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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대표 출장 갔을 때 국민의힘 입당한 윤석열

 

차기 대권주자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 2위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달 30일, 당대표도, 원내대표도 모르게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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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길로 들어설 때부터 극우보수세력에 들어갈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국민의힘 입당여부와 시기는 확실치 않았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의 특검에서 수사관으로 일했던 전력 때문에 박근혜 지지 세력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고, '제3지대 인물론'으로 부상하였기 때문에 본선까지 지지율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 쉽게 입당하지 않을 것이라 예견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국민의힘 관계자들도 윤석열의 입당사실을 당일에나 알았다고 한다. 이준석 당대표는 같은 시각 전남 여수ㆍ순천을 찾아 여순사건 희생자 유족들과 간담회를 하던 중이었고, 김기현 원내대표는 한 주 동안 휴가를 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87년 이후 민주적 정권교체가 공고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선 때마다 제3의 후보, 제3지대 인물론은 어김없이 등장했고, 반짝 인기를 누렸다. 이들이 새로 정당을 창당해 일시적으로라도 자기 세력을 구축한 뒤, 기존 양대정당 중 한 정당과 연합하는 경우도 있었고, 기존의 양 거대 정당 중 하나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이 제3지대 인물의 정치도전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하나 같이 실패로 귀결되었다.

 

대선 때마다 제3지대 인물로 부상했다가, 기존의 양 거대 정당에 귀의 또는 합종연횡 등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뿌리를 내리려 안간힘을 썼으나 실패한 인물들, 그러니까 ‘잠룡’이었다가 ‘잡룡’이 되어버린 이들을 정리해본다.

 

 

1. 제3지대 후보의 원조, 92년 대선의 ‘왕회장’ 정주영

 

김대중VS김영삼 라이벌 구도에서 치러질 줄 알았던 1992년 대선. 한순간 ‘잠룡’으로 급부상한 인물이 있었으니, 근현대 한국경제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인 정주영 회장이다. 제3지대 인물론의 원조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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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DJ, 김영삼 전 대통령은 YS,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는 ‘창’이라는 약칭이 따라다녔다. 정치적 거물에게만 붙여지는 약칭이 꽤나 부러웠던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 CY라 불리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왕회장이었고, 사후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왕회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나이 이미, 77세, 1992년 말 대통령 선거를 겨냥, 1992년 1월 1일 정치에 입문한다. 1992년은 3월 총선과 12월 대선이 한꺼번에 치러진 해였다. 그는 총선 45일을 앞두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31석 원내교섭단체를 구성, 정치권에 파란을 일으킨다. 이때 왕회장의 아들이자 훗날 ‘몽’으로 불리는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를 국회의원으로 동반 당선시켜, 대를 이은 ‘잠룡의 잡룡화’ 복선을 깔아둔다.

 

그가 정당까지 창당해 국회의원 선거 뿐만 아니라 대통령 선거에 직접 나선 이유는 1991년 10월 주식 변칙증여 혐의에 따른 현대그룹의 세무조사의 앙금 때문이었다. 1992년 1월 정치에 나서면서부터 새해 꼭두부터 “박정희, 전두환 뿐만 아니라 노태우 정권에도 매년 두 번씩 5~100억 원의 정치헌금을 냈다”고 폭로해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

 

3월 총선 직후 있었던 5월 전당대회에서 경선 없이 단독으로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다. 통일국민당 자체가 왕회장이 대통령 출마를 염두하고 창당한 정당이었고, 처음부터 왕회장에 의존하는 정당이었으므로, 정주영을 견제할 정치인이 있을 래야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대선 후보로 나서면서 “정경유착을 끊어낼 대통령”, “집권하면 1년 뒤 재벌을 해체하겠다”, “공산당 결성을 막을 필요가 없다”, “아파트를 반값에 공급하겠다”, “2000억 원을 통일국민당에 기부해 정치대학을 설립하겠다”는 파격적이고 저돌적인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경제대통령을 표방한 그는 당시 김영삼 후보를 국가경영능력이 부족하다고 공격하는가 하면, 김대중 후보에게 정치성향이 급진적이라며 공격을 퍼부었다.

