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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936년 8월 1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가 지휘하는 팡파르에 맞춰 히틀러가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등장한다. 수많은 관중들이 한 손을 높이 들어 나치식 경례를 했다. 

 

괴벨스가 써 준 개회 선언문을 들고, 아돌프 히틀러가 개회 선언을 한다. 그렇게 베를린 올림픽은 시작된다. 

 

첫 사진.jpg

 

사실 올림픽을 유치한 건 히틀러가 아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끝 무렵인 1931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이 됐고(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여유 있게 따돌렸다), 혼란한 와중에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올림픽을 준비하게 된 거다. 

 

 

1.

 

히틀러는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로 작정을 했고, 그대로 준비를 했다.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의 위엄과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실내 수영 경기장. 4천여 명의 선수단을 위해 베를린 교외에 만들어진 올림픽 선수촌은 올림픽의 ‘기준’을 보여줬다. 지금 펼쳐지는 올림픽의 형식미는 베를린 올림픽 때 다 만들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너무 당연한 성화 봉송. 원래 성화를 채화하는 건 9회 올림픽이었던 암스테르담 올림픽 때부터였지만,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지까지 성화를 가져오는 건 베를린이 처음이었다. 

 

확실한 연출, 스토리 라인을 제대로 짰다고 할까? 독일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장부터 베를린까지 성화 봉송 경로를 따라 3,422명의 성화 봉송 주자들이 각각 1킬로미터씩을 달렸다. 

 

이게 가지는 의미가 무얼까? 

 

나치는 올림픽이란 행사를 통해서 독일 국민들을 포섭하려 했던 거다. 올림픽 성화가 독일 곳곳을 지나갈 때 이 성화를 운반하는 봉송 주자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 봉송 주자들을 쫓아 달리는 수많은 나치 청년들. 독일인의 민족주의를 건드렸고, 소속감과 일체감을 고양시키는 거였다. 이 봉송 행사는 잭팟을 터트렸다. 

 

성화봉송.JPG

 

(재미난 사실은 이때 사용된 성화봉을 만든 게 크룹社(사) 였다는 거다. 독일인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 기업이라고 해야 할까? 철강 기업이며 동시에 무기 생산으로 유명한 크룹이 성화봉을 만든 거였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암시한다는 거였을까?)

 

독일인들은 열광했다. 열패감에 찌들어 있던 독일 국민들이 눈에 보이는 ‘소속감’을 확인할 수 있었고,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느끼게 된 거였다. 히틀러는 교묘했다. 올림픽이 열리는 베를린 곳곳에 독일 국기와 나치의 스와스티카를 같이 올려놨다. 독일과 나치를 동급으로 만든 깃발들이 베를린 이곳저곳을 메웠다. 

 

선전을 위해 경기는 라디오 생중계로 방송됐고, 부족하긴 했지만, 초기형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하기도 했다(물론, 그닥 큰 재미는 못 봤다. 어쨌든 나치가 선전에 목 메단 건 확인할 수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텔레비전 카메라..JPG

 

 

2. 

 

베를린 올림픽은 그 이전의 올림픽과 규모나 세세한 디테일.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달랐다. 어느 정도로 디테일에 신경 썼냐면, 메달을 딴 선수들이 받는 월계관과 화분까지 신경을 썼다. 

 

우리나라 손기정 선수도 받은 이 참나무 묘목 화분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부르 참나무이다. 원래 올림픽 하면 올리브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히틀러는 참나무를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바로 독일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참나무는 독일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다. 참나무를 뜻하는 켈트어 다이르(dair)는 고대 켈트족의 제사장을 뜻하는 드루이드(Druide)에서 유래했다. 독일의 성씨 중 참나무와 연관된 성이 상당히 많고, 참나무와 연관된 지명만 1,400여 개가 넘어간다. 

 

이 중에서 로부르 참나무는 특히 유명한데, 종교 개혁의 선봉장이었던 마틴 루터를 기념하기 위해 독일 전역에 심은 나무가 바로 로부르 참나무였다. 히틀러의 사상적 기틀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는 툴레 협회의 문양에도 이 로부르 참나무가 들어가 있다. 

 

손기정 컬러.JPG

▲1936년 8월 9일 손기정(가운데)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후 시상대에서 월계관을 쓰고 참나무 화분을 들고 서 있다. 같은 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 남승룡(왼쪽)과 2위로 입상한 어니스트 하퍼가 함께 시상대에 올랐다. / 출처-<연합뉴스>

 

히틀러는 우승자에게 이 로부르 참나무로 만든 월계관과 1년생 로부르 참나무 묘목을 건넸다(손기정 선생이 들고 있는 화분이 바로 로부르 참나무 묘목이다). 이 화분에는, 

 

“승리의 영광을 위해 자라고, 또 다른 업적을 이루자.”

 

라고 적혀 있었다. 히틀러는 이 참나무 묘목을 건네면서, 

 

“고국으로 돌아가 적당한 곳에 심고 가꿨으면 좋겠네.”

 

라고 권했다. 이 이야기를 손기정 선생도 들었고, 당연히 이 참나무를 심었다.

