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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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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문학동네>

 

 

두 개의 세계

 

개나 고양이에게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길들여진 애완동물로 살아가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갈 야생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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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의 삶은 안락하고 밝은 세계이다. 이 세계에 속한 동물은 다른 짐승들의 위협과 더위, 추위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는다. 또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굶주림과 싸워야 하는 대신, 맛난 사료를 건네주는 주인의 따뜻한 손길이 있다. 단지 본성을 잊고 인간에게 배를 까고 목덜미를 맡기면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다. 만약 누군가 인간으로 존재한다면, 그가 속한 사회는 그에게 두 개의 세계를 제시한다.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빛의 세계는 허락된 세계이며, 어둠의 세계는 금지된 세계이다. 

 

일부 호기심 많은 인간들은 어둠의 세계를 알고자 한다. 더 나아가 빛의 세계를 거부하고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기도 한다. 물론 가혹한 대가가 따른다. 이것은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야생으로 돌아간 애완동물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일부 인간들은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 약을 삼키듯,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을 훔치듯,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혹은 실수로 정해진 선을 넘어 어둠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화 여름의 잔해.PNG

영화 ‘여름의 잔해’ 中

 

 

밝은 세계의 소년 싱클레어, 어둠의 세계로 향하다

 

소년 ‘싱클레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에게 ‘중산층 가정’이라는 ‘밝은 세계’를 선물했다. 이 세계는 사랑과 엄격함이 함께 있었으며, 좋은 교육이 있었고, 아침에는 맛난 음식들과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세계였다. 이 세계는 밝은 미래로 곧게 뻗어 있었다. 싱클레어는 자기 삶의 목표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자신이 속해 있는 ‘밝은 세계’가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자기 집을 청소하는 하녀들로부터,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기술을 배우는 견습공들로부터 ‘밝은 세계’ 바로 옆에 ‘어둠의 세계’가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이상한 일은 그 두 세계가 나란히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었던가!

 

좋은 옷을 입고 라틴어 학교에 다니는 점잖은 집안의 아들 싱클레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어둠의 세계로 들어섰다. 싱클레어를 어둠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프란츠 크로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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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EBS>

 

프란츠 크로머는 싱클레어가 갖고 있는 어둠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만한 녀석이었다. 그는 열세 살가량 된 거칠고 힘이 센 초등학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평판이 좋지 않은 술꾼 재단사였고, 프란츠는 또래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불량스러운 어른처럼 이빨 사이로 침을 뱉었다. 

 

그는 명령했고 우리는 복종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와 어울렸지만 그것이 마치 오래된 습관 같았다.

 

 

어둠의 세계에 들어온 대가

 

어느 날 또래들이 프란츠 앞에서 온갖 시시한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였다. 싱클레어는 대담한 이야기를 꾸며 내었다. 프란츠의 마음에 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싱클레어의 상상력은 있지도 않은 자신의 ‘사과 도둑질’을 그럴싸하게 만들어 내었다. 

 

그 순간 어둠의 세계가 느닷없이 싱클레어의 세계가 되었다. 프란츠는 야비하고 잔인하게 싱클레어를 협박했다. 경찰에 사과 도둑질을 고발하고 상금을 받겠다는 프란츠를 어린 싱클레어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싱클레어는 난생처음으로 돈을 훔쳐 프란츠에게 갖다 바쳐야 했고, 자신을 불러내는 프란츠의 휘파람 소리에 무조건 나가야 했다. 그리고 그의 온갖 요구를 들어 주어야 했다. 프란츠의 휘파람 소리는 어린 싱클레어에게 지옥의 소리이자 악마가 누르는 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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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EBS>

 

싱클레어는 학교에 늦겠다고 깨우는 인자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토했다. 싱클레어를 둘러싼 밝은 세계는 파괴되었다. 어린 싱클레어는 자신이 집안으로 끌어들인 어둡고 무거운 그림자에 휩싸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해야 했다. 허락되지 않은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진 대가는 열 살의 소년에게도 가혹했다.

 

매트에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더러움을 두 발에 묻힌 채 집에선 알지도 못하는 그림자를 집으로 끌어들였다.

 

싱클레어를 고통에서 구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다가왔다. 우연히 옆 반과 함께 성서 수업을 들었을 때였다. ‘카인’의 이야기가 수업의 주제였다. 신이 카인이 바친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이 바친 제물만을 받았기에, 카인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친동생 ‘아벨’을 죽였다. 신은 카인의 이마에 표식을 찍었다. 카인은 그 표식을 단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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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을 죽이는 카인

 

싱클레어는 ‘카인의 표’에 몰두했다. 그는 한 때 아버지가 선사해준 밝은 세상을 경멸하고 스스로 어둠의 세계로 나아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이 카인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마에도 형벌의 표식이 찍혀 있는 것 같았다. 싱클레어는 아버지가 선물해 준 밝은 세상의 테두리 바깥에 호기심을 품은 자신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데미안의 등장

 

그때, 싱클레어에게 ‘막스 데미안’이 다가왔다. 영리하고 밝고 더없이 단호한 얼굴이었다. 데미안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을 갖고 있었고 선생님들 앞에서도 단호한 말투를 유지했다. 또래들과 함께 있는 데미안의 모습이 싱클레어에게는 마치 농부의 자식들 사이에서 그들과 같아 보이려 노력하는 변장한 왕자 같았다. 

