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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올림픽 유치나 실행에 있어서 가장 주의하는 게 뭘까? 평창과 도쿄 올림픽을 보면 퍼뜩 이해가 갈 거다. 바로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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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표기 때문에 평창과 도쿄 올림픽에서 한바탕 홍역을 치른 걸 생각해보라. IOC는 언제나 올림픽이 정치와 연관되는 걸 극도로 경계해왔고, 그런 조짐이 보일 때면 어김없이 중재를 하거나 제재해왔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쇼’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와 거리를 두려고 하면 할수록 올림픽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역대 올림픽 중 정치적이지 않은 올림픽이 없었으며, 정치인들도 올림픽을 정치의 무대로 만들기 위해서 온갖 수를 다 써왔다. 올림픽만큼 정치하기 좋은 무대도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무대. 게다가 스포츠는 뭔가? 총성 없는 전쟁 아닌가? 민족주의가 한껏 고양된 무대 위에서 살짝 불씨만 당겨주면 활활 불타오를 수 있는 상황. 여기에 숟가락을 올리고 싶지 않은 정치인이 누가 있겠는가? 스포츠, 민족주의, 정치가 결합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002 한일 월드컵 때 4강 신화를 만들어냈고, 정몽준이 일약 대권후보 반열에까지 올랐다. 스포츠란 게 이 정도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올림픽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IOC가 정치를 멀리하고, 정치와 연관되는 걸 두려워 하지만, 이는 올림픽이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근대 올림픽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올림픽은 언제였을까? 바로 제11회 하계 올림픽, 베를린 올림픽이다.

 

우리에게는 故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대회로 더 유명하겠지만, 베를린 올림픽은 정치사적으로 세계사적으로, 그리고 올림픽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대회였다. 툭 까놓고 말하겠다. 아돌프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니 설령 일으켰더라도 최소한 패배하지 않았다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독일 역사에서 길이길이 빛날 영광의 순간이자, ‘올림픽이란 이렇게 개최하는 거다!’란 기준점이 됐을 거다(실제로 올림픽의 역사는 베를린 올림픽 전과 후로 나뉜다). 또한 정치사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너무도 컸다.  

 

“올림픽을 정치에 활용하는 올바른 예”

 

라고 해야 할까? 베를린 올림픽의 모든 건 그 이전과 달랐고, 그 모든 것에 있어 후대 올림픽의 기준이 됐다. 이 올림픽 덕분에 히틀러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힐 수 있었고,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를 포장할 수 있었다. 시간을 끌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히틀러는 올림픽이 개최되기 5개월 전부터 베를린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올림픽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었지만, 이 정치적인 대회가 히틀러 손에 들어간 순간 무한한 가능성을 안겨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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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5년 3월 16일 독일은 재군비 선언을 한다. 그 이전부터 독일군의 재군비는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히틀러의 재군비 '선언'이 가진 정치적 파장은 엄청났다. 이제 독일은 공식적으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가려 했다.

 

독일 재군비 선언 직후 유럽의 정치판은 급박하게 움직였다. 히틀러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고 해야 할까?

 

독일이 재군비 선언을 한 지 10일 후인 1935년 3월 27일, 프랑스와 소련이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다. 동서 양쪽에서 독일을 협공할 수 있는 포석이라 보였지만, 이 상호원조조약은 알맹이가 쏙 빠진 무늬만 원조조약이었다.

 

실질적으로 힘을 발휘할 것처럼 보였던 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모임이었다. 1935년 4월 11일 이탈리아의 휴양지 스트레사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정치지도자가 모여 재군비 선언을 한 독일을 비난했다. 소위 말하는 ‘스트레사 체제’였다.

