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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 15일은 광복 76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1945년 8월 14일 연합국 측에 전쟁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을 통보했다. 그리고 다음 날 15일 정오, 일왕이 대외적으로 공식 선언을 했다. 그로부터 18일 후인 9월 2일 요코하마에 정박 중인 미 전함 선박 위에서 일본은 항복 문서에 서명하게 된다. 이로써 2차대전은 공식적으로 종결이 됐고, 한반도는 일제 지배하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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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6일 오전 9시, 마포형무소 앞에서 석방된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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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 지배의 잔재는 7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한 청산이 되지 않았다. 더욱 불행한 일은 그 잔재로 인한 갈등의 상당 부분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내부 갈등이라는 점이다. 해방의 주체에 대한 역사적 사실관계부터 일제 지배 당시의 저항 운동에 대한 지위 문제에 이르기까지 첨예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건국절’ 논란이 대표적이다. 국가가 만들어진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정치적 입장이 다른 두 논점이 충돌하고 있다.  

 

 

‘8·15 건국절’이 헛소리인 이유  

 

건국절이라는 말이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 일부 보수 학자나 논객들이 8.15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개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부터다. 이들의 주장은 1919년 3.1운동 이후 민중들의 자주 의식에 자극을 받은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워 한민족의 적통성을 이어받은 사실을 온전하게 인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국가 구성의 요건인 영토, 주권, 물리적 강제력 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저항운동의 거점으로써 평가는 할 수 있으나 한 국가의 정식 정부로써 자격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1948년 8월 15일 수립한 대한민국 정부는 상기의 국가 구성 요소를 갖췄기 때문에 비로소 국가 건국의 주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건국절이 없는 우리나라는 8월 15일을 정부수립일이 아닌 건국절로 개칭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이 주장하는 요체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건국절의 근거는 이미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한 주체에 의해서 부정됐다. 

 

대한민국 제헌국회 임시의장 이승만은 단기 4281년(1948년) 7월 12일 자 발표된 제헌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1948년 수립된 정부는 관보를 통해서도 그 해를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연호를 명시하고 있다. 1948년 기준으로 30년 전이면 1919년에 해당한다.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정부는 같은 해 앞서 제정된 헌법을 근거해서, 그리고 정부의 공식 입장을 통해서 1919년 건립된 대한민국을 계승한 정부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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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1일 발행된 관보 제1호 

 

굳이 ‘건국절’이라는 기념일을 만들기 위해 날짜를 선택해야 한다면 민중의 자발적인 대규모 봉기가 시작된 1919년 3월 1일이 되어야 하는지,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행사를 한 같은 해 4월 11일이어야 하는지, 

 

또는 유일한 한반도 소재 임시정부인 한성임시정부가 출범한 4월 23일이 적절한지, 그렇지 않으면 여러 임시정부들이 상하이에서 통합돼 새롭게 출범한 9월 11일을 택해야 하는지, 다양한 의견 수렴과 충분한 논의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날을 택하더라도 건국의 해는 1919년이 되어야 함은 역사적으로 이미 정해진 것이다. 

 

1919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이들이 주장하는 국가 구성의 요건 문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들은 국가의 구성요소에 반드시 주권이 미치는 영토가 전제되어야 한다지만, 이미 많은 역사적 사례를 보면 딱히 그렇진 않다. 오히려 반대의 예도 있다. 

 

프랑스의 예를 보자.

 

 

‘임시정부가 정통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프랑스 사례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반 이상의 국토와 북서 지역 해안지방 전체를 점령당했다. 그나마 남은 남동쪽에 비시(Vichy)를 수도로 삼은 주권국 프랑스가 만들어졌지만, 최근까지 프랑스의 정통 역사는 비시정부의 프랑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정통성은 부인되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 후세에 남길 교훈의 대상으로 역사에 기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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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비시정부의 프랑스는 말 그대로 수도 비시에 정식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국가의 수반도 있었고, 형식적으로나마 군대도 보유하고 있었다. 

 

흔히 비시정부를 나치독일의 괴뢰정부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프랑스 비시정부는 나치 독일이 세운 정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민들이 스스로 법적 절차를 통해 승인한 정부가 통치하는 엄연한 주권 국가였다. 

