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5~60년대, 늦으면 70년대 초반까지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앞섰던 건 주지의 사실이죠.

주로 남한 출신인 남파 공작원들이 남한에 와서 옛 가족이나 친지 집을 찾았을 때 단골로 뱉는 멘트가 이거더군요. “우리가 왜 이렇게 못 사는지 아니?” “이게 사는 거니?” “이건 사람이 사는 게 아니야.” 이유는 다 미제 탓이고 자신들이 사람답게(?) 사는 건 김일성 장군 탓이지만요. 박정희 대통령 형인 박상희의 절친이자 박정희 본인의 멘토였던 황태성도 평양의 발전상을 담은 필름을 가져왔는데, 박정희가 그걸 보면서 “우린 언제 저렇게 되나” 한탄했다고 하니 북한의 ‘첫끗발’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스포츠에서 최초로 남북대결이 벌어진 것은 배구였습니다. 1963년 뉴델리에서 펼쳐진 1964년 도쿄 올림픽 예선이었죠. 최초의 대결은 남자배구가 먼저였습니다. 격전 끝에 북한을 3대2로 이겼죠.

여자배구팀을 포함한 한국 응원단은 격정을 넘어 좀 과열된 응원을 펼칩니다. “아오지 탄광 물러가라. 빨갱이 죽여라.(1963년 12월 27일 동아일보)”  한국 응원단 가운데에는 남북송환을 거부하고 중립국을 택했던 76인의 포로 가운데 한 명이 포함돼 있었다고 합니다. 76인의 포로들도 인도를 택하냐 남미를 택하냐 등에 따라 갈렸고 인도를 택한 이들은 좌익 성향으로 의심받았다고 하는데 그는 어찌어찌 정체성을 남쪽으로 잡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여자배구팀은 북한 ‘괴뢰’ 배구팀에게 3대0으로 셧 아웃되고 맙니다. 당시 북한 임원이 돌발 인터뷰에서 “배구는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즐긴다.”고 했으니 여자배구팀의 실력이 더 나았던 모양입니다. 국제대회에서도 그랬죠. 여자배구의 세계적 활성화가 늦은 탓이긴 합니다만 북한은 1970년 세계 배구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당대 세계 최강 일본팀이 깊이 연구할 정도의 실력이었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남북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납니다. 3, 4위전에서 동메달을 놓고 맞붙은 거죠. 이때 북한의 주포로 활약한 이들이 김증복, 강옥순 등입니다. 2011년 아시아 여자배구 선수권 대회 때 간만에 출전한 북한팀 감독의 카리스마가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이 강옥순이었죠. 김증복의 경우 그 스파이크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남자다!”라는 설이 제기돼 성별 검사를 받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선 김영자, 이순복, 그리고 조혜정 등이 나섰지만 강력한 스파이크를 때리는 북한에 완패당합니다. 15대 7, 15대 9, 15대 9.

북한은 동메달을 땄습니다. Korea의 이름을 쓰는 팀 중 구기종목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었지요.

북한에 연거푸 진 여자배구팀의 절치부심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야 끝납니다. 여자배구 대표팀은 북한을 3대0으로 잡는 쾌거를 이룩합니다. 테헤란 아시안 게임은 북한이 처음 출전하는 아시안 게임이어서 메달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심지어 운동 놓은 지 한참 되는 역도 선수 출신 신민당 국회의원 황호동을 급거 출전시킬 정도였지요. 이 황호동 의원, 아니 선수는 동메달을 딴 뒤 여자배구 북한전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선수들이 북한을 3대0으로 이긴 순간 그는 코트로 내려와 선수들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선수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뮌헨 올림픽 때 우리가 익히 아는 검은 9월단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선수촌을 습격,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사건이죠. 그 때 여자배구 선수들도 새벽의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유경화 선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가 이것이었다지요. “6.25가 터졌구나.” 서독 뮌헨에서 6.25라니. 여자배구 선수들은 조심조심 창밖을 내다봅니다. “머리 검고 얼굴 노란 동양인은 없었다.”

남북대결이 펼쳐질 때 선수들은 배구장을 보면서 네트가 38선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경기에서 지면 ‘증오와 한탄과 적의’ 속에 경기장을 나섰고, “빨갱이 죽여라.”고 외칠 수 있었으며, 또 북한한테 지기 싫어서 스파르타식 중에서도 독하기로 소문난 일본 코치를 초빙해 기절할 때까지 스파이크 리시브 훈련을 받았죠. 결국 여자배구는 1974년 북한을 넘어섰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1972년의 북한처럼 동메달을 땁니다.

70년대 당시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 선수들은 경기를 전쟁처럼 치러야 했습니다. 이기면 좋다가 아니라 지면 죽는다는 정신으로 리시브하고 스파이크를 때려야 했지요. 상대방이 강하면 “저거 남자 아니야?” 의문을 제기했고 “빨갱이 죽여라.”고 과감하게 악을 썼습니다. 누군가 실수하면 발을 동동 굴렀고 그 선수는 우거지상이 돼 어쩔 줄을 몰라 했지요.

그런데 도쿄 올림픽의 한국 선수들은 그렇지 않더군요. 져도 웃음, 실패해도 미소. 승부를 놓칠 수야 없지만 경기를 즐길 줄 아는 모습이 너무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 활기와 기상 속에 과거의 절박함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코리아’의 여자배구 선수들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선수분들께, 그리고 '연경제(軟景帝)' 김연경 선수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