 

일대 파란을 일으킨 왕회장에 기존 정치권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12월 선거를 코앞에 두고는 사전 선거 운동 혐의로 현대계열사에 국세청의 압수수색이 들어왔다. 그런 와중에도 이종찬, 김복동, 김동길씨를 영입해 입지를 넓혔다. 뿐만 아니라 선거 막판에는 ‘초원 복집사건’으로 유명한 YS를 지지하는 부산 기관장 대책회의 내용 폭로하는 배포를 보였다(왕회장은 당하지만 않는다 이거에요).

 

어쨌든 그는 1992년 선거에서 16.3%를 득표하고 낙선했다. 왕회장이 수도권과 충청권, 제주도에서 선전했던 걸 감안하면, 김대중 후보의 낙선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왕회장은 선거가 끝난 이듬해부터는 어마어마한 보복 비스무리한 것을 받는다. 1993년 1월 15일 출국금지 조치가 떨어지고 서울지검 공안1부에서 대통령선거법 위반 혐의 및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 등으로 소환조사를 받았다. 이후 2월 9일 의원직 포기와 함께 통일국민당 탈당, 정계 은퇴선언을 해버렸다.

 

정계 은퇴를 하고 2001년 서거 때까지 소떼 방북 기획 등 한국현대사에서 그 어떤 기업인도 하지 못할 업적을 세웠다.

 

 

2. 97년 대선, 피닉제의 탄생, 이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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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선은 국민의힘 전신인 신한국당의 내부분열로 제3의 후보가 탄생한다. '피닉제'의 서막을 알리는 이인제의 신한국당 탈당 및 독자출마다.

 

기업이 대규모 도산했고, 외환위기와 IMF구제금융으로 나라 살림 전체가 거덜났다. 1997년 선거에서 집권당인 신한국당에 대한 심판론이 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선거 구도 또한 신한국당의 폭망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야당 진영에서는 DJP연합이 이뤄졌으나 여당인 신한국당은 분열로 자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역할이 이인제의 경선불복 및 탈당, 독자출마였다.

 

1997년 이회창 후보가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지만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으로 지지도가 급락했다. 이 때 후보경선에서 2위를 한 이인제 경기지사가 9월에 탈당 후 독자출마를 결행한다. 당시 이인제를 따르던 전현직 의원들을 비롯한 지지자들은 11월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이런 와중에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회창 후보의 사이가 좋지 않아, 김 전 대통령이 이인제를 지원한다는 ‘국민신당 청와대 지원설’이 선거쟁점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이인제는 박정희를 연상시키는 점퍼차림을 하는 등 박정희 향수에 올라타는 전략도 펼쳤다. 나라가 도산하자 '경제는 박정희'라며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고, 그것이 박정희 향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젊음’과 ‘세대교체’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인제는 대선에서 19%를 득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뺏어오는 맹활약을 펼친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이다. 1위와 2위의 득표율이 1.5%로 역대 최소였던 점을 감안할 때 이 후보의 신한국당 탈당 및 독자 출마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후 이인제는 새천년민주당 입당, 대통령 후보경선 패배와 탈당, 독자 출마 등을 반복하면서 ‘피닉제’로 거듭난다.

 

 

3. 2002년 월드컵 대선, 정몽준의 급부상과 급하강

 

이회창VS노무현이 붙은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떠오른 또 하나의 잠룡은 왕회장의 아들 정몽준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의 한국대표팀 선전과 열기가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이었던 정몽준 대권론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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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4월,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국민경선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확정해놓고 있었다. 노무현 바람이 만만치 않았으나, 김대중 대통령 아들 비리, 지방선거에서 여당 참패와 이에 대한 책임론까지 이어지며 바람은 수그러드는 기세를 보였다. 여당 내에서는 후보를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제3의 후보로 정몽준이 부상했다.