 

비시정부의 수반 필립 페탱(Philippe Pétain) 장군은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승전국으로 이끈 영웅이었다. 그랬던 그가 2차 세계대전에서는 나치 독일이 전 유럽을 점령하게 될 것으로 판단해 프랑스를 통째로 독일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축소된 영토의 프랑스를 받아들인 것이다.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다수의 국민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비시정부를 자신들의 정부로 인정을 했다. 물론 프랑스 북부를 점령한 나치는 2년 후, 1942년 11월 비시정부의 프랑스까지 점령함으로써 페탱 장군의 판단은 어떤 의미로든 틀렸다는 사실로 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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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악수하는 페텡과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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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당시 런던 BBC 방송국에서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샤를 드골.

 

그에 반해 레지스탕스(저항 독립운동단체) 세력을 중심으로 나치에 저항했던 사를 드골(Charles de Gaule) 장군의 프랑스는 합법적 군대도, 영토도 없이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있었다. 드골 망명정부의 목소리가 얼마나 본국의 프랑스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최근까지 역사가들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아마도 나치 치하의 프랑스 땅에서나, 비시정부의 프랑스 땅에서나 대부분의 프랑스인에게 독일의 침략은 ‘분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레지스탕스에 동조하거나 협조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했고, 그렇게 나치의 점령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치가 패망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고, 역사는 다시 뒤집혔다. 

 

드골 망명정부가 연합국의 일환으로 귀환, 프랑스의 적통 세력을 이어받았고, 파리를 수도로 새로운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드골 망명정부가 전후 승전국 대열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나치의 점령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의 강한 저항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소수 레지스탕스의 저항은 다수의 침묵하는 프랑스인들에도 불구하고 종전 후 프랑스를 협상의 유리한 입장에 놓일 수 있게 했고, 저항의 프랑스를 역사의 적자로 만들어 페탱 정부의 프랑스를 반민족, 반역사 세력으로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드골의 망명정부는 나치의 점령 기간 동안 그렇게 영토도, 정규 군사력도, 치안력도, 통치권이 미치는 국민도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갖췄던 비시정부를 대신해 프랑스 역사의 주인이 되었다. 

 

오히려 전후 국제사회는 전통적 의미의 국가 구성요소를 더 갖춘 비시정부보다 저항과 민족정신을 잃지 않았던 망명정부를 프랑스의 공식 정부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승전국의 지위까지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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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파리에 입성하는 샤를 드골과 레지스탕스.

 

그렇다면 전후 새로 들어선 드골 정부가 자신들이 수립한 정부를 건국 정부로 칭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만약 나치의 패망 후 들어선 새 프랑스 정부가 자신들을 건국 정부로 칭했다면 그것은 점령기의 망명정부를 프랑스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결국 프랑스 역사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치에 짓밟힌 치욕의 시간 동안에도 저항을 이끄는 구심점으로서의 정부를 구성하고 국가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프랑스 역사의 연속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새로 수립한 정부도 같은 이유로 ‘건국’이 아닌 프랑스 역사의 적통을 ‘승계’해 재건한 정부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전후 프랑스는 제4공화국 12년을 거쳐 1959년 이원집정부제 형식의 대통령제로 전환,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국제법에 따른 ‘8·15 건국절’도 헛소리다 

 

국제법 차원에서도 8.15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가 희박하다. 이들은 국제법상 국가의 존재는 국제사회의 승인이 절대적이라는 주장을 한다.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는 외교력도 한계가 있었고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했던 반면, 1948년 수립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고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을 받았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1948년 수립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은 전후 질서에 따른 결과였다. 전후 질서로 이전의 상황을 들여다보는 것, 패러다임 전환 이후의 논리로 그 이전을 판단하는 것은 심각한 논리적 모순이다. 

 

마치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헌법과 관습에 따라 조선왕조의 전제적 통치체제를 불법적이라고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당시의 합법성이나 정통성은 임시정부가 있던 당시의 국제정세와 논리로 판단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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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지역을 침략, 강탈할 당시의 국제 질서는 약육강식과 무법천지의 시대였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땅은 소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강점되었거나 그 계획 하에 놓여있었다. 그 와중에 약소국들의 생존전략은 하나의 제국주의 세력에 일방적 협조를 하거나 복수의 세력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 외교를 하는 정도뿐이었다. 

 

동아시아가 일본의 일방적 세력권 안에 있었다면 남아시아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가 지금의 태국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양분하고 있었다. 그나마 있는 국제기구는 제국주의 세력들 간의 교통정리 역할이 고작이었다. 

 

당시는 국제연합(NU)의 전신 격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라는 기구가 있었지만, 1차대전 전후 처리 문제에 매몰돼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 한마디로 국제 질서 관리를 전혀 못 하는 국제기구였던 셈이다.

