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윤 정부에 대한 심판을 걸고 치러지게 될 총선이, 이제 4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 영국도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다. 80일 정도를 앞둔 런던 시장 선거 때문이다.

 

영국은 의원내각제로 대통령이 없다.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가 되어 국정을 운영한다. 그러나, 지방자치제도가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지역에 따라 권한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 권력이 분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중에서 가장 큰 파워를 가진 자리가 바로, 런던 시장이다.

 

스크린샷 2024-02-25 231418.png

노동당 소속의 런던 시장, 사디크 칸

출처 - <AP통신>

 

6천만 명 중 약 1천만 명. 전체 인구의 1/6이 거주하는 곳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가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중앙집권화되어 있던 권력을 분산시키려 한 토니 블레어 정부. 런던 권력 이양 주민투표가 치러진 후, 2000년에 런던 시장직이 신설된다. 영국 시장직 중, 직접 선거로 선출되는 최초의 시장직이었다.

 

임기는 4년이지만, 제한 없이 계속 출마할 수 있었다. 8년마다 노동당과 보수당이 차례로 임기를 지냈고, 현재는 다시 노동당 소속의 사디크 칸이 시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21년, 재선에 성공한 사디크 칸. 그가 이제 3선에 도전한다. 보수당은 이번엔 보수당이 시장직을 차지할 차례라며, 선거 운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림1.jpg

1월23일, 영국의 일일 신문 <이브닝 스탠더드>는, 칸과 홀의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지를 내걸었다.

 

런던 시장직은, 총선의 결과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2000년대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집권하던 시기. 노동당 소속의 켄 리빙스턴이 런던 시장직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으로 신뢰를 잃은 뒤,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던 블레어의 영향으로, 당시 보수당 소속이었던 보리스 존슨이 시장에 당선되고 이후 재선까지 성공한다.

 

그리고 2016년, 이번엔 브렉시트 이후 이렇다 할 해결 방안을 내놓지 못한 보수당이 총선에서 고전한다. 이 틈을 타 노동당은 사디크 칸이라는 인권변호사를 앞세워 인기몰이에 성공. 노동당은 런던을 탈환했다.

 

결국, 후보가 누구인지, 어떤 정책을 내놓았는지보다 후보의 소속 정당이 어디인지가 더 크게 작용했다. 현재 집권당이 어디인지, 국민에게 신임을 얻고 있는지가 시장직 당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장이 어떤 아젠다를 내세우는지는 대세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본인 증명이 필요 없는 나라, 영국

 

스크린샷 2024-02-25 235127.png

출처 - (링크)

 

보수당의 수잔 홀 후보가 들고 나온 이번 선거의 중대점은, 투표할 때 반드시 사진이 있는 신분증을 지참해야만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럼, 여태 신분증도 없이 투표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한국의 경우, 주민등록증과 같은 신분증이 있어야만 투표가 가능하다. 하지만, 영국은 한국과 달리 주민등록제도가 없다. 따라서 출생부터 사망까지, 운전면허를 취득하지 않거나, 해외여행을 갈 일이 없어 여권을 신청하지 않는 경우, 사진 있는 신분증을 가질 일이 없다.

 

병원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자동으로 출생 신고가 이루어지며, 이후 부모의 주소가 등록되어 지역 카운슬(한국의 주민센터와 같은 곳)에서 관리해 학교를 등록한다. 그래서 18세 이상이 되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본인이 별도의 신고를 하지 않는 이상, 국가는 국민이 어디서, 뭘 하면서 사는지 알 수 없다. 철저하게 개인의 신변은 개인이 관리하도록 하는 시스템인 셈이다.

 

선거 때도 마찬가지다. 선거일이 결정되면, 해당 지역의 카운슬은 각 주소에 출생 혹은 이전 등록이 된 자료를 바탕으로, 누가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지 조사를 진행한다. 그렇게 통합된 정보를 바탕으로 선거인 명부가 작성되고, 투표 날엔 명부에 있는 이름에 체크만 하면 투표용지를 받아 투표할 수 있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등록된 시민이라면, 누구나 별다른 본인 증명 과정 없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

 

얼핏 보면, 허술하고 미개한 것 같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영국의 선거 방식은, 국가는 국민을 지원하는 역할을 할 뿐, 국민을 감시하고 점검할 수 없다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시스템이다.

