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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6일 필리핀 의회, 두테르테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국정연설(SONA, State of the Nation Address)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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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는 상하 양원 공동의회에 매년 7월 마지막 주 월요일 대통령이 참석하여 지난 1년간의 국정에 대한 보고와 향후 국정 운영 방향에 대해 국민에게 보고하는 전통이 있다. 

 

특히 집권 5년 차 마지막 국정연설에서는 임기 동안 이룬 업적에 대한 나름의 평가가 연설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필리핀 대통령은 6년 단임제이며, 두테르테 대통령의 임기는 내년 6월 30에 종료된다)

 

이번엔 코로나 사태로 제한된 인원만 참석하고, 부통령을 포함하여 많은 정부 인사들은 온라인으로 참여했다. 이번 두테르테 대통령의 마지막 SONA는 2시간 46분이나 이어지며 1986년 이후 가장 긴 연설로 기록되었다. 

 

일반적으로 집권 마지막 SONA가 끝난 후에는 정권 전반에 대한 평가와 함께 차기 대선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어진다. 그러나 올해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이러한 논의의 열기가 삭감되었다. 

 

 

차기 대선 열기가 묻힌 두 가지 이유

 

① 코로나 사태의 심각성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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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은 지난해부터 코로나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lock-down) 정책에도 불구하고 매일 수천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필리핀은 최근 확진자 수 감소와 백신 접종 본격화로 통제 수준을 낮추려고 하였다. 

 

그러나 델타 변이 바이러스 확산으로 확진자 수가 다시 증가하고 있다. 주변국들처럼 새로운 유행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여 통제 수준을 낮추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코로나라는 질병 자체 외에도 다른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그동안 강력한 통제 정책하에서 힘겹게 버텨왔던 서민들의 삶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SONA 이후, 정치적 이해득실을 논하는 것이 자칫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한 것이다. 

 

 SONA 당일 저녁, 필리핀 전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일본 역도 경기장에서 날아 온 낭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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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MBC>

 

1924년 파리 올림픽부터 참여한 필리핀 올림픽 97년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 획득 소식이었다. 

 

여자 역도 55kg급 경기에서 필리핀의 하이딜린 디아즈(Hidilyn Diaz)가 중국의 랴오추원을 1kg 차이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역사적인 금메달 획득 소식은 SONA에 대한 필리핀 국민의 관심을 일제히 앗아갔다. 

 

대중적인 인기와 인지도가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간주되는 필리핀 정치에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디아즈가 이제 막 시작된 차기 대선 경주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될지 주목해 볼 일이다. 그녀는 지난 2019년 필리핀 정보기관에 의해 반정부 인사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각종 불이익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필리핀 전 국민이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스포츠 이벤트가 또 하나 있다. 

 

오는 8월 21일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필리핀 상원의원이자 과거 복싱 8체급 세계 챔피언을 지낸 매니 파퀴아오(Manny Paquiao)와 현 WBC와 IBF 웰터급 통합 챔피언 에롤 스펜스(Errol Spence Jr.) 간의 타이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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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는 필리핀 스포츠 영웅이자 차기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는 파퀴아오가 출전한다는 점에서 국민적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정치적 동지였던 두테르테 대통령과 불화가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경기 이후 필리핀 국민의 여론이 어떻게 형성될지가 차기 대선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선의 가장 큰 이슈, 두테르테의 부통령 출마

 

내년 대선과 관련하여 볼 이런저런 사안들은 많지만, 최근 대선 관련 가장 큰 이슈는 아무래도 현 두테르테 대통령의 거취 문제이다. 단임제 대통령으로서 임기 종료와 함께 정계에서 물러나 국가원로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줄 것이 일반적인 기대이다. 