 

이에 발맞춘 듯 국제연맹도 독일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이번 행동과 같이 유럽에서의 평화와 안전을 해칠 경우가 다시 발생한다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마지막까지 소련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국가 중 하나였지만, 히틀러가 총통의 자리에 오르자 소련을 법적으로 인정했다. 1934년 6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독일이 재군비 선언을 하자 소련과 상호원조조약을 맺는다. 독일의 재군비가 가져온 외교적 변화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히틀러도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영국에게 손짓을 했고, 유명한 ‘영독 해군 조약'을 맺었다. 공식적으로 영국 해군 대비 35%의 해군력을 확충할 권한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는 군사적으로도 외교적으로 의미 있는 조약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보유가 금지됐던 전함과 유보트를 건조할 수 있게 됐고, 총 톤수로 보자면 ‘워싱턴 체제’에서 프랑스가 확보했던 1.67 비율의 건조비와 비슷한 톤수를 인정받았다. 독일은 프랑스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는 외교적 성과도 얻었다. 히틀러에 대항하는 유럽의 공동전선을 무력화시킨 결과이기도 했다.

 

히틀러의 모험은 여기서 끝난 걸까? 아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다음 목표는 라인란트(Rhineland)의 재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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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란트(Rhineland)는 독일과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국경선과 라인강 지역을 의미한다. 알퐁스 도데가 쓴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되는 알자스-로렌 지역이 포함돼 있는 지역이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빠를 거다. ‘마지막 수업’에서 잘 드러났듯이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민족감정 문제도 얽혀있지만, 군사전략상 라인란트 지역은 중요했다.

 

강은 천혜의 방어선이다. 이 방어선 너머에 참호를 파놓고 대기하고 있는 건 독일군에게 상당한 압박이다. 1차대전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와 벨기에는 침공루트가 될 수 있는 라인란트 지역의 비무장에 목숨을 걸었다. 강을 장악하고 있으면 독일의 침공 루트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고, 역으로 독일 지역을 압박할 수 있다.

 

호기롭게 재무장을 선언한 히틀러지만, 라인란트 지역은 내버려뒀다. 히틀러 특유의 간보기다. 그러나 히틀러는 여기서 멈출 존재가 아니었다.

 

“라인란트를 재무장한다! 라인란트는 명백히 독일 영토다! 독일 영토의 주권을 행사하려면 독일군이 주둔해야 한다!”

 

히틀러의 주장에 독일군 장성과 외교관들은 히틀러를 뜯어말리기 바빴다. 이 상황에서 국제사회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히틀러가 곧 라인란트에 군대를 보낼 거다.”

 

문제는 시기였다. 유럽의 외교관들과 정치인들은 빠르면 1936년 9월에 라인란트에 대한 재무장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왜? 베를린 올림픽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국 외교관들은 1936년 8월 1일 베를린에서 있을 제11회 하계 올림픽 이후일 것이라 예측했다. 나라에 잔치가 벌어지는데, 그 전에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히틀러는 이 모든 예상을 뒤엎어 버렸다. 베를린 올림픽을 5개월 앞둔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 지역에 군대를 밀어 넣었다. 프랑스는 독일이 26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판단했으나 독일은 고작 독일군 22,000명과 지역 경찰 14,000명을 밀어 넣었을 뿐이다. 히틀러는 만약 프랑스와 영국이 반응하면 '실수였다'고 병력을 뺄 생각이었으나, 프랑스와 영국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허를 찔렸다고 해야 할까? 베를린 올림픽 이후에나 있을 거라고 판단했던 라인란트 재무장을 이렇게 급작스럽게 전개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올림픽을 눈앞에 뒀기 때문에 다들 여유를 가졌고, 히틀러는 이 틈을 치고 들어갔다.

 

그러나 올림픽의 정치적 활용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야말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준비가 다 돼 있었다.

 

올림픽은 히틀러에게 있어서 최고의 무대였다. 그리고 독일은 착실히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전 세계인들이 독일로 와서 히틀러가 준비한 올림픽을 보기만 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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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베를린 올림픽은 그 시작부터가 위태로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히틀러와 나치당의 반유태주의 때문이었다. 인종차별과 반유태주의는 나치당의 전매특허였고, 히틀러가 집권한 뒤 많은 유태인들이 독일을 떠나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지로 떠난 상황이었다. 이미 히틀러의 인종주의는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연히 베를린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 논쟁이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