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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인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화교’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이 사람들도 결국은 화교(華僑)가 아닐까. 화(華)는 ‘중국’을 아름답게 부르는 호칭이고, 교(僑)는 ‘해외에서 잠시 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즉 ’화교‘는 ’해외에 잠시 살고 있는 중국인‘이라는 말이다. 언제라도 돌아갈 수도 다시 떠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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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너무 정처 없는 불쌍한 사람 같으니까, 다시 ’화예‘라는 말이 새로 만들어졌다. ’중국‘이라는 화(華)에 ’후예‘라는 예(裔)가 붙었다. 그곳에 정주해서 계속 살고 있는 중국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홍콩인들은 화교일까? 화예일까? 그들은 언제부터 자신이 대륙의 중국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지금까지도 홍콩인은 혈통적으로 틀림없는 중국인이다. 대부분 대륙 중국인과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문화적인 부분이다. 

 

춘절을 중시하고, 음식 문화도 비슷하고, 차를 즐기는 것도 비슷하고, 공자를 숭상하는 등에선 동일한 문화적 유전자(Meme)를 공유한다. 하지만 번체자와 홍콩식 광동어 등 홍콩인들끼리만 공유하는 문화적 유전자도 매우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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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남북한은 기본적으로 ‘한국어’로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선 정치체제와 이념이 완전히 다르다. 어휘나 풍속 또한 다른 점이 많기에 자주 오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분단된 지 이미 7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같은’ 종족(민족)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같은’이라고 할 때 그것의 기준이다. 

 

일반적으로 혈통, 언어, 문화적 유전자(밈) 등을 종족적 정체성의 주요 구성 조건이라고 본다. 근데 그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다. 

 

‘무엇이, 어디까지’ 같을 때 ‘우리’는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같은 종족(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화두를 붙잡고 이번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앞에서 말했듯이 식민지 홍콩 초기 중국에서 대량의 하층민이 유입되었고, 점차 다양해졌다. 태평천국 시기에는 동란을 피해 부유한 계층이 유입되었다. 

 

1856년 제2차 아편전쟁 시기에는 광저우(廣州)에서 민중들이 13행 공무역 상관(외국 상인들과 거래할 수 있도록 허가받은 13개 상점)에 방화를 했다. 외국 상관들은 속속 홍콩으로 이주를 했다. 물론 세계 각지로부터 일확천금을 꿈꾸며 신천지 홍콩으로 몰려오는 화교도 많았다.

 

 

홍콩에서 홍콩중국인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들 

 

해외 중국인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무엇일까? 

 

종교 시설, 즉 사당이다. 중국인들이 사는 곳에는 제일 먼저 사당이 들어선다. 사당은 홍콩뿐만이 아니라 중국인 사회의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해외 중국인들은 종족 내 크고 작은 분쟁을 먼저 사당이나 종친회를 통해서 해결해왔다. 

 

몇 년 전, 태국의 중국인작가협회가 개최한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들은 이야기다. 

 

태국 내 중국인 사회의 분쟁은 6대 문중의 원로들이 해결해주며, 결정에 불복할 경우 파문되어 중국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에게는 현지 실정법보다 커뮤니티의 권위와 종족 내 체면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홍콩에서도 마찬가지인데 1847년에 건립된 사당인 문무묘(文武廟)가 그 대표로서 지금까지도 홍콩(중국)인들의 정신적인 지주 노릇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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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묘 전경과 내부 / 출처-블로그<허수아비의 시선 -->

 

문무묘에는 시험을 비롯한 온갖 문서운을 관장하는 문창제, 승진과 사업운을 책임지는 관무제를 모시고 있어 찾아오는 홍콩(중국)인들의 발걸음은 오늘도 끊이질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문무묘는 일개 사당에 불과하다. 하지만 홍콩(중국)인 사회에서는 처음부터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주고 분쟁을 해결해주는 자치정부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 중국 대륙에서는 마을의 지도자들, 즉 향신(鄉紳)들이 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향신은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고, 행정의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기에 역대 정부로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지주계급을 숙청한다는 명분아래 2-3백만 명이 처형되면서 향신은 사라졌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여기저기에서 ‘비문명적인’ 무례한 행동을 하는 중국인들(물론 일부 중국인)이 나타나기 시작한 기원을 당시 향신 숙청부터 잡는 학자들이 많다. 전국적으로 향신들이 제거됨과 더불어 전통 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중국어에서 ‘예(禮)’는 ‘리(理)’로 풀이되는데, ‘예절’은 ‘이치’와 ‘도리’인 것이다. 갑자기 사라진 ‘도리’의 빈자리는 매우 큰 법이다. 

 

홍콩영국 정부는 중국인들의 대표 사당인 문무묘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을 통치 수단의 하나로 여겼다. 이른바 ‘중국인으로 중국인을 다스린다’는 ‘이화제화(以華制華)’였다. 정부의 행정부담을 들어주는 간접통치 방식이었다. 

 

홍콩의 중요한 중국인 단체는 몇 개 더 있다. 