 

그러나 최근 두테르테 대통령이 내년 대선에서 부통령으로 출마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함으로써 대선 정국에 새로운 변수로 등장했다. 그는 정치적 평형(equilibrium)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개혁정책이 지속될 수 있도록 부통령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의 발언은 임기 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높은 지지도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측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편 야권에서는 이를 퇴임 후 예상되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조사와 처벌을 회피하려는 꼼수라고 비판한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약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자행된 ‘대중 학살’(mass murder) 혐의로 2017년 ICC에 제소되었으며, 조사와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에 대해 두테르테 대통령은 필리핀 국내법이 아닌 어떠한 국제기구에 의한 조사나 재판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퇴임 이후에도 이러한 주장을 지속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기에 결국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통령 출마를 고려한다고 보는 것이다.

 

필리핀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을 금하고 있지만, 퇴임 후 다른 직위에 출마하는 것을 금한다는 규정은 없다. 실제로 대통령 퇴임 후 또 다른 선출직 직위에 출마한 사례는 예전에도 있었다. 

 

2010년 아로요 대통령은 임기 중에 끊임없이 제기된 부정선거와 부정부패 협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퇴임과 더불어 고향에서 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바 있다. 그리고 2001년 제2차 국민혁명(People Power II)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진 후 마닐라 시장에 출마하여 당선된 사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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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요(왼) / 에스트라다(오)

 

그러나 두테르테 대통령의 경우는 이상의 사례들과는 차이가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경우에는 비록 부통령이라는 하위직에 출마하더라도 여전히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두테르테는 부통령 출마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만약 야권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어떻게 하겠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즉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부통령으로서 자신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부통령 출마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단임제 대통령 임기 말에 찾아오는 레임덕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처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임기 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높은 국민의 지지도를 유지하고 있는 두테르테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대선에 뛰어들지 않더라도 그가 지명하는 후보가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집권 여당인 필리핀 민주당(PDP-Laban) 내에서는 최근 차기 대선 후보 지명과 관련하여 분열이 가중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두테르테 대통령과 복서이자 상원의원인 파퀴아오가 있다. 

 

 

임기 말 두테르테, 파키아오와 링 위에 서다 

 

파퀴아오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권투를 통해 부와 권력까지 얻은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필리핀 대중들의 높은 인기를 바탕으로 일찍이 차기 대선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 

 

그는 집권 여당의 대표(Acting President)로서 그동안 정부가 추진하는 ‘마약과 범죄와의 전쟁’이나 ‘사형제 부활’과 같은 주요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두테르테 대통령의 적극적 지지자로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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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 두테르테 대통령과 파퀴아오의 갈등은 현 정부의 친중국 외교정책에 대한 파퀴아오의 부정적 의견 표명에서 시작되었다. 

 

최근 필리핀 서해 인근에서 중국 선박이 계속 활동하는 것에 대해 필리핀 외교부가 중국 정부에 항의했다. 자국의 바다에서 중국 선박이 멋대로 활동하는 것에 필리핀 국민들은 대체로 감정이 좋지 않다.  

 

친중국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는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4월 28일 중국과의 관계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중국과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좋은 친구다. 특히 많은 백신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큰 빚을 지고 있다.”

 

이러한 두테르테 대통령의 입장과는 달리 파퀴아오는 지난 5월 3일 두테르테 대통령의 대중국 정책에 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미흡하고 다소 실망스럽다”는 의견을 밝혔다. 

 

파퀴아오는 현재 두테르테 대통령의 중국에 대한 입장은 과거에 견지했던 입장과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과거에 “내가 필리핀 국기를 내건 제트스키를 타고 남중국해 분쟁지역으로 가서 그곳에 필리핀 국기를 꽂겠다”고 했던 말을 언급하면서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싸울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파퀴아오의 의견에 대해 두테르테 대통령은 

 

“파퀴아오는 난사군도를 둘러싼 외교적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좀 더 공부가 필요하다.”