 

이 카인의 이야기를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어.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의 것들은 분명 참되고도 올바르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선생님이 설명하는 것과는 다르게도 볼 수 있거든. 그럼 이야기들이 대개 훨씬 더 나은 의미를 갖게 되지.

 

데미안이 해석한 카인의 이야기는 선생님의 말과 전혀 달랐다. 데미안에 의하면 카인은 신의 사랑을 받고자 했던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카인은 용기 있고 자기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첫 새끼 양을 죽여 제물로 바친 ‘아벨’이 겁쟁이였다. 카인은 신이 허락한 범위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했던 멋진 사람이었다. 데미안에 의하면 카인의 표식은 신의 형벌이 아닌 뛰어남의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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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이 고귀한 사람이고 아벨이 겁쟁이라니! 카인이 지닌 표가 뛰어남의 표지라니! 신을 모독하는 극히 파렴치하고 부조리한 말이었다. 대체 사랑의 하느님은 어디 계셨단 말인가?

 

데미안의 부드러운 미소와 기묘하게 빛나는 눈을 보며 싱클레어의 놀라움과 두려움은 점점 자부심으로 바뀌어 갔다. 싱클레어는 어둠의 세계로 다가간 자신이 카인과 같다면, 어쩌면 자기가 아버지보다 더 높고 선하며 경건한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서 강렬한 향기처럼 구원의 예감을 느꼈다. 

 

싱클레어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날도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에 비를 맞으며 케이크 두 조각을 들고 나갔다. 케이크 조각을 받은 크로머는 싱클레어의 갈비뼈를 치며 잔인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음 요구사항으로 그의 누나를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싱클레어가 크로머의 이 새로운 고문 앞에서 고통스러워할 때였다. 데미안이 나타나 싱클레어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프란츠 크로머’의 이름을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데미안은 그런 싱클레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거짓말처럼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그쳤다. 싱클레어는 구원받았다. 

 

 

다시 등장한 데미안과 혼란

 

싱클레어는 배은망덕했다. 데미안이 자신을 구원해줬지만, 싱클레어는 의도적으로 데미안을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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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EBS>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난 싱클레어는 빠른 속도로 다시 밝아진 세상에 적응했다. 싱클레어는 다시 평범한 학생이 되어 자신이 겪었던 두려움을 잊으려 했고 동시에 구원자까지 잊으려 했다. 데미안은 그에게 유혹하는 자였고, 어둠의 세계와 연결시키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다시 허락된 낙원으로 돌아왔다. 아벨처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살기로 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몇 해가 지나갔다. 싱클레어도 몇 살 더 나이를 먹었다. 어느 날이었다. 역시 종교 수업을 받을 때였다. 카인에 대한 목사의 가르침에 비판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싱클레어가 이런 생각을 떠오르게 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볼 때였다. 마치 마법처럼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다시 연결되었다.

 

다시 만난 데미안의 얼굴은 어른처럼 바뀌어 있었다. 데미안이 다시 싱클레어에게 온 날 이후, 그해 겨우내, 봄이 다 가도록 둘은 붙어 다녔다. 둘은 불량 학생이 되어 수업 내용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싱클레어는 수업보다는 오히려 데미안과의 대화에 더 열정을 기울였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간직하고 있던 어린 시절의 마지막 감동까지 깨뜨렸다. 그것은 구세주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데미안은 평소와는 달리 격정적으로, 그러나 미소는 잃지 않으며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 중 하나의 참회는 그 어떤 의미도 없다고 했다. 범죄자가 죽기 바로 전, 무덤을 두 걸음 앞에 두고 후회를 한다는 이야기는 감동을 주기 위해 교화적인 배경이 깔린 달콤하고도 정직하지 못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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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오히려 끝까지 회개를 비웃으며 자기 갈 길을 간 다른 강도가 사나이라고 했다. 그 강도야말로 자기를 도와준 악마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등을 돌리지 않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카인의 후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워하는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둘 중 하나를 친구로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택할 것인지를 물었다. 

