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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기록적인 폭우가 있었고 현재는 힌남노 탓에 또 전국이 비상이다. 대통령도 일찍 퇴근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다 호되게 혼이 나서인지, 이번엔 철야 비상대기를 한댄다. 사실 이런 기록적인 자연재해에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는 건 불가능하다.

 

재해가 재난이 되는 것은 얼간이들이 책임을 지는 자리에 앉아서 멍청하기 그지없는 결정을 내릴 때다. 세월호의 좌초 자체는 교통사고였다. 하지만 300여 명이 넘는 이들이 희생되었던 과정은 책임이라는 것의 무거움을 모르는 당시 집권 세력 때문이었다.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는데도 대통령은 퇴근했다. 퇴근길에 서울시가 침수되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도. 주무장관은 재난 지휘 통제시설이 없어서 우왕좌왕했다. 서울시장도 퇴근했다가 밤늦은 시간에 복귀했다. 마포구청장은 ‘비 오는 날엔 전’이라고 사진을 올렸다. 현직 여당 의원은 ‘비가와야 사진빨 잘 받는다고 했다'가 그게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놀랄 것도 없고 분노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 분들이라는 거 뻔히들 알았잖는가. 그러고도 뽑았잖은가? 사실 이 이야기 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긴 좀 다른 이야기다.

 

기록적 폭우 직후, 서울의 많은 지하철역이 침수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48시간 이내에 모두 정상화됐다. 감전사할 수도 있었는데 일단 들어가서 치우기 시작한 분들을 비롯, 수많은 분들이 철야 작업한 결과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정상 비슷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정상적인 삶’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긴 쉽지 않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긴, 그런 상황에서 일상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빗물이 찬 건설 현장은 어떻게 복구할까 

 

지난 장마에도 최근 폭우에도, 내가 일하는 현장엔 어마어마한 비가 내렸다. 현장은 연장통이 뜰 정도로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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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폭우 당시의 우리 팀 현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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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떠다니던 우리 팀 공구함.

충전 원형톱과 드릴 등을 갖고 있던 동료는 베터리만 3개 망가졌고,

줄자가 젖어서 사용하지 못하게 된 이들도 꽤 된다.

 

현장이 이렇게 됐는데 어떻게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을까. 놀라운 건 아무리 이 모양이 된다고 하더라도 비가 그치면 대략 24시간 내에 다시 공사는 시작된다. 누군가가 그 비를 맞으며 모이는 물을 양수기로 퍼내고 진흙으로 뻘밭이 된 바닥을 고압 살수기로 다 씻어내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일은 골조 전문 건설회사(현장에선 아직도 ‘단종 업체’라고 부른다. 종합건설회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전문건설회사는 한 가지만 하기 때문이다)나 원청사에서 ‘직영’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한다. 1차 하청사나 원청사에서 부르는 이들이니까 뭔가 있어 보이지만 대부분 인력사무소를 통해서 오는 분들이다. 건설 현장에서 일을 배우고 싶어 하는 분들도 자주 볼 수 있지만 상당수는 하루를 적당히 때우면 하루치 일당을 받을 수 있어서 나오는 분들이다.

 

현장엔 변기 6개짜리 수세식 화장실 하나, 포세식 화장실이 하나 있다. 그것도 족히 15~25분은 왕복해야 하는 거리에. 노동환경이 이따위인 현장엔 인력 사무소를 통해 건설 현장 나가는 분들도 오는 걸 싫어한다. 일은 겁나게 많은 데다 기본 편의시설은 꽝이고 관리자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면 누가 가고 싶어 하겠는가. 비 맞으면서 일한다고 추가 수당 주는 것도 아닌데. 그러다 보니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는 상태에서 일하고 있다.

 

거푸집을 크게 짜서 타워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서 설치하는 것을 현장에선 ‘야기리(아마도 일본어 屋切り[やぎり]' 또는 ‘矢切り[やぎり]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만, 본래의 의미랑은 멀다. 거푸집으로 벽 한쪽을 만드는 걸 통칭한다) 짠다’고 한다. 좀 위험한데도 거푸집을 왕창 짜서 붙이면 작업 시간이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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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틀목수되고 처음으로 내가 짰던 야기리(측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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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그런데 이 짠돌이 현장은 지하 쪽은 공사 뒤에 다시 파묻어야 하기 때문에 돈 아끼기 위해 여유 공간을 거의 두지 않았다. 그나마 위의 사진에선 콘크리트 기초 공간이 좀 있는 편이다. 작은 곳은 성인 남자 한 명이 서 있기가 심히 곤란한 정도다. 그러다 보니 저 회색빛 물 속에 들어가서 작업해야 한다.

