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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경기침체를 공식화하다 

 

화내는 영국인.PNG

 

“어떻게 재무장관이라는 사람이 마치 남일처럼 경기침체기에 들어섰다고 발표를 할 수 있어!”

 

지난 목요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하원의회에서 실시된 재무부 장관의 예산 발표 중계를 보며 옆에 앉아있던 동료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어려운 거 안다. 돌아가는 거 보면 모르나. 언론들이 보도하는 기사를 보면 이번 겨울은 특히 더 추운 겨울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쏟아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난방비와 물가로 배를 곯게 될 것이라거나 옷을 더욱 두텁게 입고 생활해야 한다는 인터뷰가 줄을 잇는다. 그러니 모를 수가 있나.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재무장관이라고 하는 사람이 기껏 의회에 나와 발표를 한다는 게 고작, 

 

“Britain is now recession” 

(영국은 이제 경기침체에 들어섰습니다)

 

정도라니. 재무장관이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무게를 모르는 것일까. 

 

기사.PNG

제목: 제레미 헌트(재무부 장관)은 가을 예산을 발표하며,

영국은 이제 경기침체에 들어섰다고 했다.

출처-<independent> 링크 

 

리시 수낙 총리의 발언도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그는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해야 합니다. 희망을 얘기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솔직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라고 했다.

 

‘Recession(침체)’의 공식적인 선언과 그렇지 않고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하려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경제는 심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의 새 정부는 인정이 너무 빨랐고, 대책 방안도 너무 쉬웠다(고등학교 경제 시간에도 배운다. 인플레 고금리 공식. 재무장관이 아니어도 알 수 있다).

 

리시 수낙2.png

리시 수낙 영국 총리

 

 

경기 침체를 공식 선언한 이유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영국의 재무장관 제레미 헌트는 2022-23 후반기 예산을 발표하며 영국은 불황, 즉 경기침체기에 들어섰으며, 앞으로 더욱 경기가 악화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향후 세금 증액 및 금리 인상은 불가피하다고 선언했다. 연간 550억 파운드를 증세하고, 각 부서마다 할당된 예산 삭감을 시행하여 복지제도를 통해 국민들에게 흘러가는 돈까지 막을 계획이라고 했다. 

 

이번에 발표된 정부안은 당초 예산보다 정부부채의 규모가 약 4천억 더 치솟게 될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발표된 정부안이다. 인플레이션도 현재 9.9%에서 2%가량 오를 것이며, 물가 상승률은 18%에 달하게 될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지라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영국인들도 안다. 

 

그런데 총리와 재무장관이 지금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경기침체를 공식 선언하고 앞으로 더욱 힘들 것이라고 자폭하는 꼴이라니. 국민의 리더가 아니라 단순 경제학자, 전문가로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 정말로 그냥 진실을 전하는 것일까?  

 

마가렛 대처는 총리일 당시, 실업률이 높은 현상에 대해 ‘영국병’이라는 말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이를 고치기 위한 대책으로 대다수 국영기업을 민영화했다. 사람들을 회사로 몰아넣어 실업률을 떨어뜨렸고 꽤 괜찮은 최저임금도 보장했지만, 업무 시간을 하루에 4-5시간 정도밖에 보장 안 해주며 사실상 소득을 줄여버렸고 엄청난 규모의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그로 인해 30여 년이 지난 지금, 영국 내 소득 불평등으로 인한 빈부격차, 양극화는 영원히 줄지 않을 만큼 벌어졌다. 

 

영국 거리.jpg

출처-<BBC>

 

현재도 비슷한 상황이다. 브렉시트와 코로나의 여파로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는 이를 공식화했다. 내놓은 대책은 결국 금리를 올리고 세수를 늘린다는 것인데, 그렇게 계속 진행하면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대책에는(대처 때처럼) 국가 전체만 있을 뿐, 국민 개개인은 없었다.

 

최근 들어 약속이나 한 듯, 영국의 유명 싱크탱크를 비롯, 보수-진보 너나 할 것 없이 '앞으로 우리는 더 가난해질 겁니다' 라는 타이틀로 도배하고 있다.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민영화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으라는 듯이 말이다.

 

이쯤되면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뭐, 근데 경제가 진짜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은 거 아냐?'

 

'영국인들이 유난 떨면서 정부 탓 하는 거 아냐?'

  

아니다. 영국인이 품는 불만의 기저에는 '경제가 더 어려워져도 그건 정부의 탓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기에 화가 나는 것이다.  

 

내 탓 하면 안 돼.jpg

 

 

영국 소시민의 가계부

 

얼마 전, 전기와 가스를 공급하는 회사 – 우리집은 EDF라는 프랑스계 회사와 계약한 상황 - 에서 연락이 왔다. 공급 요금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으나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에너지 소비에 대한 비용을 부득이 상승시킨다고 한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하니 별수 있나. 알겠다고 하고 몇 달을 흘려보냈다. 

 

9월과 10월. 매달 집으로 날아오는 전기/가스세는 평균적으로 88파운드 정도였다. 여름에는 난방을 하지 않아 가스비를 아꼈고, 때문에 약 45파운드 (8만 원) 정도로 줄였다. 그런데, 11월 예상 난방비는 148파운드. 우리 돈으로 30만 원 가까이 된다. 갑자기 두 배가량 뛰어올랐으니, 당장 한 달 동안 쓸 예산을 훌쩍 넘겨버렸다. 