 

데미안의 말은 싱클레어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생각들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확고히 믿었던 것들이 상상력도 환상도 없이 그저 듣고 읽었던 결과일 뿐이라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데미안은 그런 싱클레어를 바라보며 친절한 미소로 다시 말했다. 신이 인정하는 세상은 세계의 절반일 뿐이라고 했다.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 절반의 세계를 모조리 악마의 것으로 돌려버려 침묵하고 있다고 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신에게 버림받은 절반의 세계까지도 존중하고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세계 전체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인위적으로 반으로 나눈 다음 공식적으로 인정한 절반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그러니까 하느님에 대한 예배와 나란히 악마에 대한 예배도 드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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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의 말에 동화되며 싱클레어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세계는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부정이 곧 ‘밝은 세상’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는 사실을. 싱클레어는 이제 반쪽짜리 세상이 원하는 일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건 죄악이야. 사람은 거북이처럼 자신 속으로 완전히 기어들어갈 줄 알아야 하는데.

 

이후 싱클레어의 세상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은 떨어져 부스러졌다. 데미안은 여행을 떠났고 싱클레어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싱클레어는 상급 학교(김나지움)로 진학했고, 그렇게 소년 시절은 끝났다. 

 

 

어둠의 세계를 몰아내고 싶은 싱클레어의 선택, 베아트리체

 

고향과 부모님 품을 떠나 김나지움의 기숙사에 들어간 싱클레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깥세상에는 관심을 끊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간 금지되었던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흐르는 어두운 강물 소리에만 귀를 열었다. 더불어 막스 데미안에 대한 크나큰 그리움도 함께 느꼈다. 싱클레어는 고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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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는 어둠의 세계가 주는 고독감을 견딜 수 없었다. 싱클레어는 다시 밝은 세계를 건설하고 싶었다. 자신의 안에서 어둠과 악을 몰아내고 다시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그래서 한 소녀를 사랑하기로 했다.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였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우아한 옷차림을 한 소녀였다. 싱클레어는 그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주었다.

 

싱클레어는 제단을 세우고 거기에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걸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팔레트와 종이, 그리고 물감을 샀다. 싱클레어는 조심스럽게 베아트리체의 얼굴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며 그는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했다. 종이 몇 장을 몽땅 버렸다. 그리고 또 그렸다. 어떨 때는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꿈을 꾸듯 그림을 그렸다.

 

베아트리체의 초상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초상은 소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젊은이의 얼굴에 가까웠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완성한 그림 앞에 앉아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묘하게 인상적이고 신비로운 생명감이 느껴졌다. 그 이후 베아트리체의 초상은 싱클레어의 일부가 되었다. 싱클레어는 혼자가 될 때면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이른 여름 저녁때였다. 서쪽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비스듬히 붉은 빛으로 그림을 비춰주었다. 그 순간 싱클레어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왜 젊은이의 얼굴로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베아트리체의 초상은 바로 데미안의 얼굴이었던 것이었다. 아니었다. 저녁 햇살이 그림을 통과하도록 해서 보니 이번엔 자신의 얼굴이었다. 싱클레어는 오랫동안 그림을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차츰 그것은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데미안에 대한 그리움과 답장

 

그날 이후 싱클레어는 더욱 강렬해진 막스 데미안을 향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밤마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데미안이 나타났고, 자신의 집 대문에 달려 있는 새의 형상이 새겨진 문장이 보였다. 어느 날 꿈에서는 문장 속의 새가 자신의 안에서 살아나더니 자신을 가득 채우고 싱클레어를 쪼아 먹기 시작했다. 싱클레어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싱클레어는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로 꿈속의 새였다.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그렸다. 그래서 며칠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 완성된 그림 속의 새는 날카롭고 대담한 맹금류, 새였다. 그 새는 몸통의 절반이 지구에 박혀 있는데 이는 마치 거대한 알에서 나오는 듯한 모양이었다. 

 

그림을 바라보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데미안답게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방식으로 답장이 왔다. 데미안의 답장은 어느 날 문득 싱클레어의 책상에 쪽지로 꽂혀 있었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답장을 읽었다. 그리고는 심장이 움츠러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답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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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 깨어나다

 

아프락사스는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한 신이었다. 아프락사스는 빛과 어둠의 세계, 선과 악의 세계 모두를 관장하는 신이었다. 이제 싱클레어는 깨어났다. 그는 자신에게 권장된 반쪽짜리 세계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바라본 전체 세계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은 날카로운 불꽃처럼 싱클레어를 불태웠다. 

 

그 깨달음은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향한 운명적 사랑을 체험할 때도, 실패한 목사 ‘피스토리우스’ 함께 불꽃을 보며 대화를 나눌 때도 명확한 모습으로 싱클레어의 마음을 울렸다. 그 깨달음은 누군가가 강요한 반쪽짜리 세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듯, 누군가가 자신에게 배정한 역할들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유일한 임무란 곧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일 뿐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깨어난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 어떤, 어떤, 어떤 의무도 없다.