 

(손기정 기념관에 있는 참나무는... 히틀러가 선물한 묘목으로 심은 거다. 생각해 보면, 히틀러와 악수하고 선물을 받은 한국인은 손기정 선수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3.

 

이렇듯 화분 하나에도 의미를 두고, 연출을 신경 썼던 게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을 성공시키고 싶었다. 이 때문에 그동안 자신이 보여줬던 인종주의적인 모습을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올림픽 동안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상당 부분 해소됐고, 가게마다 붙어 있던 ‘유태인 출입금지’란 문구도 어딘가로 치웠다. 또한 나치 당원과 선수촌 시설 관계자들 및 안내원들에게 특별교육을 했다.

 

“한눈에 봐도 유태인인 것처럼 보여도 내색하지 않고, 다른 백인 선수단을 대우하듯 친절히 상대할 것.”

 

이런 교육은 계속 이어졌다.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대우한다.”

 

그동안의 이미지를 탈피해서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썼다고 해야 할까? 대회 기간 내내 해외에서 온 유태인들과 동성애자(?!)들은 다른 인종, 다른 성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차별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압권은 역시나 제시 오언스(Jesse Owens)와 손기정이었다. 게르만인의 혈통적 우월성을 증명하겠다며, 가장 많은 올림픽 선수단을 꾸렸던 독일인데, 육상 단거리에서는 ‘짐승만도 못한 흑인’이 4개의 금메달(100m,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을 따냈고, 올림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마라톤에서는 명예 아리아인도 아니고, 그 명예 아리아인이 식민지로 만든 나라에서 온 인물이 우승을 한 거다. 

 

오웬 다른 사진.jpg

4개의 금메달을 수상한 제시 오언스(Jesse Owens)

 

히틀러는 이 짐승 같은 흑인과 아시아인이 우승하는 걸 봐야 했다. 게르만인의 혈통적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대회가 어그러져 버린 거다.

 

(처음에 히틀러는 우승자들을 로열박스에 불러서 악수를 했었는데, IOC 측에서 국가원수가 사적으로 선수를 불러선 안 된다고 하여 그 뒤로는 하지 않았다. 제시 오언스와 일부러 악수하지 않은 건 아니다)

 

(직전 대회인 LA 올림픽 때부터 흑인들의 육상 종목 선전이 시작됐고, 베를린 올림픽에서 흑인의 신체적 능력이 증명되게 된다. 이때부터 세계 스포츠계는 흑인으로 재편되게 된다)

 

히틀러는 최대한 반유태주의나 인종주의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고,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물론 측근들에겐,

 

“유색인종들이 메달을 너무 많이 따는데?”

 

라면서 불만을 터트리긴 했다. 그런데 이걸 히틀러만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제시 오언스가 금메달을 땄을 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 흔한 축전 한 통 안 보냈고, 나중에 백악관 초청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히틀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4.

 

암튼 히틀러는 이렇게 베를린 올림픽으로 자신이 얻어낼 수 있는 모든 걸 얻어냈다. 대외적으론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줬고, 독일이란 나라가 부활했다는 걸 온 세계에 선포했다. 

 

올림픽까지 치른 나라가 긴장을 일으키고,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진 않을 거란 방심도 유도할 수 있었다. 대내적으론 독일 국민들의 일체감을 조성했고, 나치당에 대한 신뢰와 나치들이 주장하는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제대로 보여줬다. 

 

(거대한 컨벤션이라고 해야 할까? 베를린 올림픽 기간 내내 나치의 선전에 계속 노출됐고, 그 주장이 스며들게 된 거다)

 

틀러 킹.jpg

 

올림픽 기간 내내 베를린은 하나의 거대한 연극무대가 됐고, 사람들은 히틀러가 내놓은 꿈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끝이 났다. 

 

서두에 베를린 올림픽이 근대 올림픽의 기준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기준의 하나가 되는 영상이 1938년 4월 20일 개봉됐다(참고로 4월 20일은 히틀러의 생일이다).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올림피아>가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수많은 스포츠 중계의 방식들이 이 올림피아에서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큐멘터리의 탈을 뒤집어쓴 선전물인 <올림피아>는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럼에도 영상 자체는 꽤 잘 만들었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의 손기정 선생의 모습을 찍은 건 꽤 공을 들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손기정 선수 모습은 연습 때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활용한 걸 확인할 수 있다. 경기번호가 다른 걸 확인할 수 있다)

 

1시간 52분 경부터, 단상에 오른 손기정 선수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베를린 올림픽은 끝이 났다.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지만, 결국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올림픽. 이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착실히 활용해 자신의 야망을 달성한 히틀러. 

 

다시 말하지만, 올림픽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아베가 부흥올림픽을 말하며 도쿄 올림픽을 유치하려고 했던 이유도 이와 같은 거였다. 그들이 후쿠시마 농산물을 선수들에게 먹이려 하는 것도, 후쿠시마 목재로 벤치를 만드는 것도 다 이런 정치성의 연장인 거다. 

 

IOC는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어지간하면, 정말 심한 게 아니라면 넘어가는 것도 다 정치 때문이다. 정치와 거리를 두려 하지만, 정치적으로 매력이 없다면 올림픽을 개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이선/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에 대한 소고 - 히틀러 참나무의 진실/한국조경학회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