 

국제사회의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도 민족의 여러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해 만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 청사를 시작으로 중국의 10여 도시를 전전하면서도 대한민국 정부로서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만주는 물론이고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에 맞서는 군사작전도 벌였다. 잘 알려진 만주 지역에서의 저항뿐 아니라 멀리는 영국과 일본이 각축을 벌이던 미얀마(당시 버마)에서 영국군과 함께 대일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외교적 성과도 물론 있었다. 충칭 주재 당시의 임시정부는 중국 장제스 총통의 각별한 지지 속에서 열강들을 상대로 하는 외교 무대에도 적극 참여, 독립의 의지를 잃지 않았음을 지속적으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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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의거 후,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인해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 대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보장하기로 한 카이로 선언 역시 대한민국 망명정부의 끈질긴 외교 노력이 없었다면 이뤄질 수 없는 성과였다. 

 

파시즘이 지배한 추축국 동맹(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패망한 후 전후 국제사회는 승자인 연합국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로 재편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국제연합(UN)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합국은 또다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양대 세력으로 갈려졌고, 유엔 역시 점차 냉전 세력 간 대결의 장으로 변해갔다. 

 

제국주의 시대가 지나고 냉전 질서가 이후 반세기를 지배했고, 그 시기 대한민국의 외교는 지구상의 절반에서만 유효했다. 공산 체제와 그에 동조하는 국가에서는 북한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승인이 국가 존재의 필수요소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임시정부가 있던 20세기 전반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후반기 대부분의 시간에도 지구 절반의 지역에서만 존재했다고 인정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국가의 적법성이 국제사회의 승인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국제법에 따른 ‘8·15 건국절’을 반박하는 프랑스 사례

 

국제법 차원의 보다 설득력 있는 정부 승인의 근거는 앞서 프랑스 망명정부의 경우가 잘 보여준다. 자국 본토에 정통성이 인정되는 정부가 없을 때, 다른 나라에 세워진 임시 망명정부가 그 기능을 대신하는 경우 그 정부가 적통을 이어받는 정부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 망명정부가 위치한 국가의 정부가 망명정부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이들의 존재와 활동, 대표성과 권한을 승인하게 되면 그 망명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것이 국제법상 통용되는 관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망명정부는 영국에 위치했고, 영국 정부가 이들을 유일한 프랑스의 적자로 인정해 망명정부로 승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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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과 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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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과 장제스. / 출처-<독립기념관>

 

일제 강점기 당시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들이 위치한 주권국가 중화민국으로부터 망명정부로서의 승인을 얻었고, 중화민국 정부의 지지와 지원 하에 합법적인 정치와 외교활동을 벌였다. 

 

강대국들의 무법적 각축장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특히 일본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가 위치했던 중국을 비롯, 폴란드 등 몇몇 국가들로부터는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국가 승인을 얻어내기도 했다.

 

 

국호의 연원으로도 반박되는 ‘8·15 건국절’  

 

국호의 연원을 보아도 역시 같은 결론에 이른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식 국명인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부터 사용된 것이다. <고려>와 <조선>이 옛 국명에 근거해 만들어졌듯이 <대한민국> 역시 과거 사용하던 지역 명칭에서 유래한다. 

 

조선의 26대 왕 고종은 과거와 단절되는 근대 국가를 선포하기 위해 새 국명을 사용하는데, 이때 취한 것이 고대 한반도 남쪽 지역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된 <한>이었다.  

 

‘황제가 다스리는 위대한 한’이라는 의미의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3.1운동 직후 출범한 임시정부는 민중이 자발적으로 국혼을 일으킨 3.1운동을 계승하겠다는 정신을 담아 새 국호로 만든 것이 <대한민국>이다.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아닌 민의가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민국>을 사용한 것이다. <민국>은 중국의 쑨원이 영어의 "Republic"의 번역어인 <공화국>보다 더 민중의 국가라는 함의가 크다는 이유로 1905년 7월 30일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왜 ‘8·15 건국절’ 주장은 사라지지 않을까

 

전술한 것과 같이 역사적 사실관계로 보나 국제법적으로 보나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되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건국’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 35년의 지배 기간 동안 구축된 일본 제국주의 흔적이 여전히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을 이루는 기저 축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의 일제 강점기와 프랑스의 나치 강점기를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역사 사이에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큰 차이가 있다. 