 

9월 22일 조선일보-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정몽준의 지지율은 30.8%에 달했다. 이회창은 31.3%였고, 지지율이 하락한 노무현 후보는 16.8%였다. 민주당 내에서는 정몽준과 노무현 후보단일화 요구가 터져 나왔고, 후보단일화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정몽준이 대통령 선거 한 달 전인 11월 ‘국민통합21’을 창당하자, 후단협 일부 의원들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 쪽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월드컵 열기가 수그러들면서 정몽준의 지지율도 수그러들었고, 노무현 후보와 후보단일화 과정을 거쳐 단일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정몽준이 투표일 전날 후보단일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시키고, 집 앞까지 찾아간 노 후보를 끝내 바람맞히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고, 이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견인하게 된다. 분노하거나 위기를 느낀 노 후보 지지자들의 결집이 선거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어쨌든 월드컵 열기에 올라타 한순간에 잠룡으로 부상한 정몽준은 합의 파기 후 노무현 정권에서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보수진영에서 활약하였다.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다 박원순 전 시장에 패하면서 정계 은퇴의 길로 들어선다.

 

아주 잠시 잠깐 ‘잠룡’이었다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점차 ‘잡룡’의 길을 걸었으니, 결과적으로 아버지만도 못한 정치여정을 보여주었다. 아버지보다 하나 나은 점은 그래도 ‘몽’이라는 별칭이라도 얻었다는 점이다.

 

 

4. 2007년 대선, ‘잠룡’에 가장 가까웠던 문국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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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는 일찌감치 한나라당 이명박의 당선이 확실시됐기 때문에 보수진영의 분열이나 진보 진영의 후보단일화가 결과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제3의 후보, 이렇다 할 새로운 잠룡의 부상도 없었다. 이명박 후보 외에 차기를 노리는 가장 강력한 잠룡 박근혜만이 선거의 유일한 변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반짝 잠룡으로 부상해 선거철 떳다방처럼 정당을 만든 이가 있었으니, 창조한국당 문국현 당대표다. 전 유한킴벌리 사장이기도 했다. 여당의 참패가 예견된데다, 투표할 동력을 주지 못하는 인물이 여당의 후보로 나서는 바람에, 진보 지지자들 사이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운동의 장본인이자 기업인으로, 건설회사 사장 출신과 대비되었다.

 

문국현의 등장은 자못 파란 같이 보였다. 2007년 8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 문국현은 대선을 불과 두 달 앞둔 10월 창조한국당 창당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 대통합민주신당 이계안 의원을 비롯 정범구 전 의원(최근까지 주독일 대사), 최열 환경연합 대표, 김영호 전 산자부장관, 영화감독 이장호, 가수 문주란 등이 참석하고, 곽노현 방송통신대 교수(이후 서울시교육감) 등 3200여 명의 저명인사가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여당이었던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단일화하자는 논의도 있었지만 이뤄지지 못했고, 독자 출마했다. 보수진영에서도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독자 출마했고, 이인제 후보도 독자 출마했으나 대세가 이명박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어떤 변수도 되지 못했다.

 

대선 이후에도 문국현 바람은 계속됐다. 대선 이듬해 치러진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창조한국당은 3.8%의 지지율로 2명의 비례대표 당선자를 냈다. 그리고 서울 은평을에 문국현은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왕의 남자’로 불렸던 이재오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후 문국현 대표가 이끄는 창조한국당은 자유선진당과 연합해 연합교섭단체를 꾸렸다.

 

그러나 18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공천헌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어 대법원에서 최종 당선무효형을 받으면서, 그의 정치 인생은 초라하게 끝났다.

 

 

5. 2012년 대선, 안철수

 

2012년 대선에서 가장 큰 돌풍은 안철수였다. 지금의 윤석열 정도 될 것이다. 벤처기업가 출신 청년멘토로 등장한 안철수는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후보에게 ‘아름다운 양보’로 포장한 이벤트를 벌이며, 2012년 대선에서 최고의 변수이자 최고의 포지티브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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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당을 창당하진 않고 ‘진심캠프’로 출발하였지만, 결국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협상을 가장한 생떼를 보여줬다. 국민들의 지지가 떨어지자, 울면서 (후보단일화도, 후보 양보도 아닌) 대선 출마 포기선언을 해버린다.