 

국가의 관리 감독을 받는 국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소지하고 있는 주민등록증. 태어남과 동시에 생년월일에 특수한 숫자가 부여되고, 지문인식과 함께 국가의 관리와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한다.

 

주민등록제도의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2년, 조선총독부는 효율적인 거주자 등록제도인 ‘조선기류령(朝鮮奇留令)’을 도입한다. 90일 이상 일정한 장소에 거주하는 이에 대해서, 호적 및 기류 조사를 실시했다. 전쟁에 참전할 군인을 강제로 모집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인의 본인 확인은 물론, 가족관계와 거주 상황을 번호와 문서로 단번에 파악할 수 있으니, 통치에 매우 유용한 제도였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 국민에게 부여되는 주민등록증과는 다른 제도이지만, 의도와 방법은 매우 흡사했다.

 

스크린샷 2024-02-25 231823.png

1968년 1월22일, 체포된 김신조

 

특히 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부대가 대통령을 살해하려던 사건이 발생했다. 이전까지는 주민등록증 도입에 대한 여론의 반대가 극심했다.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국민 감시에 대한 불안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21 사태 이후, 박정희 정부는 주민등록법을 개정할 좋은 명분을 얻게 된다. 그 결과, 18세 이상의 국민 개개인에게 주민등록번호가 일률적으로 부여되었다.

 

1970년 이후, 주민등록증 발급을 의무화하고, 주민등록증을 신분 확인 용도로 사용하도록 했다. 1975년에는 안보 태세를 강화한다는 목적 아래, 예비군, 민방위 등 기타 국가의 국방인력자원을 효과적으로 관리한다는 명목 아래 제도가 마련되었다. 간첩이 누구인지 식별해 대통령의 안위를 안전하게 하고, 전쟁이 발발하면 효과적으로 징집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주민등록제도는 더욱 굳건해질 수 있었다.

 

즉, 국민 위에 국가가 있고, 국가는 국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하려는 제도가 바로, 이 주민등록제도였다.

 

과연, 이러한 제도가 국민을 국가의 주인으로 헌법에 명시하고 있는 국가에서 시행될 수 있는 제도일까?

 

편리한 행정 시스템, 그 이면에는...

 

스크린샷 2024-02-25 234518.png

보수당 소속, 수잔 홀 후보

출처 - (링크)

 

런던시장 선거에 나선 보수당 소속 홀 후보(68세)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투표 시 반드시 개인 신분증, 특히 사진으로 본인 확인이 가능한 것으로 자신을 증명해야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런던은 노동당, 보수당 지지 지역이 극명하게 나뉜다. 노동자, 이민자 계층이 많은 지역은 노동당이 강세이며, 오래전부터 런던에 터를 내리고 있는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보수당이 강세다.

 

여권을 신청하는 일도, 면허증을 취득하는 일도 적지 않은 금액이 발생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과정조차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보수당은 이러한 이들의 선거 참여를 막겠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국가가 국민을 관리하고 확인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중세 시대에나 가능했던 영주들의 관리 방법을 제안하고 나선 홀 후보에게 비판이 난무하는 중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를 환영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누가 누구인지 확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아무나 선거를 치르면 어떻게 하나, 최소한의 장치는 마련되어야 한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혹은 참석이 어려운 이를 대신해 나의 뜻과 무관한 투표가 이뤄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의혹을 제기하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국가란 본디, 국민을 관리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 따라서 당장의 편의를 위해 국민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를 허용하게 되면, 결국 주객은 전도가 될 수 밖에 없다.

 

PYH2022062710710001300.jpg

출처 - (링크)

 

유럽에 거주하는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유럽은 너무 느리다.”

 

행정 처리도, 서류 발급도, 모든 게 느리다. 하루, 아니 10~20분이면 발급되고 처리되는 한국의 행정 시스템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국가가 국민을 관리 감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은, 우리의 권리를 국가에 이임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빠른 시스템에 놀라는 외국인들은 많지만, 실제로 그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가 시행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특히 북미를 중심으로 유럽, 흔히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 중 대다수가 그러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의 주인은 대통령도, 국회의원과 같은 정치인도 아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