 

고 밝혔다. 이에 그치지 않고 6월 28일 대국민 주간 국정브리핑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은 또다시 파퀴아오에 대해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군사화에 대한 우리 정부의 ‘부족한’ 대응을 비판하기 전에 외교정책을 먼저 공부하라.”

 

고 말했다. 더불어 “그가 권투에서 챔피언이라고 정치에서도 챔피언이 되는 것은 아니다”며 그의 대선 도전 의도를 꼬집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파퀴아오는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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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 대통령의 의견은 존중하지만, 외교정책에 대한 나의 이해에 관한 그의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더불어 부패 척결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현 정부가 오히려 과거 정부보다도 더 부패했다고 말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파퀴아오에게 현 정부의 부패 사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 증거를 제시하지 못할 시에는 거짓말쟁이임이 분명하므로, 자신이 직접 나서서 차기 대선에서 거짓말쟁이인 파퀴아오를 찍지 말라고 촉구할 것이라며 강경하게 반응했다.

 

파퀴아오는 같은 날 자신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며 두테르테 대통령의 요구에 대해 답변할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최근 COVID-19와 관련된 예산 집행 과정에 다양한 부정부패가 이루어진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 10월 두테르테 대통령이 자신의 정부에서도 부정부패가 지속되고 있다고 인정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두테르테 대통령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노력에 부응하려는 의도라고 밝혔다.

 

 

분열된 집권 여당, 권력의 향방은 파퀴아오의 경기 결과에?

 

집권 여당 내에서는 두테르테 대통령을 차기 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대통령 후보를 그가 지명하도록 하자는 의견이 있으며, 이와 같은 의견을 주도하는 인물은 당의 부의장이자 정부의 에너지 장관인 알폰소 쿠시(Alfonso G. Cuci)이다. 

 

파퀴아오는 쿠시가 두테르테 대통령과 당 지도부를 이간질하고 여당의 차기 대선 후보를 당 외부에서 영입하려 시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여기서 말하는 당 외부인사는 현재 차기 대선주자 국민 선호도 1위를 달리고 있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이자 현 다바오시 시장 사라 두테르테(Sara Duterte)를 염두에 둔 것이다. 

 

두 분파로 갈라진 여당 내에서 파퀴아오가 이끄는 당 집행위원회는 쿠시와 그의 동조자 2명을 해당 행위를 이유로 당에서 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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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쿠시(좌) / 파퀴아오(우)

 

이에 반발해서 쿠시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분파는 당 의장(Chairman)인 두테르테 대통령과 함께 7월 17일 당 전국의회를 소집하여 당의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 자리에서 쿠시는 당 대표(President)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집권 여당 내에는 두 개의 집행부가 존재하게 된 것이며, 만약 타협과 양보가 없다면 오는 선거에서 어느 집행부가 합법적 권리를 가질지는 법의 판단에 달려 있다. 

 

파퀴아오는 현재 미국의 라스베가스에 머물면서 8월 21일로 예정된 웰터급 통합 챔피언전을 대비하고 있다. 루퍼스 로드리게스 필리핀 하원 부의장은 파퀴아오가 시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멈춰줄 것을 촉구하면서, 경기가 끝난 후에 정치적 논쟁을 할 충만한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핀의 스포츠 영웅과도 같은 파퀴아오의 경기는 필리핀 국민 대부분이 관람한다. 파퀴아오의 복싱 경기 열기가 필리핀 정치에 어떻게 반영될지는 8월 21일 이후에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파퀴아오가 필리핀 정치의 링에서 맞서야 할 상대는 다름 아닌 임기 말 두테르테 대통령이다. 

 

김동엽 (부산외대 교수 & 아세안연구원)

 

 

 

 

편집부 주

 

김동엽 교수의 새 책이 나왔다.

필리핀 한인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17인의 필리핀 이주민들의 인터뷰를 실으며,

새로운 시각으로 해외에 이주한 한인들이

정착해가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동남아에 사는 교민들의 삶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읽어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책소개 <기사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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