 

그중 하나가 남북행공소(南北行公所)이다. 남북행공소는 1868년 중계 무역에 종사하는 중국인 회사들로 구성되었다.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협회인데, 나중에는 홍콩에서 제일 큰 상업 단체가 되었다. 은행과 보험 서비스를 포함하여 커뮤니티 치안과 소방 업무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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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원

 

1869년 창립되고 1872년에 정식으로 오픈한 동화의원(東華醫院)도 홍콩(중국)인 커뮤니티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동화의원은 광동(東) 중국인(華) 병원의 축약인데, 이름부터 서비스 대상을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동화의원은 식민지 초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중국인들에게 한방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당시는 홍콩영국 정부의 관심이 중국인들에까지 미치지 않았고, 중국인들 역시 서양 의료 기술을 신뢰하지 못하는 시기였다. 

 

지금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동화의원은 처음부터 의료, 공익, 자선 사업 외에도 중국인들의 민사 청원을 해결하고 중재해 주었다.  

 

 

홍콩인의 탄생

 

식민지 초기부터 홍콩인은 언제나 (우리네 인생처럼) 명분과 실리라는 두 마리의 괴물 사이에서 애매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어쩌면 식민 치하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아니 살아내고 있는 모든 홍콩인에게 부과된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명분인 ‘민족’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실리인 ‘돈’을 따를 것인가. 앞으로 그들은 이 두 가지가 교대로 (무자비하게) 던지는 질문에 순간순간 대답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최근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점을 중세까지 올려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지만, ‘민족’이라는 아이템이 자주 사용되기 시작한 건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던 건 분명하다. 

 

역사를 보면 팽팽하던 ‘명분’과 ‘실리’의 균형이 언젠가는 깨지는 시점이 오고야 만다. 홍콩인들에겐 1866년이 그 시작이었다. 1866년 광저우의 중국인들이 홍콩의 중국인 부자들을 공격하고 약탈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홍콩 중국인 사회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서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해 줄 조직을 만들었다. 비용은 순전히 개인이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서서히 홍콩에서 부유한 중국인들의 사회적 책임감이 증가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중국인’과 ‘홍콩(중국)인’의 정체성이 분리되는 시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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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과 ‘실리’는 팽팽하게 밀고 당기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한쪽으로 기울게 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 것이 ‘명분’이라면, 우선 먹고 살아야 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실리’이다. 

 

민족이 먼저일까? 내가 먼저일까? 다른 문화적 유전자가 생성되기 시작하는 갈림길에서 던져지는 질문이다. 

 

같은 종족(민족)이기에 ‘반종족(민족)적인’ 홍콩의 중국인 부호들을 공격하라는 것은 명분일까 실리일까, 같은 중국인이라는 외침이 ‘명분’이라면, 홍콩에서 살아가는 중국인의 생존은 ‘실리’가 된다. 

 

대륙의 중국인과 홍콩의 중국인이 더 이상 ‘같은’ 중국인이라는 범주에 편안하게 머무를 수 없는 시점이 온 것이다.   

 

1884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프랑스가 월남을 편드는 중국과 갈등이 생기자 대만과 중국의 푸저우(福州)를 공격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출범 이래 최대의 난관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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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편을 들 것인가, 중국 편을 들 것인가?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프랑스 군함의 정박과 보급을 허락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피해갈 수 없는 갈림길이었다. 이때 영국 정부의 ‘명분’과 ‘실리’는 무엇일까? 

 

중국 편을 든다면 프랑스 군함의 정박을 허락하면 안 되고, 프랑스 편을 든다면 군함의 정박을 허락해야 한다. 중국 편을 든다면 홍콩(중국)인의 지지를 받아서 식민통치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지만, 프랑스 편을 든다면 프랑스로부터 대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홍콩(중국)인들과의 관계는 어려워질 것이었다. 

 

어떤 선택을 하던 홍콩영국 정부는 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홍콩영국 정부는 프랑스 편을 들었고, 프랑스 군함의 선적을 위한 노동을 거부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벌금을 부과하였다. 프랑스에 저항하라는 중국 정부의 지시를 보도한 신문의 편집인은 기소하였으며, 항의하는 군중에게는 발포하였다.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한 달가량 지속되었다.

 

중국 정부(청나라)의 입장도 매우 ‘애매’했다. 표면적으로는 홍콩영국 정부를 비난하고, 같은 ‘민족’이라는 명분으로 홍콩인을 선동하고 있었지만, 실제론 홍콩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전쟁 비용을 홍콩영부 정부 터전 아래서 돈을 번 홍콩의 은행들로부터 조달하고 있었고,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탄약도 홍콩을 통해 수입하고 있었다. 