 

2013년 김한길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 세력이 탈당하여 안철수 세력과 새정치민주연합을 만들었으나, 2014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후 김한길-안철수 세력은 문재인 대표체제에서 온갖 겐세이로 지도부를 흔들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는 문 대표에게 공천권 지분을 요구했지만 먹히지 않았고 호남지역구의원을 데리고 탈당, 국민의당을 창당한다.

 

2016년 총선에서 호남지역구의원 대거 당선, 비례대표의 선전으로 38석을 확보하며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국회 캐스팅보트로 떠올랐다. 그러나 2017년 박근혜 탄핵 후 치러진 대선에서 ‘그만 좀 개롭히십시오!’와 ‘제가 MB아바타입니까?’, 도리도리 등을 시전해 전국민이 안철수의 ‘새정치’는 실상 ‘빈정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대 대선에서 21.4% 득표,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19.55% 득표,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야권후보 단일화에 패배하면서 이제는 존재감마저 미미해졌다.

 

정치에 나서지 않을 때 가장 강력한 ‘잠룡’이었고, 정치에 나서면서부터는 수많은 ‘잡룡’ 중의 하나도 못 되는 인물이 되었다.

 

 

6. 2017년 대선, 잠룡일 뻔했던 그냥 ‘잡룡’ 유승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2017년 대선은 일찌감치 문재인 1강 구도체제로 들어선 선거였기에, 파란을 보여주는 후보도 없었다. 야권에서만 홍준표, 안철수, 유승민, 심상정 등 4명의 주요 후보가 출마했지만, 이렇다 할 위협이 될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잠룡이 될 뻔한 인물을 뽑자면 바른정당 유승민 정도 되시겠다. 바른정당은 박근혜 국정농단이 터지면서 새누리당에서 탈당한 몇몇 인사들이 합리적 보수를 표방하면서 창당한 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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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은 2015년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역임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국회법 개정안 처리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한테 찍혀 원내대표직까지 사임한 바 있었다. 이 일로 유승민은 새누리당에서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했고, 한겨레는 이런 기사까지 냈다(기사 링크).

 

2016년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유승민은 새누리당을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대구에서 당선되었다. 정치적으로 암흑기를 걷는 듯 했으나, 그해 연말 탄핵국면으로 접어들면서 합리적 보수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이준석‧하태경‧주호영 등등과 새누리당을 탈당한 인사들과 바른미래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2017년 대선에 출마했지만 득표율은 7%에 불과했다.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자유한국당과 합당하였고, 자신의 친구 아들인 이준석이 당대표를 하는 지금의 국민의힘에서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다. 잠시 잠룡이었던 시절의 추억을 상기하는 듯 하나 최재형, 윤석열에게도 짜치는 현실이다.

 

 

이상, 대선 때마다 대권을 꿈꾸며 떳다방처럼 정당을 만들든가, 정당에 드나들던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들의 특징은 기성정치인에게 염증을 느낀 대중이 관심과 지지를 보내자, 그 열기에 올라탄 뒤 호되게 혼난 뒤 짜게 식었다는 점이다. 이들 개인으로서도 별로 영광스런 정치인생은 아니었겠지만, 국민에게 끼친 영향 또한 그리 상콤하지 않았다.

 

 

상식이하 발언, 윤석열은 왜?

 

본격적으로 대권 도전 의사를 표명하고 정치에 나선 윤석열. 지지율이 하락세에 접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이번 대선에서 가장 큰 변수라는 건 틀림이 없다.

