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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가 영면(永眠)의 길로 떠났다. 그에 대한 생전의 기록을 더듬고 싶다면, 넷플릭스에서 나오고 있다는 <더 크라운> 시리즈를 보는 게 훨씬 더 나을 거다.

 

여왕이 영면이 길로 들어서면서, 한 시대가 사라졌음을 우리는 확실히 인지하게 됐다. 워낙 오랜 시간 재위했기에 그녀는,

 

“2차 대전을 겪은 마지막 지도자”

 

란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올 6월에 즉위 70주년 기념행사를 했을 정도면 말 다했지 않은가?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식 때 우리나라 사절로 갔던 사람이 신익희 선생이었음을 생각하면, 그녀가 얼마나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는지 체감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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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2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한

대한민국 국회의장 신익희.

 

떠넘겨진 왕관

 

그녀의 인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전쟁’이다. 그녀의 재위 기간 내내 영국은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그녀가 재위 직전 ‘공주’ 신분으로 겪은 전쟁이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다. 이 부분 역시 영화 <킹스 스피치>를 보면 이해가 빠를 거다. 내성적인 조지 6세(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얼떨결에(?!) 왕이 됐는데, 하필이면 전쟁 바로 직전... 위기의 한복판에서 제위를 넘겨받게 된다.

 

망나니 같은 형(국내에선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한 걸로 포장됐지만)인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포기하면서 그의 동생인 조지 6세가 왕위를 넘겨받게 된다. 왕이 되기 싫어했던 인물이 왕이 됐다. 조지 6세가 얼마나 왕이 되기 싫었냐면 에드워드 8세의 퇴위가 가시화됐을 때 왕위 수락을 거절했다. 한발 더 나아가 형이 퇴위하기 전날에는 모후인 메리 왕비(Queen Mary)를 찾아가 울기까지 했다.

 

뭐 어찌어찌 즉위는 하긴 했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졌을 거다. 조지 6세나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왕비 둘 다 내성적인 성격에 조용하게 살기를 원했던 이들이기에 얼떨결에 받아든 왕관이 좋을 리가 없었다.

 

영화 <킹스 스피치>나 드라마 <더 크라운>을 보면 엘리자베스 왕비가 왕위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그리고 자신들에게 왕관을 던진 에드워드 8세와 그 원인 제공자인 심프슨 부인에 대한 적개심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할 수 있다. 조지 6세가 서거한 이후에 이 적개심은 더 깊어졌는데,

 

“내 남편이 죽은 건 왕위를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대전이라는 대전쟁을 치러내야 했던 조지 6세는 과로와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 때문에 담배를 물고 살아야 했고, 결국 폐암으로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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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6세의 대관식. 왼쪽부터,

엘리자베스 왕비, 엘리자베스 공주, 메리 왕대비, 매거릿 공주.

 

전쟁에 선 공주

 

아무튼. 2차 대전, 이 미증유의 대참사 앞에서 조지 6세와 그 가족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여기서 오늘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공주가 등장한다.

 

2차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공주의 나이는 13살이었다.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하고, 프랑스를 6주 만에 함락한 뒤에 영국에 대한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이때 많은 영국인들은 자식들을 안전한 해외나 교외로 보내게 된다.

 

<파리대왕>을 보면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당시 영국은 호주나, 캐나다, 미국 등지로 아이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 건 선택받은 소수에 한해서다. 엘리자베스 공주와 매거릿 공주 등도 한때 캐나다로 보낼까를 고민한 적이 있었지만, 여론을 생각한다면 이건 최악의 수가 될 수 있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런던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윈저성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이 당시 런던은 히틀러의 ‘바다사자 작전’에 의해 연일 공습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말로 하면 별거 아닌 거 같지만, 당시 런던의 상황은 심각했다. 이미 1940년 9월부터 15만 명의 사람들이 지하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고, 1940년 11월 런던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주민의 약 4%는 지하철역과 대형 대피소에서, 9%는 지상 대피소에서, 27%는 개인의 주택 대피소에서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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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사자 작전. 나치 독일의 영국 침략 전투 작전으로,

영국 남부에 상륙하여 수십만의 독일군을 영국 본토로 신속히 수송해

영국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당시 독일의 폭격기가 폭격을 시작하면 지하철 역사의 문을 개방할지 말지에 대해 옥신각신하는 논쟁이 있었다. 처음엔 문을 잠그는 쪽을 선택했다가, 2주 후에 시민들의 대피호로 사용하기 위해 개방을 허용했다. 대피소나 지하라고 해서 안전한 게 아니었는데, 1940년 10월에 스토크 뉴잉턴의 대피소에 직격탄이 떨어져 민간이 160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말 그대로 전쟁의 한가운데였다.