 

참고로 우리 현장엔 간이 소변기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작업 중인 지하 2층 공간엔 간이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다. 그럼 위 사진에 저 회색빛 물의 상태가 인도 겐지스강(현지에선 ‘겅가’라고 부른다만)보다 좋을 리가 없다. 그래도 들어가서 일해야 한다.

 

12만 2천 원

 

아니, 일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판이다. 올해 들어 거의 두 달 가깝게 일을 못 했다. 정권 교체기에 코로나에 감염되는 바람에 지원받는 것 없이 자가격리로 일주일 넘게 일을 못 했고, 화물연대가 파업해서 2주간 일을 못 했다. 그리고 지금 현장 들어와선 장마와 국지성 폭우가 연달아 오면서 거의 3주가 날아갔다. 중간에 현장 바뀌면서 쉴 수밖에 없었던 시간까지 포함하면 거의 두 달이다.

 

여기에 지출되어야 할 항목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던 터라 이번 폭우는 물론, 지난 장마 중에도 인력회사를 통해 대한민국에서 탑 3에 들어간다는 건설회사의 직영으로 일했다. 나는 거푸집 해체(현장에선 ‘바라시[ばらし]’라고 한다. 사전적 의미 1. 분해하다, 해체하다, 죽이다 등의 뜻으로 쓰이는 일본어 동사 '바라스(ばらす)'의 명사형에서 온 말이다)를 하다가 인력사무소 잠깐 다니고 형틀목수를 하고 있는, 나름 특이한 경력이라 인력사무소 다닐 때도 남들이 기피하는 현장으로 주로 갔었다. 주로 힘들어서 안 하려고 하는 작업에 많이 투입되었다. 왜. 만 원 정도 더 주거든. 

 

그래서 두 곳의 인력사무소에서 넉 달 정도 일했지만, 직영으로 간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제대로 직영 일을 해봤다.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이 우중 작업 환경을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을 많이 찍어달라고 했고 나도 좀 더 생생하게 현장을 전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일한 곳은 보안시설이다. 출입할 때 전화기의 앞뒤 카메라에 스티커 붙여서 사진 못 찍게 하는 곳이다. 혹시라도 스티커가 떨어지면, 확인 즉시, 일을 중단하고 게이트로 뛰어가 사진 찍은 거 없는지 확인하고 다시 스티커 붙여야 하는 곳이었다.

 

심지어 보안시설이라고 노조 소속 형틀목수와 철근공은 받지도 않던 곳이다. 그러나 현장엔 수많은 외국인들이 일하고 있었고, 현장 곳곳엔 중국어, 베트남어, 태국어, 러시아어 등으로 안내되는 경고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외국인들은 출입할 수 있지만 노조는 들어오면 안 되는 보안시설이라니 그게 뭔가 싶지만 이런 현장, 건설 일용직 하다가 보면 많이 볼 수 있다.

 

폭우가 내리던 8월 초, 그리고 그 다음주에 내가 계속 일했던 곳은 국내에선 탑 3에 들어가는 건설사가 원청사였다. 그런데 그 현장을 소개해 준 인력사무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잘 안 가려고 하는 곳이다. 돈은 비슷한데 밥을 안 주는 곳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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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건설사 현장에 갈 때는

 컵라면 2개와 편의점 김밥 2개를 항상 따로 챙겼다.

노가다하면서 라면에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면

허기져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이렇게 일하면 하루 일당이 15만 원이다. 여기서 인력사무소 소개비(현장에선 “똥뗀다”고 한다), 4대 보험과 교통비 등을 공제하고 내 통장에 찍히는 돈은 12만 2천 얼마였다. 아 동정은 마시라. 일은 사실 힘들다고 할 수는 없다. 간이 소변기에 차 있는 소변 처리하고, 휴게실에 쌓여 있는 각종 쓰레기 청소하고, 그러다가 신호수와 화기 감시자가 부족한 상황이 되면 빨간 조끼와 빨간 안전모 쓰고 가서 일하면 됐다.