 

흔히들 윤석열의 ‘가난한 사람에게 부정식품 싸게 먹이자’라든가 ‘암 걸려 죽을 사람한테는 임상시험 전 신약을 사용토록 하자’는 발언은 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들 한다. 그래서 진짜 철학의 부재가 맞는지, 철학이 부재한 인물들은 다 저러는 것인지, 철학의 부재인 인물이 한 국가의 리더가 되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진짜 철학과 교수인 전남대학교 박구용 교수에게 문의해봤다.

 

“윤석열은 반지성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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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매스아이(이하 헤): 윤석열의 발언,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 수 있나?

 

박구용 교수(이하 용): 우리가 몇 가지 확인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리 사회와 뭔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 아닌가? 완전히 다른 세상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핵심은 지체된 의식, ‘의식지체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사회적 활동, 사회적인 역할, 토론 등을 통해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관여하고 있는데, 이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거 같다.

 

의식지체현상의 가장 큰 무서운 특징은 '반지성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모든 문제를 단순화한다. 정치상실, 정치부재현상을 뚫고 비집고 올라오는 대표적인 현상이다.

 

헤: 그럼에도 윤석열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고, 지지율도 높다.

 

용: 정치와 언론이 시민들의 의견과 의지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면, 윤석열처럼 매우 단순한 콘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포퓰리즘, 파시즘을 형성하는 전통적인 과정이다. 대개 양자택일,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콘셉트를 가지고, 선과 악의 구도로 반정치, 반지성, 반시민, 선과 악의 구도로 몰고 가서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세력이다. 윤석열의 부상과 저 반지성적 발언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보통 반지성주의자나 포퓰리스트는 양자택일, 선과 악의 구도를 이용한다. 이준석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고, 트럼프도 그런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반지성주의 또는 포퓰리스트들이 그걸 이용하기는 해도 스스로가 그렇게까지 무지하진 않다. 그런데 윤석열은 진짜 무지한 거 같다. 우리 사회에서 보통 대학생들 정도면 또는 고등학교만 나왔어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의식 조차 없다는 게 놀랍다.

 

헤: 입만 열면 논란이 생기는 게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인 것 같다.

 

용: 어느 부분에서는 들통이 날 것은 알았지만 상상을 초월한다는 게 놀랍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한 조직의 수장을 맡아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마지노선 지키고 있었다는 것도 놀랍다.

 

 

“윤석열은 배신자 아닌 괴물”

 

용: 난 윤석열은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만든 괴물이냐? 우리가 만든 괴물이다. 배신자가 아니라 괴물이다.

 

헤: 괴물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면 어떤 모습일까? 괴물이 대통령이 되면?

 

용: 괴물이 토마스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이다. 그 리바이어던이 강력한 힘을 갖게 되면,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너희들 다 내가 죽여도 다 나에게 복종해야 돼! 이렇게 된다. 우리는 지금 괴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보기 드문 괴물. 괴물이 나타났다!

 

헤: 윤석열은 계속 지지율을 유지할까?

 

용: 윤석열이 계속 이런 식으로 가게 되면 우리가 밑바닥을 확인하는 거 아닌가, 이 정도?

 

헤: 국민의힘에 윤석열이 입당했는데, 그 당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용: 깜짝 놀랐을 거다. 근데 이준석 같은 국민의힘은 윤석열을 이용한다. 이준석은 원래 유승민맨이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에 전형적으로 세뇌된 사람. 그 사람들이 윤석열은 보고 진짜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이 정돈가?’ 하고.

 

어떻게 보면 더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걸 극으로 몰고 가서 딱 폭파시킬 수 있으니까. 윤석열은 반기문처럼 빨리 수건을 던지지 않을 것이다. 반기문은 겁이 많아서 빨리 수건을 던졌는데, 윤석열은 그럴 거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극적인 정점에서 폭파시키면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최고일 것이다. 그런 식의 기획은 가지고 있는 거 같다.

 

헤: 최종 후보가 될 수 있을까?

 

용: 어렵다고 봐야 한다. 지금 이 수준이면 정말로 어렵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를 지도하고, 이끌어가야 할 사람의 의식이 일반시민을 못 따라 간다는 게 너무 놀랍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