 

엘리자베스의 전쟁은 이 ‘영국본토항공전(Battle of Britain)’부터 시작됐다. 독일의 폭격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1940년 10월 13일 엘리자베스 공주는 라디오 연설을 시작한다. 아버지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차분하게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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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서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부모님과 떨어져 집을 떠나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새로운 환경에서 살고 계신 여러분에게 위로를 보냅니다. 동시에 이들을 맞아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전시(戰時)의 프로파간다는 일상이지만, 14살 공주의 연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간밤에 폭격이 있으면, 언제나 영국 해군 제독 정복을 차려입은 조지 6세가 왕비와 함께 피해 입은 곳을 시찰하며 국민들에게 위로를 건넸다. 독일군 폭탄이 버킹엄궁 옆에 떨어진 적이 있었음에도 그는 국가 원수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 와중에 그의 장녀였던 엘리자베스가 BBC 라디오 연설에 나선 거다. 말 그대로 왕실의 존재 이유를 보여준 거였다. 이후 엘리자베스 공주는 프로파간다를 위한 활동에 계속 참여했다.

 

왕족의 의무

 

전쟁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서자 이제는 ‘생산성’과의 싸움에 들어가야 했다. 영국은 이미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고, 식량은 언제나 부족했다. 이 당시 영국은 1인당 한 달에 비누 3개씩을 배급했는데, 이 비누로 세탁, 설거지, 세면까지 해야 했다. 이 밖에도 우유, 버터, 베이컨, 빵 등등 식량과 생필품을 배급했다. 영국은 이 배급제는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날 때까지 유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정부는 식량 생산을 독려해야 했다. 여기에도 엘리자베스 공주는 동원됐다.

 

“승리를 위해 밭을 일굽시다!”

 

이러면서 윈저성에서 텃밭을 가꿨다. 이건 비단 영국만의 모습이 아니다. 당시 미국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엘러나 루스벨트 여사도 백악관 앞마당에 텃밭을 가꿨다. 이게 그 유명한 ‘ Victory Garden’이다.

 

(이 텃밭 만들기는 나름 전통이 있다. 1차 대전 당시에도 미국은 텃밭을 만들었다. 그 당시에 미국 전역에 500만 개의 텃밭이 생겼다. 이게 얼마나 효용이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는데, 1944년 미국의 텃밭에서 나온 채소와 과일이 약 910만 톤이었다. 상업 농산물 생산량에 육박하는 양이었다. 이 당시 미국은 베이컨 기름을 모아서 폭탄을 만들겠다고, 베이컨 기름을 수거할 정도였다. 천조국이 괜히 천조국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건 실질적으로 보탬이 되는 측면도 있지만, 더 큰 건 후방의 시민들에게 ‘전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함도 컸다. 즉, 일종의 프로파간다라 할 수 있다)

 

이런 프로파간다에 활용되던 엘리자베스 공주가 직접적으로 군대에 뛰어든 건 16살이 되던 1944년이다. 바로 여성부대인 ATS(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에 입대한 거다. 당시 서른 살이 되지 않은 미혼 영국 여성은 군에 입대하거나 군수산업에 종사하도록 했는데, 엘리자베스도 이에 따른 거다. 그리고 1945년 3월 마침내 군용차량 정비부대에 배치돼 차량 정비사가 된다(이 과정에서 엘리자베스는 부왕인 조지 6세의 허락을 구해야 했다. 조지 6세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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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막바지였지만, 어쨌든 왕족의 의무를 다했고,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자가 남들처럼 군 복무를 위해 나섰다는 건 왕실 입장이든, 국민들 입장이든 나쁘지 않은 모습이다. 그리고 본인한테도 말이다.

 

마지막 지도자

 

엘리자베스의 이 ATS 복무 기록은 이후 그녀의 공주 시절, 여왕 시절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됐고, 그 기록 필름은 21세인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상영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게 엘리자베스는 이 복무기록 하나만으로 "현역 군 복무를 한 최초의 여성 왕실 인사이며, 동시에 2차 대전에 복무한 기록이 있는 유일한 현역 국가 원수"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물론 이런 ‘경력’이 그녀의 재위 기간에 보탬이 됐냐면, 확실히 보탬이 됐다. 그녀는 국가원수였으며, 영국군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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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차 대전을 경험한 국가지도자는 없다. 생각해 보면 엘리자베스 2세가 비정상(?!)인 거 같다. 아이젠하워나 케네디, 드골 같은 경우는 충분히 수긍이 가고 납득이 갈 만한 상황이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그들을 뛰어넘는 아득히 긴 세월을 버텨냈다고 해야 할까? 왕족이란 특수성 때문에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고, 집안 내력 상 건강 체질이었다는 점 등등을 고려해야 하더라도 그녀의 재위 기간은 평균을 넘어섰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지구상 마지막 남은 2차 대전을 경험한 국가지도자가 영면의 길로 들어섰다. 부디 그곳에서 안식을 찾기를, 아울러 그녀가 남겨놓은 가족들이 무탈하게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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