 

노가다 시작할 때 다들 직영 일부터 해보라고 하는 이유는 어디에서 뭔 빵꾸가 나면 일단 뛰어가야 하는 이들이 이분들이기 때문이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게 2018년 3월경부터였는데 지난 4일간 지금까지 안 해봤던 것들을 꽤나 해볼 수 있었다.

 

물론 노동조건은 개판이다. 1회용 비옷으로 지난번의 그 폭우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날이 다 나간 손톱으로 각재를 잘랐다. 그것도 오줌에 제대로 절여져서 찐득찐득하게 달라붙으며 오묘한 향기를 내 뿜는 것들을 말이다(여기선 동정하시라!). 하지만 이것도 이번처럼 폭우가 단기간에 집중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비가 오는 날이 왕창 길어지면? 답 없다.

 

2020년 여름이 그랬다. 코로나 원년이었지만 건설노동자들은 일반인들과 생활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에 코로나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사람을 만나야 전염이 되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이들이 주로 사는 곳은 처음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장마의 위력은 대단했다.

 

일단 형틀목수들과 철근공들이 일을 못 했다. 천둥번개에 폭우가 쏟아지는데 어떻게 쇳덩어리들을 만지는가. 그러면 타설도 안 되고 해체도 못 하며 정리와 청소도 할 일이 없다. 그 상태가 거의 50일 넘게 이어졌던 것이다. 건설과 관련된 일을 하는 거의 대부분 이들이 장마 기간 내내 손가락만 빨았다.

 

비는 낮은 곳으로 고인다

 

난 그래도 상황이 나았다. 배달 앱의 두 강자가 내가 사는 지역을 서비스하기 시작하면서 프로모션을 꽤 세게 했고, 배달 수요가 꽤 되는 곳이 가까웠다. 자전거로 주 20시간 달려도 최저생계비는 벌 수 있었다. 물론 온몸이 푹 젖은 상태로 자전거를 달리는 것이 쉽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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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그때 우리 집의 밥줄,

집 이사를 해야 해서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다시 바라시 일을 시작하고도 찬 바람이 불때까진 계속 자전거로 달렸다.

 

그때 내가 일하던 곳 같은 작은 현장에선 철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자재를 사람 손으로 올린다. 뜯어낸 거푸집과 내린 서포트를 다시 위층으로 올려줘야 한다. 사람 손으로. 보통 한 팀이 하루에 7~8톤 정도를 올리니까 물에 흠뻑 젖은 상태로 자전거 달리는 것도 할 만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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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보통 여섯 일곱 명이 하루에 올리는 분량이다.

 

솔직히 힘들었던 것은 GPS가 먹통이 되어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어 배달 시간이 꽤나 걸렸다는 것과 길이 미끄러워 자빠링했던 경우가 좀 많았다는 것 정도다. 그즈음 트위터에서도 배달과 관련한 불만이 많이 올라오고 있어서 심리적으로도 많이 위축되었다. 남의 나라 민권에 대해 글 쓰는 분이 그즈음에 배달 온 국물의 양이 적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봤다. 배달하는 이에게 뭔 일이 생겨서 국물을 쏟았을 가능성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던 걸까. 

 

좀 쓰라리긴 했지만 이미 몇 년을 겪었던 일이었다. 사람들이 살고 일하는 곳, 즉, 건물을 짓는 사람들은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배달되는 밥은 내가 결제하면 자동으로 날아오는 것이지, 누군가 그걸 만들어 가져다주는 노동의 산물이라고 인식하는 이들이 몇이나 될 것 같은가.

 

그래도 고마웠던 순간들이 몇 있다. 지난 폭우 때처럼 엄청나게 퍼붓던 날, 엉뚱한 길로 들어갔다. 광교와 경기대 입구 사이에 있는 지하 산책로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GPS가 먹통이 되면서 도로로 튀어 나왔었다. 그 폭우를 맞으면서 빠르게 대로를 횡단하려고 했으나 워낙 오르막길인데다 미끄러워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차들은 내가 지나갈 때까지 서 있었다. 길 다 건넌 다음에 도로 쪽에 서 있던 차들에게 배꼽 인사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재해 상황에서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 최소한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위험을 무릅쓰고 일했기 때문이다. 그분들과 함께 일하는 입장에서 뭐 많은 것을 바라진 않는다. 그저 최소한의 안전 장비만이라도 지급되길, 그리고 ‘나의 편의’란 누군가의 노동이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주기만 바랄 뿐이다.

 

재해를 재난으로 만드는 사회에서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