 

(영국의 전기와 가스는 원래 국영기업인 British Gas에서 운영하다가 대처 때 민영화하여 민간기업이 전기와 가스를 맡게 되었다) 

 

이 외에 항상 지출될 수밖에 없는 우리 집 고정 지출도 상당하다. 영국에서는 카운슬 텍스(Council Tax)라 불리는 지역세를 월 290파운드(약 50만 원) 내야 한다. 자동차 관련 지출도 만만치 않다. 월 200파운드가 넘게 지출된다(대략 평균 35만 원 정도). 자동차세 30파운드와 (천정부지로 오른)기름값이 리터당 1.7파운드(약 3천 원) 정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득세, 국민세(NI, National Insurance) 등 기타 비용까지 합하면 최소 150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집세와 식료품 등 나가야 할 돈은 더 있다. 이런저런 지출을 다 포함하면, 우리 세 식구가 아무리 외식 한 번 안 하고, 커피 한 번 안 사 먹으며 아끼며 살아도 무조건 월 500 이상은 우습게 지출된다. 즉, 이 이상 소득을 내지 못하면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대출받아 집을 산 사람의 경우, 높아진 이자율로 인해 지출 부담은 더 높아진다. 영국은 주택구입을 위해 대출받은 후 상환이 어려울 것 같아 대출 약정을 취소(해지)하는 경우, 다시 대출 받는 건 하늘의 별따기이기 때문에 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높은 이자율의 대출을 갚아 나가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물가가 이렇게 천정부지로 계속 오르고 난방비에 세금까지 더 오르면, 이들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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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지하철을 이용하는 노동자 계층

 

영국에 거주하는 70% 이상의 노동자 계층은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과연 이대로 간다면, 이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영국이 경기침체에 들어선 건 사실이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중 한 명인 런던정경대(LSE)의 찰스 굿하드(Charles Goodhart) 교수도 영국 노동시장은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한다. 각 정책 연구 기관들도 비슷하게 내다본다. 통화정책 보고서(The Monetary Policy Report)에 따르면, 1964년 이후, 가계소득이 가장 큰 폭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업률도 상승할 것이고, 영란은행은 치솟은 인플레이션 감소를 위해 금리를 2.5% 추가로 인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했다. 국립경제사회연구원은 이런 상황이 150만 가구 이상의 생계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 예측했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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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헌트 영국 재무장관

출처-<UK Parliamen>

 

현 영국의 재무장관 제레미 헌트는 군인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 니톨라스 헌트(Nicholas Hunt)는 영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북대서양 총사령관(영국 해군 중 2명의 4성 장군 중 하나)을 끝으로 예편한 해군 제독 출신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썩 좋지는 않았다고 전해지나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헌트는 런던에서 나고 자라, 옥스포드 내에서도 최고 인재들이 진학한다는 PPE학부 – 정치 좀 한다는 영국 보수당 출신들은 대부분 이 과정을 거친다 - 를 거쳐 정계에 입문했다. 현재 5선 의원으로, 보수당이 집권한 이래 환경부, 외교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거물급 인사로 평가받는다. (옥스포드 PPE 학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는 지난 기사 ‘최초의 비백인 영국 총리 탄생 : 1980년생 리시 수낙을 알아보자(링크)’를 참고)

 

리시 수낙 가족.png

리시 수낙 부부와 두 딸

 

총리는 어떠한가. 영국 역사상 가장 재산이 많은 갑부 총리로 알려진 인물이다. 말이 억만장자지 (아내가 재벌인 덕에)등록되지 않은 인도 내 재산까지 합산하면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평가도 있다. 

 

본인들이야 어렵지 않을 게다. 당장 난방비 걱정하는 노동자 계층의 하루살이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당장 추위와 싸워야 할 일이 없고, 완전한 내 집이 있어 내야 할 이자가 없으니 금리를 올린다는 발언에 서민들이 받을 무게감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싶다. 때문에 정부의 경제정책 발표에 국민들은 진정성을 느끼지 않는다. 전술했듯, 상황이 더 어려워져도 자신들은 책임을 피해가려고 마련해두는 면피용 장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느끼는 게다.

 

머리 좋은 총리답게 1기 내각을 시작하며, 밑밥을 잘 깔아놓고 시작하긴 했다. 

 

“지금 너무너무 어려운 상황이야. 그걸 직시해!”

 

라며 말이다. 잘 되면 좋지만 나빠져도 어쩔 수 없다는 정치적 수를 깔아놓은 셈이다. 일종의 단체 국민 가스라이팅이라 할까. 하지만 벌써부터 정부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할 장치를 마련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안 되면 말고 식의 정책을 추진하는 동안 칼바람을 맞으며 추위를 견뎌야하는 이들는 국민이다. 

 

‘과’도 많은 인물이지만, 세계 2차대전 당시 영국이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끝까지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똘똘 뭉쳐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한 책임 총리 ‘처칠’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다음 편, 예고

 

이번 편에선 현재 영국 경제 상황에 대해 거시적으로 훑고 넘어갔다. 다음 편에선 영국 내 개인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좀 더 생생한(?) 체험기로 다뤄보겠다. 영국에 사는 영국의 소시민으로서 강한 감정이입이 예상되니 그 점은 양해해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