 

 

데미안과 이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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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워너브러더스코리아>

 

아주 큰 전쟁이 터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거리는 흥분에 휩싸여 있었고 사방에서 ‘전쟁’이라는 낱말이 울렸다. 데미안은 장교로 참전했다. 군복에 은회색 외투를 걸친 데미안의 모습은 묘하게 낯설었다. 데미안이 떠난 날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에게 키스해주고 한동안 품에 안아 주었다. 그해 겨울, 싱클레어도 전쟁터로 향했다.

 

그해 봄, 싱클레어가 플랑드르 지방의 한 전선에서 보초를 설 때였다. 싱클레어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데미안을 떠 올리고 있었다. 그 순간 하늘의 별 중 하나가 밝은 울림을 내며 싱클레어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그 별은 천둥소리와 함께 수천 개의 불꽃이 되어 흩어졌고, 싱클레어는 공중으로 번쩍 들렸다가 다시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수레에 실려 후송된 싱클레어는 어떤 홀의 바닥 매트리스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뜬 싱클레어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때 바로 옆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던 병사 하나가 싱클레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마에 카인의 표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바로 데미안이었다.

 

싱클레어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꽤 긴 시간 동안 데미안은 미소를 지으며 싱클레어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싱클레어에게 말을 걸었다. ‘프란츠 크로머’를 기억하냐는 것이었다. 싱클레어가 기억한다는 의미로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데미안은 ‘꼬마야’라고 부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다시 말했다.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가야만 해. 너는 어쩌면 다시 내가 필요할지도 몰라. 크로머나 다른 어떤 것에 맞서기 위해서 말이지.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나는 이젠 그냥 말이나 기차를 타고 오진 않을 거야. 너는 네 안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럼 내가 네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알겠니?

 

싱클레어는 피를 계속 흘렸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사람들이 붕대를 감기 위해 싱클레어를 깨웠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옆 매트리스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 위에는 데미안이 없었다. 웬 낯선 사람 하나가 누워 있을 뿐이었다. 이후 싱클레어는 가끔 거울을 보았다. 그러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데미안과 같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너의 길을 가라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데미안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 가장 떠오른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떠오른 생각은 ‘당연하다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다’였습니다. ‘당연한 것’이 ‘쉬운 것’이라면 제대로 산다는 게 이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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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나의 것이지만 실제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는 이유가 한 두 가지는 아닐 것입니다. 그중 누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이유 한 가지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온전하게 자신만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한 개인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다양한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 사회성이, 그 관계가 나의 삶을 규정하기도 하고 때로 강제하기도 합니다. ‘나의 길’이 아닌 ‘부모의 길’, ‘자식의 길’, ‘부부의 길’, ‘신앙인의 길’ 등을 살도록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이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배신행위가 될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성과 동시에 개성과 자아를 지닌 존재이니까요. 

 

‘아프락사스’는 신인 동시에 악마인 존재입니다. 이것의 속뜻은 부분이 아닌 전체일 것이고 이분법이 아닌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만약 사회성과 개성, 이 둘을 나누어 어느 한쪽만을 살도록 한다면 그것은 곧 반쪽짜리 세상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회화는 차고 넘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화’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타인이 부여한 책무, 사회의 시선에 부응하는 책무를 위해 애를 쓰며 살게 됩니다. 내가 타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를 먼저 계산한 후에야 행동하게 되며, 몇 살이 되면 결혼해야 하고 또 몇 살이 되면 집을 장만해야 하고,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낙오자의 멍에를 써야 하고...... 이것은 반쪽짜리 세상 속 인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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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

 

이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원했던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애당초 어떤 삶을 원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안타깝지만 인생은 단 한 번뿐입니다.

 

깨어 있는 시간 거의 전부가 타인과의 대화입니다. 이제는 자신과의 대화를 해 볼 때입니다. 싱클레어가 마음속 데미안과 했던 것처럼 타인과 세상을 향했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일 뿐이고 단 한 번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데미안을 잠에서 깨워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대화를 통해 현재 자신이 걷고 있는 인생길이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원했던 길을 찾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알 속의 새가 자신의 세상을 향해 나오려면 껍질을 깨는 노력과 고통이 있어야 하듯이 그것이 쉽진 않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래도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시도 자체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내 인생은 온전히 나의 것입니다. 

 

타인과 사회에서 인정받는 ‘나’가 아닌 자기 자신의 인정을 받는 ‘나’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데미안’이 보여주는 인생이 아닐까 합니다. ‘단테’는 자신의 작품 ‘신곡(神曲)’ 속에서 여행자로 등장합니다. 단테는 지옥(연옥)을 지나며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이때 또 다른 등장인물,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서슬 퍼런 호통을 날립니다. 베르길리우스의 호통을 소개하며 열일곱 번째 인생탐구를 마칩니다. 

 

“남들이 뭐라 해도 넌 너의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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