 

이런 ‘애매한’ 입장은 비단 청나라 정부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이후 군벌전쟁이나 국공내전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 이르기까지 동일했다. 홍콩의 정체성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잊지 말아야 할 지점이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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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초기 역사에서 중국인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1891년에는 목수들이 임금 문제로, 등나무 의자를 만드는 노동자들이 근무시간 문제로 파업을 했다. 어떤 학자는 영국에 반대하는 애국주의가 배후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생계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본다. 역사적인 사건사고는 언제나 그러하듯 우리에게 쉬운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홍콩이라는 영국 식민지의 중국인 노동자 계급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자신이 영국인이 통치하는 식민지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이고, ‘노동’으로 삶을 영위하는 ‘계급’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향후 중국 정부가 홍콩 문제를 그리고 중국인 노동자들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 그 방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중국 정부는 민족적 정체성이 강한 삼합회(三合會) 등의 비밀결사를 이용하여 노동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기도 했다. 

 

 

또 하나의 ‘홍콩인 정체성’이 형성되다 

 

식민지로서 당연하겠지만 초기 영국인들은 홍콩(중국)인들을 차별했다. 법원은 이중 잣대로 백인에게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홍콩(중국)인에게는 태형 등 비인도적인 판결을 하기도 했다. 야간 통행금지는 실질적으로 홍콩(중국)인에게만 적용되었다. 

 

빅토리아 산정(peak) 부근은 아편전쟁 이후 1백 년 동안 영국인들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지금도 홍콩의 최고 상류층이 거주하는 곳이다. 영국인들은 빅토리아산 정상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전통적인 마을의 특징을 그대로 재현하여 클럽, 호텔, 병원, 성공회 성당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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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산정과 산정에서 본 홍콩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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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 트램

 

지금도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피크 트램(Peak Tram)은 1888년에 운행을 시작했는데, 이는 원래 산 위 고급 주택가에 사는 영국인들의 출퇴근을 위해 설치된 교통수단이다. 

 

또한 홍콩의 주요 클럽은 홍콩(중국)인의 가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1846년에 창립된 사교클럽인 ‘홍콩클럽’은 점주, 홍콩(중국)인, 인도인, 여자 등을 받지 않았다. 노는 곳은 물론 사는 곳도 달랐다. 

 

식민지 초기 홍콩은 남자들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여 1872년에 시행된 인구조사를 보면, 홍콩(중국)인은 7대1, 유럽인은 5대1이었다. 당시 홍콩에서 사는 여자들은 홍콩(중국)인과 외국인을 막론하고 직업여성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초기 홍콩 사회를 들여다보면,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홍콩 간다’의 유래로 이런저런 설을 말하지만, 나는 이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교클럽 문화는 지금까지도 홍콩 문화의 특징 중 하나인데, 나는 딱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오랜만에 박사 지도교수를 찾아뵙자 사모님과 고민을 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 허락을 받았고, 같이 가자고 했다. 

 

유명 작가와 인문학자들이 정기적으로 식사를 하는 클럽이었다. 선생님은 홍콩의 클럽 문화를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클럽이 종횡으로 홍콩의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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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사교클럽 중 한 곳의 모습.

 

결국 이런 클럽 문화는 부정할 수 없는 홍콩 문화일진대 ‘우리’를 확인하는 과정 즉 ‘끼리’ 문화는 ‘그들’을 생성하고 ‘소외’를 동반한다. 홍콩 사회는 식민지답게 내부적으로 이미 그렇게 취약했다.

 

자본주의의적 성장은 거대 자본이 집중되는 것을 의미하고, 더불어 홍콩에서 홍콩(중국)인 재벌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뭉치기 시작했다. 

 

1896년에는 중화회관(中華會館), 1899년에는 홍콩(중국)인들의 상공회의소인 ‘화상회소(華商會所)’가 출범했다. 홍콩영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이 조직들은 사회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역시 ‘이화제화(以華制華)’ 정책의 하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치자인 영국인들과 부유한 홍콩(중국)인들이 상호 ‘실리’라는 접점에서 만나는 횟수와 범위가 확대되고 있었다. 

 

이렇게 민족이라는 ‘명분’은 약해지고 경제적 ‘실리’라는 문화적 유전자를 통해서 이익을 공유하는 – 새로운 기득권이라는 - 또 하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우리’ 즉, 홍콩의 상류층은 이렇게 태어나고 있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이후 3년 8개월 만에 돌아온 홍콩영국 정부는 홍콩(중국)인들에 대한 차별을 눈에 띄게 완화했다. 홍콩(중국)인을 정부 부서 책임자로 승진시키고, 홍콩(중국)인의 거주가 엄격하게 금지되었던 빅토리아 산 정상과 장주도(長洲島)를 개방했다. 

 

식민지 역사가 1백 년이 지났고 일본의 통치를 경험하면서, 지배자인 홍콩영국 정부와 피지배자인 홍콩(중국)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홍콩인’이라는 정체성 형성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이제 홍콩이 자랑하는 시스템을 살펴봐야 할 시간이 왔다. 식민지라는 속성 때문이겠지만, 홍콩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행정주도’라는 점이다. 홍콩의 행정 체계가 ‘동양의 진주’로 불리는 홍콩을 만들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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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는 초기 식민지 홍콩의 정치체제와 교육제도를 살펴보겠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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