 

프랑스는 나치에 패배할 당시에도 국제무대에서는 영국에 버금가는 열강이었고, 해외 영토가 독일보다 훨씬 넓은 강국이었다. 1차대전 당시 승전국이었고 패전국 독일에 대해 우월적 입장으로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 최강의 육군을 자랑하던 프랑스는 2차 대전 초반 독일군의 진격을 막지 못해 6개월 만에 국토를 내주는 충격적 결과를 보게 된다. 폴란드 침공 후 서쪽으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전략을 잘못 읽어 마지노(Maginot)선에 집착한 것이 결정적 패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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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점령 후 파리에 입성한 히틀러와 독일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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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중명전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친일파가 찍은 기념사진.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의 왼쪽에 이완용(이토로부터 세 번째), 박제순(이토로부터 네 번째의 모습)의 모습이 보인다.

 

반면 일제 강점기 당시의 조선은 일본의 국력에 비교가 되지 않을 약소국이었고, 일제 강점은 전쟁 패배의 결과가 아니었다. 

 

1910년 최종 강제 병합되기 이전까지 6년 동안 군대 주둔, 정치 간섭, 외교권 박탈 등 무력 충돌 한 번 없이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조선은 무기력하게 서서히 국권을 빼앗겨 갔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의 싸움에서 패해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열강들 사이의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이 전리품으로 챙겨간 땅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치의 프랑스 점령은 4년에 불과했지만, 일제의 한반도 점령은 35년간 이어졌다. 35년의 시간은 실질적으로 한 사회의 모든 체제와 구성을 바꿔놓을 수 있는 시간이다. 

 

왜 프랑스에서는 나치 점령 후 철저한 역사의 단죄가 이뤄졌는데 한국에서는 그러지 못했는가의 답은 여기에 있다. 

 

 

프랑스에서 이뤄진 ‘역사의 단죄’가 한국에선 이뤄지지 못한 이유

 

프랑스가 나치 패망 후 그토록 철저하게 부역자 단죄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역사 인식이 더 투철했기 때문이 아니다. 비시정부 세력이나 기타 콜라보(Collabo, 나치 부역자)들이 정치, 경제, 언론 등 프랑스의 기축을 차지할 만큼 피지배 기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나치 점령 당시의 부역자들이 프랑스의 중추신경까지 침투해 있었다면 그토록 철저한 단죄는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불행하게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 한반도의 근대화는 적어도 시기상으로는 일제 강점과 함께 시작됐다. 극우세력의 일부가 주장하는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이 그래서 표면적으로 맞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산업화가 박정희 통치와 함께 왔다는 주장처럼. 결과적으로는 맞다. 다만 인과관계를 잘못 짚었을 뿐이다. 

 

산업화 기간을 박정희 세력이 군대를 동원해 강탈해갔듯, 근대화 기간의 한반도를 일본이 점령했던 것이다. 

 

제2공화국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빼앗아 자신들이 실행하면 그것이 군사정권의 공인가? 국부를 강제 수탈해 철도를 놓으면 그것이 일본의 덕인가? 내 주머니에서 강탈한 돈으로 나에게 밥을 사면 고맙다고 할 일인가?

 

어쨌든 한국은 약소국이었고,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점령을 당했다. 프랑스와 달리 피지배 기간이 한 세대 동안 이어졌고, 그러는 동안 국가의 중추 세력은 친일세력으로 완전히 채워졌다. 

 

전쟁이 끝난 후엔, 당사자이자 주체로 승전국 반열에 섰던 프랑스와 달리 한국은 전쟁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전락, 승전국 미국과 소련의 협상 테이블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남쪽 점령국 미국은 귀국한 망명 임시정부의 재산도 권리도 빼앗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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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들 제1진 귀국. 이들은 미군정의 견제로 인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시민들의 환영 행사도 없었다. 왼쪽부터 안미생(검정옷 여성, 안중근 의사의 오촌 조카),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김구 주석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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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귀국한 임정 요인들. 장준하 선생도 있다. 역시 개인 자격 귀국이다.

 

흔히 프랑스의 우익세력은 역사의 단죄를 했지만, 한국의 우익은 그렇지 않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전후 집권 세력이 프랑스도, 한국도 우익이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우익이 키워드는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망명정부가 적통을 이어받았지만 한국의 망명정부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두 나라, 두 역사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프랑스에서도 극우세력은 여러 방식으로 나치 지배의 시대를 옹호하고 변호한다. 마치 한국의 극우세력이 일제 강점기를 옹호하듯이. 다만 차이점은 그들의 극우는 소수인 데 반해 한국의 극우는 보수진영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뿐이다.

 

임상훈 (인문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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