은 주보 뿐만 아니라 낯선 소책자들도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예수 탄생의 교리적 의미와 성탄을 맞이하는 참된 교인의 자세를 위한 지침' 같은 교리집 쯤 되겠거니 하고 흘겨보다 나는 그걸 여러권 덮썩 집었다. -오! 주여! 이것은 탐욕의 발로가 아니라 좋은것은 함께 나누려함 입니다 - 천주교단내 핵심 간부들이라 할 수 있는 주교들이 모인 주교회의. 그곳에서 당당히 4대강 사업에 유감도, 우려도 아닌 ‘반대’를 표하고 나선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로만칼라 입은 사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주님을 믿는다는 누군가는 국토를 개발해야한다 하고


누구는 주님의 뜻에 거스르는 국토개발을 막겠다 한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그분은 아시겠지


 


나는 속편한 날라리, 나이롱(!) 신자다. 수기로 성서를 필사하며 달달 암송할 의욕도 없고 교리와 세계관을 조리 있게 정리하는 공부도 못했다. 그렇다고 열성적으로 포교하거나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신앙을 간증 할 용기조차 없다. 심지어 A.D.3세기에 쓰여진 복음서의 진실성을 의심하며 '심판의 날 지금의 육신을 가지고 올곧이 부활한다' 는 교리마저 의심하는놈이 왜 지금껏 '천주쟁이'로 남았을까. 그저 오래된 습관인 줄로만 알았다. 익숙함을 굳이 바꾸기 귀찮아 유지한 관성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나는 아무래도 사람의 아들 보다 사람의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늦은 감이 있지만 청빈, 정결(아..아멘;;), 순명을 중히 여기는 천주교인의 자세를 따라 나 역시 주교회의 결정에 순명하련다.


 


나는 천주쟁이다.


 


이 말은  대한민국의 정의와 자유,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수십 년을 분투해온 이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소심한 자랑이다. 다시 한 번, 나는 대한민국의 천주쟁이다.


 


 


기도


 


주여!


 


부디 낮은 곳에 임하시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엠비아래서 구하시고 저희 영혼을 돌보시되,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끝으로 저와 제 하드의 죄 또한 함께 용서해주소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